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봉 정상에 이르면 ♧
백운봉 정상에 다다르면 왼쪽에 정상의 태극기가 보이는데 정상에 오르기 전에 인수봉이 가장 가까이 보이
는 오른쪽 끝에 3·1 운동 암각문에 대한 안내문이 서 있습니다.
이 3·1 운동 암각문은 백운봉 정상에 새겨져 있는데 독립운동가인 정재용선생이 3·1 운동의 역사적 사실
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새겼다고 합니다.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33인 대표 중 29인이 태화관에 모여 33인 대표 손병희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
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919년 3·1 이날 같은 시각 파고다 공원에는 각급 학교 학생 시민 약 5,000명이 모여 있었는데 33인의 민
족대표가 예정을 바꾸어 나오지 않자 정재용선생은 배포하고 남아 있는 한 장을 가슴속에서 꺼내어 단상에
올라가 낭독하였다고 합니다.
낭독이 끝나자 군중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한독립만세“가 시작되고 자주독립을 외치는 거대한
함성의 물결은 메아리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 <백운봉 정상에 휘날리는 태극기>
▲ <암각문 출입금지 표시판>
♧ 백운대 정상 바위에 새겨진 '3.1독립선언' ♧
매사는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고 바라는 바가 있으면 바라지 않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일제의 쇠말뚝으
로 정수리에 '독침'을 꽂고 있던 북한산은 역시 정수리 언저리에 한 독립운동가가 3.1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새겨 놓은 '민족정기'의 상징물을 이고 있다.
백운대 정상 바위 위에는 독립운동가 정재용(鄭在鎔, 1886~1976,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선생이 새긴
3.1독립운동 관련 기록이 아스라히 남아 있다. 모진 비바람에다 수많은 등산객들의 발길에 닳고닳아 이젠
글씨를 판독하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가로 1.2m, 세로 3m 크기에 전체 총69자, 해서체로 씌어진 이 내용은 정 선생이 일제의 눈을 피해 몰래 새
긴 것인데 바위바닥 네 귀퉁이에 '경천애인(敬天愛人)' 네 자를 새겨 각을 잡은 다음, 그 안에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육당 최남선이 썼고,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정재용이 독립선언만세를 이끌었다(번역문)'
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 <정상을 코앞에 두고 >
▲ <잠시 숨을 고릅니다>
▲ <잠시 쉬던 가족들이>
▲ <한 명씩 한 명씩>
▲ <최정상을 향하여>
▲ <오르고 있습니다>
♧ 이제 몇 발자국만 오르면 ♧
백운봉 정상에 서서 오르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어떤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최정상에
오르고 싶어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곳까지 단숨에 오릅니다.
그러나 대부분 정상 바로 직전에 털썩 주저앉아서 잠시 쉬며 숨을 고릅니다. 우리 가족들도 제가 암각 안내문
사진을 찍는 동안 앞서고 있어서 곧바로 끝까지 올라 가나보다 했더니 그야말로 정상을 몇 미터 앞에 두고
쉬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쉬고 있는 동안 먼저 정상에 올라서 기다리고 있다가 올라오는 가족들을 인수봉을 배경으로 차례대
로 찍었습니다.
▲ <원효봉과 염초봉>
▲ <신랑·신부 바위>
▲ <백운봉 주변 바위>
▲ <백운봉에서 바라본 노적봉>
▲ <인수봉에서 암벽 타는 사람들>
▲ <인수봉 꼬리 부분>
▲ <인수봉 허리 부분>
▲ <인수봉 머리 부분>
♧ 백운봉 정상에서 ♧
오를 때 그 높아 보이던 인수봉도 백운봉 정상에서 보면은 발 아래에 보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백운봉은
836.5 미터, 인수봉은 810 미터로 26미터나 낮으니까 아래로 보이는 것이지요.
오늘은 날씨가 추워서 암벽을 타는 클래이머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05년 5월 1일날 올랐을 때 찍었
던 사진을 같이 올립니다.
인수봉 암벽에 매달린 사람들의 광경이 장관이었거든요. 이제 곧 봄이 되어 날이 풀리면 또다시 저 인수봉
암벽에 수많은 사람들이 붙어 있겠죠.
오를 때에 옆에서 보면 큰 돌기둥 같아서 아무리 뽑으려고 해도 뽑힐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인수봉의 그 우
람한 형상은 어디로 가고 백운봉에 서면 뒷부분이 마치 꼬리 달린 뱀처럼 뒤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참고로 만경봉은 795.5m로 국망봉이라고도 하는데 국망봉은 무학대사가 한양의 도읍지를 살폈다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 오르면 세상의 온갖 경치를 구경할 수 있으므로 만경대라 불렀다고 합니다
리찌를 즐기는 사람들은 많은 오르고 있지만 이 만경봉은 정상적인 등산로가 개설되어있지 않아서 일반등산
인들이 오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연훼손일지는 모르나 이 만경봉에도 등산로가 개설이 되어서 나 같은 만
년 산행초보자도 구경할 수 있도록 해 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해보면서>
▲ <정상에 서 있으면서>
▲ <다시 안 올라온다는 큰딸>
▲ <올라오느라 힘들었을텐데>
▲ <여전히 힘이 나는 작은 딸>
▲ <그래도 옆에서 우스개소리를 꺼내자>
▲ <어색한 웃음을 터뜨립니다>
♧ 태극기 휘날리는 백운봉 정상에서 ♧
드디어 백운봉 정상입니다.
삼각산(북한산)은 지형적으로는 서울시 강북구, 도봉구, 은평구, 종로구, 성북구, 경기도 의정부시, 고양시, 양
주군 등에 걸쳐 발달해 있으며 1983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답니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이지요. 사방을 빙 둘러보면은 제가 사는 우이동쪽을 기점으로 왼쪽 동쪽방면에 경
기도 의정부, 송추가 양주가 보이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 아래 구파발쪽 산성매표소 자리에 있는 주차
장도 보입니다.
정상에 십여 분 이상 머물면서 사진도 많이 찍었습니다. 그러나 백운봉 최정상은 이렇게 편안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서보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입니다. 날이 따뜻해지면 더 많
은 사람들이 올라와서 돌아서기도 힘든 장소입니다. 정상에 오래 머물 수도 없고 사진 한장 제대로 찍기도
쉽지 않는데 오늘은 설 명절이어서 등산객들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산은 오르느라 힘이 들지만 일단 정상에 오르고 나면 그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 <여기가 바로>
▲ <백운봉 중앙에>
▲ <바위 위입니다>
▲ <정말 최고 높은 곳이죠>
▲ <눈을 감아도>
▲ <눈을 떠도>
▲ <다 보이나요, 세상이>
▲ <꿈과 이상은 높게 >
▲ < 저높고 푸른 하늘처럼>
♧ 정상 위의 정상 ♧
백운봉 정상에 오르면 정재용선생이 새겼다는 암각문이 있고 누가 들어서 갖다 놓은 것처럼 중앙에 1미터 내
외 크기의 바위가 하나 놓여져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올라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지요.
밤사이 백운봉이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봐 지키고 있는 한밤의 정찰병처럼 오두마니 중앙에 서서 최정상을
지키고 있습니다.
엄격히 따져서 말하자면 바로 이 조그만 바위가 백운봉의 최고 꼭대기이지요.
사람이 많은 날에는 이 바위를 기대고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어서 바위에 오르려고 비켜달라고 말하기도 미
안 할 정도지요.
이 날도 정상에는 사람들이 좀 있었지만 양해를 구하고 최고 높은 곳에 올라서 사진을 찍었지요. 언제 우리
가족 전부가 백운봉에 다시 올라보겠어요.
▲ <내려가면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 <가족이란 이름으로>
▲ <같이 있을 때가>
▲ <행복 아니겠는지요>
♧ 가족사진-나태주 ♧
아들이 군대에 가고/대학생이 된 딸아이마저/서울로 가게 되어/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자고 했다.//
아는 사진관을 찾아가서/두 아이는 앉히고 아내도/그 옆자리에 앉히고 나는 뒤에 서서/가족사진이란 걸
찍었다.//
미장원에 다녀오고 무쓰도 발라보고/웃는 표정을 짓는다고 지어보았지만/그만 찡그린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떫은 땡감을 씹은 듯/껄쩍지근한 아내의 얼굴/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나의 얼굴/그것은 결혼 25년만에/우리
가 만든 첫 번째 세상이었다.
나태주님의 시 [가족사진] 전문입니다.
우리도 벌써 큰딸은 집을 떠나 있고 아들은 중학생이지만 머지 않아 군에 간다는 말이 나오겠지요.
▲ <이 사진은 05년 5월 1일>
▲ <백운봉 정상에서>
▲ <너럭바위을 찍은 사진입니다>
▲ <오늘은>
▲ <2007년 02월 18일>
▲ <음력 설납입니다>
▲ <고향대신 찾아갔지요>
▲ <만경봉은 서쪽이라>
▲ <눈이 쌓여 있는데>
▲ <인수봉은 해가 떠 있습니다 >
♧ 너럭바위에서 ♧
위의 세 장의 너럭바위 사진 세 장은 05년 5월 1일 혼자서 백운봉에 올랐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운봉을 오르내리며 이곳에서 다리를 뻗고 쉬기도 하고 밥도 먹고 사진도 찍습니다. 사진에
도 수십 명이 넘는 걸로 봐서 한 백 명쯤은 한꺼번에 앉아서 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춥다면서 웅크리고 있는 큰딸, 불쌍하게 보입니다>
▲ <여자는>
▲ <남자하기>
▲ <나름이지요>
♧ 너럭바위에서 ♧
백운봉에 내려오자마자 내려가기 바쁜 가족들을 너럭바위로 불러모았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너럭바위에서 사
진을 찍지 않고 내려가면 섭하지요.
백운봉을 중앙으로 하여 왼쪽은 인수봉이고 오른쪽은 만경봉입니다.
▲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앉아서 쉬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 <앉아 있으니까 엉덩이가 차갑습니다>
▲ <내려가야 하는데 하품도 나오고>
♧ 너럭바위에서 3 ♧
여름 산행은 햇볕이 따갑지만 시원하니까 능선을 타고 경치를 즐기는 것이 좋고 겨울산행은 바람을 막아주니
까 골짜기를 타고 오를 때가 좋지요. 정상에 탁 트인 곳에 와 있으면 땀이 식으면서 추워집니다. 이 날도 사
진을 찍느라 20여분 머물렀더니 아이들이, 특히 큰딸이 춥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내려가는 시간을 재지 않고 너무 늑장을 부렸나요. 충전기도 좀 아껴 두어야하는데 정상에서 너무 많
은 사진을 찍는 바람에 하산하면서는 사진도 못 찍고 결국에는 캄캄한 산길을 내려가야 했습니다.
▲ <태극기 아래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은, 아내 >
▲ <백운봉 바로 아래 너럭바위에서>
♧ 산을 오르며 /도종환 ♧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도종환님의 [산을 오르며] 전문입니다.
우리는 산을 보통 일상적인 생활이나 삶에 비유를 많이 합니다. 산을 오르는 일, 산을 내려오는 일과 평지
와 봉우리가 있고 항상 정상에 머물려 있을 수가 없으며 겸허한 마음으로 산을 타지 않고 자만으로 욕심으
로 타다보면 자칫 사고로 이어져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으며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잃을 수
도 있습니다.
도종환님의 [산을 오르며] 시 한 편으로 삶의 겸허함을 배우며
겸손한 마음으로 산행을 하여야겠습니다.
3부 끝.
4부는 하산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