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사실은 얼마나 오래 전부터 마음으로부터는 이렇게 부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살아계실 때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예의’라는 벽 때문에 그렇게 쉽게 부를 수 없는 호칭이었겠지요. 그리고 제겐 그런 것을 무너뜨릴 만한 용기가 없었나 봅니다. 제 기억 가운데 어린시절 정을 많이 나누었던 외할머니는 돌아가신 지 20여년이 훌쩍 넘었고, 친할머니는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서 쌓인 정이 별로 없어서 할머니라고 정감있게 부를 사람은 없었거든요.
목요일 아침(1월23일) 어느 분이 전화를 주셔서 알고 계셔야 할 것 같다고 했을때 ‘아 드디어 돌아가셨구나’그렇게 담담한 느낌뿐이었습니다. 할머니에 대해 대부분 들려진 소식이 그리 오래남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전화를 받고 제게는 특별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눈물이라도 후련하게 흘렸어야 할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그날 밤, 발길을 재촉하여 문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할머니에 대한 그 어떤 회상의 흔적조차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토요일 아침 발인예배를 위해서 일찍 집을 나서면서 신기하게도 뻥 뚤린 강변북로를 달리는데 갑자기 밀려드는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나서 고생을 좀 했습니다. 그동안 오래도록 투병하시는데 1년이 넘게 찾아가 보지 못한 게으름이 저의 마음을 채찍질 했습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장례식장에 앉아 할머니에 대한 몇가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사진 속의 할머니가 지금이라도 튀어나와 그 두툼한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으면서 ‘서전도사 왔어,’ 그리곤 제 표정을 살피면서 ‘아니 이제 목사님이 되셨지’ 할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 손의 놀라운 위력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가끔 피곤해서 찬양 인도가 시원찮거나, 밥 먹는게 시원찮으면 제 등짝을 두들기시면서 ‘힘내라고 하실 때마다 ’제가 느꼈을 그 고통은 전혀 모르셨지요? 제가 등이 좀 약합니다(엄살). 언젠가는 ‘안찰 한번 받아야지?’하시는데 정말 사표 쓸까 말까 고민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 손에 내 몸을 맡긴다면 살아 남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거든요(정말 엄살).
제가 구기동교회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와 수도원이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뉴스를 통해서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처신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가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르시죠? 그 담대함과 평온함, 아마 그런 것들이 할머니의 생애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었겠지요.
주일 아침이면 누가 듣든지 듣지 않던지 주일 장년 성경공부를 진행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사실 앉아 있는 분들이래야, 뭔가 알아들을 것 같은 젊은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전부 빠져나가고 남은 분들은 대부분이 할머니들이셨지요. 간혹 일찍 교회에 왔던 분들도 할머니의 열변이 시작될 때쯤이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며 사라졌습니다. 어쩌다 저도 그 자리에 앉게 되는 날이면, 1부예배 설교라고 투정하면서 딴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그땐 저도 할머니의 상경공부를 듣기 싫어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너무나 보고싶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다시 한번 할머니의 그 걸걸하면서도 확신에 찬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 다시 한번 제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귀담아 잘 듣고 싶습니다.
누가해도 맛있는 음식과 풍성한 메뉴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구기동의 점심식사지만 할머니가 하실때면 특별히 ‘남의 살’이 많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언젠가 삼계탕을 하셨는데 ‘한마리씩이 기본’이라고 하시면서 거의 모두에게 반강제로 한 마리를 할당해 주시고는 저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반마리를 더 얹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드시지도 않고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으셔서 ‘누가 잘먹나?’이리저리 감시(?)하고 다니셨습니다. 아무리 제가 닭을 좋아했어도 그 닭은 정말 컸습니다.
그래서 닭 한 마리 반을 다 먹어치우느라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덕분에 그날 오후예배 시간에 닭처럼 졸면서 닭꿈 꾼 것 아세요?
일년에 한번 혹은 두 번쯤 인사 드리러 가면 목사가 된 다음에도 여전히 ‘서전도사’라고 부르시고는 정정하시는 것, 그것 때문에 제가 섭섭해할까봐 톤이 약간 낮아지시기도 했지요. 그리고 시작되는 할머니의 그 유명한 공포의 네버엔딩 스토리, ‘원주 무실교회 이야기, 아니 그 이전 원산 이야기부터 시작하셔서 수도원을 맨주먹으로 짓던 이야기며, 전밀라 목사님 기념 교회당으로 구기동 교회를 개척하신 일, 그리고 중간 중간 기억에 떠오르는대로 끼어들어오는 삽화들을 거치면서 현재까지 오는데 거의 한시간 이상 걸리곤 했습니다.
제가 저의 아버지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견딜 수 없는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인내심이 강한 저였지만 때로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전혀 안하시고 할머니는 가끔은 침을 튀겨가면서 정말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전혀 자기 자랑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번 들었지만 그 이야기에는 정말 믿기지 않는 생동감이 있었습니다.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노인의 푸념도 아니고,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채 지금은 상처 입은 영웅의 초라한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현실의 바로 이 자리에서 멈추지 않을 당신의 신앙과 삶에 대한 웅변이었던 것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그런 모습이 당신을 닮고 싶다는 도전과 함께 제게 얼마나 큰 용기와 힘이 되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가끔 송권사님이 곤경에 처한 저를 구해주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못 다한 이야기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제 손을 꼭 잡으시고 봉투를 손에 쥐어주시곤 했습니다. 그리곤 한마디 꼭 하셨습니다. ‘어려울때 돕는 건 다 저금하는거야’ 그런데 할머니 저금의 대상을 잘못 택하셨어요. 결국 제게서는 단 한푼도 챙기지 못하셨잖아요.
장로님이 병중에 고생하실 때 언제나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셨을 텐데도 찾아 뵐때마다 소녀처럼 웃으시면서 오히려 위로하러간 사람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돌아서는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따뜻하게 힘있게 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장로님이 돌아가시고 2년여동안 마지막 길을 투병하시면서도 할머니의 가슴속에 가득한 용기는 조금도 사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아간 사람들의 손을 붙잡고 오히려 힘을 내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당신에게는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라고 가르치셨고, 실제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당신에게는 남에게 감추면서 꾸미고, 치장하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할머니의 당당함을 생각하면 뭔가 감추려고 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 집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는 누가 봐도 에너지가 넘쳤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시작되어진 영적인 힘말입니다. 그 힘이 구기동의 식구들뿐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든든하게 붙잡아 주는 힘이 되었음을 할머니를 아는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순수하셨습니다. 이 때묻은 세상이 부끄럽도록 말입니다. 그 열정과 순수함이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남아 기억되고 있답니다.
지금은 그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천국을 밝히고 계실 것을 생각하면 제 가슴이 무척 설레입니다. 할머니! 정말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할머니를 만나게 될 그 날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땐 ‘서전도사 어서와’라고 말씀하셔도 너무 감격스러울 것 같습니다. ‘나도 천국에 왔구나’라고 안도할 수 있을테니까요.
할머니와의 만남은 주님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축복된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주님의 품안에서 파안의 웃음을 터뜨리면서 만나고 싶은 모든 사람과 함께 웃고 계실 할머니께 어거스틴의 ‘고백록’ 가운데 한부분으로 제 마음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할머니! 천국에서 다시 만나뵙겠습니다.
“이 유한한 세상에서는 나의 영적인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교회와 아버지가 되시는 당신 안에서는 한 형제가 되며, 당신의 백성들이 출생시부터 그곳을 향해 한숨쉬며 순례를 하고 있는 저 영원한 예루살렘에서는 같은 시민이 되는 전혜진 전도사님을 기억하게 해주소서.”(어거스틴이 어머니 모니카를 생각하면서 드린 기도문을 일부 바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