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한민족은 日本에 文化를 傳受하는 등, 훌륭한 역사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대한제국말기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日帝治下40年이라는 恥辱의 歷史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日本은 歷史的, 地理的으로 우리땅이 분명한 獨島에 1999년 日本人이 戶籍을 옮기고, 가상 독도점령 군사훈련까지 실시하면서,시나리오에 따라 독도를 한·일공동관리수역에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가 왔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때, 그때마다 단발적으로 대응하곤 하니, 저들은 조선인의 냄비기질이 또 발작한다고 비웃으며 계획대로 독도점령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시키고있다.
이제 위대한 韓民族의 얼과 역사적인 우월성으로 일본에 접근 해야한다. 보라! 양후공 장수 이공 종무 장군 (襄厚公 長水李公從茂將軍)의 대마도정벌의 위업을.
1360년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장수이씨 을진공(八道都統使助戰元帥 長水 李氏乙珍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종무장군은 1381년 동해안 출몰 倭寇를 ,1397년에는 서해안에서 倭寇를 박살내고 , 1419년 6월20일 對馬島타케시무라(竹敷村)를 점령하고, 21일 오후나고시(大船越)에 일본 본토군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방책을 치고, 26일 니위(仁位)를 점령한 후 6월29일 가야지역인 오후나고시에서 對馬 제8대 島主 종정성(宗貞盛)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마침내 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이종무장군의 대마도정벌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일본땅 정벌이란 위대한 克日업적이다. 우리는 장군의 대마도 정벌 위업을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고, 한차원높은 독도지키기운동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자,
지금도 <가야, 가야, 가야>를 노래하는 오오미 마을이 있고, 장군이 항복을 받은 오후나고시도 가야지역 이기 때문에, 대마도 가야와 가장 가까운 이곳 가야에 양후공 장수 이공 종무장군의 대마도 정벌 기념비를 세운다
단기 4334년 3월 1일 .글지음: 독도지킴이 황백현 .글
새김: 명륜석재.(윤길주)
2. 이종무 장군
이종무(李從茂) 장군1360(공민왕 9) ∼ 1425(세종 7)
① 조선의 장군으로 시호는 양후(襄厚). 본관은 장수(長水).
② 어려서부터 활쏘기, 말타기에 능했고, 81년(고려 우왕 7) 21세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쳐 공을 세워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③ 97년(태조 6) 옹진만호(甕津萬戶)가 되어 서해안에서 또 왜구를 물리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④ 1400년(정종 2)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고 통원군(通原君)으로 피봉되었다.
⑤ 의주(義州) 병마정제사 등을 거쳐 1406년(태종 6) 장천군(長川君)으로 피봉되고 우군총제(右軍摠制)
를 겸했다.
⑥ 1419년(세종 1)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고 돌아와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가 되었다.
⑦ 1421년 장천부원군(府院君)에 피봉된 후 23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3.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사 개요
(1) 동정(東征=대마도정복)의 원인과 제1차 정벌의 개괄
① 고려말 왜구의 우리나라 해안침범은 매우 심각하여 고려멸망의 원인중의 하나가 될만큼 그 미친 영향이 컸었다
② 1396년 12월 3일에 대마도 정벌군을 편성한 적이 있다.
③ 조선 태조(이성계)는 건국이래 왜구대책으로 일본의 막부와 북구주의 유력한 오우치(大內)에게 왜구 조선침범금지를 요청하고 입국하는 무역상에게 특혜를 주기도 했다
④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와 손잡고 조선에 밀항하는 사람을 통제키로 하는 등의 정책으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⑤ 1418년 4월 24일 대마도주 종정무가 죽고 그의 아들 정성(貞盛)이 뒤를 이은 뒤로 대마도를 기점으로 한 왜구의 조선침범이 잦았다
⑥ 1419년 5월 13일 어전회의서 대마도 정복을 결정.
<일자별 상황>
① 5월 14일: 대마도 정복군 편성
中軍 - 총 대 장 : 이종무 장군
중군절제사 : 우박-나중에 16일 이숙무로 교체
황상
左軍 - 좌군도절제사 : 유습
좌군절제사 : 박초
박실
右軍 - 우군도절제사 : 이지실
우군절제사 : 김을화
이순몽
총사령관: 이종무 삼군도 체찰사 (李從茂 三軍都 ?察使)
병력 - ● 전 함 : 227척 (경기도 10척, 충청도 32척, 전라도 59척, 경상도 126척)
● 병 력 : 17,285명
● 군 량 : 65일분
② 5월 29일: 이종무장군 대마도에 사자 보냄
③ 6월 8일: 거제도 견내랑 집결명령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포구)
④ 6월 17일: 견내랑읅 출항하여 대마도 진군.
일기 불순으로 통영군 한사면 봉암도 추봉에 회항
⑤ 6월 19일 오전10시: 추암 포구 출진
⑥ 6월 20일: 선발대 10척 대마도 두리포 점령
⑦ 6월 20일 정오: 타케시무라 (竹敷村) (그 당시 명칭:두지포)
⑧ 6월 21일: 오오후나고시(大船越) (그 당시 명칭:훈내곳)
⑨ 6월 26일: 니이(仁位) (그 당시 명칭:니로군)
⑩ 6월 29일: 항복받음.
대마 제8대 도주(大馬8代島主)인 종정성(宗貞盛)이
이종무 장군에게 오후네고시(大船越)에서 항복.
⑪ 7월 3일: 귀환
<전과>
① 적선포획:129척 (20척만 남기고, 나머지 소각)
② 가옥: 1,939호 소각
③ 참수: 114명
④ 포로: 21명
⑤ 중국인포로: 131명 (탈환)
(2) 제2차 대마도 정벌
① 7월 7일: 다시 노략질하는 왜구를 문책하기 위하여 제2차 출정군편성
② 7월15일: 경남 사천시 서포면 구랑리 구랑량(仇浪梁)에 집결해있던 이종무장군이 재정벌군에게 출정중지 명령하달 하여 제2차 대마도 정벌중단.
(3) 의의
① 우리나라에서 대마도 원정은 1389년 고려 공양왕 1년 박위장군과 1396년 조선 태조 5년 김사형장군이 두 번째 원정이 있었으나 큰 기록이 없다.
② 이종무 장군은 세 번째이나 대마도 도주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므로 그 의의가 크다.
고 문 : 강요한 신부. 이득춘. 이영국 (장수이씨대종회 前.現회장)
추진위원장 : 황 백 현 (극일운동시민연합 의장,독도호적옮기기운동회장)
고증및감수 : 이 향(이종무장군 사료연구실장 )
지 도 위 원 : 견상필. 방홍열. 신석순. 이기철. 이내수. 이은수, 임흥수, 정길영, 정영태.
집행위원장 : 남영우, 서영재, 이윤길.
추 진 위 원 : 강경수, 김대윤, 김병식, 김종열, 김충교, 김현국, 남광우, 김귀련.
도일효. 박 구. 박인규. 박태성. 방태열. 백분기. 신삼재, 심홍섭.
양명순, 연도흠. 유연국, 조근제, 심혁자, 탁근우, 탁상래,
김 욱, 주옥자, 엄귀남, 장창현, 조양재, 하정자, 황정현, 양덕화, 오택윤,
http://www.tocdo.or.kr/main.htm
극일운동/이종무장군 기념비
<신문기사보기>
중앙일보(2001.3.1)
http://www.tocdo.or.kr/이종무장군기념비(기사).htm
동아일보(2001.3.13)
http://www.tocdo.or.kr/이종무장군기념비(동아).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