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옥류천(玉流川) 지역
창덕궁의 후원, 즉 秘苑의 가장 깊숙한 골짜기에 흐르는 개울을 옥류천이라고 하는데 (최근에야 일반 관람 공개)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존덕지등 연못을 중심으로 한 정자들이 비교적 서로 근접하여 이어져 있었지만
옥류천 지역은 후원의 북쪽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관계로 숲길을 제법 걸어가야 한다.
<옥류천지역으로 넘어가는 숲길....>
<오르막 숲길을 벗어나면 길 옆 왼쪽으로 '취규정'이 있다>
<이제 오른쪽 아랫길 숲속으로 들어가면 옥류천 지역이다>
인조 14년(1636년)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U자형 둥근 홈을 파서 물을 돌게 하였으며, 임금과 신하들이 여기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소요암을 중심으로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농산정, 취한정 등 5개의 정자가 모여있는 옥류천 지역은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여 많은 임금들에게서 특히 사랑받았던 곳이다.
<소요암 바위.... 물이 돌아 흐르도록 되어 있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다.>
飛流三百尺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옥류천 주변에 있는 5개의 정자들.....>
후원은 휴식공간일 뿐 아니라 학문 연마와 심신 수양의 공간이며
임금이 농사를 짓고, 왕비가 누에를 쳐서 백성에게 모범을 보였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초기부터 후원(後苑), 북원(北苑), 금원(琴苑)등으로 불러졌고, 대한제국 말기부터 비원(秘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ㅇ 낙선재(樂善齋) 지역
처음 창덕궁을 들어와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등 궁궐지역을 둘러보고
후원으로 넘어갈때 오른쪽에 남아 있던 낙선재 지역.....
옥류천까지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올때에 마지막으로 찾아보기로 하였었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본래는 세자의 거처인 동궁이 있던 자리...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 임금의 거처로 지어져 편안히 쉬면서 책을 볼수 있게 마련한 개인적인 공간이다.
대궐에 있는 집이면서 사치스러움을 경계하여 단청을 하지 않았다.
석복헌은 헌종 14년(1848) 헌종의 후사로 간택된 후궁 경빈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임금과 대왕대비를 가까이서 모실수 있도록 헌종의 침소인 낙선재와 대왕대비의 침소인 수강재 사이에 지었다고 한다.
수강재는 정조 9년(1785) 지어진 후, 헌종 14년에 육순을 맞이했던 헌종의 할머니 순원왕후의 거처로 고쳐졌다.
수강재 뒤쪽 언덕에 보이는 정자는 취운정이다. (숙종 12년, 1686년에 지어진, 이 일대의 건물중 가장 오랜 건물이다)
<낙선재 전경....>
<연경당과 같이 낙선재 대문도 장락문이다....>
<아름다운 花階(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ㅇ 낙선재와 마지막 조선 왕실 사람들....
낙선재는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 순정효황후 윤비
순정효황후 윤비는 순종황제의 비다.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중전다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옥새를 감춰 두고 내놓지 않은 일이며, 한국전쟁 때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라며 호통쳐서 내쫓은 일, 왕조가 무너지고 순종이 승하한 뒤에도 일제에 항거하며 낙선재를 지켜낸 그 당당한 기품 등.....
또한 공산치하에서 어느 누구 하나 황후라고 돌보아주는 이 없는 혹독한 가난과 고독한 피난살이에서도 황후로서의 자존심을 저 버리지 않고 끝내 낙선재를 되찾아 흩어진 왕족들을 기다리던 윤황후였다.
그녀는 왕조의 운명과 함께 침잠하는 자신의 운명을 불교에 의탁하기도 하였다. 한때 그녀는 성북동 흥천사 가까운 곳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그 절을 매일 찾아가 왕가의 며느리로서 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를 했다. 흥천사에서의 기도 덕분이었는지 그녀는 이승만 정부와의 끈질기고도 외로운 싸움 끝에 끝내 창덕궁 낙선재를 도로 찾아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약하나마 자신의 몫을 다하려 했던 조선의 마지막황후 순정효황후는 1966년 낙선재 석복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다.
마지막 황후 윤비의 장례식이 기억에 생생하다......
★ 영왕
영왕 이은(李垠)은 1897년 생으로 고종의 3남이며 순종의 동생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서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후, 1920년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제로 일본 황족의 딸 (이방자 여사)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영왕의 귀국은 광복이 되었어도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3년 12월에야 가능하게 되었으나 이미 말을 못하고 게다가 기억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으며 홍유릉에 안장되었다.
★영왕비 (이방자 1901-1989)
일본 동경 출생. 황족의 장녀로 태어나 1918년 학습원을 졸업하고, 20년 당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과 결혼하였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조선과 일본의 융합이란 차원에서 계획된 경략결혼이었다. 제 2차세계대전 후, 1947년에 지정된 신헌법에 의하여 왕족신분을 상실한 두 사람은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63년 한국적( 韓國籍)을 취득하여 귀국하였다.
1970년 남편 이은과 사별한 후 한국에 남아 부군의 뜻을 이어 신체장애자를 위한〈명휘원(明暉園)>과 정신지체아를 위한 <자혜학교(慈惠學敎)>를 세워 사회복지활동을 하였다.
★ 이구 (李玖; 1931- 2005)
영왕과 이방자여사의 2남으로 태어난 이구씨는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단독으로 도미(渡美)하여 MIT공대를 졸업하였다. 직장동료였던 줄리엣여사와 결혼하였으나 한국에 돌아온 후 왕실의 품위를 그르쳤다는 질타 속에 파탄을 맞게 되었다. 이방자여사가 돌아가신 후 한국을 떠났다가 1996년 영구 귀국하여 부암동에 거처를 정하기도 하였으며 2005. 7. 16 일본에서 사망 하였다.
★ 덕혜옹주(1912-1989)
덕혜옹주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이다. 고종이 나이 환갑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외동딸로서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1925년 12세에 동경유학을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갔고 17세가 되던 1929년 어머니마져 돌아가시게 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던 20세에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하고, 결혼생활 3년만에 그동안의 시련으로 심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쳤다. 폐인이 된 몸으로 1962년에 환국하여 낙선재에서 1989년 운명하기까지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ㅇ 조선 마지막 황손의 탈상 (2007년 7월 16일 조선일보 기사)
통곡은 없고 하늘에선 장대비만…조선 마지막 황손의 탈상
신형준 기자 hjshin@chosun.com
통곡하는 사람은 없었다.
는개처럼 흩날리던 비는 행사 도중 장대비로 변했다.
조선 왕궁에서 더 이상 조선 왕실과 관련한 상제(喪祭)는 열리지 않을 것임을 알리는 빗줄기였다.
16일 오전 10시 50분, 창덕궁 낙선재.
300여명의 전주 이씨 종친들이 모여,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의 대상제(大祥祭=삼년상을 마치고 탈상함을 알리는 제사)를 치렀다.
그는 2005년 7월 16일, 자신이 태어났던 터인 일본 도쿄 아카사카프린스호텔(옛 영친왕궁 자리)에서 사망했다.
종친회에서 황사손(皇嗣孫)으로 지명된 이원씨가 초헌관(初獻官)을,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아헌관(亞獻官)을,
의친왕의 손자인 이준씨가 종헌관(終獻官) 맡아 마지막 황세손의 영정에 술잔을 올렸다.
비가 내리자 낙선재 마당에서 제사에 참가했던 참석자들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절을 대신했다.
행사는 오전 11시 35분 축문(祝文)을 태우는 것으로 마쳤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2005년 7월 24일 황세손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 회인원(懷仁園)에 묻었을 때도 그렇고,
사망 뒤 만 1년인 2006년 7월 16일 치른 소상(小祥) 때도 비가 내렸다”고 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전주리씨대동종약원측이 밝힌 ‘순수 외빈’은 공동위원장인 유 문화재청장과
김충용 종로구청장 단 두 사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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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보다 더 많은 임금들이, 더 오래 머물렀다는 창덕궁.
후원인 秘苑의 아름다움을 찾아 거닐어 본 하루....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자부심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낙선재에 이르러서는 참 많은 생각을 해본다.
왕조의 몰락...
국가의 몰락...
때마침 손에 든 신문기사는 '조선 마지막 황손의 탈상'...
........역사를 너무 모르고 살았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