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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통 40살 기념 3번 국도 라이딩 (7월 22-25)
40살이다. 고등학교 졸업한 풋풋한 20살이 두배로 뻥튀기 된 칙칙한 나이가 되버렸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올 초에 무선 모형 비행기를 만들며 무의미하게 하루하루 지내다가 자전거를 세팅하여 합천에를 넘어가서
지인을 만나 해물탕을 얻어먹고 함께 합천 창녕보를 다녀왔다.
말로만 듣던 4대강을 직접 눈으로 봐도 특정 정치인 욕을 엄청 할수 밖에 없었다.
2조도 아닌 22조를 쳐바른 대국민 사기.
한 두번도 아니고 자꾸 이런식으로 당하는 걸 보면 국민이나 대통령이나 어찌 그리 한심한지......
이날 차가운 날씨에 무리를 해서 안 타던 자전거를 140여킬로나 타고 오니 몸이 엄청 피곤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배가 아프다.
화장실에 가고 까스명수를 사먹고 손을 따고 굶고.........
하루를 버티다가 밤이 되어 억지로 잠에 들었다.
자다깨다 자다깨다 일어나니 아픈 부위가 오른쪽 아랫쪽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맹장인 것이다.
입원할 준비를 해서 가방에 싸서 매고, 겨우 겨우 걸어서 차를 몰고 병원에 갔다.
맹장이 맞단다. 그런데 수술할 의사가 출장 갔단다.
그래서 다시 겨우 걸어서 차를 몰고 다른 병원으로 가서 입원 수속을 밟고 엑스레이와 초음파 검사를 하고 수술을 끝마쳤다.
전날 술 마시고 속이 안 좋은 상태로 수술을 한 의사가, 들어낸 둥글게 부푼 맹장을 보여주며 더 늦었으면 큰일 날뻔 했단다.
수술실에서 실려와 닝겔을 맞으며 침대에 누워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맹장 수술이 별거는 아니지만 나름 인생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좀더 열심히 살고 남들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 평생 살면서 처음 입원을 하고 처음 링겔을 맞아봤으니 새로운 경험이지 않은가.
며칠 누워있으면서 올해는 3번 국도를 타고 통일 전망대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7월 22일 일요일
이번 라이딩에 같이 가자고 약속한 이타 선생님이 펑크난 자전거를 끌고 발통 가게로 오셨다.
아침 9시 출발인데 미리 오셔서 펑크 수리를 하고도 시간이 남았다.
2년전 일본 아소산 라이딩을 같이 한 선배는, 휴가를 맞추지 못해서 배웅만 하러 나와 출발 사진을 찍어주었다.
출발을 하니 발통가게 명견 도치는 가게 앞에 묶인 채로 뚱한 표정으로 떠나는 발통을 쳐다본다.
'저 인간 또 나를 놔두고 며칠동안 멀리 가나보다'
딱 이 표정이다.
3번 국도는 경남 거창 아래로 산청 진주 사천 남해까지 이어지고 위로는 김천 상주 문경 -------- 의정부 동두천 연천 철원까지 이어진다.
발통의 어머니 고향 주상면과 아버지 고향 웅양면을 지나서 적하를 넘어서면 바로 경북 도경계가 나온다.
해발 500m의 도경계를 넘어서 신나게 내려가면 김천 대덕이 나온다.
이 곳에서 무주와 수도산으로 가는 길이 나오고 우리는 직진을 계속해서 김천에 이르런다.
3번 국도를 따라서 김천 시내를 벗어나니 새로 닦은 4차선 3번 국도가 나오는데 자동차 전용도로로 지정되어 있다.
왜 지방 국도를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할수 없이 꼬불꼬불한 시골 3번 국도를 따라서 상주로 향했다.
시간이 1시가 넘어서 시골 마을의 한 식당으로 들어가 콩국수를 먹었다.
한참을 굴러가다보니 드디어 상주에 진입했다.
구름낀 날씨라 그리 덥지는 않았지만 물을 많이 마시고 콩국수까지 들어가니 뱃속이 영 불편했다.
그렇지만 갈증이 가시지 않아서 시원한 편의점에 들어가 이온 음료를 마시고 쉬다가 나오니 몸이 더 피곤하고 졸렸다.
전날밤에 선배 이사한다고 상자를 몇개 나른데다가, 낮에 마신 커피로 인해서 새벽 2시까지 잠을 자지 못해 컨디션이 엉망이다.
시내의 한 정각에서 잠시 자려고 누웠는데 몇분 지나지 않아 깔따구들의 습격으로 다리와 팔을 긁으며 자전거에 올라야했다.
우리는 상주를 통과하여 문경으로 향했다. 한참을 굴러가다가 힘이 빠져서 파워젤을 하나씩 먹고 힘을 냈다.
상주 시내나 문경 시내는 거창에 비하면 해발 고도가 아주 낮았다.
거창은 200m 내외지만 김천이나 상주, 문경은 100m가 채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거창은 산골...........ㅎㅎㅎ
문경시를 지나 힘겹게 문경읍에 도착하니 문경 온천이 있었다.
해도 저물고 해서 라이딩을 문경온천에서 접기로 하고, '썬모텔'에 숙소를 잡고 씻고 밥을 먹으러 나왔다.
묵조밥이라고 채 썬 묵 한그릇이랑 조밥을 몇가지 반찬과 같이 차려나온 깔끔한 식당에는
사극 드라마를 찍은 여러 배우들의 사진과 싸인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숙소로 들어와서 개콘을 보다가 자불다가 보다가 자불다가 끝까지 보지 못하고 결국 자버렸다.
7월 23일 월요일
간밤에 모텔의 온천수가 좋았는지 자고 일어나니 몸이 생각보다 개운했다.
하루만에 150km 거리를 굴린 거 생각하면 꽤 괜찮은 컨디션이다.
날씨는 여전히 구름이 끼어 있어 자전거 타기에 참 좋았다.
어제의 콩국수가 속을 불편하게 했기에 오늘은 점심을 건너 뛰기로 하고 식당에 가서 청국장을 먹고 3번 국도로 다시 진입했다.
충주로 넘어가는 길은 이화령 터널을 지나고 소조령 터널을 지나야했다.
새로난 이화령 터널은 해발고도가 겨우 350m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의 코스에 대해서 약간 긴장을 했었지만 그건 그냥 기우였을 뿐이다.
물론 길이 새로 나면서 거리가 짧아지고 고도가 낮아진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거창 무주 구간의 두 고개 900m와 700m를 생각하면 이건 그냥 장난이다.
차가 별로 많지 않아 터널 몇개를 지났지만 그리 위험하지 않았고 배수로 두껑 위로 지나가니 좁은거 빼면 안전했다.
이화령 터널에서 허리 높이의 배수로 두껑 위로 타고 오면서 이타 선생님이 중심을 잃어 위험한 순간이 있었는데
나이가 드니까 균형감각이 떨어진다고 하신다.
육십대 초반인 이타 선생님은 어젯밤에 젊은 사람보다 라이딩 실력이 낫다고 하니 '나도 젊어~' 라고 하셨었다.............ㅎㅎ
소조령 터널에서는 배수로 두껑이 자전거가 그 위를 지날 때, 피아노처럼 또닥 또닥 소리를 내곤 했다.
수안보 온천을 지나 충주로 들어서니 자전거 라이딩 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인다.
충주를 빠져 나오면서 새로 공사중인 4차선 길로 올라섰다.
이 길이 더 빠르고 차도 없으니 좋다고 신나게 굴러갔다.
이타 선생님은 이렇게 가면 장호원까지 한시간 하면 갈거라고 하신다.
그래서 발통 왈, '장호원에 무슨 약속 있으세요?'
헬멧도 벗고 머리 두건도 풀고 머리 묶은 고무줄도 풀고 자유를 느끼며 공사 중인 4차선 3번 국도를 십몇 킬로 구르다보니
공사는 끝나고 이어지는 도로는 19번 도로다.
말도 안돼..................
우리는 3번 국도를 벗어나 이제껏 19번 도로를 따라온 것이다.
가다가 보이는 경찰서에 길을 물으러 들어가니 순찰을 나갔는지 문이 잠겨있다.
근처 가게에서 이온 음료를 사고 삶은 옥수수 두개를 얻어서 경찰서 입구에서 먹고 있으니 순찰차 한대가 들어온다.
한 차에서 4명이 내려 경찰서로 들어가는데 이타 선생님이 길을 물어보신다.
우리는 19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38번 국도를 타고 장호원으로 가기로 했다.
19번 도로는 원주 횡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마트면 바로 강원도로 갈뻔했다.
38번 도로에 접어드니 길이 좋았다. 물론 오르락 내리락 하며 덥기도 더웠다.
자전거 타기가 지겨워서 라이딩하는 중에, 안산쪽에서 싸이클 타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4박 5일만에 4대강 라이딩을 마치고 막 부산에서 퍼져있는 중이었다.
이따위를 자전거 도로라고 만들었냐며 이 모씨 욕을 엄청한다.
이 모씨 오래 살거 같다. 오래 살아도 좋으니 제발 매스컴에 그 면상 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로가에서 복숭아를 사먹고 있으니 f16 전투기 세대가 계속해서 날아다닌다.
충주 비행장에서 날아온 거라는 인심 좋은 복숭아 장수 아저씨는 생수를 자꾸 주신다.
엿장수 마음이라면서..........ㅎㅎ
한참을 굴러서 장호원을 지나 경기도 이천에 진입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그러나 날은 덥고 볕은 따가웠다.
이제껏 구름이 끼어서 좋았는데 볕이 나서 한손은 유바를 잡고 한손은 왼쪽 뺨을 가리며 굴러갔다.
(발통의 자전거는 여행용으로 세팅을 해서 유바가 달려있고 앞 샥은 없으며 앞 바퀴쪽에도 짐받이가 달려있다.)
한적한 버스 정류소 앞에서 복숭아를 깍아 먹고 초코바와 영양갱을 먹었다.
자전거를 타면 수시로 이온음료와 견과류, 초코바, 파워젤 등을 먹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허기가 져서 페달질을 전혀 할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천 시내를 향해서 가다가 길가의 수도를 발견하고 세수를 했다.
2년전에 일본 라이딩때 했던 등목을 상기하면서 잠시 쉬다가 다시 굴러서 이천 시내를 벗어났다.
이천 시내를 벗어나 다시 편의점에 들러 이온 음료와 견과류를 먹으며 한참 쉬었다.
한마디로 굴러가기가 싫은 것이다.
이틀만에 300킬로 가까운 거리를 구르니 몸에서 슬슬 반응이 오는 모양이다.
광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 갓길을 가는 느낌이다.
간혹 자전거 도로나 인도가 괜찮게 만들어진 곳도 있었지만 시내 주위 조금 뿐이었고 나머지는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목숨을 걸고 굴러서 조금씩 어두워지는 광주의 한 편의점에 도착하여 우유와 삼각 김밥, 이온 음료를 사마시고 쉬었다.
이제부터는 억지로 가는 것이다.
이타 선생님은 전혀 힘든 기색없이 자전거를 굴리신다. 김밥도 안드시고 말이다.
먹기는 발통이 두세배는 더 먹는데 굴러가기는 이타 선생님이 훨씬 잘 가신다.
출발하기 며칠 전에 '하루에 적어도 백킬로는 가셔야 합니다'라고 했던 말이 실수였다는 것을 몸소 확인했다.
이타 선생님은 아주 가끔씩 발통 가게에 오는 손님이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라이딩을 같이 하게 되었으니
저만한 내공을 가지고 계신지 알수가 없었다.
사고가 나서 차가 막히는 어둑어둑한 광주 시내를 테일 라이트를 켜고 통과하여 억지로 성남으로 향했다.
발통의 첫사랑이 살았던 성남시내의 인도와 차도를 번갈아 타며 한참을 구르다 보니 송파구다.
거창에서 이틀만에 서울에 입성한 것이다.
5년전 서울 - 거창 라이딩이 거꾸로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마음이 편해져서 양재동 아래 발통의 형이 살고 있는 헌인릉 근처로 천천히 굴러갔다.
밤 9시쯤 형이 사는 집에 도착해서 시원한 물로 씻고 형이 직접 해준 신선한 야채가 들어간 비빔면을 먹고 쉬었다.
밤새 모기에 뜯겨가며.................
7월 24일 화요일
오늘은 서울 시내를 통과해야 했다.
처음에는 3번 국도를 따라 굴러가려고 했지만 양재천과 중랑천을 이용하면 의정부까지 자전거 전용 도로로 갈수 있었다.
그래서 차가 없는 의정부까지 발통의 형도 동참하기로 하고 형은 아침밥을 지었다.
쇠솥에는 아침밥을, 코펠에는 찌게를 끓여서 셋은 맛있게 먹고 잠시 들린 발통의 누나가 주는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누나가 싸온 떡은 자전거 뒤 짐받이 가방에 넣었다.
둘이 셋이 되어서 다시 출발 기념 사진을 찍고 누나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양재로 굴러가서 양재천 자전거 도로로 내려갔다.
이타 선생님은 서울에 이런데가 있냐면서 너무나 좋아하시며 우리는 양재천을 지나 한강변을 타고 잠수교로 향했다.
잠수교 가기 바로 전의 편의점에서 우리는 음료수와 초코바를 먹으면서 잠시 쉬었다.
쉬면서 이타 선생님과 발통은 각각 서울의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라이딩에 대해서 자랑질을 하고..............ㅎㅎ
우리는 한강을 건너 중랑천으로 향했다.
중랑천을 오르면서 살곶이 다리에 잠시 내려 형의 자전거에 바람을 조금 넣고 잠시 쉬다가 다시 굴러 올라가는데
인라인복을 제대로 차려입은 인라이너 둘이 팩을 지어서 내려온다.
큰소리로 화이팅~ 외쳐주고 조금 더 올라가니 청계천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서 조그만 다리를 건너서 중랑천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상계동까지 와버렸다.
자전거 도로에서 시내로 올라가 발견한 마트에서 음료수와 바나나를 사서 다시 자전거 도로로 내려와
상계교 아래 그늘에서 누나가 싸준 떡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발통의 형은 발통과 장거리 라이딩을 딱 한번 했었다.
올 봄에 서울서 수원 화성을 다녀오는 거였는데 양재천 과천천을 지나 살살 다녀서 하루 종일 걸린 라이딩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타 선생님과 함께 동행을 하기로 하였으니 더운데 고생을 단단히 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상계교 아래 그늘에서 떡과 바나나로 점심을 해결한 후에 발통은 오카리나를 꺼내 불었다.
계속된 라이딩에 손가락이 저려서 연주가 똑바로 되질 않았다.
이때까지 자전거를 오래 타도 손가락이 저린 적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손가락이 저린다.
40세, 서글픈 나이이다.
따가운 햇살을 헤치고 우리는 의정부에 도착했다.
의정부에는 2003년 3월 7일 북덕유산을 같이 자전거로 오른 신쌍덕 대위님(그 당시)이 사시는 곳이다.
(이 미친? 라이딩은 자전거 잡지 바이시클 라이프 2003년 6월자에 내용이 나온다.)
2006년 여름, 의정부에 우연히 들러서 만났을 때는 고수부지에서 자전거 교육과 정비를 하고 계셨는데
이제 114에 물어서 전화를 해보니 신대위님은 캡틴 바이크 샵을 운영하고 계셨다.
위치를 물어서 찾아가니 6년만이라 인상이 바뀌어서 조금 어색했지만 그간의 얘기를 주고 받을수 있었다.
발통가게에 비해 많이 깔끔하고 고급 제품이 많은 그의 가게에서 잠시 쉬면서 그의 라이딩 사진을 보다가
신대위님의 요청으로 오카리나를 한곡 연주해 드리고 우리는 우리의 길로 떠났다.
(신대위님은 2006년에 만났을 때 발통이 오카리나를 연주했던 걸 기억하고 계셨다. 동영상을 찍으시려는 걸
억지로 말려서 겨우 연주만 들려드렸다. 실수할까봐 차마 동영상을 찍게 할수 없었다........^^;)
의정부의 자전거 도로가 거의 끝나는 지점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서 우리는 3번 국도로 올라섰다.
날은 덥고 차는 많았다. 우리는 인도를 타고 살살 북쪽으로 굴러갔다.
뒤 따라 오던 발통의 형이 뒷바퀴에 바람이 없단다.
그래서 그늘로 가서 자전거 튜브를 꺼내어 보니 길다란 가시 같은게 보였다.
빼서 보니 이쑤시개 반토막이다. 수리 도구를 꺼내서 펑크를 때우는데 사포가 없다.
이쑤시개가 관통해서 펑크난 두 곳을 보도 블럭에다 문때서(경상도 사투리, 문지러다 보다 쎈 느낌)
패치 두개를 붙이고 바람을 넣고 수리를 완료했다.
(의정부까지만 갈까하던 형은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3번 국도 종점까지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양주 시내로 진입해서 우리는 노때리아 팥빙수를 먹으러 들어갔다.
시원한 실내에서 지도를 보며 한참 쉬다가 다시 동두천으로 향했다.
동두천 입구에는 자전거 도로가 잘 닦여 있고 'MTB의 고장 동두천'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잘 닦여진 자전거 도로는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동두천 시내를 지나 조금 더 가니 한 동네는 이태원처럼 영어 간판 일색이었고 곳곳에 미군 부대가 있었다. 물론 외국인도 많았다.
덥고 힘든 길을 가다보니 대규모 닭공장이 나온다. 냄새가 고약하다.
우리는 저런 곳에서 나온 닭을 튀겨 먹고 삶아 먹는 것이다.
전곡으로 향하는 길에서 우리는 38선을 지났다.
선사시대 조형물과 함께 도로가에는 38선이라는 바위를 세워놓았다.
38선을 통과했으나 발통의 형은 무척이나 힘들어한다. 당연히 속도도 자꾸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전곡에서 오늘의 라이딩을 접기로 하고 가다가 보이는 능이 삼계탕 집으로 들어간다.
(발통은 어중간한 채식주의자가 된지 일년이 넘었는데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서 오늘 하루만 닭을 먹기로 했다.
채식은 지난해 거창에 머물렀던 지독한 채식주의자 데이빗씨로부터 영향을 받아 시작했는데 데이빗 밴스라는 이 사람은
호주인이며 2011년 무주 대회를 같이 나갔는데 그의 자전거는 21단 레스포 자전거였다.
그의 무주 대회 사진은 2011년 6월자 더 바이크 잡지 119페이지에 나온다.
안타깝게도 그의 대회 기록은 계측되지 않았다. 큐알레버가 없는 앞축으로 인해, 핸들바에 케이블 타이로 매어 놓은 기록칩이
전파를 받을수가 없어서 성적은 좋았으나 정확한 기록을 얻지 못했다.)
우리가 먹은 능계탕이라는 요리는 능이버섯을 닭과 삶아서 찰밥을 같이 내어 놓은 것이었는데 맛은 있었지만
육식이라는 거부감으로 인해 몸에 썩 와닿지는 않았던거 같다.
그러나 국물은 남김없이 깨끗이 비웠다.
어두워진 전곡 시내에 들어선 우리는 굿모닝 모텔을 찾아서 들어갔다.
7월25일 수요일
새벽 일찍 출발하기로 했기에 서둘러서 길을 나섰다.
잘 뚫린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와초리 백화점이 나온다.
이 시골에서 보기 힘든 비교적 큰 가게다.
이온 음료를 사서 초코바와 먹고 있으니 가게 간판 위쪽에 노무현이 꿈꾸는 나라 플랭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재임 당시에는 언론에 의해서 국민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지만 지금은 가장 그리운 대통령이 되신 분.
사기꾼 현 대통령과 많이 비교되는 육군 병장 출신 대통령.
그립습니다.
와초리를 지나니 작은 마을이 나오고 주유소가 하나 있는데 커다란 간판에 끝주유소라고 적혀있다.
끝이라는 말은 항상 아쉬움과 허전함, 씁쓸함까지도 느끼게 한다.
이제 더이상 우리가 갈 길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말이고 이 나라의 분단이 이 근처라는 말인 것이다.
주유소를 지나 뒤를 돌아보니 첫주유소라고 적혀있다.
그렇다, 첫번째나 끝번째는 사실상 같은 것이다.
뒤집어 놓고 보면 공부 제일 잘하는 사람은 공부 못하기로 줄을 세우면 꼴지인 것이고
갑부인 사람은 가난하게 살기로 줄을 세우면 역시나 꼴지에 속할 것이니까.
철원으로 향하는 길 옆으로는 철도와 4차선 도로를 건설 중이었다.
곧 통일이 될것인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어느날 갑자기 독일처럼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3번 국도 끝 평안북도 초산까지 올라가려면 휴가를 2주씩 내야 하나.............ㅎ
## 길이는 555.2㎞이다.
왕복2차선은 302㎞, 왕복4차선은 205.9㎞, 왕복6차선은 42.6㎞이다.
미개통 도로는 3㎞이고, 미포장 도로는 1.7㎞로 도로포장률은 99.1%이다.
전국 25개 남북노선 가운데 하나로, 각 지방국토관리청이 관리한다.
전체길이 100m 이상의 장대교가 28개소, 소교량이 118개소 있다. 1971년 김천∼거창 구간을 시작으로 1995∼2002년 단성∼산청 구간(19.8㎞)이,
2002년 생극~장호원 구간(10.1㎞)이 완공되었다. 경기도 광주시에 갈마터널이 있는데, 상행선은 1978년, 하행선은 1992년 완공되었다.
서울특별시∼의정부시, 광주시∼성남시, 성남시∼서울특별시, 의정부시∼동두천 구간이 가장 교통량이 많다.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2번, 함양군 안의면∼거창군 거창읍에서 24번,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감곡면에서 21번국도와 중복된다.
기점에서 19번국도와 이어지고 사천시 사천읍에서 33번국도와 연결되며,
사천인터체인지에서 남해고속도로(고속국도 10), 진주·서진주·단성 인터체인지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고속국도 35)를 이용할 수 있다.
진주시에서 2번국도와 교차하고 정촌면∼함양군 함양읍까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와 마주하고 달리며 88올림픽고속도로(고속국도 12)가 지나간다.
거창군 마리면에서 37번, 김천시 대덕면에서 30번과 교차하고, 김천시내에서 4번국도와 연결되고 경부고속도로(고속국도 1)가 지나간다.
또한 경부선 김천역이 있으며 경북선의 시발점으로 이 도로를 따라 달린다.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에서 남이-상주간 고속도로(고속국도 30)가 지나가고 상주시내에서 25번국도와 연결되며,
중부내륙고속도로(고속국도 45)가 이 도로를 따라 마주보고 달린다.
문경시 호계면에서 34번국도와 연결되고 영동선과 경북선이 만난다.
충주시내에서는 19번국도와 교차하고 주덕읍에서는 충북선이 지나가며 36번국도와 연결된다.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에서는 37번·38번국도와 교차하고, 이천인터체인지에서 영동고속도로(고속국도 50)를 이용할 수 있으며,
이천시내에서는 42번국도와 교차한다.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에서 중부고속도로(고속국도 35)가 도로 위를 지나가고
광주읍에서는 43번국도와 교차하며 45번국도가 지나간다.
서울특별시 송파인터체인지에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고속국도 100)와 연결되고,
송파대로·잠실대교·자양로·천호대로·동2로·동1로 구간이 포함되며, 광진구에서 47번국도, 중랑구에서 6번국도와 만난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경춘선과 중앙선이 도로를 지난다.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39번·43번국도가 교차하고 경원선이 도로를 따라 마주보고 달린다.
연천군 전곡읍에서 37번국도와 연결되며 휴전선에 이른다.
[출처] 3번국도 [三番國道 ] | 네이버 백과사전
조그만 고개를 몇 개 넘으며 결국 우리는 강원도 철원에 들어왔다.
차들은 몇 대 지나 다니지 않고 도로가에 공사하시는 분들만 몇 명 보였다.
마침내 백마고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3번 국도는 민통선 초소를 만난다.
근무를 서는 이 일병에게 물어보니 차로 25분 다녀오면 민통선 출입 허가증을 받을수 있다고 한다.
이제 발통의 40살 기념 3번 국도 라이딩은 여기서 접어야 할 모양이다.
거창에서 440킬로, 분단된 국토의 종점.
통일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발통은 이 일병에게 총검술을 보여달라고 장난을 치다가 같이 기념 사진을 찍고 영양갱 하나를 쥐어준다.
(발통의 조카 열명 중에 4명이 이 일병보다 두서너살이 많고 모두 다 육군 병장 제대를 했다.)
통일 전망대를 보려고 왔는데 어느 전망대로 가야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단 온 길을 되돌아 내려가서 아침을 먹고 가까운 통일 전망대를 구경하고 파주쪽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자전거 핸들을 돌려 남쪽으로 향하다 보니 속도계가 444.44km를 찍는다.
우리는 할매국수라는 신탄리의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물국수 세 그릇을 주문해서 먹고 있으니 주인 할아버지가 나오신다.
해병대 출신인 이 할아버지는 경남 진해에서 몇달 전에 딸네집으로 올라오셨는데
자신의 40년 된 싸이클을 보여주시며 한참을 설명하신다.
뒷 기어가 6단인 꼴라고 싸이클은 발통의 나이만큼이나 세월이 흘렀다.
세월아..................
다시 연천으로 내려온 우리는 연천 군청에서 지도를 구해서 파주쪽으로 향했다.
날은 덥고 고개는 높다. 임진강을 따라 내려오는 길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몇 개의 고개를 넘다가 오이와 옥수수를 파는 도로가 비닐 하우스에서 옥수수를 사먹고 오이를 얻어 먹었다.
한참 쉬다가 고개를 넘어서 가는데 형이 안장을 높혀 달란다.
휴대 공구를 꺼내서 클램프 육각 볼트를 돌려 푸는 순간, 볼트가 똑 부러져 버린다.
이를 어쩐다?????
일단 발통의 자전거 안장과 시트 포스트와 시트 포스트 클램프를 형 자전거에 맞춰주고(다행히도 같은 사이즈)
형의 부품들을 발통 자전거에 맞추어 케이블 타이와 테일 라이트 클램프로 고정했다.
이렇게 하니 아쉬운 대로 억지로 탈수 있었다.
몇 킬로를 굴러서 도착한 작은 마을 철공소에서
(카센터 같기도 하고, 시골에는 한 곳에서 다양한 일을 처리해야 할때가 많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그냥 철밴딩으로 클램프를 묶어버렸다.
아무런 댓가도 치르지 못하고 그냥 고맙다는 인사만 전하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날은 덥고 도로는 멀었다.
짧아진 시트 포스트 덕에 다리는 금새 피로해지고 발통의 형은 계속 쳐지고 이타 선생님은 빨리 못 가서 애 터지고.
임진강을 따라서 북한을 저 너머에 두고 문산 입구에 이르러고 보니 아침에 세웠던 통일 전망대 방문이나 1번 국도의
임진각 구경은 다음 기회로 돌려야 할것 같다.
도로가 그늘에서 형을 기다리다가 배낭에서 싸온 머리카락을 꺼냈다.
신문에 곱게? 싸온 발통의 머리카락에는 흰머리가 여러 개나 보였다.
2년전에 일본 갈때 자른 머리카락에는 흰머리가 거의 없었는데.......
서러운 사십세여.
(2년전 일본 아소산 라이딩 때도 거창에서 머리카락을 잘라 배낭에 넣고 아소산 정상을 오른 다음 돌아오는 길에
현해탄에 뿌리려고 했으나 배 위의 갑판에서 조금씩 흩날린 머리카락이 아래 갑판 안쪽으로 날려 들어가는 바람에
당황하고 황당하여 그냥 다시 싸서 거창으로 들고 왔다.)
원래는 통일 전망대에서 뿌리려고 했던 발통의 자른 머리카락을 그냥 문산 입구의 한 도로가 풀섭에 다소곳이 내려놓으니
여러 생각들이 지나갔다.
웅양을 지나면서 보게 된 내장이 분리된 차에 치인 고라니 시체, 김천을 들어가면서 받은 고등학교 동창 아버님의 부고 문자,
상주로 들어가면서 생각한 여자 싸이클 선수단, 문경의 모텔에서 뉴스로 본 통영 초등학생과 제주도 관광객 사건,
이천에서 알게된 지인 어머니의 암투병 소식, 올해 음력 4월 4일 04시 40분에 암으로 저 세상에 간 인라인을 같이 탄 상현이 형.
우리는 문산 시내로 들어와서 먼저 버스 터미널로 갔다.
버스는 모두 천연가스로 가는 버스여서 짐칸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산역으로 이동하여 물어보니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전철 카드를 발급 받아 자전거를 전철의 제일 마지막 칸에 싣고 의자에 앉으니 이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DMC역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전철로 갈아 탄 다음 서울역에 내려서 이타 선생님의 지인이 기다리는 충무로역 3번 출구까지 라이딩을 했다.
우리는 충무로역 근처의 한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마시며 해단식을 하고 오카리나 한곡을 연주하고는 이타 선생님과 이별을 했다.
발통과 형은 남산을 돌아서 한남대교를 건너 남부터미널까지 온 다음, 형은 헌인릉 근처 집으로 가고 발통은 터미널로 들어왔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거창으로 가는 심야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좌석에 앉으니 이로서 40살 기념 3번 국도 라이딩이 끝을 맺는다.
거창으로 오는 3시간 몇십분 동안 계속 자다가 거창에 도착하여 발통 가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며 지갑과 배낭의 동전을 꺼내보니
백원짜리 4개와 오십원짜리 4개가 들어있다.
올해 4자는 왜 이렇게 많은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