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鸦片战争 ; Opium War
道光 20년에서 22년인 1840~1842 기간 중 아편 문제를 둘러싸고 영국이 중국에 대해 도발한 전쟁으로 전쟁의 결과 중국이 패하며 중국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었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등 중국 근대사의 시작이라고 여겨지고 있으며 영국 측은 제1차 아편전쟁(鸦片战争)을 중영전쟁(中英战爭 : First Anglo-Chinese War)으로 칭하고 있다. 더불어 상선(商船) Arrow호에서의 충돌을 빌미로 1856~1860 기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톈진(天津)과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국을 공격한 제 2차 아편전쟁으로 톈진조약(天津條約)과 베이징조약(北京條約) 등을 체결하며 열강의 침략이 심화되었다.
청은 강희(康熙) 이래 줄곧 대외무역정책에 있어 쇄국정책을 채택하고 외국 상인들에게는 광동에서의 교역만을 허가하였으며 청 조정은 더 나아가 건륭 24년(1759) 외국인이 중국에 와서 무역을 하는 경우 양광총독(兩广總督)에 비준을 받도록 강화하는 등 엄격히 외국인의 무역을 제한하고 또한 무기, 식량, 각종 철기 등의 수출의 금지와, 비단, 주단(綢緞)도 수량의 제한을 두어 이러한 보수적, 폐쇄적인 쇄국정책이 중영(中英) 양국의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비단ㆍ차(茶)ㆍ도자기 등의 수입에 따른 대량의 은(银)이 유출되자 1832년까지 중국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 목화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함으로써 차의 구매자금을 조달하려고 하였다.
1830년대로 들어서자 중국에서 은(银)이 종전 입초(入超)에서 출초(出超)로 바뀌게 되어 은의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하였으며, 본위화폐인 은화의 등귀는 재정과 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고, 또한 관청, 특히 군대 안의 아편 중독환자의 급증은 왕조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838년 말 도광제(道光帝)는 옹정(雍正) 연간부터 금지해 온 아편금지령을 엄격히 시행하기 위하여, 금연령을 반포하고 흠차대신(钦差大臣) 호광총독(湖广總督) 임칙서(林則徐)를 광저우(广州)에 파견하여 대부분 영국인 소유의 아편을 몰수 소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호문소연(虎門銷煙)이다.
게다가 1839년 7월 구룡(九龙)의 한 마을에서 영국 수병(水兵)이 술에 취해 소동을 일으키며 촌민을 때려죽이자 임칙서(林則徐)는 영국 상무총감(商务總監) Sir Charles Elliot(1801~1875)에게 살인범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치외법권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Elliot은 영사재판권을 이유로 선상에서 자체 재판을 통해 관련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 후 그 결과를 중국 측에 통지함으로써 발생한 중국과 영국간의 마찰이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8월 초 아편금지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의회는 이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빅토리아 여왕의 영향 하에서 최종적으로 271 대 262표로 군사행동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영국에게 있어 아편의 전매수입이 인도의 재정 안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여 아편무역이 당시 영국의 인도 지배에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또한 아편을 이용하여 확보한 은이 영국을 중심으로 미국ㆍ오스트레일리아ㆍ중국ㆍ인도를 연결하여 시행된 세계 무역의 수지를 결제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아편무역 자체를 수호하고 합법화할 필요성에 따라 국내외의 비난을 무릅쓰고 전쟁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1839년 10월 1일 영국은 자국의 무역을 보호하고 영국인에 대한 생명의 위협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영국군대의 파견을 결정하고 1840년 2월 George Elliot과 Sir Charles Elliot를 정부 전권대표(正副全权代表)로 임명하였으며, George Elliot을 영국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4월 영국의회는 정식 전쟁결의안과 파병안을 통과시켰고 동년 6월 George Elliot이 이끄는 영국 함대 40여 척과 4,000명의 군대가 인도를 출발해 중국을 공격함으로써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1840년 영국군은 광저우에 도착하여 임칙서(林則徐)의 군대를 격퇴하고 샤먼을 공격하였으며 이어 북쪽으로 저장, 정해(定海)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도광제는 임칙서를 해임하고 화의를 위해 대표를 파견하여 천비초약(穿鼻草約)을 체결하였으나 영국이 제기한 내용이 너무 가혹하여 도광제가 이에 불만을 품고 광동에 군사를 파견하자 영국군도 광저우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2만여 중국 군대가 패하여 영국군에 투항하기에 이르렀으며 8월 영국군은 재차 저장을 공격하고 1842년 난징을 침공하였다. 3월 10일 중국군대의 반격이 실패하자 난징의 함락이 가져올 황제의 권위 실추를 방지하고자 청 정부는 재차 영국군과 담판을 하기에 이르렀고 난징의 정해사(静海寺)에서 영국과 4차에 걸친 회담을 통하여 8월 29일 영국이 제기한 조건을 수용하기로 하고 영국함대 선상에서 정식으로 중국 근대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홍콩의 영국 할양과 상하이, 광저우 등 5대 항구의 개방 및 영국인의 거주를 승인하게 되었는데 이들 조약은 중국을 강제적으로 세계 시장에 끌어들임과 동시에, 영사재판권과 최혜국 대우를 인정시키고 관세자주권을 빼앗아 중국을 반식민지화 하는 기초가 되었으며 이후 중국은 전쟁에 대한 배상금의 지불, 아편 거래에 의한 은의 유출, 외국 공업제품의 무차별적 보급으로 국내산업의 위축과 더불어 행정기관의 퇴폐 등으로 봉건사회의 기초가 흔들리게 되었다. 1856년에는 영국 국기를 게양한 상선 아라호(亚罗号, Arrow)는 중국인이 소유하며 운영한 상선이었으나, 청(清)의 관헌이 들이닥쳐 중국인 해적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영국 국기가 끌어내려진 일로 명예가 손상되었다는 이유로 영국은 배상금과 사과문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거부되자 광저우(广州) 교외 시가에 불을 질렀다.
영국은 청(清)이 태평천국(太平天国)에 시달리는 것을 기화로 재차 무력으로 압력을 가하여, 청의 양이주의(攘夷主义) 세력을 제거하고 공사(公使)의 베이징 주재권, 창장(长江)의 개방, 상인의 중국 내륙 여행권 등을 중심으로 한 조약개정 요구를 실현하려 하였다. 영국 본국에서는 광저우 방화사건에 대한 정당성 여부를 둘러싸고 의회에서 논란이 일어 내각은 총사퇴하였으나 여당이 선거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부추겨 영불 양국군대의 중국 파병을 단행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1858년에 천진, 1860년에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베이징의 명원(名园)과 원명원(圆明园) 등을 파괴하였으며, 1860년 베이징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하여 기존 요구사항 및 기독교의 중국 내륙 포교권을 획득하였다.
참조어
난징조약(南京條約, 남경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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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鸦片战争, Opium War] (중국시사문화사전, 2008. 2. 20., 도서출판 인포차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