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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10년 농촌은 그들에게 무엇인가? | ||||||||||||||||||||||||||||||||||||
철저한 준비 공동체 적응이 필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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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많이 줄긴 했지만 직장생활이 힘들고 지칠 때면 흔히들 내뱉는 말이 있다. “직장 때려치우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짓지 뭐.” “쥐꼬리만한 봉급 받아가며 상사 눈치 보는 것보다야 농사짓는 게 더 맘 편하지 않겠어”라는. 한 번쯤은 각박한 도시생활을 접고 농촌에서 흙을 만지며 농사를 짓고 싶다거나, 은퇴 후 농촌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반대로 내 자식만은 힘든 농사꾼으로 키우지 않겠다며 도시로 내보내는 농민들의 모습을 주위에서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왜 이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에게 농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그 대답 또한 각양각색이다. 우리 역사 속에 귀농은 늘 있어왔다. 그만큼 귀농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하지만 정부에서 귀농자금을 지원하면서까지 정책적으로 귀농을 권장한 것은 10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았다. 이같은 정부 시책과 맞물려 귀농운동을 올바로 추진하기 위해 한국농어민후계자 중앙연합회,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한국4-H연맹 등 9개 관련 단체들이 귀농운동을 범국민적 관심사로 이끌어내기 위해 전국귀농운동본부을 창립한 시기도 지난 96년의 일이다. 특히 지난 97년 IMF 외환위기가 귀농의 촉매제 역할을 하면서 98년을 기점으로 귀농현상이 보편화됐다. 본격적인 귀농이 시작된 지 10년. 귀농 후 정착해 계속 농사를 짓고 있는 귀농자들의 생활과 귀농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그나마 고모부의 도움으로 1년간 시설채소 농사에 대해 배웠기에 가능했지, 그같은 경험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조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1년간의 시설채소 경험과 고모부라는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 귀농자들은 조씨와 같은 준비과정이나 이해없이 귀농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고모부의 도움이 컸다고는 하나 독립해서 농사를 짓고 정착하기까지 실패도 적지 않았다. 조씨가 고모부 밑에서 농사일을 거들 때만 해도 상추 등 시설채소 가격이 좋았기 때문이다. 등락 폭이 큰 시설채소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마철과 봄, 가을 날씨에 따라 가격 폭이 그렇게 클 줄 몰랐어요. 소위 돈이 될만하다는 생각만 했지 가격 폭락이나 장마로 애써 재배한 농작물을 갈아엎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조씨에게는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귀농 당시 8동에서 현재 29동으로 규모는 커졌지만 임차농이다보니 언제까지 계속 땅을 빌려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다. 더구나 최근 들어서는 신도시 얘기가 돌면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임대농의 설움을 톡톡히 겪고 있는 것이다. 귀
97년 한 종묘회사 연구원직을 그만두고 귀농한 정씨는 품종 육종 연구 경험을 토대로 오이농사를 짓고 있다. 오이 품종을 연구한 경험과 다른 품종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이라 판단하고 오이농사를 시작했지만 농사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직업이 오이 품종 연구인데다 젊음을 무기로 안정을 추구하기보다, 실험정신으로 육종연구소에서 재배시험을 의뢰하면 곧바로 시험재배에 나섰다. 하지만 그같은 모험(?)은 바로 수입 감소로 이어져 1200평의 땅을 정리하고 남을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귀농 당시 정부에서 귀농자금을 지원했지만 담보나 보증인 등 제도가 까다로워 임씨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윳돈이 없는 상태에서 초기 시설투자비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구원으로 있을 때와 사정이 크게 다르다는 인식도 적었다. “연구원으로 있을 때에는 품종을 연구하면 됐지만 직접 농사에 뛰어들면서는 재배하고 수확해 판매를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지금은 이력이 붙어 웬만한 문제는 해결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 “오이가격이 귀농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유가와 원자재 가격은 물론, 농약이며 인건비 등은 계속 오르는데 오이값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니 소득이 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힘들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임씨의 설명. 오이농사를 접을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계속 오르는 물가에 소득 감소로 인한 걱정은 수도작 농민들에게 더욱 뼈아픈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98년 사업을 정리하고 귀농해 이동면 덕성리에 정착한 조연수씨(63)가 그들 중 한명. 6000여평의 땅에서 쌀농사를 짓고 있는 조씨는 귀농자금 지원과 집 등을 정리하고 지난 98년 귀농했다. 농사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지만 당시 농촌지도소와 마을 주민들, 젊었을 때 농촌에서 자란 덕택에 빠르게 자리를 잡아 나갔다. 하지만 경험이 적다보니 초기에는 못자리를 썩히기도 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초여름인 6월에 모내기를 해 3분의 1가까운 2000평 정도 서리 피해를 입기도 했다. “적지 않은 논이 비가 오면 모내기를 하기 어려운 천수답이다 보니 가뭄이 심했던 어느 해에는 6월에 모내기를 해 수확이 늦어져 서리 피해를 입었어요. 수매에 내놓지 못했으니 술밖에 더 하겠어요. 당시 막걸리는 원 없이 먹었을 겁니다.” IMF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사업을 접고 귀농을 했지만 조씨는 그나마 귀농자들 중 조금은 나은 편이지만 수입은 나아지지 않았다. 귀농 당시 정부로부터 귀농자금을 지원받아 트렉터와 이앙기 등의 농기계를 구입해 일찍부터 기계영농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경농에 여유자금이 있었던 조씨지만 수입은 크게 늘지 않았다. 쌀값은 계속 하락하는데 원자재 등의 가격과 물가는 계속 오르기 때문이다. “생활하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힘든 만큼 얻는 것은 적은 것 같아요. 귀농 당시 대출받은 2천만원은 아직도 빚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고요.”
현재 농업 현실은 귀농자들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자란 이들조차 버거운 상대다. 어떤 이는 농촌의 전원생활을 기대하며 귀농을 꿈꾼다. 또 어떤 이는 농촌부흥을 일궈 새 희망을 심어보겠다는 사명감으로 귀농을 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어려운 현실과 여건 속에서도 농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지금도 농촌사회를 지탱하는 젊은 세대들이 사명감으로 때론, 실낱같은 기대와 희망으로 농촌의 버팀목이 되고 있을지 모른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는 믿음으로 말이다. 끝으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창립선언문 일부를 싣는다. “이제 우리의 땅, 우리의 농촌, 우리의 고향이 더 이상 버림받은 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땅의 농업이 한낱 돈놀이의 수단으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일꾼인 농민이 더 이상 이 시대의 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