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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에 대하여...
학 교 : 김천대학교
학 과 : 음악과
학 번 : 200923501
이 름 : 권수진
윤이상의 음악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 윤이상 -
윤이상은 현재까지 세계음악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작곡가이다. 그는 살아있을 당시에 이미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인정을 받은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상황은 그의 개인적 생활에 비극적 흔적을 남겼다. 그는 통영(지금의 충무)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이후 일본(오사카, 도쿄)에서 첼로,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다. 1946년-52년에는 통영과 부산의 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1952-56년까지는 부산과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했다.
한국에서의 작곡활동은 동요와 가곡 정도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가곡집 『달무리』(1949. 8.)에는 「고풍의상」, 「달무리」, 「추천」, 「충무가」, 「편지」, 「나그네」가 실려 있다. 「고풍의상」이나 「추천」 등은 60년대에 한국에서 많이 불린 가곡에 속한다.
5음계를 조금 넘어서는 노래로서 간단한 장식음을 섞어서 나름대로의 한국풍을 의도한 음악으로 보인다. 반주는 음계를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는 방식으로 화성을 만든다. 그는 다른 음악들도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는 유럽에 건너간 후 한국에서 쓴 모든 작품들을 파기했다.
1957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음악원에서 오뱅(Tony Aubin)에게, 이후 베를린음악대학에서블라허(BorisBlacher)와 루퍼(Josef Rufer), 슈바르츠 쉴링(Reinhard Schwarz-Schilling)에
게 작곡을 공부한다.
그후 유럽의 여러 음악제에서 참여하여 이름이 알려졌고, 독일에 정착한 그는 유럽의 현대음악과 한국음악 및 동양음악을 융합하는 작곡세계를 펼쳐나간다.
1967년에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치르는데, 이 사건이 그에게 남긴 후유증은 그의 평생 내내 남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 정부의 간섭으로 2년 후 석방되어 독일로 되돌아간다. 1969-70년에는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강사로, 1972년부터는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명예교수
로, 1977-87년에는 베를린 음악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유럽에서 작곡된 윤이상의 음악은 대단히 많은 요소들을 혼합한 것이다. 그의 음악은 12음 기법처럼 모든 12음들을 한 번씩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뿐만 아니라 음향적으로 사고하는 "음향 돗자리"(Klnagfläche)를 깔아 작곡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래픽적으로 작곡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일정한 형식이나 이론적 방향 없이 작곡한 그의 음악은 "인상주의적"이라는 말과도 어울린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음악에 대한 연상작용을 통해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한국음악 관련성은 한국음악의 조성이나 리듬 등 금방 알아챌 수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음향적으로> 그리고 <선율형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국악 중 민속악보다는 궁중음악과 관련된 부분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음향적으로> 착상된 그의 한국음악관련성은 우선 쉽게 눈에 띄는 것으로는 한국의 악기의 음색을 서양악기로 옮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오보에는 피리를, 하프는 가야금을, 플루트는 대금을, 바이올린은 해금을 대신하여 소리내는 것이었다.
또한 작품에 한국적인 제목이나 음악형식을 사용하기도 했다(Reak-禮樂, Bara-바라, Gasa-가사歌詞 등등).
윤이상 음악을 말할 때에 가장 많이 얘기되는 것이 <중심음>(도. Hauptton, 해당 항목 참조) 기법이다. 이는 하나의 선율만 있는 음악에서는 한 음이 중심에 있고, 그 주위의 다양한 주변음들로 장식된다.
그리고 여러 음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음악에서는 <중심음들>(Haupttöne)이 몇 개의 음으로 결합되어 나타난다. 주변음들은 오선보 상에서 흔히 장식음으로 나타난다.
중심음들은 미끄러지면서 다른 음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심하게 떨거나 가볍게 떨기도 한다. 중심음(들)의 생성과 사라짐을 섬세하게 펼치는 것이 그의 음악이 가진 특징이다. 생성과 사라짐은 셈여림 기호에 의해 드러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음악은 음향음악 또는 클러스터 음악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
또한 생성과 사라짐을 음양(陰陽) 이론에 비추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음양적 성격을 도교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윤이상은 이런 음악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 음악에서 음 하나하나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고, 음들의 연속이 비로소 어떤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우리 음악에서는 <음> 그 자체가 이미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 음악에 음은 붓글씨의 필체와 비교할 수 있다. 시작부터 마지막 여운까지 모든 음은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장식이나 선취음, 진동, 글리산도 그리고 강세의 변화로 장식되어있다.
모든 음의 자연스러운 변형은 음고의 관점에서 선율을 형성하는 음정(Intervall)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장식적 기능으로 그리고 동일한 음의 부분으로 이해된다." 이는 한국음악의 "시김새"(해당 항목 참조)를 설명한 것이다. 이 시김새는 사실 윤이상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고, 한국의 여러 양악가들의 작품에서도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시김새 현상은 "오음음계"와 "삼박자"가 한국음악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것 이상을 넘어가지 않았던 초기의 한국양악가들과는 다른, 더 발전된 단계의 한국 음악에 대한 이
해이자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이러한 시김새는 특히 윤이상처럼 12음을 기본으로, 그리고 여타의 미분음까지 사용하는 윤이상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도구를 제공한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실내악곡 『낙양』(洛陽 Loyang), 관현악곡 『예악』(禮樂 1966), 오
페라 『류퉁의 꿈』(Der Traum des Liu-Tung 1965),
『유령의 사랑』(Geisterliebe 1970), 『심청』(1972), 3개의 교향곡 등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는 다작의 작곡가로서 현대음악가로서는 대단히 많은 양의 곡을 썼다.
윤이상의 삶
한국에서의 활동
윤이상은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선비 출신의 윤기현(尹基鉉)과 농가 출신의 김순달(金順達) 사이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이상의 어머니는 용이 지리산을 감싸고 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1] 1920년 충무(지금의 통영)로 이사를 해 학교를 다녔다. 다섯 살 때부터 3년간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에 다녔다. 여덟 살에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풍금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잘 부르고 악보를 곧잘 읽는 등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웠고 직접 선율도 써보았다. 그런데 동네 영화관에서 자신이 만든 선율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생각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결국 2년 후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1935년 상업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 시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이 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됐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의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치 도모지로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 후 다시 저항활동을 도모하다가 일본경찰을 피해 서울로 도피했다.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김춘수·정윤주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부문을 맡았다. 이 때 통영고교 등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고려대학교 교가도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다. 이듬 해 8월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했는데 여기에 실린 〈고풍의상〉이나 〈추천〉등은 60년대에 많이 불렸다. 1950년 1월 30일 같은 학교에 국어 교사로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같은 해 8월 첫 딸 정이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일하다가 1953년 휴전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였다가 서울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4월 《현악4중
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대한민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다.
유럽에서의 활동
1956년 유럽으로 가 현대 음악을 배웠다. 파리 시에 머물다가 1957년에 베를린으로 갔다. 그의 스승으로는 레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이 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다. 1959년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윤이상은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동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과 1966년 도나우에슁어 음악제에서 초연한 교향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동백림 사건
윤이상은 1963년 4월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그 후로도 여러 번 평양을 방문하며 김일성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이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서울로 소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희곡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 안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 루이지 달라피콜라, 죄르지 리게티, 아르네 멜내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요제프 카일베르트, 마우리치오 카겔, 오토 클렘퍼러, 한스 베르너 헨체, 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다. 윤이상은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윤이상은 서독으로 추방되어 그 뒤로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윤이상은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에 교수로,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정치 운동
윤이상은 1971년에 서독에 귀화하였다. 그 뒤로 조국 통일 범민족 연합(범민련)의 유럽 본부 의장으로 있는 등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1980년 광주 민
주화 운동의 소식을 듣고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써서 이듬해 발표했다.
윤이상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오갔다. 북조선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서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별세
1994년 도쿄에서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 1994년 9월 대한민국에서는 서울·부산·광주 등에서 윤이상 음악축제를 열었다. 윤이상은 참석하려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갈등을 겪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 때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음반이 있었다.[3]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14일에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입국했다.
주요 작품
한국 가곡
《고풍의상》,《달무리》,《편지》,《추천》
오페라, 성악곡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오라토리움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
오페라 《류퉁의 꿈》(1965)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 1968)
혼성 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1968)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 1970)
세 명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나모(南無)》(1971)
오페라 《심청》(1971, 1972)
1972년 뮌헨 올림픽의 개막을 축하하였다.
목소리, 기타, 타악기를 위한 《가곡》(1972)
타악기, 오르간, 혼성 합창을 위한《도에서(道-)》(1972, 1982)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2)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 1987)
경련 스님, 박두진, 김남주, 고은 등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칸타타이다.
소프라노, 3성부의 여성 합창과 다섯 개의 악기를 위한 《에필로그》(1994)
관현악곡
관현악을 위한 《바라》(1960)
대관현악을 위한 《교향악적 정경》(1960)
현악 합주를 위한 《교착적 음향》(1960)
관현악을 위한 《유동(流動)》(1964)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藝樂)》(1966)
대관현악을 위한 《차원》(1971)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음형들》(1972)
대관현악을 위한 《서곡》(1973)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환상 《무악》(1978)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추상》(1979)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1981)
《교향곡 제1번》(1982, 1983)
《교향곡 제2번》(1984)
《교향곡 제3번》(1985)
교향곡 제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1986)
대편성 관현악과 바리톤 독창을 위한 《교향곡 제5번》(1987)
대관현악을 위한 《윤곽》(1989)
관현악을 위한 메멘토 《화염에 휩싸인 천사》(1994)
협주곡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5, 1976)
플룻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7)
클라리넷과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81)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1번》(1981)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2번》(1983-1986)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3번》(1993)
실내악곡
현악 사중주 제1번
현악 사중주 제2번
현악 사중주 제3번(1959)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1959)
한국 정악(正樂)의 색채를 담았다.
실내 앙상블을 위한 《로양》(1962-1964)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歌詞)》(1963)
플룻과 피아노를 위한 《가락》(1963)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1964)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律)》(1968)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影像)》(1968)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을 위한 《삼중주》(1972, 1973)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1972-1975)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4)
관악기, 하프, 타악기를 위한 《조화》(1974)
오보, 클라리넷, 바순을 위한 《론델》(1974)
실내 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단편》(1976)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1976)
오보에, 하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1979)
관악기, 타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무궁동》(1986)
관악기와 현악 5중주를 위한 《거리(距離)》(1988)
《실내협주곡 제1번》(1990)
《실내협주곡 제2번》(1990)
독주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쳄발로를 위한 《소양음》(1966)
오르간을 위한 《음관들(陰管-)》(1967)
첼로를 위한 《활주》(1970)
오보에를 위한 《피리》(1971)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1974) - 듣기
오르간을 위한 《단편》(1975)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왕의 주제》(1976)
플루트를 위한 《소리》(1988)
플루트를 위한 《가락》 - 듣기 및 악보
리코더를 위한 《중국의 그림》(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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