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염정 상량문(勿染亭 上樑文)
정자 안을 들여다보니 마루는 우물마루로 잘 놓여 있으나 흙 묻은 구두 발자국 때문에 흙마당이 다 되었다. 신발을 벗을까 신을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도저히 벗고 들어갈 용기가 서질 않아 나또한 할 수 없이 구두를 신은 채 올라 섰다.
나올 때는 도저히 그대로 올 수가 없어서 수건을 걸레삼아 대강 치웠지만 깨끗하게 하지 못해 미안함을 이길 수 없었다.
제일먼저 천정의 중앙에 마룻대인 상량대가 보이고, 상량문이 드러나 보인다. 상량대의 동쪽 끝에는 ‘海龍(해룡)’을, 서쪽 끝에는 ‘洛龜(낙구)’를 각각 밖에서 안을 향하여 써 있고, 그 중앙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崇禎紀元 後 五戊子 仲秋九月初四日 甲子辰時立柱 六日 丙寅未時 上梁‘이라고 검은 먹으로 해서로 씌어 있다.
그러니까 ’숭정기원 후 5무자해가 되는 중추 9월의 초4일인 갑자일 진시에 기둥을 세우고, 그 이틀 후인 6일 병인일 미시에 상량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곳 물염정의 상량문처럼 왜 해룡(海龍)과 낙구(洛龜)를 상량문 좌우 양끝에 용(龍)자와 구(龜)자를 서로 마주 대하도록 썼을까? 이는 용과 거북이 수신(水神)이므로 화재를 예방해주리라는 속신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 상량대에 써있는 상냥문 : ‘崇禎紀元 後 五戊子 仲秋九月初四日 甲子辰時立柱 六日 丙寅未時 上梁‘이라고 검은 먹으로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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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이 상량대를 올린 해인 崇禎紀元後五戊子(숭정기원후오무자)란?
숭정(崇禎)은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 장렬제 때의 연호로 서기로는 1628년에서 1644년까지이다.
그러나 여기서 "숭정기원 후 5무자"란 숭정5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숭정의 연호를 쓴 숭정기원 원년이후로 계산하여 戊子년이 5번째로 돌아온 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숭정기원 후 첫 번째 무자년이 서기1648년이므로 다섯 번째 무자년은 서기 1888년 고종 25년인 단기 4222년이 된다.
그런데 19세기 말인데도 불고하고 그 때가지 우리 년호를 사용하지 않고 중국 년호를 사용하는 걸 보면서 우리 선인들이 얼마나 중국에 의존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으며 정말 씁쓸하기 그지없다.
이런 상냥문은 여기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볼수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서기 1888년에 중수한 것으로 보이는데, 서기 1981년에 작성된 ‘물염정 중수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고 적혀 있어서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물염정의 창건 시기는 화순군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에는 16세기 증엽이라고 적혀있고, 물염정 앞에 세워져 있는 ‘물염정 전승비’에는 “조선 명종조 병인에 물염공 송정순이 축정하여 퇴휴지소로 사용하여 오다가
외손자 창주공 나무송 구화공 나무춘 형제에게 물려주셨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조선 명종조 병인년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명종조에서 병인년은 명종21년인 서기 1566년 밖에 없음으로, 서기 1566년에 세워지고, 1888년에 중수하면서 올린 상량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 상량문 (上樑文)은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또는 고치게 된 까닭, 공역한 날짜·시간 등을 적어둔 글로서, '상량대'를 새로 올리게 될 때만 새로 글씨를 쓰게 된다.
원래는 이 물염정처럼 상량대에 붓글씨로 간략하게 썼으나, 별지에 상량문을 적어서 상량대에 홈을 파고 넣는 방법이 발전하였다.
또 상량문을 쓴 ‘상량대’는 여러채일 경우 각 채마다의 가운데 칸에 설치한 '마룻도리'인데, 상량문을 쓸 때에는 도리의 배바닥을 반듯하게 대패질해서 편평하게 만든 부분에 먹글씨로 쓴다.
상량문의 내용은 건물을 세운 사실, 집 지은 뒤에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찬문, 공역에 관계한 사람의 이름, 글을 쓴 시기 등인데, 상량대의 홈에 상량문을 넣을 때는 패물과 부적을 함께 넣기도 한다.
따라서, 이곳 물염정의 상량대 속에도 상량문이 따로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상량대를 중심으로 천정은 단청이 잘 입혀져 있어서 화려하고 깨끗해 보인다. 그래나 선비들이 물염과 안빈락도를 노래하는 정자가 화려한 단청이라니 뭔가 아쉬운 감이 있다.
나만의 미련한 생각인지 편협된 아집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자주 든 것은 어쩔 수 없다.
△ 상냥대의 동쪽 벽에 걸려있는 시편액 : 오른쪽에 ‘물염정기’, 그 왼쪽에 ‘물염정서’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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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염정기(勿染亭記)
상량대의 동쪽 천정을 보니 커다란 두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중 동쪽에 ‘물염정기’가 서쪽으로는 ‘물염정 서’가 걸려 있다.
이 <물염정기는 정축년 가을에 묵자산인(默子散人) ‘진산 유성운’이 지은 것이다.>
△ 상냥대의 동쪽 벽에 걸려있는 ‘물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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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물염정기’를 비롯하여 모든 편액의 한시에 대한 해설은 화순문화원에서 편찬한 ‘화순루정집(和順樓亭集)’에 따르되 일부 수정하여 여기에 옮겼음을 밝혀두며, 원문은 한자가 너무 많이 보여서 싫증이 날것 같아 그동안 모르는 한자를 찾아 자판을 두드렸던 일이 아쉽지만 다시 지워버렸다.
<물염정기 해설>
물렴정(勿染亭)은 동복 천변에 있는 이름난 정자라, 깊숙하고 고요하여 속세와 멀리 떨어져 호남에 으뜸이니 ‘묵수자’가 한가한 날 한번 찾아가니 주인이 글을 청하여 기록하라 하거늘, 묵수자가 물질을 물들이는 것은 젖어서 그 바탕을 변하게 하는 것을 칭함인데, 이제 이에 정자이름을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뜻을 취한 것이니 주인은 또한 아는가.
이 정자가 이미 남쪽에 이름이 나서 이 정자에 오른 자 하나 둘이 아닌데, 만약 술과 가무를 즐긴 자 즉 노래와 여색에 물들인 것이요, 유연(流連)에 빠져버린 즉 유람에 물들임이요, 주방을 사치하고 교만을 자행하여 산수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 즉 방백(方伯)이 공명에 물들임이요, 종이 많고 복식이 화려하여 홀연히 지나다닌 즉 수령이 전성(專城)에 물들임이라.
이에 마땅히 맑은 물결은 연금과 같고 개인 달이 빛을 흘러 사방이 고요하여 적은 티끌이 이르지 아니한 즉 정자가 물들이지 아니함이라 사람이 이때에 마음이 담연(湛然)하고 만 가지 생각이 공허하여 옛 못과 같이 맑고 밝은 거울처럼 가림이 없어 저 네 가지의 물들임을 하나도 물들임이 없는 것을 가히 물염(勿染)이라 이를 것이요, 만약 사사로 자기의 소유를 삼아서 여럿이 함께 하고자 아니 하면 정자에 물들임이니 그 물염(勿染)의 이름에 어찌 하리요.
반드시 진실로 나에게 글을 구하고저 하면 글에 물들임에 가깝지 않으냐 나는 비록 네 가지의 물들임은 없으나 주인의 뜻에 부응하려고 이 글을 지어 이 정자를 기록한 즉 또한 가히 요구에 응하는 수응(酬應)에 물들임이라 이를 것이니 이는 주인과 나와 더불어 모두 물염(勿染)에 혐의가 있으니 가하겠느냐하니,
주인이 이르기를 오직 위에 네 가지의 물들인 것은 물들임의 속됨이요, 자네의 이른바 물염(勿染)에 혐의가 있다는 것은 물들임의 아름다운 것이다.
물의 본성은 하나로되 경수(涇水)는 흐리고 위수(渭水)는 맑아 한 가지가 아니고 나는 곳은 균일하되 향초(薰)와 누린내풀의 다름이 있듯이, 어찌 가히 동일하랴? ‘묵수자’가 그 말을 기이하게 여기어 이에 필을 들고 기록할 제 이 밤이 반쯤 지남에 만 가지 소리가 고요하여 마음이 맑고 주위가 깨끗하여 속의 티끌이 물들이지 아니하니 물염(勿染)의 필로써 勿染을 기록하노라.
주인 나씨는 옛 도사(都事) 휘는 무송이요 자는 수부이니 주인은 능히 대대로 이정을 지키리라.
<정축 맹추삼일 묵자산인 진산 유성운 삼가 기를 지음 >
* 경수와 위수 : 중국 경수의 강물은 흐리고 위수의 강물은 맑아 뚜렷이 구분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물염정에 피어 있는 배롱나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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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염정서(勿染亭序)
물염정의 동쪽 벽면에 ‘물염정기’와 함께 나란히 같은 벽면의 왼쪽에 ‘물염정서’가 걸려 있다. 이 '물염정서'는 외조부로부터 물염정을 물려받은 ‘창주 나무송’이 직접 지은 것이다.
한문 원문을 겨우 찾아 적었다가 너무 지루할 것 같아 생략하고, 그 번역만 여기 적어 본다. 다만, 옛글이라서 어려워 옮겨 적으면서도 혹여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 벽면에 걸려 있는 ‘물염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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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염정서(勿染亭序)
창랑*①북쪽 물가와 무등산 서석 동쪽 머리는 만고의 강산이요 백년의 은거지로다. 기암괴석은 중국 하나라 우왕 때의 자취와 같고,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복숭아꽃을 보니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사람이 없던 진나라 백성이로다. 일 천길 푸른 벽은 마땅히 푸른 옥장을 끼고 서행함이요, 만 길의 붉은 계단은 가히 적송자(赤松子=신선)*②를 불러 함께 노닐도다.
진실로 풍진을 떠나고 속에 벗어나 뉘가 능히 하늘의 오묘를 보아 창업을 여리오. 주인은 장수한 남극노인*③이요, 안개구름 자욱한 하늘에서 내려온 송나라 서호처사*④ 처럼 한평생을 청천에 떠 있는 붕황이란 새의 등*⑤과 같이 큰 웅지를 품고 살았도다. 기를 토하며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잠못이루는 생각은 재주 특출한 사람의 한낱 부질없는 꿈이로다.
일찍이 일천이천의 노래를 불렀고 새벽에 대서특서의 필을 잡았도다. 문장은 명달에 싫어함이 있고 시운이 고르지 못하여 운수가 기박하도다. 작은 관리로 백발이 되었으니 반생을 창주에 맡겼도다. 맑은 가을날 몽롱한 꿈속에선 매양 고향 산수에 젖어들고, 자리에 누울 때마다 떠오른 것은 한 때나마 잊고 지낸 고향산천을 그리워 한 적이 기 얼마나 되었던가!
하물며 난리 만나 세월이 흘러가니 공명의 기회에 의미가 없고, 의지는 수구초심의 여우보다 간절하며, 마음은 날기 싫어 둥지를 찾는 새를 따르는 격이로다.
봄이면 진성루각*⑥의 연꽃 속에 먼지는 자욱하고 소수와 상수의 동정호*⑦ 흰구름 중에 비바람치는 가을이 기 몇 해였던가! 남쪽 고향을 향하여 이파리 하나 날려 보내며, 외로이 북극성을 바라본지 그 얼마였던가 ?
자갈밭과 띳집은 누대로 이어온 재산이오, 후손들은 우리 집의 자랑이로다. 우리 선친의 노닌 곳이요 우리 아이들 노닌 곳이로다. 이에 고하고 이에 돌아가니 무회씨의 백성인가 갈왕씨*⑧의 백성인가? 부귀공명에 대한 근심 걱정이 없이 송죽매를 즐기는 일반시흥에 사노라니 조자손 삼세의 재주 모임이로다.
소선의 적벽을 얻었으며 이백의 단구(丹丘)*⑨에 누었도다. 적막한 물가와 한가로운 들은 오직 편안한 곳이요, 목란의 돛대*⑩로 해당화 배를 물가에 띄웠도다. 그 배는 어느덧 약수삼천리*⑪에 흘러 길은 이미 봉래산 영주산의 12층 요대로 통하니 사람이 완연 신선세계에 와 있는 듯 하도다.
청강의 조약돌은 어부의 길로 역역한 모래밭이요. 황관*⑫에 들옷은 산가의 모습이요 교교한 달빛이 노을 밖에서 비추니, 어찌 속세의 바깥 세상과의 구별이 특별한 것이 되며,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을 익히니 가히 즐거운 곳이라 말할 지어다.
가을이 가고 봄이 오니 사철 경치가 하나만은 아니요, 아침에 나갔다가 저물어 돌아오니 하루의 즐거움이 끝이 없도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이 모두가 제왕의 은덕이요, 내 스스로의 즐거움 역시 군은이 아닌 것이 없도다. 임금을 향한 작은 정성스러운 내 마음은 항상 궁궐에 걸려있는 밝은 달빛이요, 몇 줄기 안 되는 새하얀 머리 가락은 임금 화로에 피어나는 향불연기와 같이 은은한 즐거움을 바라노라.
거문고와 독서로 여름을 소일하고 가벼운 잔을 날려 흥을 돋우도다. 춤추는 소맷자락이 해를 가리니 갈매기 나는 물속에 그림자 드리우고 안개자락에 피리가락이 꾀꼬리 소리와 어울리도다. 나물국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이 어찌 같음이 있겠는가? 혜초 장막과 꽃 병풍은 너무 편안함이로다.
태강*⑬ 때와 같은 도성의 번잡한 생활이 내겐 없어 나의 일장춘몽이 아닌데 옥당금마*⑭는 어느 곳에 있을까?
북창삼우와 더불어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자니*⑮ 낙양성의 훌륭한 정원에 온 듯 하고, 다만 제후는 천하의 난리를 다스리지만 초계 묻혀 사는 사람들의 생업은 달라도 마음만은 진실로 왕유의 망천도*⑮와 한가지로다.
어찌 덕이 높은 사람 석인들과 합할 뿐이리오. 유연한 군자상인걸. 오직 어진자라야 북창삼우를 즐겨할 뿐이다. 다시 멍에와 같은 말로 구할 수 있은 것이 어떤 것이겠는가?
오호라! 낙화의 우주요 유수의 건곤이며 광음의 과객이요 풍월의 가빈이라. 그 변화로부터 볼 진데 천지도 일순간이니 장차 늙음에 이르는 것까지도 알지 못하며 우울하다거나 즐거움을 모두 잊기를 바라는데, 일편청산을 다툰 자는 어떤 사람인가? 만경창파를 다 갖는다 해도 금하는 이가 없으니, 이것은 조물주가 모두 감추어 놓은 것이로다.
내가 자네와 더불어 함께 즐긴 바라, 하물며 부귀는 나의 원한바가 아니니 그 아래 있음에 어찌 슬퍼하리오. 낙토를 이에 얻었으니 거의 이로부터 길이 마치리라. 타고난 목숨을 다시 어찌 의심하리요??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리라. 마침내 창랑의 곡을 화답하여 노래하노니
창랑 노인이 노래 한곡 불러서/ 조각배로 창랑정을 기뻐해 점했어라.//
거울 같은 호수에 밝은 달은 삼백리를 비춰주고/ 무협에 뜬 구름은 십이 병풍 열었도다.//
원컨대 적벽에 동풍 편으로 인하여/ 은하수 북두성에 날아서 오르리라.//
이곳에 서로 만나 한번 크게 웃으며/ 과영과 명령에 부여한다.// <滄洲>
註① 창랑(滄浪)이라 함은 옛날 남장보(南張甫, 彦紀)가 이곳을 지나면서 지은 이름으로 남령(藍嶺)과 장불의 두 내[川]가 합쳐진다. 큰 고기가 뛰는 모습이 햇빛에 반사되어 비단구름[雲錦]과도 같은 찬란한 모습이 마치 용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거기에 은어 수십 마리가 발랄하게 뛰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내 비록 고기의 마음은 모르기는 하나 그들이야 말로 얼마나 즐겁겠는가.≪고제봉유서석록(高霽峰遊瑞石錄)≫
註② 적송자(赤松子) : 천상의 신선
註③ 남극노인(南極老人) : 옛 천문도 남반구 하늘에 비교적 큼직하게 노인성이 그려져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를 남극노인(南極老人=老人星), 또는 수성(壽星)이라고 불렀다. 예로부터 이 별을 보는 사람은 장수를 누리고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전해 내려왔다.
註④ 서호처사(西湖處士) : 임포(林浦)의 故事에 나오는데, 절강성의 서호(西湖)에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아 살았다는 송나라 때의 시인.
註⑤ '장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鵬(붕)이라는 새는 등이 태산만 하고 날개는 하늘의 구름 같으며 한번에 구만리를 날아오른다 하였다.
註⑥ 진성루각 : 광서성 흥안에 있던 누각으로 고대건축 중 가장 정교한 누각이라한다.
註⑦ 소상동정 : 중국호남성 북부에 있는 ‘동정호’와 남쪽에 있는 소수와 상수의 강 이름.
註⑧ 무회씨(無懷氏)와 갈왕씨(葛天氏)는 전설에 나오는 상고(上古)의 제왕들로, 무위자연을 통치의 바탕으로 한 도가에서 말하는 성왕들이다. 출전 : <五柳先生傳-陶淵明>
註⑨ 소선의 적벽과 이백의 단구(丹丘) :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적벽과 ‘이백의 장진주’에 나오는 단구를 말한다. 이백은 나이 42세에 늦게 벼슬을 하기 시작했으나 2년 만에 모함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나서, 숭산에 있는 元丹丘(원단구)의 영양산 거처에서 객으로 있었다.
註⑩ 목란의 돛대(木蘭之檣) : 소식의 적벽부에 “桂棹兮蘭檣으로 擊空明兮?流光이로다.” 즉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속이 훤히 들이비치는 물을 쳐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도다. "라는 구절에서 따 온 듯하다. 또 계수나무 노와 목란(木蘭) 상앗대는 '초사(楚辭)'에 나오는 말로. '초사'에 '계수나무 노와 목란 돛대'라는 표현이 나온다.
註⑪ 약수(弱水)삼천리 : 약수는 옛날 중국에 신선이 살던 고장에 있었다는 강 이름이며, 그 길이가 삼천리가 되고, 부력이 약해서 기러기 털도 가라앉는다 함. 더구나 사람은 건너지 못한다는 물
註⑫ 황관(黃冠) : 1)누른 관, 2)풀로 만든 평민의 관이란 뜻, 벼슬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
註⑬ 태강(太康) : 하(夏) 나라의 세 번째 왕 : 禹?→?啓?→?太康?→?仲康?→?相?→?少康 → ?? → ?槐 ?→ ?芒 ?→ 泄 →?不降?→???→???→?孔甲?→?皐?→?發?→?履癸(桀王)
註⑭ 옥당금마(玉堂金馬) : 옥당은, 홍문관 홍문관의 부제학·교리·부교리·수찬·부수찬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거니, 화려한 집 또는 궁전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
여기서 ‘옥당’은 漢대의 대리석 궁전을 지칭하고 ‘금마’는 미안궁의 금마문을 지칭하는데, 둘의 모두 의미는 귀한 고관을 뜻함
註⑮ 북창안고침(北窓眠高枕)은 : 北窓三友(북쪽 창가의 세 친구. 거문고와 시와 술)와 高枕安眠(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잔다.)의 합성 구인 것 같다.
망천도(輞川圖) : 중국 협서성 람전현에 있는 곡천(谷川)을 망천이라 함. 당대(唐代)의 왕유가 이곳에 망천장이란 별장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함. 이로부터 이 일대의 뛰어난 자연경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데서 이 화제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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