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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이야기 스크랩 조선실록 제 15대 광해군, 16대 인종, 17대 효종..
성헌 추천 0 조회 27 11.01.28 10: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 15대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575~1641년, 재위기간: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 18년


1. 전란이 가져다 준 왕위..


 

선조는 아들이 14명이나 되었지만 정비 의인왕후 박씨의 소생은 없었고, 그녀가 왕비에 책봉된 이후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서자들 중에서 세자를 선택해야 했는데 서자가 너무 많아 이 또한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선조는 자신이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무척 부담스러웠던지 정비 의인왕후가 와병 중이라 더 이상 적자를 볼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의 나이가 40세를 넘기자 대신들은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40세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혹여라도 선조가 미처 세자를 결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불시에 죽는다면 조정이 혼란에 휩싸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신들은 이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 문제를 거론했는데, 이 문제를 가장 먼저 내놓은 사람은 좌의정 정철이었다.


1591년, 좌의정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영의정 이산해. 대사헌 이해수, 부제학 이성중 등과 책봉 문제를 놓고 심각한 논의를 벌였다. 그리고 논의 결과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선조에게 주청을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음모가 진행되었다. 서인의 거두 정철을 궁지로 몰기 위해 동인의 중심인물인 이산해는 은밀히 계략을 짜고 있었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인빈을 찾아가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한 뒤 인빈과 신성군을 모함하여 죽일 계략을 짜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을 듣고 인빈은 당장 선조에게 달려가 정철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모략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인빈을 총애하고 있던 선조는 이 말을 듣고 심하게 분개하며 정철을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한 정철은 경연장에서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청했다가 선조의 진노로 그만 화를 당하고 만다. 이때 동인인 유성룡과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인인 이해수, 이성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다가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그 후 세자 책봉 문제는 거론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분조(비상사태에 즈음하여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해야 될 상황에 처해서야 비로소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게 된다.


당시 선조는 북쪽으로 쫓겨 가는 몸이었기 때문에 후사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고, 또한 조정을 분리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되는 입장이어서 평양성에 머무를 때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 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 때 선조의 총애를 받던 신성군은 이미 병사하고 없었고,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임금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세자 책봉 문제가 일단락된 것은 아니었다. 세자를 책봉하면 명나라에 보고를 해야 했으며, 명에서 고명이 내려와야 정식으로 세자로 확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전란 중인 1594년 선조가 윤근수를 명에 파견하여 세자 책봉을 주청했지만 명은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때문에 광해군은 비록 왕으로부터 세자로 선임되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불안정한 처지였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분조의 소임을 다하여 조야의 명망을 얻게 되었으며, 명의 고명 여하에 관계없이 모든 대신들은 그를 세자로 받들었다.


그 후 광해군의 계승권은 요지부동한 사실로 인식된 듯하였다. 하지만 전란이 끝나고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면서 광해군의 입지는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606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선조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적자가 태어난 것이다. 선조는 적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 눈치 빠른 신하들은 선조의 속내를 파악하고 서서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게다가 선조는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히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대신들은 암암리에 영창대군 지지파와 광해군 지지파로 분리되고 말았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도 받지 못했다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 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버린다.


이후 이 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하지만 선조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 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재위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 끝난 것이다. 이때가 1608년 2월 2일로 광해군의 나이 34세였다.



2. 실리주의자 광해군의 과감한 정치..

 

우여골절 끝에 비로소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된다.


광해군은 157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공빈 김씨의 소생이다. 공빈 김씨는 그가 세 살 때 죽었으며, 임해군은 그의 동복형제이다. 그의 이름은 혼으로,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분조체제 아래에서 조정의 일부를 이끌며 소임에 최선을 다했고, 선조가 죽던 1608년 2월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우선 조정의 기풍을 바로잡고 임진왜란으로 파탄 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초당파적인 입지를 굳히고 있던 남인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시키고 전란 중에 타버린 궁궐을 창건, 개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살렸으며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했다.


하지만 왕권 안정 과정에서 피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우선 왕위 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시켜 죽이는 한편, 왕의 권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하던 동복형 임해군도 유배시켜 죽인다. 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른다.


광해군이 임해군을 유배시킨 것은 1608년 명나라에서 조선의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서얼 출신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명나라에서는 이에 논란이 일었고, 그래서 현장 실사를 위해 사신이 파견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 하여 그를 유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당시 임해군은 왕위를 도둑맞았다면서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비방하고 다녔기 때문에 집권당인 대북파는 이를 그냥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명의 현장 실사로 광해군의 심사는 무척 괴로웠다. 이미 세자 책봉 과정에서 광해군이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명을 거부했던 명나라였다. 때문에 명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도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는 것은 그야말로 조선 조정과 광해군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분노는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소북파, 그리고 명분론과 대명 사대주의를 강조하던 유생들에게 돌려진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현장 실사를 한 것은 조선 내부의 친명 세력이 요청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분노를 부추긴 것은 대북파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들을 제거하게끔 종용했고, 광해군은 왕권 안정을 목표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많은 정적들을 양산해 결국 이로 인해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폐위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1611년에는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유생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광해군은 이 사태에 직면하자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한다. 이 때문에 그는 등극 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1612년 이른바‘김직재의 옥’으로 소북파 인사 1백여 명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 과정 소게 사건이 걷잡을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1613년에는 다시‘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시키는 한편,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 삭직시킨다(위 두 사건은‘광해군의 정적 제거 과정과 대북파의 득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이후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해 능창군(인조의 아우)은 물론 이에 연루된 ‘신경희’ 등이 제거된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로 일찍이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상이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경계를 받아왔다. 당시 죄수 소명국이란 자가 무고하기를 그가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함에 따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되고 이후 살해당할 위협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는 사형당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임이강, 오충갑 등은 유배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신경희의 옥사’라고도 한다.


1617년 이르러서는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 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인 1618년에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하지만 광해군은 민생 안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은 등극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세금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였다. 1611년에는 농지를 조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또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년인 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또는 경희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 중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민간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동북아의 국제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후금을 건국하자 그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평양감사에 박엽, 만포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응하게 했다. 그러나 부차싸움에서 명나라가 후금에 패하자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누루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하는 능란한 양면 외교 솜씨를 보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사실 광해군의 책략이었다. 즉, 명나라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협력하는 체하면서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고, 후금에 대해서는 명의 강요에 의해 출병했을 뿐 그들과의 우호를 다지겠다는 양면의 계책을 폈던 것이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이런 계책을 충실히 이행한 인물이었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계속해서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고 있었다.


이 밀서 덕택으로 조선은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고, 그렇게 파악된 정보에 따라 대책을 세워 후금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방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론은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609년 일본과 송사약조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대일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 오윤겸 등을 회답사로 일본에 파견하기도 했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 악화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광해군의 실리적 정치관은 도성을 옮기는 계획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일반에는 이씨 왕조의 기운이 다해 정씨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이는 민심을 동요시키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또한 한성이 전란으로 완전히 소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복구 사업에 엄청난 재원과 인력이 필요했다. 그는 민간에 널리 유포된 ‘정씨왕조설’을 일소하고 임진왜란의 악몽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도성을 파주의 교하로 옮길 것을 결정했다.


광해군이 새로운 도읍지를 교하로 설정한 것은 철저한 실리주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교하는 위치적으로 볼 때 임진강을 끼고 있어 물 사정에 어려움이 없고 대평야로 둘러싸여 있어 식량을 쉽게 구입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중국과의 해상 교통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도 적당했다. 군사적으로 보아도 한성보다 안전한 위치였다.

 

즉, 한성보다 지리적으로 북쪽에 있어 일본의 위협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고, 임진강이 가로 막고 있어 중국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제격이었다. 또한 주위의 산이 낮아 산성으로 사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중국과 해상로가 가까워 수군에 의한 위협이 있는 곳이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중국은 해상전에 약한 국가였기에 그다지 염려할 바가 못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천도 계획은 명에 원군을 파병하는 문제를 비롯한 다른 현안에 밀려 연기되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하고, 축성 작업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만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 천도 계획은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아주 기발한 착상이었다. 요컨대 광해군은 밖으로는 철저한 실리주의 외교노선을 걸었고,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 체제하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병화로 손실된 서적 간행에도 박차를 가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가행실』등을 다시 간행하고,『국조보감』을 다시 편찬하여 정사 운영의 방향을 확립했고, 실록 보관을 위해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네 곳의 사고를 대신했다. 한편, 이 시대에 허균의『홍길동전』,허준의『동의보감』등이 나와 문학과 의학 부분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616년에는 류큐로 부터 담배가 수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이런 실리적이고 과단성 있는 정책은 인조반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의 15년 재위기간 동안 정권을 장악한 것은 대북파였다. 대북파는 정권 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과 서민들은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1623년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의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인조반정 과정은「인조실록」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 기간 동안 광해군은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1641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10명의 부인을 뒀으나 자녀는 세자 질과 옹주 1명을 얻었을 뿐이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에 있다.


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 한 측면이 강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을 완전히 꽃피우지도 못한 채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는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내건 이 같은 명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선 이들이 중국의 흐름에 둔감해 시대적 대세를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였고 청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그런 세력다툼을 이용해 개국 이후 계속되던 중국과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 점을 읽어내고 중립 외교노선을 걸었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대명 사대주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 청에게 왕이 무릎을 꿇고 군신관계를 맺는 대치욕을 겪게 된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비롯해 능창군, 인목대비 등의 왕권 위협 세력들을 제거한 것을 폭정으로 몰아간 부분이다.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일은 거의 없다. 그는 오히려 민생 구제에 주력하여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데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조선 정치사를 볼 때 이른바 성군 내지는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왕들 역시 자신의 정적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과 세조였다. 태종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죽였고 동복형제도 유배시켰으며 또한 계모 강씨의 능을 일개 후궁의 무덤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자행하고, 심지어 장자인 양녕이 왕이 될 인물이 못 된다 하여 폐 세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였으며, 형수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냈으며, 왕권에 대한 도전이 두려워 철저한 심복정치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들의 행적에 비하면 극악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는 오히려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란에 불과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사대주의자 내지는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는 그들의 반정이 순수한 구국 의지의 발로라기보다는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인조반정을 중종반정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비해 광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들과 단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종은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은 경우였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반정을 주도했다. 중종반정이라고 일컫는 사건이 연산군 폐출사건이었다면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정이자 역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3. 광해군의 가족들과 광해군의 유배생활


광해군이 폐위된 뒤 그의 가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는 인목대비의 철저한 복수심의 표출과 인조 세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인목대비와 인조반정 세력에 대해 종래와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 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배시킨 것은 그곳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 사람을 한 곳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 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 안치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 세자는 사약을 받고, 세자빈은 자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하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 것 같다. 세자 질은 어느 날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짐작컨대 그는 은덩이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모종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세자 질이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론컨대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결국 세자 질에게 사약을 내렸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러 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한때 광해군의 중립정책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 사대정책을 주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름대로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가치관이 뚜렷했던 여자였다.


그러나 유배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화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히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마저 죽자 광해군의 가족은 박씨 일가로 시집간 옹주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생활에 적응해서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몇 번에 거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구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의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 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으며, 이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오히려 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 하는 나인이‘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 모른다. 또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 귀양생활 18년 수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을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 발치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은 그의 유언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의 공빈 김씨 묘 아래쪽 오른편에 그를 묻었다. 그리고 박씨 집안으로 출가한 서녀의 자손들로 하여금 보사하도록 하였다.



4. 광해군의 정적제거와 대북파의 득세..


광해군시대는 왕권에 대한 위협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선조 이후 적자가 아닌 서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방계 승통이라는 오점을 남긴데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민간에 이씨 시대가 끝나고 정씨 시대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광해군 역시 서자였고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유영경의 모략 때문에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받은 처지였다.


게다가 그가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명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그의 왕위 세습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한 데다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했기에 왕권에 대한 위협은 한층 심화된 상태였다.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 제거 작업에 몰두하게 했으며, 광해군 지지파였던 대북파가 이 작업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실천하게 된다.


광해군의 왕권 안정책은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임해군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해군은 세자 책봉에서 탈락된 이후 줄곧 광해군을 헐뜯어온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처사는 광해군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게다가 그의 광폭한 성격으로 인해 민간이 피해를 입는 일도 잦아졌다.


그런 와중에 광해군의 집권을 반대하던 서인 세력과 소북 세력은 은밀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집권당인 대북파는 임해군이 말썽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며 그를 유배시켜야 한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임해군 이외에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적지 않았다. 특히 영창대군과 신성군의 양자 능창군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광해군과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를 몰아내고 영창대군과 능창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 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률이 병역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된다. 신률은 그를 체포한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 계획을 자백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 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 했다고 허위자백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이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이 사건이‘김직재의 옥’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모반의 주모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이때 고기와 술을 먹었다 하여 직첩을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적이 있었다. 그 후 광해군 때에 늙은 어머니를 학대했다 하여 직첩을 다시 빼앗겼다. 이 때문에 그는 광해군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고, 대북파가 이 같은 그의 약점을 이용해 소북파를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소북파를 몰아낸 대북파는 어리지만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영창대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때마침‘칠서의 옥’이 발생해 이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다.


1613년 문경새제[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자들의 서자 7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무륜당(無倫堂)’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여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타진 되었다. 하지만 이‘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후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의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은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사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했던 일이 박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된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계축옥사’라고 한다.


대북파의 또 다른 숙청 대상은 능창군이었다. 능창군은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의 아들로서 인비의 소생이자 한때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로 책봉될 뻔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당시 17세로서, 주변에서 그를 중심으로 역모를 감행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 뿐만 아니라“능창군은 기상이 비범하다.” 든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매우 성하다.” 혹은 “인빈의 무덤 자리가 좋다.”는 등의 말들이 소문을 통해 광해군의 귀에도 들어왔다. 따라서 대북파와 광해군은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 작업은‘신경희의 옥’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경희는 당시 수안군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1615년 그가 양시우, 소문진, 김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명국의 말에 따라 이들에게 역모혐의가 쓰인다. 그리고 이때 이들이 추대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능창군이라는 자백을 얻어내고 능창군을 유배시켜 죽여 버린다. 이때 죽은 능창군은 후에 반정을 통해 왕이 된 능양군(인조)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북파는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1618년, 5년 전의 계축옥사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등의 강경론자들은 인목대비를 사사시킬 것을 간언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현에 옮기지 못한다. 이후 이이첨은 몇 번에 걸쳐 인목대비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고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렇듯 왕권 위협 세력을 거의 모두 제거했음에도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정적의 제거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적을 양산했는데도 이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한 것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로는 대북 세력이 조정을 독점함으로써 전체를 균형 있게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군 원조에 병력을 동원한 탓으로 도성과 궁궐의 치안을 소홀히 했던 점 등이다.



5. 변혁시대에 핀 문화의 꽃..


☆ 비운의 혁명가 허균과 불사의 영웅 홍길동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최초의 한글소설을 남긴 문사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시대를 변혁하기 위해 혁명을 꿈꾸던 사상가였다.


그는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장하여 학자와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던 ‘허엽’의 아들이다. 자는 단보이고 호는 교산, 학산, 성소, 백월거사 등 여러 가지를 썼다. 그의 어머니는 예조판서를 지낸 김광철의 딸로서 명문 출신이었으나 허엽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따라서 허균은 비록 서출은 아니었지만 이복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면서 다분히 서얼들이 겪는 고통을 맛보았고, 이러한 경험이 후에『홍길동전』속에서 서얼 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이복형 허성은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동복누이 허난설헌은 양반 출신임에도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릴 만큼 섬세하고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뛰어난 문인 집안 출신답게 허균 역시 5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었으며, 둘째 형 허본의 친구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그 뒤 26세 때인 1594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지만 한양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 6개월 만에 파직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 등을 지내고 1604년 수안군수를 지내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계속 불교에 몰두하였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을 높이 평가받고, 그에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보여 이를 중국에 출판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세 번째로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게 평가하던 조정은 그를 다시 공주목사로 기용하였는데, 이번에는 서얼 출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관직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또 다시 네 번째 파직을 당하게 된다.


파직당한 뒤 그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기생 계생을 만나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함께 지냈고,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과도 교분을 쌓아 인간관계의 폭을 넓혔다. 그러다가 1609년 명나라 책봉사가 오자 종사관이 되어 영접했으며,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하지만 1610년에 있었던 과거에 시험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하였는데, 1613년 영창대군을 죽인 계축옥사와 관련하여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당시 실세로 자리를 굳히고 있던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하였다.

 

그는 이이첨의 주선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1615년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의 책임자가 되어 두 번이나 천추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특히 두 번째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 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으로부터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킨다.


그러나 이즈음 허균은 그동안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는 서얼 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이 혁명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우선 한성을 장악할 것을 결심하고 수하들을 시켜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소문의 내용은 “북방의 오랑캐(여진족)들이 쳐들어왔고, 남쪽에서 왜구가 쳐들어와 남쪽 섬을 점령하고 대군을 상륙시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점차 민간 속으로 파고들어 효력을 발휘하자 그는 남대문에 이 내용을 붙이게 하였다.


남대문에 전란에 관한 방이 나붙자 장안은 온통 전쟁 분위기에 사로잡혀 도성민들 중에는 황급히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허균은 민심의 동요가 더욱 심해지면 그 틈을 노려 한성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 계획은 엉뚱한 곳에서 탄로 나고 말았다.

 

1618년 8월 그의 부하 현응민이 도성을 출입하다가 불심 검문에 걸려 거사 계획을 발설한 것이다. 현응민으로부터 모반 계획을 파악한 이이첨은 군사를 이끌고 허균의 집을 내사하여 그와 반란 핵심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리고 허균을 역모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했다. 이로써 20년 가까이 준비해 온 혁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50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당시 사람들은 허균에 대해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인격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 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며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다섯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글로 된『홍길동전』을 남김으로써 한국 문학사에 일획을 긋는 대업을 이루었다. 허균의 혁명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홍길동전』은 당대에만 하더라도 누구의 저작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보다 18세 아래인 이식이 그의『택당지』잡저 부분에 “허균이『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록한 것을 통해 후대에 밝혀졌을 뿐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때로 주인공 홍길동은 홍판서의 서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전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하기에 이르고, 타협안으로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게 된다.


길동은 한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하고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 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 상을 마친 후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살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작품은 도적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소설이자 양반 가정의 서얼 차별의 불합리에 항거한 사회 소설이다. 또한 이상향을 그리는 낙원사상을 담고 있으며, 도교적인 둔갑법, 축지법, 분신법, 승운법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도교 소설적인 요소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성격은 사회 혁신을 꿈꾸는 사회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대하여 비교 문학적으로 고찰한다면 중국 명대의『수호전』,『삼국지연의』,『서유기』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도적의 의적 행위에 관한 것은『수호전』과 흡사하고, 분신법으로 팔도 감영에 방을 붙이고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속이는 것은『삼국지연의』제68회의 좌자의 분신법에 의하여 조조를 희롱하는 것과 상통하며, 도술을 부리고 구름을 움직이는 것은『서유기』를 본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모델은 조선 국내에 있었던 것 같다.

 

즉, 연산군 6년 가평, 홍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름난 화적 홍길동과 명종 대의 의적 임꺽정, 선조 29년 7월에 임란 와중에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거사한 종실의 서얼 이몽학의 난 등에 나타난 여러 가지 요소를 복합적으로 조합시킨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도국 같은 이상국의 건설에 관한 것은 조선 선비들이 내면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상형에 대한 동경이 노출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허균 역시 이상형을 꿈구던 대표적인 선비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홍길동전』은 당시 조선 중기 사회의 양반과 민중들의 사고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얼 문제를 비롯한 사회계급의 불평등에 대한 것이 후대로 갈수록 점차 사회 쟁점으로 부각한 것을 볼 때 조선 중기 전반에 걸쳐『홍길동전』은 혁명사상의 교과서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허균은 홍길동을 통해 자신이 이상형으로 여기던 사회를 건설하려 했고, 또한 소설 속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를 실천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사회변혁 사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이후에도 조선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일례로 홍길동은 후대의 박지원에 의해 ‘허생’으로 재탄생되어 혁명의 사상을 잇게 되었고, 민간에게는 사실적 인물로 전해져 전라도 영광의 홍길동 마을에 대한 전설을 낳고 공주 유구에는 홍길동이 쌓았다는 산성 전설을 남기게 되었다.


허균이 남긴 소설은『홍길동전』이외에도『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남궁선생전』,『장생전』등이 있다.


 

☆동방의 편작 허준과『동의보감』


허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무과 출신으로 경상도 우수사를 지낸 허곤의 손자이며 용천에서 부사를 지낸 허윤의 아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1546년 김포에서 무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무과에 응시하지 않고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내의원에 봉직하게 된다. 이 후 내의 태의 어의로서 명성이 높았고 동양 의학을 집대성한『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조선 의학의 우수성을 청과 일본에 과시하기도 했다.


의과에 급제한 이래 그는 1575년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과 함께 입진하여 실력을 증명했으며, 1581년에 고양생의『찬도맥결』을 교정하여『찬도방론맥렬집성』4권을 편성함으로써 맥법 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이후 그는 어의로 활동하며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왕자의 두창을 낫게 해 선조로부터 당상의 가자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임란 때는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남아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 선조의 명을 받아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각지로 흩어지는 바람에 작업을 일시 중단되었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 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 5백여 권을 고증하게 했는데, 그는 내의원에서 어의로 종사하면서도 편집 일에 전념하여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25권 25책의『동의보감』을 완성했다. 이 책은 그 당시의 의학지식을 총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 외형, 잡병, 탕핵, 침구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대 강편 아래에 질병에 따라 항, 목을 정하고 그 항목 밑에는 해당되는 병론과 약방들을 출전과 함께 자세하게 열거하여 각 병증에 관한 고금의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병증에 따르는 단방과 침구법을 부기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실용화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


이 편집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각 병증의 항과 목이 증상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예로 ‘내경’ 편의 ‘진액’ 항에 한증(땀병)의 처방을 보면, 먼저 그 맥법과 원인을 밝히고 그 다음에 자한, 도한, 두한, 심한, 수족한, 음한, 혈한 등 8목으로 분류되어 있어 임상의가들이 환자를 대했을 때 많은 책을 참고로 하지 않아도 이 책 한권으로 손쉽게 고금의 의서들을 열람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게다가 세종 때 만들어진『향약집성방』,『의방유취』와 선조 때의『의림촬요』복희의 저작으로 알려진『천원옥색』, 신농의 저작이라는『본초』,『소문』,『영추경』등 83종의 고전 방서들과『상한경』,『맥경』,『단계심법』등 한, 당 이래 편집된 70여 의방서가 인용되고 있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동의보감』은 편집력과 서술 능력의 우수성으로 인해 동양 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 뒤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한방 임상의학서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저작으로 이 책처럼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널리 읽힌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허준은 이 책을 완성한 이후에도 세조 때 편찬한『구급방』을『언해구급방』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의『창진집』을『두창집요』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하고 간행하였다. 또 노중례의『태산요록』을『언해태산집요』로 개칭하여 간행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신찬벽온방』과『벽역신방』을 편집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그는 동의학사에 이 같은 많은 업적을 남기고 1615년 11월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광해군일기』는 총 64책으로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광해군 재위 15년 1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24년 춘추관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원래 1623년 이수광이 광해군 당시의 시정기를 수정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한 이듬해 1월에 발생한 이괄의 난으로 많은 사료들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광해군이 폐군이라는 이유로 편찬 작업을 하지 않고 시정기만 수정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시정기만으로는 광해군의 실록을 대신할 수 없다는 춘추관원들의 주장에 따라 1624년 2월에『광해군일기』편찬 작업이 결정되었다.


같은 해 6월에 일기 편찬을 위해 남별궁에 찬수청을 설치하고, 총재관 윤방을 중심으로 3개 조로 나누어 편찬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기본 자료인『정원일기』등이 대부분 이괄의 난 때 없어졌기 때문에 부득이 광해군 즉위 이후의 조보와 사대부 집안의 소장 일기, 상소문의 초고, 야사, 문집 등과 사초를 합쳐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 작업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632년 2월에 다시 시작하여 이듬해 12월에 겨우 완성을 보아 곧 인쇄에 착수했으나 물자가 부족해서 한 달 동안 광해군 즉위년 2월에서 6월까지의 기록 5권과 그래 7, 8월에 해당하는 기록만 인쇄하는 데 그쳤다. 이에 조정은 정초본을 여러 벌 등사하여 각 사고에 나누어 분장하기로 하고, 1634년 정월부터 등록관 50인을 임명하여 4반으로 나누고 정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2부의 정초본을 작성하였다.


실록의 편찬을 완료하면 원래 초초와 중초는 세초하고 정초본만 인쇄하여 사고에 보관하는 것이 관례였으나『광해군일기』는 불과 2부를 동시에 등사했을 뿐이어서 중초본을 세초하지 않고 이를 64권으로 꾸며서 태백산 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정초본 2부는 강화도 정족산 사고와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에 나누어 분장했다. 이 때문에 실록 중에 유일하게『광해군일기』만 중초본과 정초본이 함께 남게 되었다. 그 후 이 책은 숙종 대와 정조 대 두 번에 걸쳐 인쇄와 출판이 논의된 바 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광해군일기』중초본은 먹 또는 붉은 먹으로 수정하여 삭제하거나 보첨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 중초본은 실록 편찬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이 비록 ‘일기’라는 표제를 달고 있기 하지만 중초본을 통해 실록과 다름없이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편찬한 사람들이 인조반정을 주동하거나 또는 방조한 서인 세력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많은 부분이 왜곡, 조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 광해군 시대의 세계 약사


광해군 시대는 동북아뿐만 아니라 유럽, 아메리카, 인도 등 전 세계적으로 변혁이 시작되던 때이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정치, 사회, 문화 분야에서 근대화를 시도하고 중국에서는 후금 세력이 강성해져 명의 멸망이 가속화된다. 유럽은 한동안 평화기를 맞이하다 30년 전쟁으로 전란에 휩싸이고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갈 등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국가들은 인도와 아메리카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한다. 또한 이 시기에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의 걸출한 문학가들이 사망하고,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한 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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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대 인조실록 (仁祖實錄)..

1595~1649년, 재위기간: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1. 무력으로 광해군을 폐출 능양군..


선조의 선위 교지를 받지 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등극하자 곧 자신의 불안정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련의 왕권 강화책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 등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들과 그들을 떠받치고 있던 소북파와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618년 인목대비마저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그동안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고 역모를 도모하고 있던 세력들은 이 사건을 명분으로 무력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이것이 1623년 3월 12일 밤에 일어난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인물은 능양군이었다. 능양군은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이자 1615년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죽은 능창군의 친형이다.


여기서 그가 반정을 도모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광해군에 의한 동생 능창군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광해군과 인빈 김씨의 관계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선조는 인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을 총애했다. 그래서 한때 정철이 건저문제를 제기했을 때 선조는 광해군을 반대하고 인빈 소생인 신성군을 지목했다. 하지만 선조의 바람은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들은 신성군이 아직 어려서 국사를 논할 입장이 못 된다면서 인품과 학식이 뛰어난 광해군이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선조와 대신들의 이 같은 견해 차이로 한동안 세자 책봉이 미루어지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자 선조는 할 수 없이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을 세자로 앉혔다.


인빈 김씨를 비롯한 그녀의 소생들은 이것이 불만이었다. 때문에 광해군이 등극한 이후에도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게 되었는데, 광해군으로서는 당연히 이들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성군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 그 이외에도 인빈 소생의 아들은 셋이나 더 있었다. 특히 신성군의 동복아우인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왜냐하면 능창군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된 상태인 데다가 사람들로부터 군왕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인들의 평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제거해 왕권 안정을 도모했던 광해군과 대북파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고, 신경희 사건이 일어나자 능창군을 그들과 연루시켜 유배시키고 끝내는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능창군의 맏형 능양군은 광해군과 대북 세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인물들과 접촉하면서 무력 정변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618년 인목대비 유폐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명분으로 역모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능양군과 함께 무력 정변을 도모한 인물들은 대개 서인 세력이었다. 서인은 정치, 외교적 차원에서 철저하게 대북파와 대치했다. 그들은 특히 외교론 에서 극단적인 견해 차이를 드러냈다. 대북파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노선을 걷고 있던 반면에 서인은 철저한 대명 사대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또 서인 세력은 정치적으로 선조의 유명을 받들어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었다. 이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대북파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결국 대북파와 서인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광해군 역시 서인의 척결 없이는 자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폐출했던 계축옥사 때 서인의 중심인물들을 정계에서 내몰았고, 이후 인목대비 유폐사건 때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서인 세력도 사형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정계에서 밀려난 서인 세력은 역모를 계획해 이미 능창군의 죽음으로 역모를 꿈꾸고 있던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능양군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귀, 김자점, 김류, 최명길, 이괄 등이었다. 이들 모두는 이이, 성혼의 문하였다.


이 역모에 군사를 동원하기로 한 사람은 이귀와 김류, 이괄 세 사람이었다. 이귀는 당시 평산부사로 재직 중이었고, 이괄은 함경도병마사에 제수되어 임지로 떠나야 할 입장이었다. 그리고 김류는 강계부사를 역임한 바 있으나 대간의 탄핵을 받아 정계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이들 세 사람 중 이귀와 김류는 오래 전부터 역모를 함께 도모해온 인물이었고, 이괄은 김류와 교분이 깊던 효성령별장 신경진에 의해 거사에 합류한 상태였다.


반정을 일으키기 1년 전인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로 있었다. 이때 평산 지방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자 이귀는 범 사냥을 하는 군사들이 도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무장한 채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상소를 하였다. 이는 무장한 채로 바로 도성으로 밀로 올라갈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모의는 사전에 누설되어 연기되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정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버렸다.


상황이 이처럼 급변하자 능양군을 비롯한 역모 세력들은 이듬해인 1623년 3월 13일 새벽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확정하고 12일 밤부터 홍제원에 모여 대오를 가다듬고 군사 행동 지침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이미 조정에서 그들의 거사 계획을 눈치 채고 훈련도감 이확으로 하여금 역모 가담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귀는 거사 시간을 앞당겨 출병을 서둘렀다.


출병 당시 반란군의 숫자는 겨우 7백 명 정도였다. 반란군 대장을 맡기로 했던 김류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반란군은 예상 인원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대로 눌러앉아 있어봤자 결과는 진압군에게 당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귀는 일단 이괄에게 대장직을 권유했다. 이괄은 대장직을 맡자 반란군으로 하여금 머리에 ‘의(義)’자가 써진 띠를 두르도록 하고 군사를 지휘했다.


한편 김류는 거사 계획이 탄로 났다는 소릴 듣고 주저하고 있다가 뒤늦게야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에 합류했다. 이때 이괄은 김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귀의 중재에 의해 합병하고 김류가 총지휘를 맡은 다음 궁궐을 향해 진격했다.


반란군이 창의문을 향해 진격했을 때 진압군은 문을 굳게 닫고 궁을 수비했지만 반란군은 곧 창의문을 뚫고 창덕궁에 도달하였다. 창의문 안에는 이미 능양군이 자신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훈련도감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 주위에 매복하고 있었으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반란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훈련대장 이홍립은 대궐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반란군에 내응하기로 약속한 터였기에 간접적으로 반란군 진입을 돕고 있었다. 그래서 반란군은 순식간에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에 이르렀다. 금호문 역시 수문장 박효립이 내응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쉽게 통과한 반란군은 돈화문에 이르러 불을 질러 승리를 알렸다. 광해군은 그제야 반란군이 대궐을 점거했음을 알고 몇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재빨리 궁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해서 반란군은 쉽게 궁궐을 접수해버렸다.


반란에 성공한 능양군은 대궐을 장악하자 곧 광해군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빠져나가고 난 다음이었다. 능양군은 먼저 서궁으로 달려가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찾았다. 능양군을 맞이한 인목대비는 반란이 일어나 광해군이 패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색을 하며 기뻐하면서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이유로 다음의 세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는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인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 둘째는 과도한 토목 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여 정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것 등이었다.


이 같은 폐위 이유는 곧 반정 세력들의 거사 명분이었다. 이 거사 명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반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광해군의 정사 운영을 악정으로 매도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이유로 내세운 것 중에 선왕을 독살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인목대비가 줄곧 주장해오던 것이다. 인목대비의 이 말은 곧 그녀 자신이 서궁에 유폐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세운 과도한 토목 공사는 궁궐 재건 사업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정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광해군이 궁궐을 개축, 신축한 것은 왕권을 바로 세우고 정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광해군이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그들 서인 세력이 자신들의 외교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겨우 벗어나 안정기로 막 접어들 순간이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서인 세력은 자신들을 정계에서 축출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이 겨우 다져놓은 안정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다. 이 사건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거사 이틀 후 광해군이 의관 안국신의 집에서 붙잡힘으로써 능양군의 계획은 완전히 성공하였다. 이로써 능양군이 조선 제16대 왕에 오르니 그가 곧 인조이다.



2. 굴욕의 왕 인조, 끝없는 조선의 수난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그동안 득세했던 대북파 인사들에게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친명 사대주의를 표명하며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괄의 난, 청의 침입 등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결국 청과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다. 이후 조선의 경제는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고 민간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빈 소생인 정원군의 맏아들이다. 광해군의 서조카이고 인목대비의 서손자인 셈이다. 그는 1595년에 태어났으며, 1607년 능양도정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이후 1615년 막내동생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해 죽자 역모를 도모, 1623년 3월 서인 세력과 함께 무력 정난을 일으켜 조선 제1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우선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했으며, 광해군 시절 정권을 독점했던 정인홍, 이이첨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대북 세력 2백여 명을 모두 숙청하였다. 그리고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에 유배 중이던 남인 이원익을 여의정에 앉히고 반정에 가담했던 서인의 김류, 이귀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분리해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렸다.


그는 또한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을 신원하고, 나머지 희생자들도 대부분 관작을 복구시켰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이 되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여 그동안 광해군이 유지해오던 중립외교의 틀을 깨뜨렸다.


인조는 이렇듯 광해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조정과 사회를 안정시켜 자신의 정치사상을 펼치려 했지만 이는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반정 정권이 들어선 지 채 일 년도 못 되어 다시 한 번 반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사건은 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일으킨 것으로 1624년 1월에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인조에게 이괄이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간언을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주했을 정도로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내부 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떠난 사건은 처음이어서 민간과 조정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민간에 대한 사찰이 강화되어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게다가 이괄이 북방 주력 부대를 이끌고 내려옴으로써 변방의 수비에 허점이 생겨 후금의 침략을 용이하게 했다.


호시탐탐 내침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이 3년 뒤인 1627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키자, 후금의 기세에 위험을 느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때 후금은 조선 측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들의 침략 이유 일곱 가지를 밝히며 조선의 만주 영토를 후금에 내놓을 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3만 군사를 지원할 것 등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 회담에 나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면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앞세워 약조를 성립시키자 후금은 철수하였다.


이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그들은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때 척화론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인조는 삼전도에서 당한 굴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반청의 색깔을 더욱 짙게 드러내는 한편 망해가고 있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노선을 한층 강화시켰다.


인조의 그 같은 모화정책은 청에 인질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의 의견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소현세자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에 말려들어 급기야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 소현을 독살하는 극악한 일면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 대의 서인과 남인 사이에 치열한 정쟁으로 비화된 예송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현종실록」참조).


조정은 이때부터 귀인 조소용 소생의 옹주를 손자며느리로 맞아들인 김자점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횡포를 일삼아 조저에 대한 민간의 불신은 강해지고 정국은 더욱 혼란으로 치달았다.


인조는 이괄의 난 이후 계속된 조정과 사회의 혼란을 일소하고 한때 병권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624년에는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강했고, 이 후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했다. 이로써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1628년에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표류하여 왔는데, 그의 이름을 박연으로 고치고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 넣어 대포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해 조선군의 화력을 증강시키기도 했다.


한편 민생 안정책으로 광해군 당시 경기도에 한정해서 실시하던 대동법을 1623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해 징세의 이원화를 꾀하고 민간의 부담을 줄였으며, 1634년에는 삼남 일대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경지의 면적을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세금 수입을 확대시켰다. 또한 농토세 징수 규범인 전세법(田稅法)을 폐지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화폐 사용을 위해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했으며, 청인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여 북관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증강에 시장을 열었다.(경원개시, 중강개시)


이 같은 인조의 노력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또한 대부분의 정책들은 이미 광해군 대에 실시한 것들이어서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오히려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정두원과 소현세자가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황극경세서』,『동사보편』,『서연비람』등의 책들이 간행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학자들은 현종, 숙종 대에 걸쳐 예송을 일으켜 조정을 일대 파란으로 몰고 가게 된다.


인조는 이처럼 굴욕과 고통으로 왕위를 유지하다가 1649년 재위 24년 만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를 비롯 5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를 낳았고, 능은 장릉으로 왕비 인렬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는데, 처음에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다가 영조 때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3. 인조의 가족들..


인조는 인렬황후 한씨를 비롯한 5명의 부인에게서 7명의 자녀를 얻었다. 인렬왕후 한씨가 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4남을 낳았으며, 계비 장렬왕후 조씨는 후사가 없었고, 귀인 조씨가 승선군, 낙선군, 효명옹주 등 2남 1녀를 낳았다. 이들 중 두 왕후와 소현, 인평대군 등의 삶을 간단하게살펴보기로 하고 봉림대군은「효종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 인렬왕후 한씨(1594~1635년)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딸로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 능양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에 봉해지고 1623년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슬하에 소현, 봉림, 인평, 용성 등 네 아들을 낳고 1635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은 장릉으로 인조와 함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영도 때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로 옮겨졌다.


 


◎ 장렬왕후 조씨(1624~1688년)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1635년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뒤인 1638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대비가 되고 1659년 효종이 죽자 다시 대왕대비가 되었다. 이때 그녀가 입어야 할 상복이 정치 문제화되어 서인이 만 1년만 착복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하여 그 절차대로 복상을 치렀다. 하지만 이듬해 남인 허목 등이 대왕대비의 복상은 3년을 착용해야 한다는 3년설을 제기하여 서인을 공격했다. 이에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 아들이므로 복상은 1년만 착용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다시 주장했고, 남인 윤후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맏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하여 3년설을 주장했다.


결국 이 복상 문제는 양당 간의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고,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기년설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입지가 약해지고 서인의 입김이 강해졌다. 하지만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다시 이 복상 문제가 대두되어 남인은 기년설을, 서인은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1688년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능은 휘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 소현세자(1612~1645년)


인조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왕, 어머니는 인렬왕후 한씨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이후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이 같은 외교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으로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접하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소현세자의 이 같은 활동을 친청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적격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조소용과 세자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소현세자가 9년 동안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하였을 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였다.


입국 후 두 달 뒤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 지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34세의 혈기 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 가 두 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인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 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 인평대군(1622~1658년)


인조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요, 자는 용함, 호는 송계이다. 1630년 인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637년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심양을 다녀왔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했고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정통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구인 화가 맹영광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산수도」,「노승하관도」,「고백도」등이 있다. 이러한 미술품 이외에『송계집』,『연행록』,『산행록』등의 저서가 남아 있다. 사후에는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이다.



4. 인조시대의 변란들..


◎ 이괄의 '삼일천하’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조선 사회는 한동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란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은 또 다른 반란을 염려하는 한편, 사분오열되어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각 계파들은 반대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계략 짜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급기야 역모설을 퍼뜨려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이 같은 계파간의 갈등이 빚어낸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는 등극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신세가 된다. 고전 끝에 가까스로 난은 평정되지만 이 사건으로 조선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사회는 극심한 혼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결국 왕이 무릎을 꿇고 청에 사죄를 하며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진다.


인조시대의 혼란과 국치의 전주곡이 된 ‘이괄의 난’은 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대한 이괄의 불만에 의해 야기된 사건이라는 것이 사관들의 통평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좀더 면밀히 분석해보면 이 사건은 이괄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서인들의 세력다툼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인조실록』의 한 사론은 이 사건을 이괄이 인조반정 때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2등 공신에 책록된 데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밀려난 것에 앙심을 품고 일으킨 변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론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감안하지 않고 기술되어 있다. 이괄이 평안병사로 부임하던 시기는 누루하치가 후금을 일으켜 명의 요동 지방을 함락시키고 조선에 위협을 가해오던 때였다. 이 때문에 친명정책을 쓰고 있던 조선은 변방 방어에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변방 방어의 주력 부대 지휘관인 평안병사 이괄에게 국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인조가 이괄을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외직으로 내쫓아 그의 불만을 야기시켰다는 논평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오히려 인조는 그의 풍부한 전투 경험과 용병 능력을 높게 평가하여 그에게 북방 수비군의 주력 부대를 맡겼다고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 논리에 맞다.


당시 변방 수비를 책임졌던 사람은 장만이었다. 인조는 그때의 상황을 준 전시 상황으로 규정하고 전시에나 임명하는 도원수에 장만을 세웠고, 부원수에 평안병사 이괄을 임명했다. 사실 이때 부원수 물망에 오른 사람은 이서와 이괄 두 사람이었다. 인조는 두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해야 될지 몰라 도원수 장만에게 부원수를 지명하도록 했는데, 이때 장만은 이괄을 지명했다.


북방 수비대의 병력은 1만 5천 명 정도였다. 그 중에 주력 부대 1만 명은 부원수인 이괄의 지휘 아래 영변에 주둔하고 있었고, 지원 부대 5천 명은 장만의 지휘 아래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편제는 곧 부원수가 변방 수비의 실질적인 총 책임자라는 것과, 따라서 도원수 못지않게 잔략에 밝고 통솔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괄의 부원수 임명은 신중한 논의 끝에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괄은 이러한 자신의 중요한 책무를 통감하고 임지에 도착하여 군사 조련, 성책 보수, 진영의 경비 강화 등 여진족의 내침 방어에 몰두했다.


이괄이 이처럼 변방 수비에 몸을 아끼지 않고 있을 때 중앙의 서인들은 이괄이 변방에서 군사 1만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남아 있던 북인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1624년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그리고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헌집, 이시언 등이 변란을 꾀하고 있다고 왕에게 고변했다.


이들은 모두 한때 광해군과 친분이 있던 인물들이었다. 기자헌은 영의정까지 지낸 정치 원로였고, 이시언은 훈련대장을 역임하고 인조 즉위 이후에는 순변 부원수로 재직 중이었다. 하지만 기자헌은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귀양을 갔고, 이시언은 인조반정 때 협조한 공로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이들은 비교적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서인들에게는 위협적인 세력일 수 밖에 없었다.


반란으로 집권한 인조는 역모에 대한 고변이 들어오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이괄을 신임하던 터라 쉽사리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조사관을 구성하여 엄중하게 조사를 진행시키도록 했는데, 조사 끝에 이 고변이 무고임이 밝혀졌다. 조사 담당관들은 조사 결과를 고하며 문회, 허통, 이우 등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 역시 이들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서인 집권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김류, 김자점 등의 집권 세력은 자기편 당인들의 고변이 무고임이 밝혀졌는데도 이괄을 부원수직에서 해임하고, 중앙으로 소환하여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인조는 이괄을 국문하자는 의견은 묵살하고,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한명련 등을 중앙으로 압송하여 국문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또한 그 외에 기자헌 등 역모 혐의가 있는 40여 명의 중앙관료들은 하옥시켰다.


이전을 한성으로 압송하기 위하여 금부도사가 영변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괄은 몹시 분노하였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변방 수비에 전력을 쏟고 있는 자신을 역모자로 몰고 간 서인 세력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괄은 자신의 아들이 역모 혐의를 쓰고 압송되어 만약 고문을 못 이겨 거짓 자백이라도 한다면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했다. 기왕에도 중앙의 서인 관료들을 좋아하지 않던 그였다. 마침내 그는 아들을 잡아가기 위해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괄은 우선 자신과 함께 역모혐의를 쓰고 한성으로 압송되던 한명련을 구출해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 휘하에 있으면서 큰 전적을 올린 무신이었다. 출중한 용병력과 뛰어난 무인정신을 소유한 그는 당시 최전방에서 순변사로 재직하다가 불시에 압송되던 중이었다.


한명련을 합류시킨 이괄은 자신에게 항복하여 수하가 된 왜병 포로 1백 명을 선봉으로 삼고 전 병력 1만 명을 이끌며 영변을 출발하여 도성으로 진격했다. 이때가 1624년 1월 22일로 인조 즉위 10개월 만이었다.


이괄은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해 곧바로 도성으로 향했다. 장만은 이괄에게 잡혔다가 풀려난 군관 남두방을 통해서 이괄의 반란 사실을 듣고 있었으나 5천 명의 지원 부대로 1만 명의 주력 부대를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일단 자기 휘하의 군졸들을 결집시켜 성문을 닫은 뒤 이괄 부대의 기습에 대비하면서 중앙에 반란 소실을 알렸다.


이괄 부대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거침없이 한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진군은 철저히 샛길을 통해 이루어져 황해방어사나 경기방어사의 부대도 미처 그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진압군과 처음으로 접전이 이루어진 곳은 황해도 황주였다.


그곳에서 이괄 부대를 가로막는 것은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끄는 부대였다. 그들 두 사람은 이괄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이괄은 가급적이면 정면 돌파를 피하고 급습을 통해 그들을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괄은 우선 부하 장수 허전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진압군에 투항하게 하여 적의 경계를 늦춘 다음 급습하였다. 결과는 이괄의 대승이었다. 진압군을 누른 이괄은 관군 선봉장 박영서를 죽이고 다시 도성을 향해 재빠르게 진군하였다. 그토록 도성 진입을 서두른 것은 아마 도성 내에 살고 있던 가족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성에 도착하기 전에 그의 아내와 동생 이돈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괄 부대의 두 번째 전투는 개성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평산에서 벌어졌다. 이때 관군은 방어사 이중로와 평산부사 이확이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여울을 경계로 삼고 이괄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잠복 정보를 입수한 이괄 부대의 급습으로 관군은 다시 대패했다.


세 번째 전투는 임진강 나루터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이괄은 한명련의 노련한 조언에 힘입어 관군을 대파하고 벽제로 진출했다.


한편 임진강 전투에서 관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와 서인 세력은 기자헌 등 옥에 갇혀 있던 수십 명의 대북 세력들이 반란군에 내응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하고 그들을 모두 처형시켰다. 그리고 한성을 버리고 서둘러 공주로 피난을 떠났다.


이괄 부대가 마침내 한성에 당도한 것은 출군 19일 만인 2월 10일이었다. 그들은 도성에 당도하자 우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반란군이 승리하여 새로운 왕이 즉위할 것임을 알렸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역사상 반란군이 도성을 점령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도성을 점령하면 승리한 것으로 간주했던 만큼 이괄 부대는 선조의 아들 홍안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곳곳에 방을 붙여 주민들이 생업에 충실하도록 민심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들의 한성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이 도성을 점령하자 곧 뒤쫓아온 장만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만과 정충신, 남이홍 등은 작전을 짠 끝에 북산의 길마재에 진을 쳤다.


이괄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관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반란군의 선봉장은 백전노장인 한명련이 맡았다. 하지만 지형상 유리한 지역을 고수하고 있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관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자 이괄은 부상당한 한명련과 패잔병을 이끌고 급히 도성을 빠져나가 이천에 다시 진영을 조성했다. 하지만 2월 15일 이천에 도착했을 때 반란군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러자 전세를 회복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괄의 부하들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투항해버렸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조선 사회의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내부 반란으로 왕이 쉽게 도성을 비우자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고, 이러한 정서는 난이 평정된 이후에도 조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또한 반란으로 인해 변방의 주력 부대가 상실되어 북방 수비가 허술해졌고, 이는 후금의 침략욕을 자극시켜 결국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정묘호란은 다시 병자호란으로 이어져 왕이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 정묘호란


이괄의 난이 평정된 지 3년 만인 1627년 1월 그동안 호시탐탐 내침을 노리던 여진족이 대대적인 조선 침략을 감행한다.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던 조선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임진강 이북을 점령당했다가 화의조약을 맺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있는 틈을 타서 건주위 추장 누루하치를 추대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 1610년 후금을 세웠다. 이후 그들은 비옥한 남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명나라를 침략하였다. 그러자 명은 10만의 대군을 조성해 후금을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명의 요청을 받고 출병하긴 했으나 명이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여 수세에 몰리자 광해군은 중립주의 외교 노선을 취해 강홍립으로 하여금 후금과 휴전을 맺도록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단 전란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명과 후금의 싸움을 관망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국방을 강화시키고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광해군의 이런 전략 덕분으로 조선은 한동안 전란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출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친명배금 정책을 천명함으로써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조선은 대명 사대주의의 길을 걸으며 공공연히 명을 후원하며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보호해주기도 하였다. 조선의 이 같은 배금정책은 결국 후금을 자극하였고, 조선이 이괄의 난으로 국방이 허술해지자 후금은 3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기에 이르렀다.


후금의 장수 아민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은 것은 1627년 1월 중순이었다. 압록강을 넘은 그들은 순식간에 의주를 점령한 다음 주력 부대는 용천, 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했고, 일부 병력은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명의 모문룡 부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을 비롯 여러 곳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후금군을 저지하는 데에 실패했고, 모문룡 역시 가도에서 대패하여 신미도로 패주하였다.


이렇듯 후금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해오자 인조는 장만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대신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그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평산에서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던 장만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예성강 남쪽인 개성에 진을 치고 적과 대치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김상용을 유도대장에 명하여 한성을 지키게 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후금군은 후방의 위협을 염려한 나머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평산에 머무르며 조선에 화의를 제의하였다.


후금은 화의를 제의하는 서신에서 일곱 가지의 침략 이유를 대며 세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후금에 압록강 이남 변경 지역 땅을 할지할 것, 둘째 명의 장수 모문룡을 잡아보낼 것, 셋째 명나라 토벌에 조선 군사 3만 명을 지원할 것 등이었다. 후금은 2월 9일 후금의 부장 유해와 후금에 항복해 있던 조선 장수 강홍립을 보내 이 서신을 전달하고 화친의 뜻이 있음을 전했다.


조선 대신들은 이 서신을 받고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자와 이를 반대하는 척화론자로 갈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후금군을 상대할 여력을 상실했음을 실감한 대신들은 최명길 등 주화론자의 주장에 따라 그들과 화의 교섭을 하기에 이르렀다.


화친 과정에서 후금은 명나라 연호인 천계를 사용하지 않고, 왕자를 인질로 달라고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이에 조선은 왕자는 아직 어려서 보낼 수 없다며 종친 이구를 왕자라고 하여 후금 진영에 보내고 병조판서 이정구, 이조판서 장유 등으로 하여금 교섭을 진행하도록 했다.


조선의 화의 조건은 첫째 후금군이 평산을 넘지 않을 것, 둘째 맹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군할 것, 셋째 후금군은 철병 후에 다시 압록강을 넘어서지 않을 것. 넷째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할 것, 다섯째 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 것을 인정할 것 등이었다.


조선의 화친조약은 한마디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테니 더 이상 조선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후금이 조선의 이 제의를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이때 조선과 후금이 맺은 조약을 흔히 정묘약조라고 한다.


조선과 후금의 이 약조는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동안 야인으로 배척해오던 여진족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은 힘에 밀려 패전한 입장에서 취한 치욕적인 조치였을 뿐만 아니라 후금에 대해 세폐를 바쳐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마저 안게 되었고, 후금 역시 비록 조선과의 맹약으로 세폐를 통해 물자 조달을 약속 받았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궤멸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금 경향이 더욱 고조되어 여전히 배후에 불안의 씨앗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군사력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고 후금은 명과 싸움 때문에 섣불리 조선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런 양국의 내적인 어려움이 결국 양쪽 모두 불만스러운 정묘약조를 성립시킬 수밖에 없게 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 병자호란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폐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깨고 식량을 공급해 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해왔다. 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관계’로 개약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폐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후금의 요구 사항이 이처럼 터무니 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해 2월에 용골대, 마부대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리고 인조 비 한씨 문상을 겸할 요량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그들은 맹약을 바꿔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개약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이 후금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이에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칠 것을 극간했고, 인조도 이에 동조하여 후금 사신이 가지고 온 국서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민가의 마필을 빌려 급히 본국으로 도주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조선 조정이 평안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을 그들에게 탈취당하고 만다. 이 유문은 전시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비를 손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후금을 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유문을 읽은 후금 태종은 조선을 재차 침략할 뜻을 비친다. 그리고 이 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였으며,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가한다. 하지만 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조선 조정은 그들의 제의를 묵살해버린다. 그해 11월 청은 다시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내세우는 인물들을 심양으로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이번에도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시해버렸다.


그해 12월 1일 청 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1만 등 도합 12만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쳐내려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도원수 김자점과 의주부윤 임경업의 장계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이었다. 그리고 13일 오후 늦게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청군이 그렇게 빨리 밀고 내려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장계로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고, 도성 내의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4일 개성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조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에게 주사대장을 겸직시켜 강화도 수비를 명령했다. 또한 윤방과 김상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가씨, 원손, 둘째 아들 봉림대군, 셋째 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도록 했다.


인조 자신도 그날 밤 도성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 불광동)을 통과했으며,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이를 포기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남게 되자 한성 주변의 관리들은 각기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집결하였고, 이에 총 병력은 1만 3천이 되었다. 이때 성안에 있는 식량은 양곡 1만 4천3백 석, 장 220항아리 정도로 약 50일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한편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청태종은 1월 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싸움 없이 40여 일이 경과하자 성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조선군들은 싸움에서 모두 대패하여 패주하고, 명에 청한 원군도 내부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이리하여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인조가 출성하여 항복할 결심을 굳히자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등은 적진을 왕래하며 조선측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고, 청군 진영에는 용골대, 마부대 등의 사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회담에 응하였다. 조약서에 명시된 청의 요구 사항은 총 열한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세폐(공물)를 보낼 것 등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하였던 척화론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청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단도의 동강진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청 태종은 패륵 아탁과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으로 하여금 병선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측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 조건에 따라 평안병사 유림을 수장으로 하고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으로 하여 청군을 도와 싸우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를 몰래 보내어 명제독 심세괴에게 피하도록 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청군에 의한 군사적 피해 못지 않게 민간의 피해도 막심했다.


청군은 도적질을 일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군하면서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을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끌고 간 여자들을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속가를 낼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꽤 많았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조선후기의 유일한 법화 상평통보


인조 대의 경제 정책 중 주목할 만한 일은 상평처으로 하여금 명목화폐이자 동전인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한 것이다. 이때 발행된 상평통보는 숙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유일한 법화(法貨)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상평통보를 주조했던 상평청은 원래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비축 곡물이나 자금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이는 고려 성종 대에 설치되어 세조 대까지 이어졌던 상평창(常平倉)을 계승한 것이다. 세조는 상평창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운영 법규까지 제정하였으나 국가 재정의 궁핍으로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선조 대에 와서 상평청으로 격상시켜 각 지방의 구제곡물을 관장토록 하며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인조 대에 와서 대동법을 시행하던 경기청과 선혜청에 부속되기에 이른다.


이때 비변사에서 운영하던 진휼청과 병합되어 평소에는 상평청이라는 이름으로 곡물을 관리하고, 흉년이 들면 진휼청으로 개칭하여 구제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1633년에 마침내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된다.


상평통보 이전에도 조선은 이미 세종 대에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유통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전의 주조로 당시 법화로 규정해 놓은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는 현상이 일어나 저화의 퇴진을 가져왔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던 원료와 주조에 투입할 인력 부족으로 충분한 양의 동전이 생산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조선통보 역시 법화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인조는 법화가 실종된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심하다가 결국 신망을 잃은 조선통보를 거둬들이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보급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주조된 상평통보 역시 미처 신망을 얻기도 전에 크나큰 난관에 부딪힌다.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던 청나라가 1636년에 대대적인 침략을 자행함에 따라 화폐가 무용지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도 전란의 여파는 계속되어 시장에는 한동안 물품 화폐만이 유일한 교환수단으로 남는다.


하지만 효종, 현종 대를 거치면서 점차 경제적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숙종 대에 이르러 조선 조정은 다시금 화폐정책을 실시하여 법화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상평통보의 부활로 이어진다.


1678년(숙종 4년)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를 유일한 법화로 채택하여 유통, 보급토록 공포하게 된다. 주조작업은 호조, 상평청. 진휼청, 정초청, 사복시, 어영청 및 훈련도감 등 7개 관청 및 군영에서 맡는다.


이후 상평통보는 1894년 고종에 의해 정식으로 주조 중단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조선의 공식적인 법화로 활용되는 것이다.


『인조실록』은 초 50권 50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23년 3월부터 1649년 5월까지 인조 재위 26년 2개월 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50년 8월 1일에 시작되어 1653년 6월에 끝마쳤다.


편찬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총재관 이경여, 김육을 비롯하여 도청당상 3명, 도청낭청 25명, 일방당상 5명 일방낭청 7명, 이방당상 3명, 이방낭청 6명 그외 실무진 15명 등 도합 66명이었다.


▶ 인조시대의 세계 약사


당시 중국에서는 명이 서서히 몰락하고 청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서구와의 교역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일본 문화와 서구 문화의 접목이 시도되고 있는 시기였다. 또한 인도에서는 무굴제국의 힘이 약화되고 영국의 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유럽은 30년전쟁 및 종교전쟁 시대를 끝냈으며,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증대시키고 아메리카에 도시를 건설하고 뉴질랜드 등 남태평양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또 이 시기에는 데카르트의『방법서설』, 홉스의『시민론』, 밀턴의『언론의 자유』, 갈릴레이의『천문대화』, 뒤마 피스의『춘희』등의 저작들이 나왔고, 파스칼은 유체의 압력에 대한‘파스칼의 법칙’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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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대 효종실록(孝宗實錄)..

1619~1659년 재위기간:1649년 5월~1659년 5월, 10년


1. 소현세자의 죽음과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1637년 청은 병자호란을 종결짓고 돌아가면서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인조의 세 아들을 볼모로 잡아갔다. 그 중 셋째 아들 인평대군은 이듬해에 돌아왔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뒤인 1645년에야 귀국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둘 다 청에 8년여 동안 함께 볼모로 잡혀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완전히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당시 청에 수입된 서양 문물을 대하면서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익혀나간 데 반해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현세자는 서양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알았고, 또한 서양의 과학 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은 그에게 천주상과 서양의 역서 및 과학서들을 선물로 주었고, 그 덕택으로 소현세자는 서양의 역법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한편 조선의 천문학이 초보 단계에 있음을 알았다.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봉림대군 역시 청에서 많은 서양 문물들을 대하고 있었지만 소현세자만큼 깊이 심취하거나 경탄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패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경험들은 반청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청에서의 생활상은 역관이나 사은사들을 통해 조선 조정에도 전해지게 되었는데, 인조는 소현세자가 서양 종교인 천주교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을 듣고 몹시 분개했다. 게다가 귀인 조씨와 김자점 등이 소현세자가 청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다고 이간질을 시킴으로써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즈음 청나라는 명을 멸망시켰고, 세자 일행을 풀어주었다.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씨와 두 아들을 데리고(큰아들 석철은 조선에 있었던 듯함) 1645년 2월에 한성으로 돌아왔지만 인조는 전혀 반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당시 인조는 청으로부터 철저한 반청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반면에 소현세자는 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은 조선과 의논할 문제가 있으면 인조와 상의하지 않고 심양의 조선관에서 소현세자와 상대하기를 원했다.


청의 이런 태도는 인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김자점, 귀인 조씨 등이 소현세자가 입국하면 왕위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로 인조의 경계심을 더욱 높여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도착하자 곧 인조를 찾아뵙고 청의 내부 사정과 서양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인조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고, 그가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인조는 심하게 분개하며 벼루를 들어 그의 얼굴에 내려치기까지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소현세자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 병의 원인이 울화병인지 아니면 단순한 열병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당시 그를 진찰했던 어의는 학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때 인조의 주치의인 이형익이 그의 열을 내린다고 세 차례 침을 놓았는데, 그는 이침을 맞더니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의문사에 대해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 묘지 문에 “환궁 이후 계속해서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고,『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고 포로된 조선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 놓고 진기한 물건들은 사들여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시장과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녀 조소용(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했다거나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 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며칠 만에 죽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독에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추론의 증거는 사건에 대한 사후 처리와 소현세자의 장례식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못 사용하면 의관이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인조는 의관의 추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사헌 김광현이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이 연일 세자에게 침을 놓은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자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면서 김광현에게 몹시 화를 냈고, 나중에 그가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버린다.


또 소현세자의 장례식도 일반 평민의 장례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만 아니라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하였고, 참관 인원을 일부 종실로 제한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조는 묘지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신하들의 중론을 무시하고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에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더욱이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첫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인조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후 소현세자의 주변 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 보내고 마지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에 유배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고, 나머지 셋째 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인조의 이 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반청 감정 때문이었다. 원래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대명 사대주의였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대모화 사상은 병자호란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왕인 자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하는 치욕까지 겪게 했으며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반청 감정은 그 어떤 실리주의 노선으로도 무마시킬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인조보다도 소현세자를 더 신뢰하였던 것이다. 인조는 이 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현세자의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에서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찬양하며 조선이 변화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인조는 그런 세자가 청의 첩자 정도로 인식되었을 터이고 그것은 배반감으로 이어져 결국 아들을 독살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제거되자 그때까지 심양에 남아 있던 봉림대군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가 귀국한 것은 1645년 5월이었다. 인조는 한 달 뒤인 6월에 신하들에게 세자 책봉 의사를 밝혔으며, 9월에 봉림대군을 세자에 앉혔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8년여를 심양에 기거했지만, 소현세자가 거기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실리외교를 주창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대명 사대주의에 더 집착하여 반청사상을 한껏 고조시킨 인물이었다. 그의 이 같은 반청 감정은 인조를 흡족하게 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반청 감정이 자신의 대명 사대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큰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봉림대군은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북벌론’을 내세우며 국력 강화에 전념했던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다.


 

2. 효종의 북벌정책과 조선의 안정


소현세자와 함께 오랫동안 볼모생활을 하며 반청 감정을 강하게 키웠던 효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곧 친청(親淸) 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 자들을 중용하여 북벌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 같은 북벌 계획은 끝내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 덕택으로 국력이 강성해져 사회 안정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효종은 1619년에 인렬왕후에게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호, 자는 정연이다. 1631년 12세에 장유의 딸 장씨와 혼인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과 함께 비빈, 종실 및 남녀 양반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어 형 소현세자 및 김상헌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는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 소현세자와 함께 지내면서 그를 적극 보호하였으며,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신이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하여 청의 요구를 막았다. 그 뒤 청이 서역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하여 그를 보필하기도 했다.


8년여의 볼모생활 동안 많은 고통과 고생을 겪으며 반청사상을 정립시킨 그는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해 9월 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31세의 나이로 조선 제17대 왕으로 등극했다.


효종은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 등지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고, 동쪽으로는 철령위, 개원위 등으로 끌려 다니며 온갖 고초를 다 겪었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해 많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집권 초기부터 배청 분위기를 확산시키며 송시열의 북벌론에 근거하여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이 계획을 수립하기에 앞서 우선 친청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표적인 친청 세력은 김자점이었다. 그는 인조반정의 공신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한때 정권을 장악해 권세를 누리다가 대간이 탄핵을 받아 물러난 바 있으며, 이후 김류와 제휴하면서 다시 정계에 나선 인물이었다.


김자점은 사은사로 수차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소용과 결탁하여 인조의 의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를 비난하여 인조와 이간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조소용이 낳은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 세룡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 관계를 보다 강화시켰다.


그러나 김자점은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여 김상헌, 송시열 등 반청 인사들을 중용하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 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역관 ‘이형장’을 시켜 새 왕이 구신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고 한다고 효종을 청에 고발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조선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문서를 보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군대를 압록강 근처에 배치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난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 등의 외교 능력에 힘입어 이 사건은 무마되었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광양으로 유배된 김자점은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한다. 아들 이익으로 하여금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리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죽었으며, 그를 후원하던 인조의 후궁 조귀인도 사약을 받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축출 당했다.<김자겸에 난>


김자점 역모사건으로 친정 세력을 모두 제거한 효종은 이완, 유혁연, 원두표 등의 무장을 중용하여 북벌을 위한 본격적인 군비 확충 작업에 착수했다.


1652년에는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군사도 6백여 명에서 1천여 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로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한성 외곽의 방비를 보강하였고,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가시키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빈약하여 실현하지 못했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이 핵심인 속오군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를 강화하고,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정예 인력을 보충시켜 기강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한양 외곽과 강화도 군력을 증강시켜 수도의 안전을 꾀했다. 효종은 이러한 군비 증강을 바탕으로 두 번에 걸쳐 나선(러시아) 정벌을 감행하기도 했다.


나선은 흑룡강변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흑룡강 우안의 알바진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불법적인 탈취 행위를 하였다. 그 때문에 주변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잦았으며, 나아가서는 청나라 군대와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청은 누차에 걸쳐 나선인들의 국경 진입을 막았지만 그들은 점차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노략질을 일삼았다. 청나라 정부는 군사를 보내어 영고탑에서 전추를 벌여 그들을 축출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총포에 번번이 당하곤 하였다. 청은 별수 없이 조선 조총군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청은 조선 조총군사 1백 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하여 영고탑에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심의 끝에 조총군사 1백 명과 병력 50명을 파견하여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격퇴시켰다. 이것이 1654년 4월에 있었던 제1차 나선 정벌이다.


조선은 1658년 6월 청의 요청에 따라 다시 조총부대 2백 명과 초관 및 여타 병력 60여 명을 파견해 제2차 나선 정벌에 나섰다. 나선 정벌에 나선 청군과 조선 조총군은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적을 만났다. 이때 나선군은 10여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다가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어 감히 그들을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되었다.


이 두 번의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후에도 나선 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이런 집념 어린 군비 확충 작업은 번번이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혀 중단되곤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군비 확충에만 주력한 나머지 민생을 곤란하게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효종의 이런 국방 강화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벌의 기회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나라의 세력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효종은 국방 강화와 동시에 경제적인 안정을 꾀하였다. 두 번에 거친 외침으로 말미암아 완전이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 질서 확립을 위해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문화면에서도 역법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또『국조보감』을 재 편찬해 치도의 길을 바로잡고,『농가집서』등의 농서를 마련해 농업 생산을 늘리려 했다. 또한 흐트러진 윤리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가 편찬한『내훈』, 김정국이 쓴『경민편』등을 간행하였다.


효종은 평생을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으나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하여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 재건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결국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와 인빈 이씨 등 4명의 부인에게서 1남 7녀를 얻었는데, 인선왕후 장씨 소생이 현종을 비롯한 여섯 공주이고, 안빈 이씨 소생이 숙녕옹주 1명이다. 능호는 영릉으로 처음에는 경기도 구리시의 건원릉 서쪽에 위치했다가, 후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옮겨졌다.


인선왕후 장씨(16181674)는 우의정 자유의 딸이며, 13세가 되던 1630년 한 살 어린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에 봉해졌다.


1637년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전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 8년여 동안 심양에서 생활하였다. 1654년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이 제때 되지 못해 사저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 뒤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어 2년 뒤에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후 1662년 효숙의 존호를 받아 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을 얻어 죽었다. 그녀는 효종과 함께 영릉에 묻혀 있다.


『효종실록』은 총 21권 22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49년 5월부터 1659년 5월까지 효종 재위 10년간의 역사적 사실들은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60년 5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2월에 완료되었다. 작업에 참여한 인원운 총재관 이경석을 비롯 도청당상 3명, 도청낭청 4명, 일방당상 5명, 일방낭청 7명 그리고 그 외 실무진 39명 등 총 59명이었다.


▶ 효종시대의 세계 약사


이 당시 유럽은 크롬웰이 집권하면서 영국의 힘이 강성해지고, 네덜란드에 의해 아프리카 식민지화가 추진된다. 또한 포루투칼은 네덜란드로부터 빼앗은 브라질을 점유하여 식민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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