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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나니 스타가 됐더라! 이 말이 정말 와 닿는 요사이 cf스타를 한명 들라면 나는 주저없이 추성훈을 꼽을 것이다.
그야말로 뜬금없이 난데없이(적어도 격투기쪽에서 그의 활동을 주목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붐을 형성하며 수많은 cf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며 한창 그 줏가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트랜드에 민감한 광고계에서 그의 영입을 결정하게 된 것은 그의 지나온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보다(물론 이 부분이 광고판에서 백그라운드로 써먹기는 좋다고 판단은 됐겠지만서도..)는 무릎팍도사에 출현했던 그의 운동선수답지 않은 젠틀하면서 감성적인 화술과 의외라 할만큼 분위기있게 불렀던 "하나의 사랑"의 공전의 히트가 아닐까 싶다.
역시나 시청률에 비해 개인의 인지도에 대한 파급력이 대단한 프로다
사실 오래전부터 개인적으로 추성훈이라는 개인을 인간적으로 연민하기도 응원하기도 했던 사람으로서(부연하지만 팬까지는 아니었다.)작금의 추성훈 붐이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알맹이는 쏙 빼놓고 그를 바라보는 듯 해서 이렇게 시리즈까지 편성하면서 그에 대한 글을 한번 써보기로 했다. 한국의 격투기 팬들이라면야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들이겠지만 이 글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추성훈을 새로운 cf스타정도로 받아들이는 분들을 위한 포스팅이니 이해를 바라면서 포스팅을 시작한다.
1.재일동포 추성훈
누구나 알다시피 그는 재일동포이다. 75년생으로 재일동포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운동을 하신 분들로 두분은 전국체전에 만난 인연이다. 원래 유도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찌 유도를 시작한 추성훈은 고교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일본에 3대째 거주하면서도 귀화를 하지 않은 집안의 내력으로 그는 한국의 국가대표선수가 되기 위해 한국행을 결심한다.
그러나 고국에 와서 그가 느꼈던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역차별!
일본에 있을때는 재일동포라 해서 온갖 불이익을 감수했었던 그에게 고국은 다시 재일동포라는 딱지를 붙여서 역차별을 하고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기존 파벌의 세력이 권고했던 유도계에서 일본에서 갑자기 날아온 추성훈은 그야말로 굴러온 돌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이때 이 모든 차별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발버둥친 그의 노력의 결실이 "한판승의 사나이"란 별명이었다.
한판승의 사나이! 멋들어져 보이는 이 별명 뒤에는 재일동포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속에서 정상적인 판정으로는 도저히 승리를 가져올 수는 상황을 뛰어넘기 위한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 숨어있는 것이다. 한판으로 이기면 아무도 그 승부에 이의를 달 수 없기에 아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길 수가 없기에 그는 모든 경기를 한판으로 마무리 하기 위해서 남들의 두배 세배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런 모든 노력도 결국은 허사로 돌아가고 그토록 염원했던 아시안게임 대표선수 선발에서 탈락한 후 그는 조국에 대한 허탈한 배신감을 토로하고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만다.
2. 일본인 요시히로 아키야마
한국에서 우여곡절많은 시간을 보낸후 일본으로 돌아간 추성훈은 결국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것은 3대째 굳건하게 지켜오던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버리고 일본으로의 귀화를 감행한 것이다. 주변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조국에서의 실망감과 일본에서의 러브콜사이에서 그는 결국 귀화를 선택하고 만다. 그리하여 그는 그토록 원하던 아시안게임 대표 선수로 출전하게 되지만 그의 도복에 새겨진 것은 그가 그토록 원하던 태극기가 아닌 선명한 일장기였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남자유도 81키로 결승전! 추성훈은 한국의 안동진 선수를 맞이하여 저돌적인 공격을 펼친끝에 결국 승리 우승을 차지한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금메달이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 조국의 선수를 이제 더이상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의 신분으로써 꺽어야만 했고 그렇게 그는 일본인으써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신문이 나올때만 해도 그가 오늘날 이렇게 조국에서 각광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한때 한국인이었던 사나이에게 금메달을 빼았기자 언론들은 일제히 자극적인 기사제목으로 조국을 등지고 일본인이 되어 버린 이 사나이에게 맹비난을 쏟아붇기만 했을뿐 아무도 왜 일본땅에서 3대가 넘도록 한국인임을 고집했던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던 그가 일본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일이 시간이 약이라고 그랬던가! 비난의 돌풍이 지나가고 난 뒤 사람들은 조금씩 이 특이한 이력의 사나이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금씩 그의 지나온 한많고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그에 대한 동정론도 형성되기 시작되어 간다. 조국에 대한 짝사랑 하나로 현해탄을 건너와 온갖 차별과 설움을 묵묵히 버티어내다가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짝사랑의 대상에게 절망하고 결국 쓸쓸히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이 사내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었겠는가.
일본으로 돌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가끔 그게 궁금해진다.
2003년 오사카유도대회에서도 우승을 한 추성훈은 은퇴를 결심하고 2004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시 한참 승승장구중인 이종격투기였다. 마침 입식타격계의 절대강자 k-1은 mma룰을 적용한 새로운 단체를 준비중이었고 이것이 바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k-1히어로즈이다. k-1측은 새로 시작하는 대회홍보를 위해 일본인이면서 그라운드 기술에 능하고 지명도까지 있는 인물이 필요했고 추성훈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종격투기라는 전혀 생소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추성훈은 첫 상대로 전IBF헤비급 세계챔피언 출신인 프랑소와 보타와 경기를 치루게 된다. 복서 출신으로서 상대적으로 그라운드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는 보타였지만 이제 이종격투기계에서는 햇병아리인 추성훈에게 보타가 버거운 상대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추성훈은 이 모든 우려를 불식시키듯 깨끗한 암바기술로 보타를 꺽고 데뷔전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데뷔전부터 그의 특유의 저돌성은 유감없이 빛이 났다.
이후 제롬 느 밴너라는 K-1의 절대강자와의 대결에서의 1패를 제외하고는 추성훈은 여러 강적들을 차례로 격파시키며 그의 운동능력이 이종격투기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거듭되는 연승으로 격투가로써의 명성과 대중의 인기를 차곡차곡 쌓아가던 그였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한참 잘 나가던 격투가로써의 그의 인생에 찬물을 뿌릴 만한 큰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3 추성훈 혹은 요시히로 아키야마
2006년 12월 31일 k-1히어로즈에서는 빅 매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프라이드fc의 간판 스타라 할 수 있는 사쿠라바 카즈시와 한창 그 주가를 높이고 있던 추성훈과의 대결이 성사된 것이었다. 사쿠라바 카즈시는 프라이드 시절 연전연승으로 그 상대를 찾을 수가 없었던 그레이시 가문의 강적들을 연파하면서 일본의 격투기 영웅으로 떠오른 일본 격투기계의 아이콘같은 인물이었다.
이 드림매치가 추성훈에게는 얼마후 나이트매어로 바뀌고 말았다.
일본 격투기계의 아이콘과 한참 떠오르는 신예와의 그야말로 신구간의 대결로서 드림매치라 불리우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 경기는 추성훈의 호쾌한 파운딩에 의한 TKO승으로 끝나지만 문제는 경기가 끝난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경기중에도 계속해서 심판에게 추성훈의 몸이 미끄럽다는 주장을 했던 사쿠라바측이 추성훈이 몸에 금지된 오일이나 크림등을 발랐다며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조사 결과 추성훈은 실제로 경기 전 보습크림을 바른것으로 밝혀졌으며 추성훈 본인도 이를 인정하고 그러나 고의성은 없었다며 사과를 했다. 히어로즈측은 얼마 후 경기무효를 선언하고 추성훈에게는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다소 과하다 싶은 처분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출장정지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은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하는 여론이었다.
막상 문제가 터지고 나자 그동안의 일본의 유도영웅의 이미지 대신 정당한 승부에서 비겁한 암수를 사용해서 일본인을 이긴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인"으로 돌변하고 만 것이다.
이 부분이 나를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한다.
결국 추성훈이라는 이 사나이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한국과 일본 두나라의 미묘한 감정의 골 사이에서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조국은 그가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일본은 그래봐야 결국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어느 한곳에서도 그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곳은 없었던 것이다.
그 어디에도 속할 수가 없었던 사나이. 강인한 육체속에 그는 얼마나 많은 슬픔을 담고 있을까?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지며 온갖 여론의 질타에 시달리던 그는 2007년 12월 31일 마침내 미사키와의 시합을 가지게 되지만 이 시합은 시합이라기보다는 악화된 일본내의 추성훈에 대한 이미지를 환기시키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에 가까웠다. 추성훈의 앞으로의 활동에 상당한 기대(특히나 한국공략에 있어서 추성훈이라는 카드가 가지고 있는 흥행파워를 그들이 간과할리가 없다.)를 가지고 있었던 히어로즈측에서는 어떻게든 그에게 면죄부를 내려 줄 필요가 있었고 이는 또한 추성훈 본인에게도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희대의 공개면죄부를 위한 이벤트의 시나리오였다.
평소와는 전혀다른 소극적인 플레이로 일관하다가 맥없이 미사키에게 쓰러진 추성훈에게 미사키는 대뜸 "일본인은 강하다"는 일갈로 시작해서 수많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공개 "훈계"를 하기 시작한다. 그 모양새는 그야말로 강하고 정정당당한 일본인이 비겁한 암수를 쓴 한국인에게 한 수 가르쳐 줌으로써 그를 교화시킨다는 그런 그림이었다.
일본인들에게는 이 이벤트로 인하여 어느정도 추성훈에 대한 비난여론과 부정적 이미지가 완화됐을지는 몰라도 한국인 입장에서는 참으로 보기 불편한 그림이였고 무엇보다도 귀화까지 해서 자국에 메달까지 안겨준 자를 결국은 낮선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그네들의 시각이 무엇보다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하긴 이런 부분은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일본인을 대신해 버릇없는 한국인에게 회초리를 드신 "미사키훈장님"역의 미사키 선수
이런 온갖 풍상을 겪으며 묵묵히 정진해오던 추성훈에게 고진감래라 했던가! 비록 본업인 격투기쪽에서가 아니라 다소 쌩뚱맞은 방향으로부터 불어온 열풍이기는 하지만 그토록 갈망했던 수많은 조국의 국민들이 그를 알게되고 관심가져주고 아껴주게 되었으니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변두리를 맴돌던 추성훈 선수 본인의 기쁨이야 이룰 말할 필요도 없을테고 옆에서 그를 쭈욱 지켜보던 나같은 사람까지도 "그래! 이제야 알아주는건가!!" 하는 마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질 정도다.
일본이나 한국 양쪽에 모두 속해있으면서도 그 어디에서도 따뜻하게 그를 받아주는 곳에 없기에 추성훈 혹은 요시히로 아키야마로 살아와야 했던 이 사나이! 이 사내의 멋진 근육보다는 그 속에 숨겨진 깊은 한과 슬픔을 이해해주시기를 바라며 이 포스팅을 작성했고 지금의 추성훈에 대한 관심들이 반짝하는 일회성 인기몰이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며 스타 추성훈보다는 인간 추성훈에게 지속적으로 따뜻한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바램을 담으며 두서없이 길기만 했던 이 포스팅을 마무리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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