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나는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문-
쉬는 시간에도 자리를 지키며 공부하던 한 고등학생이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을 교무실 앞에 공지할 때면, 매번 전교 1등 자리에는 그 이름이 있었다. 학교 선생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가 예의도 바르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친구들은 ‘좋은 대학에 가겠구나’하는 부러움과 ‘공부밖에 모르는 벌레 같은 녀석’이라는 경멸감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대했다. 그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향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열심히 달려야 한다고 믿었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매년 수십명의 친구들이 자살하는 현실이나, 점수가 몇 점 낮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배제당하고 무시당하는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모멸감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숨막히는 입시경쟁에서 숨차게 뛰어갔다. 그리고 소위 SKY 의대에 입학한 것이다. 50만이 넘는 지원자 중 극소수만이 승리하는 그 게임에서 살아남았다. 소개팅을 나가도, 친구를 만나도 심지어 택시를 타도, 학교를 밝히면 그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우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누리는 우쭐함이, 그 당당함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자괴감을 거름으로 하여 얻어진 것인지 알지 못했다. 가슴에 빛나는 훈장처럼 얻혀진 학벌이 수많은 이들에게 ‘낙오자’라는 주홍글씨로 새겨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노력했으니, 살아남았고, 자신은 그 정당한 특권을 누리는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학교 축제 때 과에서 하는 장터일을 돕다가,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를 만났다. 그는 처음으로 프레스가 18살 노동자의 손가락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작업량이 밀리면, 안전장치를 꺼놓고 일하는 사업장이 있다는 이야기도 처음이었다. 그는 조금씩 그들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만큼씩 놀라기 시작했다. 노동부에 신고되는 산업재해 사망자 숫자만 1년에 2600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7명이 매일 죽고, 200여명이 매일 다치는 것이다. 1년에 5만명이 넘는 숫자가 다치는데, 그러면 10년이면 50만명이고, 그렇게 해방이후 50년이면 2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산업재해로 건강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200만명이 넘는 사람이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리고, 강철 코일에 발이 뭉개지고, 석탄 가루에 폐가 돌처럼 변하고, 과로사로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친척 중에는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이 없었다. 20년 가까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교육을 받았지만, 한번도 그들이 겪는 고통에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신음하는데, 그는 그런 사실을 모른채 20년이 넘는 세월을 같은 사회에서 살아온 것이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그는 이 사회가 얼마나 자신과 그들을 갈라놓고 있었는지, 높은 벽을 쌓아놓고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라고 채찍질을 했었는지. 그 견고한 벽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담 너머 세계를 영원히 모르고 살아갔을 자신의 모습과 예전처럼 홀로 살아남기를 끝없이 강요하는 이 사회였다. 내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누군가의 피와 눈물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그 소름끼치는 현실 말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독재자 후세인을 처단하고 확인되지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이라크 민중을 죽였다. 지난 10여년간 한 주도 쉬지 않고 미국은 폭격을 감행했었다. 이번 침공은 명백히 국제법을 어긴 것이고 죄없는 민중을 죽이는 침략 전쟁이지만,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무현 정부는 군대를 파병했다. 사람을 서열화시키는 학벌 사회에서 살아남고, 건강보다 이윤을 중요시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은 그는, 이렇게 국제전쟁에서도 살아남는다. 또 누군가의 눈물을 거름으로. 높다란 담 너머에서 들리는 이라크 소년의 통곡소리를 뒤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