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 쓸쓸하다 /박범신(소설가)
남자가 이상을 잃으면…
일반적인 부부는 보통 세 단계를 거치면서 함께 늙는다. 첫 번째 단계는 ‘연인’의 단계로서 살아가는 신혼 시절. 신혼이라 하는 것은 산술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낭만적인 연애가 결혼 후에도 지속되는 달콤한 기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때의 부부는 ‘사랑지상주의 ’라는 ‘감흥’이 제일의 가치여서 웬만한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도
훼손당하지 않는다. 웬만한 갈등과 문제는 아내에게 선물하는 장미꽃 한 송이 , 남편에게 따라주는 포도주 한 잔으로도 한 순간 봉합된다. 그러나 ‘에덴의 시대’는 얼마 가지 않는다. 에덴동산의 간교한 뱀 역할을 맡는 것은 주로 그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가까운 이웃들이다. 시댁 식구들과 친정 식구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 부부들이 간교한 뱀의 역할을 지원하고 나선다. 이를테면 ‘에덴의 시대’ 또는 낭만주의 시대에선 도무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아내의 역할, 남편의 역할 등이 갑자기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마침내 두 번째 단계인 ‘사실주의 시대 ’가 도래한다. 낭만주의 시대가 끝나면 그들은 결코 ‘남편 ’과 ‘아내’라는 상대적 구분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예컨대 남편은 돈을 벌어야 할 확고한 책임이 있고 아내는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길러야 할 중차대한 역할이 있다고 자나깨나 믿는 것이다. 오랜 기간 구축돼온 사회 체제 이념이 만든 역할인데도 그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고 맹세해온 어떤 것보다 그 역할을 맹신함으로써 , 스스로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길 자청하게 된다. 사랑의 프리즘을 통해 보지 않으니 이젠 모든 문제들이 낱낱이 , 명확하게 ‘문제로’ 인식된다. 잘잘못이 명확히 보이고 요구할 것과 부응할 것이 냉철히 분석되니까 어느 한쪽에서 잘못하게 되면 심각한 ‘전쟁’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부부싸움을 가장 많이 하는 때가
바로 ‘남편’과 ‘아내 ’라는 상대적 관계로 살아가야 하는 이 ‘리얼리즘의 시대 ’ 이다. 이혼의 대부분도 이 기간에 일어난다. 그리고 이 단계야말로 또한 혹독하게 길다.
세 번째 단계는 이 기간을 견뎌야 누릴 수 있다. 사랑의 완성은 - 완성이 있는지 확신 할 수없지만 - 반드시 시간의 시험을 통과해야 얻는다. ‘남편’과 ‘아내’라는 사회적 이름으로 맞이하는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잘 겪어내고 나면 마침내 안정된 평화를 얻을 때가 오는데 , 이때가 오면 그들은 고단한 남편과 아내의 옷을 벗고, 또 남자와 여자라는 경계도 허물고 ‘인간’이라는 동류항으로 묶이는 너그러운 시대가 도래한다. 잘 늙고 지혜롭게 견뎌온 노년의
부부들이 맞이하고 향유하는 이 시대를 가리켜 나는 ‘인간의 시대’라고 부른다.
내가 아는 어떤 중년 부부의 경우, 결혼할 때 여자는 직장이 있었고 남자는 아르바이트 정도를 하고 있었으나 보장된 직장은 없었다. 양가에서 여러 가지 논란과 걱정이 있었지만, 두사람은 ‘연인’으로서 아직 ‘에덴 ’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막무가내 사랑만을 내세워 결혼했다. 문제는 신혼의 단꿈이 깨지기 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부만이 따로 나와 살긴 했으나 시어머니가 중병을 앓고 있는데다가 남동생들만 줄줄이 딸려 있었기 때문에 자주 시댁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 시댁에 갈 때마다 여자는 부엌으로 남자는 안방으로 생이별하듯
갈라져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고 퇴근해서 여자는 가사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남자는 그것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자 형제들과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시시껍절한 잡담이나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시댁에 갔다 오기만 하면 싸웠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근대적 역할론 만을 고집하는 시부모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시시덕거릴 분’인 남편에게 당연히 섭섭했을 터였다.
남자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게다가 여자와 남자는 각각 오랫동안 소속되어 있던 사회적인 ‘내편 ’이 있었다. 여자 친정집에선 당연히 여론이 들끓었다. 요지는, ‘네가 그러고 있으면 , 네신랑은 언제까지나 그런 식으로 너에게 안팎의 일을 다 시키며 무위도식할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직장을 그만두고 남자로 하여금, 남자의 역할이라도 다 할 수 있게 강력히 채근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남자의 집안에선 ‘네 아내가 그까짓 돈 좀 벌어온다고 우세를 할양이니 ,
네가 나서고 네 아내는 집안에 눌러 앉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떡하든지 남자가 직장을 잡아야 한다는 점에선 양가 모두 이론이 없었다. 보편적 가치에 따른 남편이 역할, 아내의 역할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는 선악과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여자는 결국 직장을 버렸고, 남자는 견디다 못해 남자의 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별 볼일 없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제야 양가에서 잠잠해졌다.
세상에서 보기에 그들은 비로소 매우 안정된 부부 관계가 됐고, 정상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서 ‘에덴 ’을 잃었다. 남자는 직장이 없을 때에도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다만 체계적인 직장 생활엔 자신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 자기의 전공과 꿈을 살려 가는 보다 창조적인 삶의 설계를 쫓아가다가, 세상의 폭압적인 억압에 밀려 , 월급쟁이로 나서게 된 것이다. 남자는 물론 열심히 일했다.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한번도 그것이 ‘자기의 길 ’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꿈’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 과장이 될 때까지 그래도 때가 오면 직장 때려치우고 자기의 길로 되돌아갈것을 꿈꾸었으나 부장이 되고 나선 그마저 포기했다.
“이제는 너무 멀리 왔지만요.” 그는 술에 취해 내게 고백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그 길로 그냥 매진했다면, 돈으로 쳐도 지금보다 더 크게 성공했을 것 같다구요. 몇 년만 견뎠어도 훨씬 수지맞는 인생을 살았을 것 같은데, 아무도 그걸 못 기다리더라 그 말예요. 집사람도 그렇고, 부모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고. 여자들이요, 남자 만든다고 하면서 남자들 남자 못되게 , 쪼다로 만드는 세상이에요.”
마지막 말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물론 그 남자의 아내도 ‘꿈’을 잃었다. 그 남자의 아내가 다니던 직장은 그다지 월급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 여자가 공부한 전공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여자는 월급이 날아가는 게 속상했던 게 아니라 ‘일’이 날아가는 게 속상했다. 남자와 달리 여자는 조직 속에서의 성취감도 높았으며 , 사람들과 섞여 사회생활하는 것이 좋았다. “네가 그러고 있으면 니 남편 평생 무위도식하는 반병신 만든다.” 친정어머니의
그 말에 따라 직장을 버린 걸 여자는 여러 번 후회했다. 그러면서 여자는 줄줄이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남자의 일방적인 말에 따르면 , 여자는 아이를 키우면서 ‘자기 꿈’을 잃은 것에 대해 상당한 보상을 아이들로부터 받더라고 했다. 어머니에게 아이들은 꿈의 상실을 상쇄할 만한 놀랍고 경이로운 가치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들 부부에겐 세 아이가 있다. 큰애는 금년에 대학을 들어간 아들이고 둘째는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고 셋째는 고입을 앞둔 아들인데, 남자가 지쳐 들어가면 , 세 아이가 제 엄마와 거실에 모여 화기애애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일제히 의례적인 인사말만 건네곤 각자 제방으로 들어가 딸그락 소리나게 문을 잠근다는 것이었다. 남자에겐 물론, 공부만 하라고 다그친다든가, 귓구멍을 뚫은 대학생 아들을 이해 못했다던가, 제 길 아닌 길을 평생 가고 있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터무니없는 일에 화를 자주 냈다던가, 하는 원천적인 과오가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아이들이 자신을 피해 슬그머니 자리를 비운 텅빈 거실에서 말할 수 없는 고독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럴 때 남자는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왜 텔레비전만 보
고 있느냐고, 마음에도 없이 화를 내기 십상이다. 아내에게도 왜 와이셔츠를 제대로 다림질 안 해놨냐, 가계부를 쓰는 거냐, 썼다면 어디 가져와 봐라, 짜증을 부린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남자의 본심이 아니었다 . 자신의 ‘잃은 꿈’에 대한 보상 심리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도 아이들하고 어떻게 해도 진실로 가까워지지 않으니 외로워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집사람이 나보고 쪼잔하대요.” 남자는 요즘 그것이 고민이었다. 여자의 입장으로 보면 다른집 남자들처럼 뭉텅이 돈을 갖다 주는 것도 아니면서 때론 불문곡직 가계부까지 보자는 남자가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쪼잔’하고 왜소한 ‘쪼다’를 그래도 남편으로 모시면서 살자 하니 , 젊은 날의 꿈을 상실한 여자로서도 미상불 나이들수록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억울하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쪼다’로 만들어온 게 누군데 적반하장으로 자기를 무시하냐 그거였다. 그러면서 남자는 이제 마지막 후원자로 점찍고 있는 아내
의 이해와 후원을 얻기도 점점 더 힘들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나마 머지않아 회사를 나와야 할 참인데, 아내한테서까지 남자 취급을 못 받으니 앞날이 캄캄하다
고 말하면서 , 남자는 자조적으로 크게 웃었다 .
“남자는 여자에게 흔히 모든 것은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여자가 원하는 대로 모든것은 바쳐 생애를다해 헌신하면 남자는 그 무게에 의해 고통받는다.”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유명한 여성주의적 작가인 보부아르가 『제2의 성 』 에서 지적한말이다. 프랑스 남자들이 그렇듯이 전근대적인 이 나라의 남자들도 결혼만 하고 나면 때로는 협박, 때로는 감언이설, 대로는 남자의 권력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여자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복종을 강요한다. 그 희생과 복종을 장려하여 생긴 것이 바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젊은 부부 시절, 온갖 방법으로 아내에게 요구하기를, 아이들 잘 키우고 남편 내조 헌신적으로 하면 , 그 보람이 모두 ‘당신 것 ’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정말 아내는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내 심중에 요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부터인가 아내가 너무 범박한 ‘아줌마’ 같아서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외출복을 차려입어도 개성 없는 아줌마의 헌신이니 짜증이 났다 .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난데없이 자기세계를 좀 가져라. 살림을 해도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라. 옷차림도 좀더 개성 있고 세련되게 하라.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병주고 약주더니 또 병이 주는 후안무취한 짓이었다. 결혼에 대한 저 날카로운 경구, ‘결혼이란 상대편에게, 꾀꼬리를 죽여 가죽으로 만드는 짓이다’의 과오를 내 스스로 태연자약 해놓고서 , 이제
‘꾀꼬리 가죽’에게 왜 살아 있는 꾀꼬리가 되지 않느냐고 타박을 늘어놓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여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똑같은 보부아르의 지적을 남자의 경우로 바꾸어서 말해보라. 여자는 남자에게 일찍이 무엇을 바치라고 한사코 요구했던가. 남자다운 이상과 기상을 바치라고 요구했던가 . 이상을 다 버리고 ‘밥과 텔레비전과 승용차’만 벌어오면 된다고 한사코 요구함으로써 , 이 나라의 모든 남자들을 ‘쪼잔’, ‘머저리 ’, ‘멋대가리 없는 중년 남자’로 만든 것은 아닌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 힘도 덜어지고 직장과 사회에서도 소외되고 그래도 내게 아내가 있구나.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듣고자 가정으로 돌아오는 남자들에게 멋대가리 눈곱만큼도 없는 쪼다 같은 남자‘라고 힐난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자의 헌신은 산지사방 회자된다. 남자는 가해자로서 설자리가 없다. 남자다운 남자가 없다는 한탄의 말이 도처에서 들린다 . 남자가 이상을 잃으면 억만금을 벌어 와도 남자다울 수 없다. 남자는 절대로 혼자 남자다운 남자가 될 수 없다. 남자는 그렇게 태어난다. 이 땅의 남자들을 남자다운 남자로 키우는 것은 여성이 몫이다. 남자들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쪼잔한 쪼
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남자들을 남자다운 남자로 길러내야, 이상과 꿈을 잃지않는 남자가 되게 해야 ‘아름답고 멋진 내 남자’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건 이상을 품고 사는 것이다. 더 이상 남자를 아무런 이상도 품지 못하는 쪼다 같은 남자로 만들지 말라.
처자를 가진 자의 운명
경험론의 원조격인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수상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처자를 가지는 자는 운명을 볼모 잡힐 것이다. 처자는, 선이든 악이든 대사업에 옴짝달
싹 못 하게 눌러붙어 방해가 되므로.”
베이컨이 결혼을 안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스콜라 철학에 반대하여 모든 선입견과
오류, 바꿔 말해 관념으로서의 우상을 없애고 오로지 관찰과 실험을 지식의 기반으로 생각한
경험론을 주창한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 위의 말 또한 경험에서 귀납적으로 뱉어낸 결혼이 아
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위대했던 철학자로 칭송받는 베이컨도 ‘옴짝달싹 못하게 눌어붙어
오로지 지향하고 싶었던 ’대사업‘ 사이에서 자못 고단했던 모양이다.
책의 서문에 가족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식의 헌사를 써넣었더니 , 더러 만나는 독자들이
내가 무슨 가족 사랑이 남다른 사람인 양 말하니 듣기에 민망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만약 덮고 있던 이불 속에서 쏙 빠져나가듯 무탈하게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가족
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사랑은 무엇을 나누는 것일까. 아버지가 ‘대사업 ’을 잃고 그 대가로 따오는 ‘과실’에만 취한
젊은이와 어머니도 있고, 내 ‘과실’을 나누어 줄 테니 너희는 내게 순종해야 된다고 짐짓 큰
기침으로 자신의 허위를 감추려는 아비도 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누는 것이
단순히 ‘과실 ’이나 속이 텅 빈 ‘권위 ’ 같은 것에 한정될 수는 없다. 사랑으로 나눠야 할 것이
있다면 맛있는 과실이 아니라 마음 아픈 ‘상실’이자 ‘결핍 ’이다. 자식의 참된 결핍을 보지 않
는 어버이의 권위가 어찌 통할 것이며 , 어버이의 상실과 결핍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자식이
어찌 어버이의 ‘과실 ’을 누릴 것인가.
전근대적인 가족 문화는 이미 해체되고 있다. 남은 것은 수직적인 그 구조의 잘못된 관행뿐
이다. 속이 텅 빈 가족의 그늘로 자본주의의 경쟁심과 배금주의가 파죽지세로 스며들어 세상
의 모든 사람들 사이를 갈라 놓다 못해 이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사이조차 갈라 놓고
있다.
남의 아들들이 감옥에 가는 걸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이게 어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아
넘길 남의 일인가. 내 새끼라고 살면서 인생의 ‘덫 ’을 밟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나는 늙어가고
있으나 아버지이니, 그 수상한 삶의 길에서 예나 이제나 가족을 지켜가야 한다. 봄꽃들도 다
지고 없는데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서 세계화의 저 수상하고 분주한 폭풍 속에서 ‘우리 ’를 지
켜낼 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 울울창창한 굴암산 숲도 휑 빈 듯하다.
인간을 넘어서는 ‘남성 ’은 없다
허벅지 나오고, 배꼽 보이게 옷 입고 나서면 모든 남자들이 군침을 삼키고 자신만을 바라볼
거라고 믿는 젊은 여자들, 참 꼴불견이다.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기만 하면 무조건 상류 사회
의 신데렐라 대접을 받을 걸로 착각하는 여자도 그렇다. 착각엔 커트라인이 없다. 한번 그런
식으로 착각하고 나면 여간해서 멈춰지지도 않으니까 나중엔 아예 병짓이 되고 만다.
결혼을 로또복권쯤으로 치부하는 여자도 있다. 성실하게 배우고 열심히 일 해봤자 단번에 팔
자 고칠 수 없다는 거 미리미리 훤하게 꿰뚫어본 애늙은이 같은 젊은 여자들은, 오늘도 젖가
슴엔 실리콘 주머니를 집어넣고 턱을 깎고 코를 높이면서 , 그래, 난 반드시 돈 많거나 돈 잘
버는 놈 잡아서 팔자 한번 오지게 뒤집어야지 . 밤낮 없이 그 생각으로 꽉 차 있으니까, 그런
여자에게 남자란 그저 로또복권 같은 뿐이다.
거리의 젊은 가부키 배우들도 꼴불견이다. 가부키 배우는 화장품으로 떡칠을 해서 그 위에 눈썹과 입술을 페인팅한다. 세계대륙을 역마살 뻗쳐 꽤 돌아다녔지만 나는 우리나라 젊은 여성 , 여대생들처럼 화장을 기쓰고 하는 나라는 본 적이 없다. 화장품 판매1위라고 했던가. 젊은 피부는 신 새벽처럼 신선하게 대기와 항상 교접하고 있으므로 화장을 진하게 하면 제 고유의 아름다운을 갖추는 것인데 , 돈 처들여서 그 멍청한 짓을 여대생들까지 하고 있으니 딱하다.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로 길에 나서면 사람들에게 예절을 차리지 않는 것이라고까지 믿는 천치도 있다. 예절은 짙은 화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단정하고 환한 아름다운에서 나온다.
중년 여성들도 뭐 도진개진이다. 짙은 화장과 여성들의 파운데이션 소비는 시간이 쌓일수록 늘어갈 수밖에 없다. 기미 , 주근깨, 잔주름을 감추자고 화류계 여자들보다 더 짙게 화장한 중년 여성들을 보면 아름답게 뵈는 게 아니라 무섭다. 그런 여성들이 더구나 떼로 앉아 수다를 격렬하게 떨고 있는 걸 보면 행여 꿈에 나올까 걱정이 된다. 더 나아가서 아랫배 허벅지의 군살은 태산같이 높은데 좀 젊어 보이고 싶은 세속적 욕망을 주체 못 해 꽉 끼는 청바지를 졸라 입고 뒤뚱뒤뚱 걷는 중년 여자의 모습은 무섭다 못해 안쓰럽다.
세상엔 무조건 남자와 여자,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고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모든 문제를 성적 이분법으로 보려는 여자들의 어떤 행태도 참 꼴불견이다. 이런 여성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의 부류는 자신이 나자 깨나 여성이라는 걸 잊지 않고 모든 만남, 모든 일, 모든 생각을 성적인 이분법의 기초 위에서 시작하고, 행하고, 끝맺음하려는 여성들이다. 이런 여성들은 밤낮 없이 치장에 신경을 쓰고 보편으로서의 여성적인 포즈를 넘어서서 교태와 애교를 지어낸다. 교태와 애교로써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직장 생활에서의 일에 이르기까지 힘든
일은 무조건 친절한 남자 동료에게 찾아가 콧소리를 섞은 비음의 교태로 해결하려 하기 일쑤이고, 책임질 시안이 생겨도 남자와 두 번만 눈길이 마주쳐도 그 남자가 ‘작업’에 들어오려 한다거나 성적추행을 할 것이라고 예단한다. 모든 남자들의 호의와 친절은 다 자신의 여성적인 매력이 넘쳐서 그런다고 꿈같이 믿을 뿐만 아니라, 때론 모든 남성들이 다 ‘짐승’이라고
자학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관심은 전적으로 이성 관계에 집중되기 때문에 연애 , 결혼, 사람 따위의 안경을 벗지 않고선 어떤 세계도 바로 보지 못한다. 심한 경우엔 정신적으로 불구에 가깝다.
이런 부류는 ‘인간’을 모른다.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인간’의 동류항으로 묶여 있어 세상의
더 많은 사물, 더 많은 문제, 더 많은 일, 더 많은 눈물겹고 아름다운 일을 바로 여성과 남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이런 부류의 여자들은 모른다. 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머리로 알뿐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남녀 관계라는
상대적인 세계관을 떠나서 사고하는 깊이로 보면 거의 어린아이거나 바보에 가깝다. 참된 의미에서 이런 여성들은 죽을 때까지 사물의 본질을 균형적으로 보지 못하고, 더 나아가 죽을때까지 참된 휴머니즘을 이해 못 한다. 불쌍하고 답답하고 멍청한 부류이다.
또 다른 두 번째 부류도 본질적으론 같다. 겉으로 보아서 , 두 번째 부류의 여자들은 매우 똑똑해 보이는데 , 얼핏 보면 똑, 소리가 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첫 번째 부류보다 하나도 나은 게 없다. 역시 불상하고 답답한고 꼴불견이다. 이 두 번째 여성들은 대개 자신이 강직한여권주의자라고 스스로 굳세게 믿고, 여권주의와 관계된 모든 문제에서 누구보다 목소리가
큰 매파가 된다. 그녀들은 첫 번째 부류와 마찬가지로 세상엔 남녀, 두 종류밖에 없다고 믿는데 , 그러나 첫 번째 부류가 남성에게 사랑 받고, 또 그 사랑을 일에까지 분별 없이 활용하려고 제정신을 못 차리고 사는 것과 달리 , 남성을 무조건 경계하고 타도해야 할 ‘적군’쯤으로치부라는 걸 서슴치 않는다.
남성중신 사회의 제반 제도의 관습을 타도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야 나무랄 수 없겠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오로지 권력 지향이거나 치한이거나 폭력범일 수 있다는 자신의 예단을 너무도 확신한 나머지, 뭐든지 , 이를테면 자신의 무능이나 자신의 무책임에 따른 실수나 실패까지 무조건 남성 중심의 세계 구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첫 번째 부류의 여자들에게까지
단지 남성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이유 때문에 공공연히 적개심을 갖고 대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부류는 장유유서도 없다. 업무와 관련된 전문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모두 ‘헬스클럽’에 다녀서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을 길러야 한다고생각한다 . 헬스클럽은 ‘운동’이다. 운동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온갖 사회 문제를 다 비판적으로만 보려는 습관을 갖고 있으며, 그것도 남자와 여자라는 상대적 이분법을 떠나서는 사고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얼핏 보면 똑똑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공소하기 이를 데 없다.
호주제를 폐지하라. 남성들의 성추행을 박멸하라. 목청은 드높지만, 호주제가 본질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호주제가 여성을 소외시키는 것은 물론 ‘인간’을 소외시킬 수 있다든지 하는
깊은 생각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한다. 그저 호주제는 ‘남성 중심’이기 때문에 깨박쳐야한다고 부르르 부르르 떨 뿐이다. 의외로 이 부류엔 자타가 인정할 만한 여권 운동가, 또는 엘리트 계급의 여성들도 꽤 섞여 있다.
80년대의 어떤 삽화. 작가A씨는 그 시절 이미 나이로 봐도 오십대 중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30여년 문학 한 길로 살아와 동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어떤 대학에서 특강을 요청 받고 갔다가 모멸적인 대접을 받았다. 어떤 젊은 대학생이 방자하게 다리를 꼬고 반쯤 누워 앉은 자세로 질문을 하면서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해 이씨 생각은 뭡니까”라고 묻더라는 거시었다.A씨의 성을 이(李)씨로 상징해서 하는 말이다. 이름까지 불렀더라도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로 보면 듣기가 거슬렸을 터인데 , 그 시절이야 이데올로기에 따른 이분법이 세상에 폭넓게 깔려 있었으니까, 어떤 권위와 계급도 일단 깨뜨리고 보자는 ‘싸가지 ’ 없는 단순한 부류의 어떤 대학생이 “이씨 생각은 뭡니까”하고 이름을 뚝 따먹고 성에다 씨자(字)만 붙여 불렀던 것이다.
A씨는 평생 그보다 더 큰 모멸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지금도 가끔 사석에서 그 일을 화제삼는다. 예가 적절한지 모르겠으니 , 스스로 자기 자신이 강고한 여권주의자라고 믿고 행동하는 여성들 중에, 이를테면 한 인간으로 보아 예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이런 ‘싸가지 ’들이 더러 있다는 말이다. 이런 부류는 일반적으로 무조건 이름 뒤에 씨자(字)만 붙이는 걸 선호한다.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나이 많은 어른을 만나도 ‘아무개씨 ’하고 불러야 남녀평등이 되었다고 믿고, 남성의 말은 무조건 비판적으로 보거나 믿지 않으며 , 남성의 일반적인 친절에도 경계심을 감추지 않고 ‘남자란 다 똑같아’ 하면서 자주 치를 떤다. 아주 편협한 광신도와 같은
이런 부류의 여성에게도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고독해서 안쓰러울 뿐만 아니라 편협해서 답답한 부류이다.
여성들의 꼴불견이 어찌 이런 것뿐이랴. 여성이라고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여성이라고 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도 아니다. 여성이라고 다 보호해야 할 연약한 존재도 아니다. 열심히화장하고 열심히 목청 높이는 여성들 중에도 수많은 꼴불견들이 있다. 물론, 당신이 말하고 싶은 걸 나는 안다. 남성들의 꼴불견은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당신은 내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당연한 지적이다. 남성들의 꼴불견을 쓰려면 남성인 내가 쓴다고 해도 몇날 며칠 밤을 새워야 할 만큼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지면은, 남성들의 꼴불견을 적시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 나는 지금 여성들 때문에, 혹은 숨 가쁜 경쟁에 내몰려 기가 잔뜩 죽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불쌍한 남자’들 기 좀 살리려고 잠시나마 속 좀 시원하라고, 짐짓 여성
들 일부의 흉을 보고 있는 중이다.
각설하고, 좋은 세상이 되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늙은이든 젊은이든, 경상도 사람이든 전라도 사람이든, 부당한 제도나 구조나 관습에 의해 소외받는 그룹이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지금 당장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원리적으로 보아,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평범하면서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편견없이 내 가치관 속에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기에 이전에, 노인과 젊은이이기 이전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기 이전에 , 그리고 또 부모와 자식이기 이전에 , 아내와 남편이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 인간으로서의 소중한 생명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만 확실히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면, 감히 말하거니와 남성과 여성의 갈등, 아내와 남편의 문제들도 상당 부분 봉합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을 넘어서는 ‘남성 ’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을 넘어서는 남편과 아내도 없다. 성의 관점으로만 보면 삶이 턱없이 좁아진다. 끝.
첫댓글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시간나면 자세히....읽어볼게요
살아가는게 너무 힘들고 어려워유....
진리를 들으면 금방 이해가되고 마음에 와 닿는데, 생각과 행동이 일치되지 못하니 이게 문제겠죠? 수양이 덜된 나를 일깨워주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자!~ 우리 남녀 모두 인간이이기에 서로 인간으로 대우 함서 삽시다요..
대표님은 그렇게 사시는지요? 대표님께서 많이 실천하셔야.....ㅎㅎㅎ
아! 제가 느낀 이글의 요점은 울 나라 여자들이 넘 설쳐대니까 인간으로 돌아 가란 그런 야그 같은디요? ㅋㅋ..
남프님 이글을 읽고 표현하지못한 깊은사랑을 느낄수있었습니다. 그런디 갑자기 변하지 마세용 ... 윤프
웬 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