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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하만물,애플릿,영상시,음악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하만물
남원의 명창
송흥록
송흥록(宋興祿)은 (1780년경) 전북 남원군 운봉면 비전리에서 태어났다. 송흥록은 어릴 때부터 나이에 비하여 기골이 장대하였고, 재주와 슬기가 출중하였으며 풍채 또한 빼어났다. 송흥록은 6세 때 서당에 다니면서 글공부를 시작하였고, 집으로 돌아오면 부친 송첨지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헤아려 아는 그 재주에 서당훈장은 감탄하고, [네가 양가에 태어났더라면 장차 큰 인물이 될 터인데 아까운 일이다]하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송흥록은 소리공부에 있어서도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나서, 그 성음이 극히 청미한데다가 성량이 또한 풍부하였고 부친이 한두 번 선창하면 그대로 방창하였다. 그래서 서당에서는 [신동]이라 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일러 [가무보살(歌舞菩薩)의 시현(示現)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송흥록의 부친 송첨지는 원래 초대 명창 권삼득의 수행고수로서 권삼득과 여러 해 동안 기거를 같이하여 왔기 때문에, 권삼득의 소리바디와 너늠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송첨지는 송흥록에게 기대를 걸고 어려서부터 정성껏 소리를 가르쳐 왔던 것이다. 송흥록은 12세 때 백운산으로 들어갔다. 백운산 일대에는 유명한 고찰과 암자가 많았다. 송흥록은 백운산 깊은 곳에 자리한 암자에 거처하는 월광선사(月光禪師)의 도움을 받아 아무 걱정 없이 소리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밥만 먹으면 소리를 계속하였고 밤이면 월광선사에게 글을 배웠다. 송흥록은 입산한 지 5년 만에 소리가 무엇인지 터득하게 되었다. 그제야 월광선사는 말하였다. [이제 글은 내게서 더 배울 것이 없다. 소리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할 것이니 명심하고 듣거라]하고, 다음과 같이 설파 하였다.
[네가 부르는 소리, 즉 창은 우주의 삼라만상의 소리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생의 희로애락과 애오욕과 생로병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천파만류의 물이 흘러서 바다에 이르면, 오직 한맛으로 변하는 바닷물이 되는 이치이며 소리 또한 그러함이라. 다시 말하면, 만백성의 우주에 충만한 한소리 한소리가 합쳐져서 원음인 한맛의 소리가 극치에 이름이라. 그러므로 이 세상 만물의 소리는 너의 연구대상이니 결코 듣고 흘려버리지 말지니라] 또, 월광선사는 창법의 원리에 대하여 [말과 음의 조화를 이루는 어단성장(語短聲長)의 창법을 알아야 하고 귀성이 낀 소리, 맵시 있는 너름새, 오음과 음향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이른바 득음(得音)을 완전히 구사하며, 사설의 발음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연마하되 소리 밖에 소리가 있고 장단 박에 장단이 있으니, 그 도리를 개달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고 네가 지금 부르는 사설이 너무 조잡하니 무든 가사를 정리하고 이를 집대성하여라] 하였다. 송흥록은 크게 깨우친 바 있어 이때부터 가사를 정리하기 시작 하였다. 먼저 춘향가에 있어서 불합리하고 조화가 이뤄지지 않은 대목은 다시 가다듬고, 너무 잡희에 지나친 곳은 고쳐가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음악적 기교와 정감에 알맞도록 창곡을 근간으로 하여 수정하였다. 사설에 있어서도 거기에 다시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민속적 사설과 한시부의 단편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시창, 가곡, 단가, 농요 등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조잡하고 짜임새 없는 내용은 수정 삭제하며 잡희의 구사경지를 완전히 탈피하여 발림, 좌립진퇴, 표현기교의 완전한 극적효과를 나타내는 극창으로서의 춘향가와 흥보가를 완성하였으며, 당시의 고전에서 별주부전, 변강쇠타령, 적벽가 등을 정리하고 이를 집대성 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노력과 적공이 쌓이고 쌓여서 송흥록은 10년 만에 득음 대성하였다. 그리하여 얻은 목은 마치 하늘을 뚫을 듯하였고, 광활한 지역을 울려 덮을 듯하였다. 그 웅장하고 쾌활한 성량은 과연 신비한 영역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지신(至神)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송흥록이 10년을 하루같이 불철주야 심혈을 다하여 절차탁마(切磋琢磨)한 적공이었으며, 또한 월광선사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광선사는, [이제 너의 소리는 신역에 이르렀다. 네가 세상에 나가면 불세출의 명창이 되리라. 이제 그만 세상으로 돌아가라]하며 다시 당부하기를, [너는 여난의 상이 있으니, 세상에 나가거든 각별히 여색을 조심하여라] 하였다. 이리하여 송흥록이 하산하려던 그 전날 밤의 일이었다. 삼경에 초립동(草笠童) 세 사람이 찾아와서, [영상대감께서 부르시니 지체 말고 어서 갑시다.]라고 하여 송흥록은, [어느 영이라고 거역하겠오마는 이 꼴을 하고야 어찌 가겠소?]하니 초립동은, [의관일습은 다 마련되어 있으니 염려 말고 어서 가기나 합시다.] 하여, 송흥록은 입은 옷 그대로 아무런 의심 없이 초립동을 따라 나섰다. 휘황하게 밝은 보름달밤 북쪽으로 능선을 타고 얼마나 갔을까, 멀리 산 아래 기슭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당도하였다. 초립동 한사람이 문간방 방문을 열고, [ 이 방에 의관일습이 있으니 갈아입고 나오시오]하였다. 송흥록이 방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초립동의 말대로 의관일습이 놓여 있었다. 송흥록은 헌 누더기를 벗고 비단 바지저고리에 버선 행전이며 초록색 도복에다 통영갓에 호박풍잠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안채로 인도되었다. 육간대청 너른 마루에 삼정승 육판서와 만조백관이 금관조복 차림으로 좌정하였고, 수십 개의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대낮같이 밝혀 있었다, 상좌의 영의정이 말하기를, [네가 비곡(悲曲)을 잘 부른다 하니, 옥중가를 들어보자] 하였다. 원래 춘향가 중의 옥중가는 옥중비가라고도 하며, 춘향가 전편을 통하여 가장 비통한 대목이다. 애지중지하던 임을 이별하고 주야상사 슬피 울며 세월을 보내던 춘향이는 신관사또의 수청 들라는 성화에 저사 모피하다가, 끝내는 삽십 대 형정 맞고 옥에 갇혀 신음하면서 그래도 이몽룡을 애틋이 그리워하는 슬픈 노래인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대관들 앞에 나서고 보니 송흥록은 떨리기도 하였으나 흥분과 긴장을 가라앉히고 목을 가다듬고 옥중가를 시작하였다. 애원한성으로 엮어나가는 송흥록의 비사애조에 청중은 측은한 표정으로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송흥록의 소리가 끝나자 영의정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말한다. [과시 천하의 명창이다. 그러나 귀곡성이 미진하구나. 내가 귀곡성을 가르쳐 줄 터이니 따라 배우라] 귀곡성(鬼哭聲)이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운 귀신의 울음소리를 말한다. 영의정이 귀신의 울음소리를 하는데 송흥록은 몸이 오싹하면서 소름이 쭉 끼쳤다. [옳지! 이것이야말로 정말 귀곡성이다.] 송흥록은 탄복하면서 따라 불렀다. 송흥록은 타고난 천재인지라 영의정의 귀곡서응ㄹ 그대로 방창하여 완전히 배워 익혔다. 그날 밤 송흥록은 분명히 산해진미의 대접을 받았고, 비단금침 속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고래 등 같은 기와집과 삼정승 육판서는 간곳이 없고, 황량한 벌판에 다 허물어진 어떤 망령(亡靈)의 옛무덤 속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와싹 소름이 끼치면서 어찌나 무서웠든지 벌떡 일어나서 혼비백산하여 앞만 바라보며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 육십령 - 백운산과 덕유산의 중간지점으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짓는 소백산맥의 험한 재- 까지 도망쳤는데, 거기서 초부에게 물어 물어서 그 암자까지 돌아오는데 3일이 걸렸다고 전하고 있다. 그거야 어찌 되었든 간에 송흥록이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그의 명성은 금방 삼남 일대에 자자하였다. 어느 날 진주 관찰사(觀察使)의 부름을 받고, 그날 밤 진주의 촉석루에서 옥중비가를 불렀을 때 수천의 청중은 송흥록의 슬픈 소리에 모두 눈물을 흘렸고 귀곡성을 내는 대목에 이르러 창거창래(唱去唱來)의 진경에 들어가자 갑자기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청중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로 전한다. 어찌하였던 송흥록처럼 많은 전설과 신화(神話)를 남긴 명창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송흥록은 무슨 소리고 그저 듣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의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우짖는 바람, 졸졸 흐르는 물소리까지도 무심히 듣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라 하는 것은 무슨 소리이건 다 송흥록에게는 좋은 교재요 연구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한 마리 황소의 기운찬 울음소리를 듣고 [얼씨구! 소리는 저렇게 힘차고 무게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은 그것을 잘 증명하고 남음이 있거니와, 이것은 또 송흥록만의 깨달음이며 터득인 것이다. 이는 물론 월광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도 있겠지만, 그러한 공부가 소리를 지르면 성낸 바람과 같이 나무라도 부러뜨리고, 속삭이듯 소리를 낮추면 따스한 봄바람에 꽃을 피우는 불세출의 절창(絶唱)을 낳았다. 사람마다 높은 목이 힘 안 들이면 눅은 청이 어렵고, 눅은 목이 부드러우면 높은 목이 안타까이 달린다. 그보다 즐거운 소리가 능하면 슬픈 곡조가 미치지 못하고, 한스러운 창이 미끄러우면 기꺼운 사설은 좀 부끄러운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송
흥록은 어느 소리고 목에 걸려서 어렵거나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상성, 중성, 하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귀신에게 배웠다는 귀곡성은 탈조화(奪造化)하였다고 한다. 대낮에 들어도 머리끝이 쭈빗할텐데 궂은비 오는 어두운 밤에야 귀신의 울음소리는 정말 무서웠으리라.
송흥록을 평하여,
[모든 가사를 집대성한 공로와 기량의 특출한 점으로 보아서 판소리의 중시조라 할 수 있으며, 그의 고매한 인격과 기예의 절륜, 포부의 호대함은 뒷사람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바라]고 하였다. 이것은 후일의 이야기이지만 명창으로서 헌종의 총애를 받았던 모흥갑은 송흥록을 가왕(歌王)으로 떠받치고 스스로 물러간 것만 보더라도 송흥록의 소리와 격조를 헤아리기에 부족은 없을 것이다. 송흥록은 대구감영의 부름을 받고 선화당에서 옥중비가를 불렀다. 그시의 경상감사의 수청기생 맹열은 송흥록의 선풍도골과 소리에 황홀하여 넋을 잃고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얼마 후 맹열은 감사에게 구실을 만들어 짬을 얻고 운봉으로 송흥록을 찾아가 필경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송흥록과 맹열의 부부생활은 결코 평탄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송흥록의 오만한 성격과 맹열의 너무 지나친 시기질투가 서로 배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송흥록은 진주 관찰사의 부름을 받게 되어 맹열과 왕환 20일을 약속하고 떠났는데, 일이 늦어져서 3일 늦게 운봉으로 돌아와 보니맹열은 가출하고 집에 없었다. 송흥록은 식음을 전폐하고 맹열을 찾아다녔다. 맹열이 진주에 가있다는 소문을 듣고 송흥록이 달려가 보니, 맹열은 뜻밖에도 진주병사 이경하의 수청기생이 되어있던 것이다. 맹열은 송흥록이 약속날짜에 돌아오지 않은 것은 필연코 다른 기생과 정을 통하는 것이라고 곡해한 나머지 가출하여 진주로 와서 자청하여 보란 듯이 이병사의 수청이 된 것이다. 송흥록은 상대가 진주병사인지라 어찌할 수 없었다. 맹열은 송흥록이 진주에 와서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병사를 시켜서 송흥록을 불러 들였다. 이병사는, [네가 명창이라지. 어데 수궁가 중에서 토끼 배가르는 대목을 들어보자, 나를 한번 웃기고 울리면 3백냥의 상을 내랠것이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을 베리라]하고, 을름장을 놨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맹열이가 앙심풀이하려고 이병사를 그렇게 시킨 것임을 송흥록은 짐작하였으나 그렇다고 이병사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송흥록은 이병살르 웃기려고 우스꽝스러운 익살, 재담, 해학 등으로 별의별 짓을 하면서 소리를 하건만, 이병사으이 얼굴은 얼어붙은 듯이 차갑기만 하였다. 송흥록은 소리를 하다말고 느닷없이 이병사의 앞으로 와락 달려들어 이병사와 얼굴을 맞대고 [ 아이고 아자씨이! 어째서 웃지 않으시오? 날 죽이고 싶소오?]하고, 농담조로 말한 것이 주효하여 이병사는 그만 방긋 웃고 말았다. [우라저씨가 웃으셨는디 또 어떻게 해야 우실까]하고, 송흥록은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을 애원처절한 성음으로, 어떻게나 슬프게 불렀던지 만좌와 함께 이병사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과연 명창이다]이병사는 탐복하고 3백냥의 상금을 내렸다. 맹열은 이병사에게 송흥록과 전일관계를 솔직하게 고백하였고 이병사의 양해로 두사람은 다시 결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흥록과 사사건건 맞서는 맹열이는 어느날 [간다]하고 봇짐을 싸가지고 나가 버렸다.송흥록은 맹열을 달래서 다시 화합하고 싶였으면서도 그 자부심이 강하고 오만한 성품은 도리어 맹열에 대한 증오와 격분이 그리고 고독의 비애감이 일시에 병발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맹열과 영이별하게 됨에 그 비통한 감정은 저 유명한 <진양조>의 [단장곡(斷腸曲)]으로 나타났으니,
맹열아 잘가거라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잘가거라
네가가면 정마저 가져가지
몸은가고 정만 남으니
쓸쓸한 빈방안에 외로이 애를태우니
병안될소냐 맹열아 잘가거라
이 비창한 소리를 대문 밖에서 듣고 있던 맹열은 동감의 정을 어쩌지 못하고 다시 들어와서 사죄하고 화해하였는데 이것이 부지부각 중에 자탄가를 부른 것이 우연하게도 <진양조>를 완성하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그후로도 송흥록과 맹열의 불화가 가실 날이 없어, 송흥록은 일찍이 월광선사로부터 [여난의 상이니 여색을 조심하라]는 타이름을 상기하고 맹열과 갈라서고 말았다. 그후로 송흥록은 의정부좌찬성 김병기(1818-1875)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 철종 10년(1859) 봄이었다. 김병기는 철종의 외척 김씨의 장손으로소 부친 김좌근은 영의정이요 생부 김홍근(김병기는 김홍근의 아들이나, 장자인 김좌근이 아들이 없어 김병기가 김좌근의 양자로 김씨가의 대을 이었음)은 좌의정이며, 김씨일가가 정부요직을 두루 장악하고있어 그 세도는 하늘에 닿았다. 김병기의 벼슬은 비록 좌찬성이나 그는 국사의 중소대사를 막론하고 삼정승 육판서는 상대하지 않고 직접 국왕만을 상대하였다. 철종은 싫건좋건 김병기의 의사를 꺾어나 비우를 건드리지 못하는 옹주였으므로 실제적으로는 김병기가 최고권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이러한 김병깅듸 부름을 받고 서울 교동에 있는 김벙기 저택의 별관에 부인과 같이 기거하였다. 송흥록은 김병기의 주선으로 어전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였고, 철종은 송흥록에게 정삼품(正三品)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명창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을 제수받은 것은 모흥갑이 헌종에게 종이품의 동지벼슬이 처음이고 송흥록이 두 번째가 된다. 송흥록은 그 전륜의 기예를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그 명성은 서울은 물론 삼천리 방방곡곡에 진동하였다. 벼슬아치 앙반들의 부름에 응하여 소리를 하게 되면 그 행하(보수)는 천량금이어서, 상경한 지 2년만에 수만금을 벌었다고 한다. 철종 13년(1863) 봄 평소에도 김병기는 종친 흥선군을 미워하였는데, 철종이 병약하고 사자가 없게 되자 김병기는 더욱 흥선군을 학대 구박하였다. 원래 성품이 곧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송흥록인지라, 김병기의 체면 없는 처사를 비방하고 [세불십년이라]하고 야유하며, [종친박대는 신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흥선군을 두둔하고 간하다가 김병기의 노염을 사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송흥록은 함경도로 귀양가게 되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통정대부의 교지와 그 많은 돈을 그대로 놔두고 보인과 함께 함경도를 향하여 방랑길에 올랐다. 그해 12월, 철종이 사자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니 흥선군의 열 두 살난 둘째 아들이 등극하여 고종임금이 되었고, 생부인 흥선이 이조사상 살아있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대원군이 되어서 섭정함에 따라 외척김씨는 일시에 몰락하고 세상이 뒤바뀌고 만 것이다. 이듬해(1864) 흥선대원군은 전날의 송흥록의 은혜를 생각하고 함경 감사에게 사신을 보내어 송흥록을 찾도록 분부하였으나 송흥록이 북청에서 증발하여 버린 뒤였다. 이리하여 송흥록은 일점혈육도 남기지 못하였고, 동생 송광록과 박만순에게 소리를 남겼을 뿐이다. (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송광록
송광록은 가왕 송흥록의 친동생으로 1803년 전북 남원 운봉에서 송씨가문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송광록은 형 송흥록의 수행고수였다. 당시만해도 명창과 고수와의 차별대우가 몹시 심하였던 모양이다. 송흥록은 부름을 받고 어디를 가든지 가마 아니면 먼곳은 나귀를 타고 가는데 고수인 송광록은 북을 걸머지고 걸어가야 했다. 앉은 좌석도 송흥록은 상좌인데 송광록은 말석이었고, 음식상을 받아도 송흥록은 주인과 마주앉아 산해진미인데 송광록은 말석이나 하인들 틈에 끼여 초라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놀음이 끝 나고 행하를 받을때도 송광록은 송흥록의 10분의 1밖에 받지 못하였다. 이렇듯 명창은 최고의 대우를 하면서 고수는 천대를 받게되 니,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니 형제간 인 까닭에 더 창피하고 아니꼬운 감정은 오히려 더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송광록은 뇌꼴스러워서 고수 노릇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다가, 경상감사 수청기생 맹열이가 송흥록을 찾아와 동거하면서 날마다 부부싸움으로 가정불화가 잦게되자, 참다못한 송광록은 가족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송광록은 그 길로 멀리 제주도 한라산으로 들어가 거기서 만리창해를 집어삼킬 기세로 소리를 연마하였다. 오랫동안 송흥록의 창법과 더늠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불과 5년의 독공으로 득음대성하였던 것이다. (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송만갑
송만갑은 1865년 전남 구례 봉북리에서 태어났다. 가왕 송흥록의 동생인 송광록의 손자로 그의 부친은 명창 송우룡이니 3대를 잇는 명문의 자손이다. 7세 때 부친의 지도를 받아 소리 공부를 하였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 13세때 벌써 소년 명창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송만갑은 시대적 요구에 순응하여 창조와 제작을 가문의 전통적 법제로 답습하지 않고, 일종의 특색있는 제작으로 문호(門戶)를 따로 세웠다. 이 때문에 그의 부친은 [송씨 가문의 법통을 말살하려는 패려 자식이라] 하여, 송만갑을 독살하 려고 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자가의 법제를 밟지 않고 일종 특색의 조격(調格)을 창시 하여 일가를 완성한 만큼, 특징과 이채를 띠었으므로 송만갑의 인기는 대단 하였다.
맑은 통상성으로 냅다 질러 떨어뜨리는 성조는 과연 선대인들의 미답지를 개척하였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고법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내는 것은 예술가의 본색인 동시에 시대적 요구에 적응한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추세의 응변이라고 한다면 괴이할 것도 없겠으나 곡조의 변화가 그리 없고 아니리가 부족하며, 일구일절에 너무 힘을 씀으로 전체를 통괄하여 가는데 빠진 것이 없지 못한 것이 옥의 티라고 하겠다. 송만갑은 전라감사 이재각에게 참봉직을 받았으며, 1800년대 말 상경하여 고종으로부터 사헌부의 정육품(正六品) 벼슬인 감찰을 제수받았다. 1902년 원각사 시절에 부주석으로 있으면서 주석 김창환을 보좌하며 창극운동을 전개하였고, 원각사 패쇄 후 궁내부 별순검의 실직을 거행하다가 해임된 후 1908년에 협률사를 조직하여 향곡을 순회공연 하였는데, 1910년 8월 한일합방으로 인하여 통영 협률사를 해산하고 고향인 구례로 돌아갔다. 송만갑은 수년간 고향에서 근신하다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시 상경하여 사울 낙원동 속칭 한양골에 세워진 연흥사에서 이동백 김창룡과 그이 문도인 김광순, 장판개, 배설향등과 협률사를 조직하여 판소리와 창극을 연행하였다. 그 후 송만갑은 연흥사를 그만두고 진용을 보강하여 지방 순회를 하였는데 이 협률사가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홈실에서 흥행한 바 있었고, 후일의 여류 명창 이화중선이 촌부로 살다가 협률사를 구경하고 결심하여 가출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1933년 이동백 김창룡 정정열 등과 제휘하고 제자 인재를을 규합하여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하고, 후배양성과 아울러 창극의 정립 발전에 크게 공현하였다. 그의 제자중에는 김광순 장판개 김정문 박봉래 박록주 박초월 김초향 이화중선 김소희 등이 남녀 명창 이 배출되었고, 한바탕 소리가 아니라도 그가 직접 간접으로 가르친 제자의 수효는 무려 수백명에 달하였다. 월사금 없이 가르친 제자가 절반 이상이고, 친지의 딱한 사정을 보면 입은 옷이라도 벗어주는 인정과 의협심 때문에 그는 더한층 제자들과 뭇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1939년 1월 1일 송만갑은 조선성악연구회 안방에서 7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그이 슬하에 2남에 손자가 7명이나 되어도 대를 잇지 않아서 송씨 계통은 송만갑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송만갑의 특장은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였다. 송만갑의 말에 의하면 중년에 상처한 후로 [심봉사가 곽씨 부인을 잃고 심청이를 안고 다니면서 젖을 얻어 먹여 키우는 대목에 이르면,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환경을 말하는 것 같아 목이 메어 소리를 할 수가 없어서 심청가 대신으로 웃음 장면이 많은 흥부가를 불렀다.]고 술회하였다. 어찌하였든 송만갑은 창악계의 대들보였고 그의 창악계에 대한 공로는 국악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장자백
국창 장재백은 후기 8명창의 한 사람으로 전북 남원 주생 출신이다.오늘날 남원 판소리가 있게 된 것은 그가 판소리의 일가를 이루면서 그와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은 당대의 내노라 하는 명창이 많이 나왔기 때문인데 판소리는 전승예술로 그 전승의 요체가 명창에 있기 때문이다. 국창 장재백에 대한 기록은 남원지는 전국8도명창대회의 전라도 대표로 참가하여 어정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고종과 민비께서 "네가 최고의 명창이다"라 하며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 답하기를 "우리 쟁인들은 죽어서도 봉분을 짓지 못하므로 이를 시정 하도록 전국에 영을 주옵소서"하여 그 날부터 봉분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이는 장재백 명창이 소리꾼들의 신분을 천민에서 평민으로 해방시키는 중대한 일을 한사람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용기를 얻어 많아 소리꾼들이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한 공로자 이기도하다.
장재백 명창에 대한 조사는 그이 출생지를 혹인할 수 있는 호적과 그가 판소리계의 일가를 이루는 내용을 알 수 있는 가계도 및 현지의 증언 그리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여 벼슬을 받았다는 교지와 각종 자료들이다.장재백 명창은 1852년 전북 남원군 주생면 내동리 10통 10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흥덕장씨로 그의 본명은 장기성(張基成)이다. 그가 태어난 남원군 주생면 내동리는 남원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순창가는 길목에 금풍 저수지가 있는 마을로 생가는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으며 동네 어귀에 있는데 집터 뒤에 그의 묘가 있다.
그의 스승은 순창에 거주하던 김세종 명창인데 소리공부를 하러 순창에서 잠시 거주했던 사실이 그의 고향을 순창으로 이야기 하거나 담양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고햐아에 대한 남원지의 기록은 그가 월락동에 와서 임종을 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주생면 내동리에서 후일에 그의 자손들이 남원시 월락동으로 이사를 한 기록으로 보아 타당성이 있으나 그의 증손자나, 5대 손녀의 이야기에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으며, 그의 무덤이 주생면 내동리에 집안묘와 함께 있는 것이 발견됨으로서 그가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의 고향땅에 묻힌 남원이 낳은 위대한 소리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는 한학을 많이 했던 지식을 겸비한 소리꾼으로 보인다. 임금이 내린 그의 교지를 보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뿐 아니라 본인까지도 벼슬을 받은 사실로 알 수 있다.그의 증조부 장지해는 通訓大夫 掌樂院正者 조부 장종석은 通政大夫 戶曺參議者이며 그의 아버지인 장희천은 가선대부 戶曹參判兼 同和 義禁府事者 그리고 장재백 명창 본인은 嘉善大夫 同和 中樞府事이다. 이러한 교지는 장재백 본인이 1884년에 받았으며 나머지는 1887녀에 贈職으로 받았다. 또한 그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1884년 12월에 받은 홍패에는 御邊軍官 張基成 武科兵科 第2593人及第出身者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소리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그는 소리꾼으로서 많은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조카인 장득진(장득주)은 국창 이화중선의 남편(또는 시숙)이자 또한 이화중선을 국창으로 길러낸 소리선생이다. 수궁가의 거장 유성준 명창 또한 장재백 명창의 조카사위이며 (장재백 명창은 유성준명창의 처삼촌임), 흥부가의 거장 김정문의 어머니는 유성준의 동생이며, 김정문의 부인은 장재백 명창의 손자이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남원의 소리 선생이었던 김기순(김영운)은 김정문의 조카이며 인간문화재 강도근 명창의 매형이며 또한 강도근은 안숙선 명창의 외당숙이다.이처럼 장재백, 유성준, 이화중선, 김정문, 김영운, 강도근등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 그와 직, 간접으로 인연을 맺은 집안이니 남원 판소리의 일가를 이루었음이요 우리나라 최고의 비가비 판소리 일가인 것이다. 그는 추천목으로 하는 소리가 장기라고 전한다. 추천목은 춘향가 그네뛰는 대목중 "광풍에 놀랜 원앙이 입도젖도 물어보고 우선 호우로 노는양"을 하는 대목을 부르는 소리로 그의 이런 특장은 유성준으로 이어졌다고 한다.그 외에 장재백에 대한 자료나 구술은 어디에서도 들을수 없었는데 그의 판소리 인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최근에 발견 되었다. 장재백 명창의 집안은 판소리가를 이룬 집안인데 그의 증손녀는 장녹운으로 9살때부터 박동실 선생의 문하에서 소리를 공부하였던 소리꾼이였으며, 무용 또한 잘하였다. 그의 딸이 현재에도 판소리를 하고 있으니 5대째 소리를 하고있는 우리나라 판소리 최고 집안 인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판소리를 지키고 가꾸기 위하여 얼마나 애정과 열정을 다 바쳐왔는지를 알 수 있느데 남원의 소리를 지키고 전승시키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결과로 오늘의 남원 판소리는 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인생 말년 60세때인 1902년에 원각사에서 고종어극 40년 경축행사에 김창완, 송만갑, 이동백, 강용환, 김채만, 유공열, 염덕준, 송옥봉, 유성준, 한경석, 허금파, 강소향 등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1907년 3월 10일 파란만장한 인생을 65세의 나이로 그의 고향에서 마감했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유성준
1873년 3월 27일 구례군 광의면 연파리 997번지에서 아버지 유경학과 어머니 장덕옥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강릉이다. 여기서 출생지 주소는 아마도 1914년 처음으로 호적을 만들 때 현거주지 위주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남원지의 기록은 그의 고향이 남원군 수지면으로 보이고 있는데, 그의 호적이 구례로 되어 있는 것은 그의 스승 송우룡의 집이 구례 광의면 연파리와 가까운 곳에서 살며 소리공부를 하였으며, 그 후 임방울과 불일폭포에서 독공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유경학은 호남좌도농악의 잽이로 한때 진안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조카인 김정문 명창이 그의 외할아버지 집에서 살면서 소리를 공부 하게된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스승은 조선후기 8명창의 한사람이었던 장재백 명창과 송우룡 김세종인데 김세종으로부터 이론을 배워 소리에 대한 일가견을 가짐으로서 전도성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전한다. 스승이었던 장재백 명창은 유성준의 처삼촌으로 소리 선생일 뿐 아니라 소리의 생명을 가르쳐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가 제자를 가르칠 때 성질이 괴팍하여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는 것은 소리의 기능만을 배우려는 제자들에게 소리기능 보다는 소리가 갖는 음양오행의 구성 원리를 가르치고자 했는데 제자들이 이를 어렵게 알고 배우려 하지 않는데서 그의 성질이 괴팍하였다 전하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실력을 갖추었다 하는 것은 그의 스승인 처삼촌 장재백이 임금에게서 받은 교지의 내용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는데 그가 모신 선생은 대부분 이론과 학문을 겸비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차후 보강필요)(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김정문
그는 어려서 남보다 출중치 못하고 성악적 재질 또한 평범하였던 것같다. 처음 외가에서 자라며 외숙인 유성준에게 소리 공부를 하는데, 언제나 남보다 뒤졌다. 소리 공부하는 광경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의 수고와 노력은 같은 것이다. 악보가 있어서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판소리란 구전심수로 전하여 내려오는 것이어서, 선생이 먼저 한 구절씩 선창하면 배우는 사람이 귀담아 듣고 그대로 방창한다. 이러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 그날 그날의 소리 마디를 끝마치게 된다. 재질을 타고난 사람은 스승이 한두 번 선창하면 그대로 방창하고 익혀가지만, 미련한 사람은 열 번을 일러 주어도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 버리기가 일쑤다. 정문이 외가에서 자라면서 유성준의 많은 제자들이 날마다 소리하는 것을 들어 왔건만 소리 귀가 아직도 트이지 않았음인지, 답답할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배우는 사람이 한두 번의 복창으로 익히면 가르치는 데도 재미가 나고 보람도 느껴 그 더늠을 계승시키려고 정성도 들이지만, 몇 번을 일러 주어도 받지 못하면 화부터 나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똑같이 가르치는 데도 김정문은 남 보다 뒤질 뿐 아니라 열 번을 일러 주어도 소리 마디를 받지 못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유성준은 그 단단한 참나무 북채로 김정문의 목덜미를 어떻게 사정없이 후려갈겼던지, 뼈가 부러지고 가죽이 찢어지며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러한 이이 있은 후로 김정문은 외숙의 슬하를 떠났거니와, 그때의 성처로 인하여 흉터가 생겼던 것이다. 그후 송만갑의 고수로 있으면서 오랫동안 보고 듣고 하는 동안에 자연히 소리귀가 뚫리고 소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다시 소리로 전환하여 송만갑의 지침을 받으면서 각고 수련 끝에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송만갑의 창제는 곡조의 변화가 그리 없고 아니리가 부족하여, 한구절 한구절에 너무 힘을 쓰게 되므로 전체를 통괄하여 가는는 유루(遺漏)가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력이 왕성하고 선천적으로 타고 난 목이 아니면 그 더늠을 이어받기 어렵다는 것이 뒷사람의 평이다. 다시 말하면, 튀어나오는 목으로 휘어잡기 때문에, 듣는데 상쾌하고 시원시원하기는 하나, 기교면에 있어서 진진한 맛이 적다는 것이다. 그는 송만갑과 같이 협률사에 참가하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스승의 더늠과 실제적 표현 동작을 모방하여 기량이 완숙하여졌다. 협률사가 통영에 이르렀을김정문의 장기는 흥보가, 심청가, 적벽가였으며 그의 더늠은 김준섭, 강도근, 박녹주 등의 문도들이 이어받아 전창하였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이화중선
이화중선은 전라북도 남원 천거 출신으로 몹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생고생으로 장성하여 17세 때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흠실 박씨 가문으로 출가하였는데, 밭갈고 김매고 베를 짜면서 평범한 촌부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러니까 1918년, 송만갑 협률사가 들어와 흠실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수지면민은 물론이고 인근면면에서 남녀노소할 것 없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협률사요 국창과 여류 명창들을 구경하려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화중선도 그틈에 끼어서 구경을 하였는데, 난생 처음으로 들어보는 판소리와 창극 춘향전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날밤 화중선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상하게도 어쩐지 자신의 길은 촌부생활이 아닌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3일간 계속된 협률사 공연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경하는 동안에 마음의 동요는 더하였다.
화중선의 눈으로 보는 남녀사원들의 화려한 옷차림은 마치 산과 선녀와 같아서 허영심이 발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으나, 감동과 충격으로 어덴가에 숨어 있었던 화중선의 음악적 재질이 싹트게 된것이고, 자기도 판소리를 배워서 여류명창으로 입신양명해 보려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흠실 박씨의 소위 행세하는 집안에서 예기가 될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화중선은 그저 탄식만 할 뿐이었다. 화중선은 밤마다 번민에 사로잡혀 미칠 것만 같은 심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필경 화중선은 남편도 가문도 체면도 저버리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오고 보니 막연하기만 하였다.
화중선은 덮어놓고 남원으로 달려왔으나 판소리를 어데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울 것인지 목표도 방향도 알 수 없었다. 남원거리를 방황하다가 어느 노파의 안내로 들어 간 것이 무당집이었다. 화중선은 그 집에 있으면서 무당이 가르쳐 주는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무당은 화중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주색가에게 몸을 팔도록 끈덕지게 졸라댔다. 그 당시 남원에 거주한 장득진 또는 장득주(장재백의 조카)는 명창은 못되어도, 본래 명창의 문하에서 이수하였던 만큼 조격이 높고 남원에서는 일류라는 평판이었다. 화중선은 어떻게 해서든지 장득주에게 소리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마침 장득주의 동생인 장혁주가 아직 총각이라는 말을 듣고, 화중선은 장혁주와 부부관계를 맺는 것이 빠른 길임을 생각하고, 자청하여 장혁주를 만났고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무당은 방해할 수 없게 되었고, 장득주는 화중선이 제수라는 인연에서 지성껏 소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화중선은 타고난 재능과 열성으로 수년만에 춘향가·심청가·흥보가 세 마당을 습득하였다. 그후 화중선은 장혁주와 이혼하고 어느 부자 모씨의 첩으로 들어가서 5백석의 재산을 얻게 되자 모씨와도 관계를 끊고 그 길로 상경하였던 것이다. 화중선은 조선권번에 기적을 두고 한동안 서울장안의 풍류랑들을 도취케한 사실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송만갑, 정정열의 지도를 받고 판소리 연마에 정진하여서, 화중선은 단연 여류 창악계 일면의 패권을 장악한 명창이 된 것이다.
화중선의 얼굴은 박색이었으나 그 성음만은 월등하게 아름답고 샘물 솟듯이 막힌 데가 없었다. 소리를 조작하지 않고 나오는대로 부르는대로 하여도 규범에 틀림없이 유창하게 잘불렀다. 이 점은 다른 사람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바였으나, 듣는 동안에 유쾌함을 느낄 뿐으로 듣고나면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화중선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1935년 줄타기 명인 임상문의 부친 임종원에 의하여 대동가극단이 조직되었을 때, 화중선은 거기에 참여하였는데 그 인원 구성은 강남중, 임방울, 신영채등의 명창과 이화중선, 이중선, 박초선, 박초홍, 등으로 판소리, 창극의 토막극, 남도민요, 줄타기의 연행으로서 연중 가설무대로 전국을 순회공연하였다. 이 대동가극단이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대동가극단으로서는 두 번째의 도일공연이었다. 일본의 레코드 회사에서 임방울과 화중선의 음반취입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일본 각지의 군수품공장과 탄광에 징용된 한국인 노무자를 위문하기 위하여 큐슈의 노무라, 야하다에서 공연을 마치고 오사카로 가려고 그 일행은 연락선을 타게 되었다.위문대라 하여 이들에 대한 보수는 없었고, 다만 여비와 숙식비 외에 점심대, 담배값정도가 지불되었다. 화중선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신병을 앓았었는데, 겹치는 피로와 영양부족으로 병세는 날로 악화되었다. 당시 일행이었던 임방울과 안영환의 말에 의하면, 화중선은 도저히 회생할 수 없음을 알고 늘 비탄에 잠겨 있었고, 「죽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하였었는데, 이날 새도나이카이를 향해 항해 중인 연락선 2등실에 누워있던 화중선은 아무도 모르게 갑판으로 올라가 바다로 뛰어들어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으니, 화중선의 그때 나이 46세였던 것이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배설향
1895년 남원에서 태어난 배설향은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맑은데다 음악적 감각도 뛰어나 한 번 들은 소리는 바로 기억하여 그대로 따라 불렀다. 이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그녀에게 자주 소리를 시켰다. 얼굴도 예쁜 배설향의 재능이 음악쪽으로 나타나자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명창으로 키우기 위해 당시 순창에서 명창으로 활약하고 있던 장판개 문하로 보내 소리공부를 시켰다. 배설향은 타고난 소질과 뛰어난 재능이 있어 판소리에 입문한 지 불과 5년여만에 판소리 본질을 터득하는 등 빠른 수준향상에 스승인 장판개도 놀라워했다. 이제 배설향이 그 어느 판소리 마당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안 스승은 1915년 그녀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그 당시 서울의 창극 공연극장으로 시민의 인기를 모았던 장안사·연흥사 등의 창극공연에 배설향은 스승 장판개와 함께 출연, 여류명창으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이처럼 대중의 인기가 크게 오르자 명창 송만갑은 자신이 이끌고 있는 창극단 협률사의 단원으로 배설향을 영입해갔다. 배설향은 협률사에서 송만갑은 물론 이동백 등 국창들의 뛰어난 예술정신과 소리의 경지를 직접 보고 들으면서 명창으로 연마해 나갔다.
배설향은 남다른 노력파였다. 그녀는 자신의 기량이 대가인 국창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있음을 알고 틈나는대로 소리공부에 열중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갈수록 기량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고 인기도 비례하여 대단하였다. 또 창극에서는 '춘향전'서 춘향역을, '심청전'에서는 심청역 등 소위 주연급을 도맡아했다. 얼굴이 가냘퍼 보였지만 성량이 풍부하고 음색도 매우 씩씩해 모습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으면 마치 목소리 고운 남자의 소리처럼 목소리가 컸다. 그리고 음색도 분명하고 선명했다. 그러니 그녀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갔고, 공연이 끝나면 배설향을 보려는 인파가 무대 위까지 몰려와 창극단 측은 공연때 마다 배설향에 대한 특별 경비를 세울 정도였다.
이 당시 배설향과 함께 활약한 여류명창으로는 김초향, 이화중선, 김녹주 등 쟁쟁한 명창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배설향의 수준이 나은 것으로 평가 되었다. 이처럼 5·6년 가량 서울에서 활약하다 1920년 배설향은 스승 장판개를 따라 전주에 내려와 예술활동을 하였다. 1937년 스승이 병사하자 그 이듬해 배설향도 스승을 잃은 슬픔과 이름모를 병으로 앓다가 세상을 버렸다. 이 때 배설향의 나이는 43세였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박초월
본명 (三順) 1916. 9. 17 - 1983. 11. 26
박초월은 남사당패의 일원이었던 아버지 박덕삼의 3남 10녀중 한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전한다.박초월 선생의 출생지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남원 운봉 비전리에 생존해 살고있는 친조카의 말에 의하면 [박초월 집안은 잠시 남원 아영면에 머물렀던 것 이외에는 대대로 운봉에서 살았다 한다. 출생지가 순천으로 기록된 것은 선생의 부친과 모친과의 부부싸움으로 인해 잠시 선생이 어머니 따라 순천에 머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순천태생이라고 한것같다.]이하생략.아무튼 박초월은 판소리의 텃밭이었던 이 고을에서 성장한 덕분에 일찌감치 소리와 접할 수 있었다. 운봉 비전마을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맞아 싸워 크게 이긴 곳으로 황산대첩비 있고, 특히 판소리를 집대성한 가왕 송흥록이 살았던 마을이다. 초월은 어려서부터 소녀명창으로 인근 고을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는데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하면서 사사하게된 스승은 김정문 명창이다. 김정문은 송만갑의 수제자로, 김정문에게 흥보가 한바탕을 사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리의 길로 입문하게 된다. 이때부터 소리에 완전히 매료된 초월은 유성준 명창에게 수궁가를 배운 후 16세에 상경해 조선성악연구회의 송만갑 명창에게서 매서운 소리 수업을 받던중, 1930년 전주 전국남녀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열일곱의 나이로 일등을 한다. 이때 오케, 폴리돌, 빅타 등 당시의 대표적인 레코드사들과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도 취입한다. 그후 10여년간 송만갑 명창에게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웠다.
임방울, 정
광수에게도 소리를 받은 초월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초월이 특히 잘 불렀던 심청가와 춘향가는 이때 배운 소리로, 박초월은 이 무렵 물산박람회에서 주최하는 명창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한다. 기량을 인정받은 초월은 이때부터 창극활동에 뛰어들게 되는데, 초월은 임방울, 박귀희 명창과 함께 동일창극단의 멤버가 되어 전국을 일주하기도 한다.이때 초월과 박귀희, 김소희가 함께 출연한 창극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춘향전으로 박귀희가 이도령 역을 김소희가 춘향 역을 박초월이 월매역을 맡아서 출연한 창극 춘향전은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로 대히트를 쳤다한다. 8. 15해방이 된후 초월은 박귀희, 김소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는데, 그중 햇님달님 이란 작품은 창극사에 족적을 남길정도로 대인기였다. 해방이 되고 창극활동이 한때 시들해지면서 창극단체가 해산되자 박초월은 서울을 등지고 지방을 돌며 제자를 양성하던 중 1955년에 박귀희, 김소희의 연락을 받고 상경, 한국민속예술학원(현 서울국악예술고)설립에 온 힘을 쏟는다. 이후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학교를 본궤도에 올려놓는데 큰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박초월이 국악사에 끼친 공로가 적지 않은데, 1964년 서울의 몇몇 창악인의 주도로 하한담이나 조선달 등 후사가 없는 선대명창의 위령제를 열어주는 뜻있는 일이 시작됐으나 차츰 국악인들은 이일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초월은 1966년부터 156위의 신주를 집에다 모셔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정성을 보인다. 이에 후배와 제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됨은 물론 주위의 칭송도 자자했었다. 1964년 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를 지정 받았고, 1973년 11월에는 [수궁가]의 보유자로도 지정을 받았다. 장기는 춘향가와 심청가이나 수궁가중 범피중류 대목과 토끼수궁에서 나오는 대목을 잘 불렀고, 발림도 좋고 노래 또한 절창이었던 까닭에 당대의 최고 인기를 누렸단다.박초월은 본인의 기량 뿐만 아니라 명인명창이 많이 배출된 가계로도 유명하고, 특히 남원국악에 끼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조통달 명창이 초월의 조카이자 수양아들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서울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남원에서 제자양성에 힘쓰고 있는 민속악의 거장이자 대금의 명인인 서용석은 초월의 언니인 박점례의 아들이다. 또 조카 서용석의 아들이자, 박초월의 조카 손자되는 서영호(아쟁)와 서영훈(피리)은 남원시립국악단에서 그 몫을 다해내고 있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현재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의 지도위원으로 있는 박천택(예명 동현)은 초월의 남동생 박수룡의 아들로 대금 연주활동은 물론 후배지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이렇듯 초월의 집안은 국악의 본향인 이 고장 남원 국악발전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초월의 성음을 흔히들 대통 속에서 나오는 성음으로 일컬을 정도로 뱃심으로 밀어 나오는 깊은 소리는 판소리의 특징인 수리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초월은 진양 설움 조를 장기로 할 정도였는데, 춘향가중 춘향모 비는 대목이나 이별가가 특기였다고 한다. 또한 낮은 소리를 낼 때도 특이한 장기로 여겨질 만큼 음역이 매우 넓었던 초월은 노래 솜씨뿐 아니라 연기력도 뛰어났는데 청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특히 추월강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다. 제자로 조통달, 최난수, 김수연 명창등이 선생의 소리를 잇고 있다. 1979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는 등 바쁜 여생을 보내다 1983년 11월 26일 많은 국악인과 팬들의 오열 속에 운명했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김영운
남원소리 전승의 과정에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소리꾼 김영운의 본명의 김기순이다. 그는 1917년 3월 9일 전북 임실군 성수면 양지리 69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 뒤 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주천면 고기리 고촌마을 241번지로 이사를 하였으며 후에 남원 천거동 187번지로 이사 하였다.명창 김정문이 그의 작은 아버지이며 명창 강도근은 그이 처남이며 또한 그의 외할아버지가 명창 유성준이다. 이렇게 훌륭한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쇠퇴해져 가기만 했던 판소리를 제대로 전수받을 수 없던 상황에서도 남원소리를 지키고 전승시키는데 평생을 받쳐옴으로서 오늘의 남원소리가 있다 할 것이다. 그의 소리선생은 작은 아버지 김정문 이였다. 그러므로 여러 선생에게서 소리를 전수받지 않은 결과가 되어 남원소리를 그대로 이어왔다 할 것이다. 그가 14세되던 1931년부터 1935년까지 5년간 당시 주천면 성주마을에서 살면서 남원권번의 소리선생을 하고 있던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웠다. 1935년 남원권번의 소리 선생이었던 김정문이 사망한후 남원소리는 그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소리를 배운 김정문의 제자들이 상당수 있었으나 남원에 남아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라나는 어린사람 들에게 남원소리를 전수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김영운은 1972년 사망할때까지 남원소리의 맥을 잇고 전수 하여온 장본인인 것이다. 어려운 여건과 시대적 상황에서 전수받은 남원소리를 그는 안숙선 이일주 장봉녀등에게 전수 하였다. 그는 또한 1958년 2월 8일 창립한 광한루앞 구춘향관 건너편에 있던 남원여성농악대에서 선생을 하기도 하며 소리를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가르쳤는데 소리를 가르칠 때 마다 사설의 내용까지도 완벽하게 이해하게 하였다. 다음 가르칠 사설중에 뜻을 모르는 소리가 있으면 당시 남원군수였던 양영조 군수에게 저녘에 집으로 찾아가 물어서 배운 다음 소리를 가르쳤다 한다.
당시 남원소리는 어렵게 전수되고 있었는데 농악대의 사람들은 많아도 소리를 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음에도 소리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직접 연탄불을 갈아 가면서 소리를 가르쳤다한다. 이렇게 어렵게 남원소리의 씨를 뿌려 싹틔어 놓고 1972년 그의 제자 집에서 생을 마감한후 명창 강도근에게 남원소리의 전수를 맡기고 남원시 어현동 함파우고개 양지 바른곳에 그가 배우고 기록했던 모든 남원소리의 사설을 안고 묻혔으나 찾는이 없이 외롭게 지내며 남원소리의 부흥을 기원하고 있는 진정한 남원소리의 전승자이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강도근
그는 동편제 소리의 마지막 적자였다. 소리에 대한 치열한 집념과 60여년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소리 연마의 과정, 그리고 자기 예술에 대한 자존심과 예술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고집스런 심성. 농사지으며 소리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았던 농투산이 소리꾼. 우리에게 전통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깨우쳐주던 남원의 그 고집스런 소리꾼 강도근 명창(본명 강맹근(姜孟根)·중요무형문화재<홍보가>기능보유자)이 세상을 떴다.천성적으로 타고난 크고 높은 소리의 거친듯한 쉰 목에 쇠처럼 단단한 소리로 늘상 소리판의 관중을 몰아대고 어르며 눈물과 웃음을 전해주던 그 소리꾼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돈과 명예에 눈을 돌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고향땅을 지키며 평생 지켜온 땅을 일구고 소리를 지키며 살았던 그는 햇빛이 눈부시게 환한 5월, 뚝배기 같이 질박한 사투리에 실어냈던 민중적 소리의 멋을 우리 가슴에 남겨놓은채 그렇게 앞서갔다.
96년 5월 13일 오후 3시. 지리산 자락이 닿을 듯 내려다 보이는 남원의 향교동 언덕빼기 자택에서 강도근 명창은 오랜 투병생활을 마감했고, 우리는 자랑스러웠던 또 한명의 소리꾼을 잃었다.
강도근 명창. 일흔여덟해를 살았던 그는 남원을 판소리의 고향으로 우뚝설 수 있게 한 대들보였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고향을 지키며 살았지만 그의 풍요로웠던 예술적 향취로 탄탄했던 남원은 오랫동안 그의 빈자리로 허전할 것임에 틀림없다.그는 1918년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중농의 집안이어서 생활에는 별 불편이 없었다. 그가 소리를 시작한 것은 나이 열일곱살 되던 해였다. 목이 좋다는 주위의 권유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그의 첫 스승은 김정문이다. 송만갑의 수제자이면서 유성준의 생질인 김정문은 당시 남원 주천에 살면서 남원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하고 있었고 강도근은 주로 김정문의 집에서 집안일을 봐주며 소리를 받았다. 2년여동안 소리공부를 하면서 그는 「흥보가」를 완전히 받았으며 다른 소리도 부분적으로 배웠다. 강도근이 무대에 선 것은 그 이듬해부터이다. 남원을 중심으로한 협률사 공연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소리에 부족함이 많다는 판단을 한 그는 공연 활동을 작파하고 다시김정문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공부를 했다. 김정문이 작고한 후에는 송만갑·정정렬·이동백 등이 운영하고 있던 「조선성악연구회」를 찾아가 주로 송만갑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스물 다섯 살이 되던 해에는 구례로 내려가 박봉술·강산홍 등과 함께 박봉래로부터 지도를 받으면서 쌍계사에 들어가 독공을 쌓았다. 후에도 쌍계사를 틈틈이 들렀던 강도근은 자신의 소리를 개발하고 완전한 득음을 위해 가진 쌍계사에서의 수련 과정이 자신의 소리를 단련된 소리로 발전시키는 거름이 됐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독공을 마친후 하동에 살고 있던 유성준을 찾아가 살고 있던 유성준을 찾아가 「수궁가」를 배웠다. 강도근이 가장 전형적이고 정통성을 지닌 동편제 소리꾼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스승들이 동편제소리를 발전시킨 대표적 소리꾼들이었다는 영향이 크다. 6·25 직후 그는 서울·목표·여수·부산·전주 등 전국 각 지역을 다니면서 소리 선생으로 지내다가 73년 고향인 남원에 돌아왔다. 남원시립국악원 창악 강사로 부임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지금껏 남원의 판소리를 지키며 수많은 재자들을 가르쳐냈다. 뿐 아니라 자신의 수련에도 치열해서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그는 어김없이 지리산 골짜기를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다. 소리판의 숨어있는 명인이었던 강도근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이다. 판소리의 예술적 완성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걸었던 그의 고집스럽고 치열한 삶은 소리판의 모범이 되기에 족했고 그 소리에 대한 자세나 열정은 그의 독특한 예술성과 함께 민중적 정서의 감동을 얻어냈다. 그는 자신의 소리가 명예나 돈과 바꿔지는 것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문화재가 되는 일에도 별반 관심이 없던 그는 문화재가 되려면 사설을 고칠 필요가 있다는 주위의 권유를 받았을 때도 한마디로 묵살해버렸다. (남원의 억센 사투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던 그의 사설은 주위로부터 오자가 많다는 오해를 받았다.)
그는 배운 것을 고쳐 부르려 하지 않았음은 물론 자작은 더욱이 하지 않았다.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만을 하겠다는 신념을 간직해온 그는 그만큼 자신이 전승한 소리를 지키려고 노력한 소리꾼이었던 것이다. 판소리 연구가 최동현교수(군산대)는 『강도근이 「타고난 성대」에 일흔살이 넘도록 큰 성량과 고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후천전인 끊임없는 노력이 밑바탕 되었기 때문이며 더욱이 남원 사람의 감성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왔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소리꾼이다』고 평가했다.
그의 특기는 「흥보가」다. 그중에서도 「제비후리는 대목」은 씩씩하고 담담한 소리에 갑자기 솟구치는 쇳소리로 내지르는 독창적인 창법으로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8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이후 4명의 제자들을 이수자로 두었다. 남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난초·전인삼씨,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명희씨와 구례의 마인화씨 등이다. 이들 외에도 오늘의 국악판에서 활동하고있는 내로라하는 국악인들 중에는 그의 문하를 거쳐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안숙선·오갑순·강정숙씨 등도 그의 문하에서 소리 바탕을 배웠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기능보유자 후보를 지정하지 못한채 세상을 떳다. 그 깊은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치열해야만 하는 소리길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나이어린 제자들에대한 보다 큰 꾸짖음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동편제 소리의 마지막 적자를 잃었다. 「대마디 대장단」의, 복잡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고 씩씩하게 풍부한 성량으로 관객들을 몰아가던 그의 창창한 소리를 우리는 직접 만날 수 없다. 89년 위암으로 대수술을 받고서도 오히려 예전보다 적극적으로 소리판에 나섰던 그는 오랜 투병 생활 중에도 나이 어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렸었다.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남원의 국악 애호인들은 그의 장례를 남원민속국악진홍회의 국악장으로 치렀다. 정성이 모아진 의미 있는 자리였지만 그의 예술이 지닌 높이나 깊이로 치자면 그는 너무 쓸쓸하게 속세와 인연을 매듭짓게 했는지 모른다. 그는 ’96년 5월 15일에 많은 제자들과 그의 소리를 사랑하는 애호가와 국악인들의 오열 속에 그의 스승 김정문의 잠들어 있는 주천면 상주 마을에 묻혔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강순영
강순영은 1927년 9월 20일(음력) 전북 남원 천거리에서 태어났다. 강순영은 남원에서 출생하여 젊어서는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33세 때 혼인하여 39세때 남편을 따라 경상남도 진주로 이사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강순영의 아버지 강창길은 경남 진주에서 삼형제중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 성모씨는 경남 함양에서 출생하였다. 강순영은 1남 6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순영의 위로 언니 강모씨, 강필순, 오빠 강태근, 언니 강복달, 강복수가 있었는데 현재 강순영과 언니 강복달만이 생존해 있다 한다. 강순영은 7남매 가운데 막내딸이다 보니 첫째언니 강모씨의 자식중에는 강순영보다 먼저 태어난 이가 있고 둘째언니 강모씨의 자녀 중에서는 강순영과 동갑인 사람이 있다 한다. 강순영의 친형제 가운데 국악을 한 사람은 강순영뿐이며 그의 언니 강복달의 딸 안숙선이 현재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로 활동 중이며 그 동생 안옥선도 현재 국악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강순영의 오빠 강태근은 슬하에 10남 5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넷째아들 강정열이 전북도립국악원 교수로 가야금 산조와 병창의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강순영의 조카인 안숙선, 안옥선, 강정열 모두 초등학교때 강순영 문하에서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익혔다. 그리하여 안숙선, 안옥선, 강정열은 가야금연주에 있어서 기초를 확고하게 다질수 있었다. 또한 안옥선은 어려서 이모인 강순영에게서 배운 신관용 가야금 산조를 음반으로 낸 바 있고 강정열을 그 산조로서 1985년 전주대사습대회에 참가하여 기악부장원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안숙선은 근래에 강순영에게서 가야금 산조를 틈틈이 재학습하고 있다고 한다. 안숙선의 재능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은 그의 이모 강순영이었고 안숙선이 일찍부터 국악에 매진할수 있었던 것 또한 바로 그 이모덕택이라 할 수 있다. 안숙선은 9세부터 수년간 그 이모에게서 가야금과 무용을 배우면서 전통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안숙선은 강순영의 소개로 주광덕과 김영운 문하에 들어가서 판소리를 사사받았다.
강순영의 증언에 의하면 안숙선을 가르친 명창 주광덕은 열사가를 특히 잘 불렀다고 한다. 암튼 그 옛날 강순영의 노력이 있었기에 훗날 안숙선과 같은 명인이 나올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순영은 애써 겸손하게 말한다. 조카딸 안숙선이 인간문화재가 되기까지 그 스승 박귀희 명인의 노고가 가장 컸노라고. 강순영은 자신을 내세우기 강순영 명인의 집안에는 유능한 전통예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강순영의 백부 강원중은 줄타기의 명수였고 그 아들 강도근은 판소리 인간문화재였고 강순영의 중부 강모씨 아들 강백천은 대금산조 인간문화재였다.강순영의 사촌오빠인 강도근은 아버지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는데 강도근의 위로 강석근, 강석춘과 같은 형들이 있고 아래로는 강선화, 강해근같은 동생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강석춘이 일제때 가야금 연주자로 활동한 바 있다. 그리고 강석근의 딸 강옥련(남원태생)은 판소리 활동을 한 바 있다. 강순영의 사촌오빠 강백천을 슬하에 강산홍과 강초운 자매를 두었는데 둘다 판소리 명창이었다. 강산홍은 강순영의 조카지만 강순영보다 7,8세 가량 연상이었다. 강산홍은 수궁가를 특히 잘 불렀으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진주에서 작고했다 한다. 강초운은 강순영보다 5,6세 가량 연하로서 언니 강산홍한테 판소리를 배웠는데 춘향가를 특히 잘 불렀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 한다. 그리고 일제때 이름을 떨친 가야금 명인 강태홍도 강순영의 친척뻘 된다. 강순영의 남다른 예술성은 이러한 집안 내력에서 비롯된다.
강순영은 15세 무렵부터 3년 동안 신관용 문하에서 가야금을 배웠다. 신관용은 가야금 풍류,산조, 병창순서로 가르쳤다고 한다. 강순영은 풍류의 경우 <본령산>과<중령산>은 안배웠고 <세령산>부터 끝까지 익혔는데 지금은 거의 모두 잊어버렸다 한다. 그리고 병창은 단가<어화청춘><객래문아><공도란이>, 춘향가중 <사랑가>, 심청가중 <심봉사 황성 올라가는데>등을 배웠다한다. 강순영의 스승 신관용은 1911년무렵에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동향인 김제 출신 이영채 문하에서 가야금 풍류, 산조,병창을 배웠다 한다. 이밖에도 신관용은 여러 스승들에게 판소리, 거문고, 피리, 대금, 해금, 양금, 장고, 꽹과리 등을 익혀 여러 음악에 능했다고 한다. 강순영은 19세때부터 5년동안 스승인 신관용과 함께 호남창극단에 소속되어 공연활동을 했고 창극단에 몸담고 있던 22∼24세때 신관용 문하에서 가야금을 재학습했다 한다. 당시 호남창극단에는 박봉술,강도근,강사홍,강종철같은 남자명창과 정채란, 최설향, 김명화, 강옥련같은 여류명창이 있었다 한다. 당시 창극공연을 하면 박봉술, 강도근같은 남자명창들은 중역을 맡았고 여류명창들은 단역을 맡았다 한다. 정채란은 전북남원태생으로 강순영보다 15세 가량 연상이었으며 창극무대에서 연기를 무척 잘 했는데 아편중독으로 건강이 안좋았다 한다. 최 설향은 전북 김제사람으로 판소리를 잘했고 김명화는 경북 장수부근 출생이라 한다. 최설향은 창극단 활동시 신관용과 함께 살았다 한다. 강순영은 호남 창극단 활동시절인 24세때 신관용 문하에서 가야금 재학습을 마치고 남원에서 신관용과 헤어진 뒤로는 그 스승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한다. 신관용은 당시 남원을 떠나 마산으로 갔다고 한다. 신관용은 전주에서 주로 거주했고 남원을 자주 왕래하며 활동했다 하는데 아편중독으로 중년을 매우 비참하게 보내다가 47세 무렵에 김제에서 약물중둑의 후유증으로 타계했다고 한다. 신관용은 여러 음악에 능했지만 가야금을 가장 장기로 삼았고 가야금으로는 주로 산조를 연기했다고 한다. 풍류는 별로 연주해지 않았고 병창은 무대에 올라가면 자주 했다고 한다. 신관용의 산조녹음은 개인 소장 릴테잎 3종이 남아있는데 국악애호가들이 그의 산조를 듣고서 감탄하지 않은이가 없다. 신관용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얌전한 맵시에 성품이 점잖았고 매우 고박하고 기품있는 산조를 들려주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신관용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땐 그의 진가를 미처 간파하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한 명인이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신관용의 산조는 음악성이 부족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치 도를 닦듯이 묵묵히 실력을 연마하고 조용히 풍류를 즐기다가 세상을 떠난 신관용의 성품 탓에 그의 산조는 다른 유파에 비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신관용은 심한 아편중독 때문에 제자들이 오래 붙어있질 못했다. 아편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제자를 성의껏 가르치질 못했고 그런탓에 수재자가 많지 않다. 신관용의 가야금 산조를 이어받은 이로는 강순영을 비롯해서 송준섭, 이한양, 조광옥을 꼽을수 있고 현재 강순영의 제자들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한영과 조광옥은 강순영이 22세에서 24세때 신관용 문하에서 가야금을 재학습할 당시 함께 배운사람들이라 한다. 이한양은 명고수였고 신관용 문하에서 취미로 가야금을 배웠는데 가야금 성음이
발발성이었다고 한다. 조광옥은 작고한 판소리 명창 조난옥의 오빠이며 조난옥은 강순영보다 20세가량 연상이었다 한다. 신관용의 후손은 현재 전주지역에 거주하고 있는데 국악의 맥을 잇는 후손은 없다고 한다. 강순영은 신관용 문하에서 배운 산조가락 그대로 연주하려고 노력했다 한다. 그리고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는 다른 유파에 비해 이어걸이, 말뛰는 가락등 독특한 점이 많다고 한다. 강순영은 신관용류에 다른 유파의 산조 중에는 함동정월류 가야금산조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한다. 강순영은 스승 신관용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청을 잘 맞처 가야금을 타야하고 떠는 발발성은 절대로 내서는 안된다.뒷손 정리를 잘해야 발발성을 피할수 있다."
강순영 일가는 유명 국악인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으나 강순영의 부모는 그가 국악하는 것을 강하게 만류했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친척 가운데 국악인이 많았기에 누구보다도 국악인들의 험난한 역경을 잘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의 국악계 진출을 무척 염려했던 것 같다. 허나 일찍부터 국악에 깊이 매료된 강순영의 뜻은 확고했고 끊임없이 국악학습에 매진했다. 강순영은 신관용 문하에서 가야금을 익히는 동시에 그와 같은 시기인 15세 무렵부터 약 5년 동안 사촌오빠인 강도근에게서 여러 단가와 판소리 다섯바탕을 토막소리로 배웠다. 그리고 강순영은 19세 무렵 한달 동안 이기권의 문하에서 숙영낭자전을 비롯하여 여러 단가를 배웠다. 당시 이기권은 이리권번의 판소리 선생이었으나 무대 명창이기보다는 소리선생으로 더 유명했다. 강순영이 당시 이기권 문하에서 배운 소리 중에서 지금 부를 수 있는 것은 단가 <사창화림>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강순영은 가야금 뿐 아니라 판소리 학습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고 그리하여 가야금 외에 판소리에도 매우 능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 젊어서는 판소리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1등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강순영은 아쟁, 양금, 무용등 여러 음악과 춤에도 열정을 보여 왔다. 일흔을 넘긴 지금도 그는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아쟁산조는 다름 아닌 조카 강정렬한테 근래에 배웠다. 양금은 전남태생의 시조 잘하던 어떤 노인에게서 배웠는데 그때 익힌곡은 <염불><타령>등이라 한다. 그리고 무용은 어려서 남원권번의 춤 선생이었던 행옥과 행란 문하에서 기초를 닦았고 중년에는 진주사람 강귀례한테 배웠다 한다. 강순영이 행옥과 행란 문하에서 배운 춤은 남원 검무이고 강귀례에게서 익힌 춤은 진주검무, 살풀이 등이라한다. 남원 검무와 진주 검무는 칼을 다루는 손놀림이 다른데 남원 쪽에서는 칼을 별로 놀리지 않고 그냥 뿌리는 경우가 많고 진주 쪽에서는 칼을 돌리는 기교가 많다고 한다. 진주 검무는 염불-타령-자진박-타령순서가 제격이라한다. 강순영은 이제 나이가 들어 춤을 잘 추지 않고 그 순서도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강순영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국악은 신관용 문하에서 배운 가야금 산조 한바탕, 가야금병창 단가<어화세상>과 <객래문아>, 이기권문하에서 배운 단가<사창화림>,강도근 문하에서 배운 심청가 중 <곽씨부인 유언하는데>와 춘향가중 <십장가 뒤의 풍경>이다.
구음은 현재 연호한 탓에 고음 처리가 어려워져서 거의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음반 취입 전날 강순영은 박환영 고수와 연습을 하면서 춘향가중 <십장가 뒤의 풍경>을 15분가량 부른 적이 있는데 강도근 문하에서 배운 송판 동편제로 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십장가 뒤의 풍경>은 여러 문제로 인해 음반 취입 당일 녹음이 성사되지 못했다. 1980년 10월 이보형 문화재 전문위원의 현장 조사에 따라 문화재 관리국 문화재 연구소에서강순영의 가야금 산조에 의한 조사보고소가 발간되었다. 이 책을 계기로 그간 묻혀있던 강순영과 그가 보유한 음악의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984년에는 황미연의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 연구"라는 논문이 발표되면서 강순영의 가야금산조에 대한 연구가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25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국립국악원 주최의 무형문화재 정기공연으로 강순영의 독주무대가 마련되어 강순영과 그의 산조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공연에서 강순영은 서용석의 장고 반주에 맞춰 가야금 산조 한바탕을 연주했고 그,의 조카딸 안숙선과 안옥선이 찬조 출연하여 서용석의 장고반주에 맞춰 가야금 병창으로 단가 <녹음방초>와 흥보가중 <흥보 집터 잡는데>를 불렀다. 강순영은 27세때부터 5년동안 남원 국악원에서, 39세때부터 12년동안 진주국악원에서, 51세때부터 지금까지 경남 진주시 평안동 11번지 1통 1반 자택에서 후학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쳐왔다. 앞서 언급한 강순영의 조카 안숙선, 안옥선, 강정열을 비롯해서 오갑순, 문숙희, 정해임, 강희숙, 김청림, 한혜순, 김현숙등 30여명이 강순영의 문하에서 가야금, 판소리, 무용등을 배웠다. 이처럼 강순영은 오랫동안 제자 양성에 힘썼고 1970∼80년대에는 진주 팔검무 악사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그리고 그는 지금도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김수악 명인과 함께 진주의 국악 보존과 발전에 주도적으로 힘쓰고 있다. 강순영 명인은 그간 귀한 음악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에 묻혀 지낸 탓에 공연이나 방송 활동이 드물었고 음반 취입도 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가르친 이들은 오늘날 국악계의 스타로 부상하여 공연, 방송 등의 눈부신 활동과 더불어 무수히 많은 음반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강순영 할머니의 데뷔음반이 나오게 되어 다행이다. 70세를 훌쩍 넘기고 나서 이렇게 자신의 첫 음반을 내게 된 강순영 할머니의 경우는 그래도 행운으로 여겨야 된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순영명인과 같은 진주 지역에 사는 김수악 명인은 현재 73세인데 단 한 장의 음반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김수악 명인은 현재 무용 분야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긴 하지만 춤 이외의 구음, 판소리, 가야금 등 여러 음악에도 두루 능하기 때문에 음반 보존이 매우 시급한 상황인데도 현실은 그러하다. 특히 구음의 경우 김수악 명인은 현재 자타공인한 최고의 실력가이다. 이런 사정은 이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순간 녹음하나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속절없이 없어지고 말 문화재들이 산재해있다.
1996년 늦가을 강순영 명인을 처음 찾아갔을 때의 그 신선함, 따뜻한 느낌, 그 감동적인 가야금 연주가 다시금 생각난다. 그렇게 엄청난 음악이 지구상에서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음반 취입이 끝날때까지 조마조마했다. 이렇게 좋은 음질로 영구히 기록으로 남게 되어 기쁘다. 아울러 앞으로도 끊임없이 강순영 명인의 음악이 잘 전승되었으면 좋겠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안숙선
안숙선(安淑善)은 1949년 남원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예술가로 태어난 그녀의 성음은 청미하고 애원이 깃들면서 매력이 넘쳐흐른다. 안숙선은 어린 시절 남원 국악원에 들어가 명창 강도근을 사사하여 춘향가와 흥부가를 이수하였는데, 천부적 재질을 타고났음인지 판소리 공부는 일취월장하였고, 15세에 벌써 소녀 명창으로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안숙선은 남원 국악원을 수료하고 1968년 다시 정광수 명창에게 수궁가를, 여류 명창 김소희에게 춘향가·심청가·흥부가를 재수하였으며,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를 이어받고 절차탁마하여 일가를 이룬 것이다. 안숙선은 판소리 연마에 정진하는 한편, 1976년 가야금 병창 문화재 박귀희 문하에서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웠는데, 재주가 출중하여 학습 2년 만에 달인이 되었고 박귀희의 후계자로서 명망이 높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그녀는 그 애원이 깃든 소리와 재치 있고 자연스러운 연기로 세인의 눈길을 끌어서 공연할 때마다 그녀의 명성과 인기는 상승일로를 치달았다.
안숙선은 1980년 홍콩에서 개최한 민속 예술제에 참가하여 동남아 12개국과, 81년에는 재일한국문화원 초청으로 일본 각지를 순방 공연하였다. 그뿐 아니라 82년 미국에서 개최한 월트 디즈니 페스티발에 참가 공연하고 이어서 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문화 행사에, 그리고 85년 미국 7개주 순회공연 등등 눈부신 국외 활동의 경력으로 안숙선의 명성은 나날이 유명해졌다. 그 후로도 그녀는 추계 예술 전문대학 판소리 강사로 역임하며 기량의 완성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했다. 1998년 국립창극단장 겸 예술총감독으로 재직 했었고, 1996년도엔 불란서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는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로 활동 중이다.
안숙선은 1946년 9월 5일에 남원군 산동면 대상리 598(속칭 웃점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배우는 것마다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남원시 천거동 소재 이모 집에 살면서 국악에 접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녀는 음악적 소질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모 강순금은 가야금의 명인이었는데, 그녀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그때 그녀는 남원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 그녀는 이모로부터 1개월 만에 풍류 한 마당을 이수하고 집 근처 남원 국악원에 다니게 되었다. 박귀희 문하에서 중요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의 전수생을 거쳐 이수자가 되었고 다음은 조교가 되었다. 그리고 1998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강정숙
강정숙(姜貞淑)은 1952년 남원 태생이며 그녀는 어린 시절 남원 국악원에서 명창 강도근을 사사하여 춘향가·흥부가·심청가를 차례로 이수하여 소리의 기초를 닦았다. 강정숙의 타고난 음악적 재질은 남달리 월등하였고 성음 또한 아름다우며 학습의 진도가 빨랐다. 1974년 남원 춘향제에 참가해서 판소리부문에 입상하였고, 이듬해 KBS주최 명인 명창 대회에서 입상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아 국립 창극단 단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강정숙은 자신의 소리에 미진한 점이 많음을 깨닫고 여류 명창 김소희에게 춘향가·흥부가·심청가를 재수하였고, 다시 여류 명창 박초월에게 수궁가를, 그리고 박동진 명창에게 적벽가를 이어받은 후 연마적공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다재다능한 강정숙은 판소리에 그치지 않고 박귀희 문화재를 사사하여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학습하여 각기 일가를 이룬 준재이다.
1984년 킹 레코드 회사에서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음반 취입하였고, 1985년 전주대사습대회 가야금병창부에 장원함으로써 그녀의 명성을 떨쳤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활동 중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및 산조 기능보유자로 2001년 9월 6일 지정되었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강정렬
전라북도립국악원 가야금 병창 교재에 소개된 강정렬 선생의 삶과 예술세계를 살펴보면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강정렬의 예술세계는 넓고도 깊다. 그를 전통시대의 마지막 예술인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전통시대의 예술인은 스승과 일대일로 교육받는 이른바 구전심수(口傳心授)라는 전통적인 학습법을 받은 세대라고 일컫지만, 또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악가무(樂歌舞) 일체를 총체적으로 습득한 세대라는 점이다. 반면에 현대의 전토음악 학습과 교육은 대단히 세분화, 전문화되어서 특정 어느 한 분야만을 연마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강정열을 전통시대의 마지막 예술인이라고 칭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가야금 산조로 국악에 입문한 이래, 판소리와 가야금 병창, 그리고 아쟁에 이르기까지 높은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동현은 신나라레코드에서 출시된 [강정열의 국악세계]CD 해설문에서 강정열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강정열은 오랫동안 판소리와 가야금을 익혀 그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정달영의 고아한 병창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강정열은 판소리 목으로는 수리성을 가졌다. 수리성은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소리 중에서도 거친 소리를 말한다. 강정열의 병창은 수리성으로 하기 때문에 요즈음 흔히 들을 수 있는 여자 소리꾼들의 곱기만한 소리와는 달리 훨씬 강하고 힘찬 맛을 낸다. 거기에 강정열의 가야금은 장단의 박을 짚어주거나 소리가 없는 공간을 메꾸어주는 소극적인 역할을 머물지 않고, 소리의 선율이 많은 신관용류 산조를 장기로 삼아 연주하기를 즐겨한 것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만한 일이다. 계면조가 많은 것을 꼭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씩씩한 우조 가락이 뒷받침되어야 계면조도 빛이 난다는 것만은 분면한 일이다." (가야금산조와 병창의 명인 강정렬 중에서)
강정열은 1950년 남원시 보절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예술가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선친 강태근은 비록 이른 나이에 세사을 떠났지만 가야금 산조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었다. 본격적으로는 인간문화재였던 대금의 명인 강백천과 동편제 판소리의 대부 강도근명창이 그의 숙부이며,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의 계승자인 강순영(현 경남 도무형문화재)이 그의 고모이다. 뿐만아니라 판소리 명창 안숙선은 내종 사촌이며, 그의 동생 강동렬, 강옥자, 강영자 모두 판소리와 가야금, 가야금 병창 등 국악예술에 종사하고 있다.
이렇듯 음악가 집안이라는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강정열은 자연히 우리 음악을 생활의 일부로 알고 성장할 수 있었다.
강정열이 13세때 진만국(전북 김제군 이서면 사람이라는 점과 본명이 진태만 이라는 점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라는 가야금 병창 선생을 만나 1년여 동안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고, 그 이듬해에는 남원 국악원에서 강도근 명창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흥보가]와 [수궁가] 두 바탕을 다 배우고 났는데, 갑자기 변성기가 찾아와서 상청이 도저히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상청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선생님은 "너는 가야금이나 해라"라며 북채로 호통만 치니, 15살 무렵의 청소년기였던 강정열은 오기가 발동해서 그 길로 지리산으로 입산해 버렸다. 결국 그는 지리산에서 독공을 거듭하여 변성기를 이겨내고 상청을 되찾아 지리산을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는 67년도에 서울로 자리를 옮긴다. 서울에서는 국악예술고등학교에 재직중이던 김병호에게 산조를 배우다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성금연 문하에 입문하여 가야금산조를 배우게 된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그는 69년도에 다시 남원으로 내려와서 남원국악원 강사생활을 시작하는데 주위 사람들의 권유(특히 그는 가야금병창 및 판소리의 중견 국악인 강정숙을 잊지 못한다. 강정열은 어려서 강정숙의 집안의 양아들로 입적된 바 있다.)로 인해서 다시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그때 만난 스승이 가야금 산조의 명인 서공철이었으며, 그에게서 가야금 산조, 철가야금 산조를 사사 할 수 있었다. 또한 가야금병창으로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 대목>, 단가 <백발가> <객내문아흥망사(소노지아)>등을 배울수 있었다.
다시 서울 유학을 마치고 남원국악원으로 복귀하여 가야금 사범활동을 하던 차에 부산국악협회의 요청으로 1773년에 거처를 부산으로 옮겨 강사생활를 시작하였다.
1980년 5월에는 7년 동안의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근처인 전주로 옮기게 된다. 전주에서 '강정열 가야금 연구원'을 설립하여 국악 보급에 힘을 쓰는 반면에, 전에 남원에 있을 때 배웠던 신관용류 산조를 다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도 신관용(1912-1961)으로부터 직접 배울기회는 없었던 터고, 그 마저도 이미 타계한 이후라서 그는 그가 남긴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어렵게 독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강순영은 신관용 생전에 창극단 활도을 같이 하면서 2년여 동안 그의 가야금 산조를 배웠다.)
전주에서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4년부터 전북대 음악교육과 강사활동을 시작으로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1985년도에 국악계 최고의 등용문 중 하나인 전주대사습놀이 대회에서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연주하여 기악부 장원을 수상한 바 있으며, 다음 해인 1986년부터 전북도립국악원 교수로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
강정열은 후진을 양성하는 와중에도 예술적 지평을 넓히고자 자기 영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1988년에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정달영 명인의 문하에 입문한 일이다. 정달영 명인이 전주대사습에 심사차 내려와서는 강정열을 만나게되고, 당장 제자로 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정달영은 강정열을 전수장학생으로 삼아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꼭 10년을 정달영에게 배웠다. 한마디로 강정열의 예술은 정달영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2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을 이수하고, 1995년에는 전수교육 보조자로 지정되기에 이르른다. 그리고 2001년에는 드디어 스승의 대를이어 인간문화재 지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정달영류 가야금병창의 가장 확실한 정승자가 되었고, 남자 가야금병창 부문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 국아계에 남자에 의해서 불리는 가야금병창은 이제 희소하다. 그러나 강정열은 희소성만으로 그예술성을 인정받고 있지 않다. 강정열이 가장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의 가야금병창이 서공철, 정달영으로 이어지는 고제(古制)의 맥을 고스란히 잇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그는 계파와 바디를 떠나서 '가야금병창의 역사'그 자체라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강정열의 진가는 갈수록 빛나고 있다. 우리 전통 음악계가 여성화되면서 호탕한 남성적 전통이 갈수록 희미해져 가는 마당에, 강정열 혼자 그 전통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도립국악원 가야금병창 교재중 강정열의 삶과 예술.1999년)(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유영애
1948년 장흥 출생.
13세때 우연히 여성국극을 관람하고 난 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목포에서 활동하고 계셨던 김상룡 선생께 판소리 사사를 시작으로 다시 성우향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춘향가>를, 한농선 선생의 문하에서<흥보가>를, 조상현 선생의 문하에서 <심청가>를 공부한 여류명창이다.
1970년 호남예술제와 '86년 경주신라문화제의 판소리 부문에서 장원을 한 뒤, '88년 남원의 전국 판소리대회 명창부에 출전해 대통령상을 탄 유영애 명창은 목이 실하고 소리가 구성지며 여성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하성, 그것도 하성의 배음(倍音)인 중하성에 특장을 지니고 있는 숨은 명창이다. 1993년 남원국립민속국악원에 몸을 담으면서 남원과 인연을 맺은 유영애 명창은 '94년 국립중앙극장에서 한농선 선생에게 잊힌 <흥보가>를 97년에는 조상현 선생에게 사사받은 <심청가>를 완창 하여 그 실력을 널리 인정 받는다.
판소리를 시작한 뒤 줄곧 소리의 고장 남원을 동경하며 남원에서 소리를 하고 살기를 갈망했던 그녀는 '93년부터 남원에 기거하면서 활발한 연주활동과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국악계의 선후배들의 일을 챙기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유영애 명창을 따르는 후배들이 꽤 많아 항상 주위에 사람들이 들끓는다.
이렇게 서서히 남원사람으로 자리를 잡은 유영애 명창은 2001년 전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태어나기는 장흥이나, 소리인생으로 다시 태어난 제2의 고향 남원에서의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녀의 장남인 이태완군 또한 어머니의 뒤를 이어 같은 소리길을 걷고 있는데, 전남대학교 국악과를 나온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소리꾼으로 현재 남원시립국악단 창극부 단원으로 활동하고있어 송흥록의 가계와 박초월의 가계, 강도근의 가계를 이어 남원 판소리에 또 하나의 가계가 형성될 것으로 보여 남원인들의 관심이 지대하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전인삼
동편제 소리의 적자 전인삼 명창은 1962년 7월 2일 남원시 노암동 391번지에서 부친 전상호와 모친 이경심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노래 잘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유년기에 접어들면서 노암동에 자리잡고 있는 국악원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흠뻑 빠져 소리판에 뛰어든때가 16살 되던 해이다. 남들에 비해 조금은 늦은 나이지만은 집근처 국악원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를 귀동냥한지가 어언 7년에 가까웠던때라 그는 소리를 3년공부한 선배들과 수업진도를 같이 나갈 정도로 이미 소리꾼으로서의 기초를 다 다듬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처음 강도근 선생께 소리를 배우러 찾아 갔을 때 그의 첫소리를 듣고는 " 이놈 어디서 몇 년 배워가지고 왔네 " 할 정도로 이미 자신도 모르게 소리의 세계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리판에 뛰어든 그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때문인지 소리공부를 남들보다 열 배는 더 열심히 했고 그러는 동안 많은 시련도 격어지만 82년도 추계예술대학 국악과에 실기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진학하고부터 그의 소리세계는 더욱더 깊고 넓어지게 되었다.이 땅에서 판소리로 대학을 진학한 최초의 소리꾼인 그는 서울에서 소리공부는 시원치 않았다.그래서 전통적인 소리공부의 방식을 좇아 성창순 선생 집에서 사숙을 하며 3년간의 독공에 들어간다. 정말 열심이었다, 그의 소리를 지켜보았던 이들의 말을 빌면 ' 요 근자에 그렇게 야무지게 공부한 사람은 없을 것이구먼' 할정도로 오직 소리만을 위해 살았고 득음만이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러한 도중 그는 '84년 대학 2학년때 제11회 춘향제 전국 판소리명창경연대회 일반부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그 기량이 높게 향상되었고, 같은 해 국립국악원에서 주최한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도 1등을 할 정도로 그의 실력은 이미 만 천하가 인정하게 되었다.그래서인지 늘 그가 말하기를 " 소리를 잡아준 이가 강도근 선생님 이라면 귀를 트이게 하신 분은 성창순 선생님입니다"라고 말한다.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25세의 약관의 나이로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창악강사로 부임하게 되고, 또 국악계에서는 최연소로 우석대학 국악과에서 강의를 맡게 된다. 그리고 전북도립국악원에서 창극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89년 당시 광주시립국극단장이셨던 조상현 선생으로부터 조연출로 발탁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던 중 91년 스승이신 강도근 선생이 자리에 눕게 된다.
이때 남원의 뜻있는 많은 인사들이 그를 남원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이기도 했으나 그가 남원으로 다시 오게된 진정한 동기는 스승인 강도근 선생의 ' 소리를 밥먹듯이 하라. 시간이 없으면 궁시렁거리기라도 하라. 너는 동편제 6대다. 이말 명심하고 남원 뜨지 말고 니가 이 땅을 지켜야 한다.' 말씀을 차마 잊을 수가 없어서 였기때문이었다고 한다.
91년 남원시립국악원 창악강사로 자리를 옮겨 고향에 자리를 잡은 그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는데 그가 맨 처음 시작한 일은 판소리의 본고장이라고 자부하는 남원이면서도 속으로는 소리를 아는 이가 너무도 적어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서기 위해 추임새라는 판소리 동호인 모임을 만들어 7년간 지도를 해왔다. 그 기간중 그의 밑에서 소리를 조금씩이라도 이해하고 단가 한마디쯤은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의 과정을 거쳐간 이가 작으만치 천명이 넘는다 하니 국악의 대중화를 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던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91년도 자랑스런 전북 청년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립민속국악원 단원으로 재직중이던 '95년도에는 제22회 춘향제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 명창 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되고, 이로 인해 강습과 공연에 쫓기던 그는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세상의 모든 허울을 벗어버리고 봉화산으로 입산하여 소리공부에만 열중하게 된다. 이러한 수련기간이 그의 일생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상이 그들 가만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남원시립국악단에서 국악장으로 와서 고향의 일좀 봐 달라는 선배와 후배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지 못한 그는 오랜 고민 끝에 '고향을 일이 곧 나의 일이 아닌가' 라는 결론을 내리고 96년 10월 하산 남원시립국악단의 국악장의 자리에 앉게 된다. 국악장이란 직책을 맡자 말자 흥부전 창극을 지도하여 '96년 흥부제 기간중 창극 흥부전 공연을 성황리에 끝맞치고, 기존의 공연 프로그램을 대폭 수정 보완하여 광한루원 국악상설공연으 수준을 전국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끌어 올려 각 매스컴의 찬사를 한 몸에 맡기도 한 그가 '97년도에는 창극 춘향전을 예전과 같이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순수 남원시립국악단 자체의 힘으로 공연해내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러한 바쁜 일정 속에서 틈틈이 준비한 소리공부가 국악 최소의 등용문인 '97년도 전주 대사습놀이 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심사위원 전원 찬성으로 거머쥐게 된 것이다. 대통령상 수상이후 지난 6월 28일 국립극장 초청 판소리 흥부가 완창 발표회는 정말 주위 찬사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여기 저기서 추임새가 터져 나오고 열화와 같은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의 소리를 감상한 많은 이들이 '정말 소리다운 소리를 들었다.' '판소리의 미학과 해학을 맛볼 수 있었던 흔치 않는 기회였다.' 는등 흥부가 발표회를 통해 그의 기량과 남원소리의 우수성을 맘껏 뽐낼 수 있어서 남원사람으로서 가슴 뭉끌함에 흐뭇함이 며칠을 두고 계속 되었다. 1998년 3월 대통령상 수상이후 나른해진 자신을 바로 세우겠다는 일념과 득음에 경지에 이르고자 세상의 끈을 다시 끊은 채 입산한 그는 벌써 2년이 넘도록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란다. 우석대와 전남대, 원광대, 남원정보국악고등학교에 출강하고 있어 선생님으로서 그리고 남원을 대표하는 소리꾼으로서의 역할에 한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는 그의 새로운 다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곧 남원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마음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부터라도 그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격려하고 힘을 모아 진정 판소리의 본고장으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00년 3월부터 전남대학교 국악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과 개인 연주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
이난초
1959년 전남 해남에서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과 끼를 보였던 그녀를 보고 주위의 권유(특히 어머니)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첫 소리스승은 당시 목포에서 제일국악원을 운영하고 있던 김상용 선생으로 정응민 선생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현재 명창으로 활동하고있는 신영희, 유영애 명창등이 김상용의 선생의 문하에서 소리를 한 것으로 보아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목포지방에서 꽤 알려진 명창으로 보인다.
목포에서 심청가 한바탕과 춘향가 일부분을 사사 받던 중 선생이 중풍으로 쓰러지자, 같은 문하의 선배 되는 신영희 명창이 스승을 대신하여 소리선생을 했는데, 여기서 잠시 소리를 배웠고, 짧은 시간이지만 김흥남 선생에게도 공부를 했다 한다.
이러던 중 평소 소리의 고장이자 가장 많은 명인 명창을 배출해낸 남원을 동경해 오던 이난초 명창은 1985년에 그녀와 소리의 터전과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남원으로 옮겨 동편제의 5대손(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김정문-강도근)이자 큰 스승인 강도근 명창께 판소리 5바탕을 배우게 되는데, 고지식하고 고제소리만을 고집하기로 유명한 강도근 명창을 만나 남성적인 동편제소리의 특징인 대마디 대장단으로 통성 소리를 내야하는 소리를 배우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으나, 원래 튼실한 목을 가지고 있던 그녀이기에 무사히 선생의 소리를 온전히 다 사사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소리인생을 다시 남원에서 시작한지 7년째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동편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던 이난초 명창은 1992년 남원 전국판소리명창대회에서 흥부가를 불러 당시 최연소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됨으로 해서 명창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96년 강도근 선생이 세상을 하직하자 성우향 선생께 춘향가를 사사 받았고, 안숙선 선생께 심청가를 사사 받았다. 그녀는 현재 남원시립국악단 창악부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활발한 공연활동과 더물어 후진양성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이고 있다.
생전 강도근 명창의 체온이 숨결이 온전히 남아있는 전수관을 이어받아 후배들을 지도하고있으며, 광주의 연구원과 남원정보국악고등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데, 그 수가 50명에 이른다 하니 여기서 제자 욕심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간 그녀의 문하를 거쳐간 제자 중 천희심과 장미래가 이미 목표전국판소리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녀가 강도근 선생에게 전수받은 판소리 5바탕중 흥부가 5회, 수궁가 3회, 춘향가 2회의 완창발표회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스승 강도근 선생의 흥부가를 가장 좋아하고 즐겨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강도근 선생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남다르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적벽가와 심청가의 완창도 계획하고 있단다.
그녀의 뛰어난 재주에 많은 스카웃이 제의가 있었고 금전적 유혹이 있는 상황에서도 남원을 떠나가 않고 있는 이유를 질문하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생전 강도근 선생이 남원을 떠나지 않고 지리산 자락에서 동편소리를 꿋꿋히 지켜 주신 덕에 자신의 오늘이 있지 않았겠느냐. 나도 선생의 뜻을 이어 남원을 지키며 생이 다 할 때까지 남원 소리를 지키겠다한다.
남원에서 강도근 선생을 만나고서야 소리를 완성했고(앞으로 더욱 정진해야 하지만), 남원에 정이 너무 들었고, 전수관에 들어설 때마다 선생님이 살아 계신 것 같아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다 한다. 이를 통해 강도근 선생과 같이 숨쉬고 싶을 뿐이다. 라고 말한바와 같이 그녀의 남원사랑은 유별나다.
그녀의 집안을 보면 휘모리로 유명한 이임례 명창이 고모 되며, 아쟁과 북으로 유명한 이태백과 고종간이다. 그리고 친언니의 아들 임현빈은 소년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그녀와 함께 남원시립국악단에서 소리꾼의 길을 같이 가고 있다.
타고난 소리꾼 이난초 명창은 상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통성과 철성을 겸비한 여류명창으로 여자 임방울 이라고 불리 운다.(그녀의 춘향가를 듣고 명창 송순섭이 말한것에서 유래)
어려운 소리 길을 걷다가 뒤늦게 만난 그녀 부군 배영배 또한 전국고수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국악계는 널리 알려진 명고수이자 후원자로 그녀의 튼실한 동반자이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뛰어난 고수인 남편과 함께 국악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자그마한 문화재단을 설립하는 게 꿈인 그녀는 아직도 틈만 나면 지리산 육모정을 찾아 소리 다듬기에 열심이다.
동편제 소리꾼들이 좋은 배경을 찾아 다 떠나고 없는 남원을 선생과 같이 정말 온전히 지키고 싶고, 좋은 소리, 좋은 흔적을 남기고 싶단다.
이승을 떠나드래도 자신의 소리를 기억하고 추억해줄 그런 소리꾼으로 남원에 묻히고 싶은 그녀의 소박한 꿈은 꼭 이루어 질 것이다.
오늘도 이난초 명창을 통해 동편제 판소리는 요천수가 흐르듯이 계속되고 있다.(자료제공 : 남원시립국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