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천시 성내동에 있는 숭렬당. 조선 세종 때 대마도와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이순몽 장군의 집으로, 1433년(세종 15)에 중국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
|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 Story Briefing
영천 출신인 이순몽(李順蒙, 1386~1449) 장군은 세종때 대마도와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명문가의 아들이었지만 무예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무과에 응시해 관직에 나섰다. 특히 세종 원년인 1419년, 우군절제사로 대마도 정벌에 나서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1433년에는 중군절제사로 여진족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워 세종의 총애가 두터웠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0편은 대마도를 정벌한 영천 출신 이순몽 장군의 이야기다. 흥미를 더하기 위해 픽션을 가미했다.
#1. 이름없는 탁발승의 예언
영천사람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 후일의 태종)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어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진 이응(李膺)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이 순몽(順蒙)으로 인물이 준수하고 성격이 활달했다. 하지만 응석받이로 키운 탓인지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고 학문은 등한시하였다. 타고난 개구쟁이로 항시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이런저런 말썽을 일삼았다. 잡아다놓고 꾸짖어도 그때뿐이어서 부모의 속을 태웠다.
순몽의 모친은 전주최씨로 판서 병례(丙禮)의 딸이었다. 심성이 후덕하고 사려가 깊었다. 하루는 최씨가 안방에서 자수를 놓고 있을 때 탁발승이 대문을 두드렸다. 행색이 남루하여 하인이 쫓아내려는 것을 만류하고 불러들여 마루에 앉게 하고 손수 차를 건네고 시주를 하였다.
때마침 바깥에서 놀던 순몽이 흙먼지를 덮어쓴 후줄근한 모습으로 집안에 들어섰다.
“대대로 학식 높은 인물이 나온 가문인데, 저 아이는 어쩌자고 저렇게 공부를 안 하는지 원.”
최씨의 한탄을 들은 스님이 유심히 순몽의 관상을 살피더니 말했다.
“부인의 친절한 마음씨를 생각해서 한 마디 드리겠소이다. 자제의 자질은 뛰어나지만 액운이 끼어서 쉬 벼슬길에 오르기 어렵고, 후일 벼슬이 높아져도 큰 화를 당할 운수요.”
이어서 스님은 가까운 선친 중에 백성의 원성을 산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최씨는 깜짝 놀랐다. 순몽의 조부되는 이희충(李希忠)은 밀직부사를 지낸 관리로 성품이 강직하고 엄혹하여 좀체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경기 수군절제사로 봉직할 때는 부하의 잘못을 따져서 3명을 장살(杖殺)시킨 적도 있었다. 나중에야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자의 무고로 밝혀졌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걱정이 된 최씨가 액운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물었다. 간절한 최씨의 부탁에 스님은 마지못한 듯 학문보다 무예를 가르칠 것을 권했다. 무엇보다 활쏘기를 능숙하게 익혀두면 후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로 최씨는 자식에게 무예를 가르칠 스승을 널리 구했다. 다행스럽게 순몽은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에 재미를 느꼈는지 나날이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윽고 열아홉이 되는 해에 순몽은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궁궐에서 한직으로 지내던 어느 날, 그는 궁중에서 벌어진 활쏘기 경연에 나갔다. 그날, 순몽의 활솜씨에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입사면 입사(立射, 서서 쏘는 활), 보사면 보사(步射, 걸으면서 쏘는 활), 속사(速射)까지. 열 발이고 스무 발이고 정곡을 맞히지 못한 화살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세 사람의 무관과 결승전을 앞뒀을 때는 백관을 거느린 태종이 친히 관전에 나섰다.
“내 듣기로 궁술에는 통원군 이종무가 뛰어나다더니 여기 또 한 사람의 젊은 궁수가 출현하였구나.”
결승전에서 우승한 그에게 태종이 손수 상을 내리며 격찬한 말이었다. 그 뒤로 태종은 신하와 병사들을 데리고 떠나는 사냥에 그를 친히 불러서 데려가곤 했다.
몇 년 뒤였다. 한번은 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후일의 세종)을 반 강제로 대동하고 사냥에 나선 적이 있었다. 다른 왕자들과 달리 학문에 탐닉하여 눈병이 나도록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충녕의 건강을 우려했던 것이다.
고려 때 동주(東州)로 불렸던, 짐승이 많기로 유명한 철원에 도착한 태종 일행은 곧 무리지어 사냥을 시작했다. 각자 넓게 산개하여 사냥감을 쫓아 우거진 숲으로 달려가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범 한 마리가 흉흉한 기세로 충녕이 탄 말을 향해 달려왔다. 말이 놀라서 앞발을 들었고, 그 바람에 고삐를 놓친 충녕이 말안장에서 굴러 떨어졌다. 말은 달아났고, 범은 곧장 풀밭에 쓰러진 충녕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침 주변에는 호위무사들도 없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때마침 말을 타고 달려오던 순몽이 급하게 활을 쏘았다. 정확히 정수리에 화살을 맞은 범은 그 자리서 즉사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무관과 병사들은 범을 잡은 순몽의 놀라운 활솜씨와 충녕대군을 구한 일에 너나없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충녕과 이순몽은 서로 흉금을 털어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위험에서 구해준 공로도 있지만 궁중법도에 깍듯한 다른 신하들과 달리 거칠지만 솔직담백한 순몽의 언행에 충녕의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태종은 순몽에게 충녕대군의 호위무관을 겸해 무예를 가르치는 직무를 맡겼다. 하지만 무예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는 충녕은 순몽에게 무예를 배우려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궁궐 바깥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일을 더 흥미롭고 재미있어 했다.
#2. 대마도 정벌에 나서다
1417년에 순몽은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말직으로 10여 년을 보낸 후였다. 비로소 운수가 트였는지 다음 해에 그는 궁궐의 병력을 통솔하는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겸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고 이어 우군절제사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고려 말기부터 출몰하던 왜구들은 조선 조정의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태종이 왕권을 바로 세우려고 힘을 쏟는 중에도 충청도와 황해도 해안지역에 출몰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1419년(세종 1)에는 대마도의 왜선 50여 척이 충청도 비인현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하여 조선의 병선을 불태우고 민가의 식량을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장계를 받은 세종은 조정의 대신들과 의논하여 왜구들의 근거지를 발본색원하기로 하고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인 이종무(李從茂) 장군을 최고지휘관으로 삼고, 우박(禹博), 황의(黃義) 등을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 박초(朴礎) 등을 좌군절제사로, 이순몽, 김을지(金乙知)를 우군절제사로 삼아 출정했다.
마산포를 떠난 이종무 부대는 전함 227척에 1만7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대마도의 아소만으로 진격하여 요충지인 두지포(豆知浦)에 상륙하였고, 적의 선박 129척을 빼앗아 쓸 배 20여 척만 남기고 모두 불살랐다. 또 가호(家戶) 1천940여 호를 소각하고 왜적 백여 명을 참수하고 20여 명을 포로로 잡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여기에다 순몽은 왜적들에게 포로로 잡혀와 있던 조선인 8명과 중국인 130여명을 구출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종무 장군은 대마도의 육상 통로이자 요충지인 훈내곶(후나고시·船城)을 장악하고 수색을 벌여 왜구들의 잔당을 토벌하는 작전을 벌였다. 특히 상현(上縣)지역인 니로군에 왜구들이 집결해 있다는 첩보를 접한 정벌군들은 이들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누카다케(糠嶽)산 아래의 요처에 미리 방어진을 치고 기다리던 왜구들의 기습공격에 의해 정벌군에게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때 뒤늦게 토벌전에 참가한 이순몽 장군의 활약은 자못 눈부신 바가 있었다. 다른 장수들이 기습적인 왜적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후퇴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순몽의 부대는 용전분투하며 적을 물리쳤으며, 순몽이 선두에서 활을 쏘아 적장을 몇이나 꺼꾸러트려 왜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로써 다른 장수들과 군사들이 가까스로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지포로 철수한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철군을 결정했을 때 이를 반대한 것도 순몽이었다. 독초는 반드시 뿌리까지 뽑아야 후환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얘기를 전해들은 대마도주 사다모리(宗貞盛)가 마침내 항복을 청하였으며, 얼마 뒤 대마도주는 신하의 예로써 조선을 섬길 것을 맹세하였고 세종의 허락으로 경상도의 일부로 복속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공적으로 세종의 신임을 얻은 순몽은 중군도총제를 거쳐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5년에는 진하사(陳賀使)로 중국에 들어가서 선종(宣宗)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이후 중군절제사가 된 순몽은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여진족)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는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서 판중추원사로 승진했다. 이때 세종은 ‘복장군’이라고 부르며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하는 자도 적지 않아서 그 뒤 몇 번이나 조정 중신들의 탄핵을 받아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지만 세종의 각별한 총애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따져보면 그건 예전 세자였던 충녕을 위기에서 구한 그의 뛰어난 궁술 실력 때문이니, 어릴 적 탁발승의 예언이 신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숭렬당 앞에는 2009년 준공한 숭렬공원이 있다. 2천380㎡ 규모로 나무와 조형물,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다. |
|
숭렬당 대문 안쪽에는 이순몽 장군의 신도비(왼쪽)와 송덕시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
이순몽 장군이 살던 집은 현재 영천 성내동에 남아있다. 바로 1433년 지어진 ‘숭렬당(崇烈堂)’이다.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중국식 고택이다. 세종이 장군을 특별히 아껴 중국인 기술자를 직접 불러 하사했다고 한다. 배바닥의 간략(草刻) 등 건축형식은 조선 전기의 양식을 띠고 있지만 일부 재료의 경우 조선 후기의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1970년 문화재로 지정된 뒤 해체 복원되어 원형을 회복했다. 현재 보물 제5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위양공(威襄公) 이순몽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영천이씨 문중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렬당 앞에는 2009년 준공한 2천380㎡ 규모의 숭렬공원도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