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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동천(진양정씨 어사공파)
 
 
 
카페 게시글
유적와 유물 스크랩 진주정씨 병암고택 이야기
문진(23) 추천 0 조회 132 14.11.25 00:4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병암고택(甁菴古宅)
소 재 지 :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12(하우산)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112번지 )
건 축 주 :  정재로(1755년생)
건축시기 :  1770년경(영조 40)
소 유 자 :  정현진(鄭賢鎭)
문 화 재 :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130호, 1985.8.5 지정 지정

건축 이야기
병천정이란 현판이 있는데 이는 정동두(鄭東斗)가 1840년경에 우산고개 계곡에 전면 5간, 측면 2간의 정자를 짓고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멋진 곳이었으나 1982년에 허물고 현판만 이 곳에 보관하였다.또한, 지붕 안에 양각한 현판의 병암은 정재하(鄭在夏)의 증조부인 진사 정철우(鄭喆愚)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건축 구성
본(本) 가옥(家屋)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6대손(代孫)인 재로(宰魯)가 15세에 주거용(住居用)으로 사용(使用)키 위하여 1770년(영조 46)에 건축(建築)하였으나, 현재(現在)는 사랑채(병암(甁庵))만 그대로 남아있고 안채는 약 80년 전에 개축(改築)하였고 별채는 약 70년전에 건축(建築)한 것이다.
병암(甁庵)은 자연석기단(自然石基壇)과 주초(柱礎)에 각주(角柱)를 사용(使用)하고 벽체는 진흙으로 사벽처리하였다. 대청(大廳)은 우물 마루놓고 상부가구(上部架構)는 오량가(五樑架)로 동자주(童子柱)를 사용(使用)하였다. 병암(甁庵)의 평면구성(平面構成)은 부엌이 고방으로 바뀌었을 뿐 소위 남부형(南部型) 주택(住宅)의 안채와 꼭 같은 실배열(室配列)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예(例)는 특이(特異)한 것이라고 하겠다.
건물규모는 병암 본채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17평 박공기와이고,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28평의 팔작기와이며, 아래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9평 우진각기와이며, 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17평 팔작기와이뎌, 기타 대문간, 두지, 창고 등이 있다.

현판
병암(甁庵)
정동두가 1840년경에 우사고개 계곡에 지었던 정자가 있었는데, 1982년에 허물고 그 현판은 지금의 병암고택에 보관하여 오고 있다. 현판(懸板)의 ‘병암(甁庵)’은 정헌묵(鄭憲默)의 조부(祖父) 정철우(鄭哲愚)의 호(號)를 따서 붙인 당호(堂號)라고 한다. 글씨는 행서체로 썼는데 선의 굵기에 많은 변화를 주었으며, 행서 특유의 장방형으로 볼 수는 없고, 조금은 방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문중 이야기
- 정종로 선생의 동생 정재노 공
정종로 선생의 동생 정재노 공이 조선 영조 46년(1770)에 지은 집이다. 사랑채만 남아 있던 것을 80년 전에 안채를 고쳐 짓고 70년 전에 별채를 고쳐 지어 현재 안채, 사랑채, 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6칸 규모의 一자형 평면구조를 이룬다. 왼쪽 부엌 1칸을 제외하고는 앞뒤로 반 칸 폭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사랑채는 여러 칸을 터 놓은 통칸방과 마루방 2칸으로 꾸몄다. 별채는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방 앞쪽으로 반 칸 폭의 툇마루를 건물 길이대로 설치하였다. 병암의 평면은 부엌이 광으로 바뀌었을 뿐, 남부지방 가옥의 안채와 같은 방배열을 보이고 있어 독특하다.

 

관련인물
- 정경세(1563 - 1633)
본관 진주(晉州). 자 경임(景任). 호 우복(愚伏), 초시(初諡) 문숙(文肅). 개시(改諡) 문장(文莊).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를 거쳐 1586년 알성(謁聖)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봉교(奉敎)를 거쳐 158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교리·정랑·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반목 끝에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 춘추관지사로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理氣說)에서 이황(李混)의 학설에 반대, 이이(李珥)에 동조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서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렸다. 시문(詩文)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찬성(贊成)에 추증되고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體參考)》《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 정종로
1738(영조 14)∼1816(순조 16).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사앙(士仰), 호는 입재(立齋)·무적옹(無適翁). 대재학 정경세(鄭經世)의 6대손으로 함창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유년 시절 외가에서 살다가 9세 때 본가인 상주로 돌아왔다. 어릴 때 가학을 전수 받았으며, 중년에 이상정 (李象靖)의 문하에 나가서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만 전념했으나, 학문과 지조 있는 행실로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다. 52세 때는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정조가 재상 채제공(蔡濟恭)에게 그의 인품을 물었을 때 채제공은 그를 "경학과 문장이 융성해 영남 제1의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이에 의금부도사로 특진되었고, 59세 때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60세 때는 강령현감·함창현감에 제수되었다.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간 뒤에도 사헌부지평과 장령 등의 직함이 내려오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을 성리학의 연구와 강학·저술에 힘썼다. 〈태극권자설 太極圈子說〉과 〈태극동정설 太極動靜說〉 등 태극의 개념을 논의하면서 태극이나 이(理)가 동정(動靜)함을 주장하였다.

 

상주 > 북부권 > 외서면 우산리
- 우산리는 상주목 지역이었으나 나중에 상주군 외서면이 되었다. 1914년에 상하의 우산리(愚山里)와 관신리(官新里)를 합하여 우산리라고 했다. 우산 마을의 남쪽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그 뒷골의 남쪽을 가지골이라고 한다.
-국사당(서낭당)
우산리 129 -1번지에 있는데 상우산과 하우산 사이 도로의 동쪽인 소나무 숲에 있는 단칸집이다. 우산이십영 중 어풍대가 있는데 이곳의 건너편이다.
큰 소나무 아래 당이 있는데 매년 1월에 설을 지내고 보름 이전에 날을 정하여 제사를 지내 왔으나 지금은 끊어졌다. 국사당 안에는 나막신, 촛대, 목마(木馬) 등의 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와 말을 깎아 모시고 있다. 당은 단칸 규모에 소로수장 3량가 맞배집이고 앞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은 벽을 쳤고, 바닥은 흙바닥이다.

- 우산리 보호수
우산리 30 -3번지에 있다. 국사당 옆인데 지정번호 11-2401501로 지정된 소나무 당산목이다. 수령은 300년 정도인데 나무 높이는 13미터정도이다.

- 상우산
우산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우복 정경세의 종가가 있다. 우산 칠리 강산에 수려한 명승을 이루고 있으며 계정, 대산루, 우산서원, 사당 등이 있는 우산2리이다. 상우산 남쪽 이안천의 북쪽 가에 새로 된 마을이 있는데 1865년 김순만이라는 사람이 이주하여 이룬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신평이라고 한다.

- 노루목
무들리 남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내서면 서만리 서만 앞을 지나는 이안천의 하류에 있다.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고도 하고, 노루가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고도 한다. 1869년에 김수왕이라는 사람이 개척한 곳이다. 무들리 마을 남서쪽에 있는 노루목 마을의 서쪽에 이안천의 상류인 내서면 서만리를 향해 남쪽으로 뻗은 고개를 노루목 고개라고 한다.

- 갈령
하우산 북동쪽에 있는 고개인데 빗물이 이안천과 외서천으로 갈라지는 분수령이 되는 곳이다. 예전에 이곳에 상주경찰서 외서파출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외서면 소재지로 옮겨가고 없다.

 

입재 정종로선생

성명 : 정종로(鄭宗魯) , 1738년 ~ 1816년
본관 : 진양(晋陽)
: 사앙(士仰)
: 입재(立齋)
출생지 : 상주시 함창읍 율리(현재 문경 영순)
출신지 : 상주 우산 
분묘지 : 상주 곡곡산(曲谷山)
입사경로 : 선음(先蔭)으로 광릉참봉에 제수
내관직 : 의금부도사, 사헌부장령
외관직 : 강령현감, 함창현감 
태몽, 생활 등
선생은 1738년(영조14) 11월 13일 상주 함창의 율리(현재는 문경시 영순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태어난지 3일 만에 어머니를 잃고 외조모와 유모에 의해 외가에서 자랐는데, 6세 때 잠시 상주의 우산 본가로 돌아왔다가 조부의 명으로 다시 외가로 가서, 9세 때에 우산(愚山) 친가로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천재적인 기질을 보였는데, 5세 때 봄에 꽃봉오리가 달린 매화나무 가지를 꺾어 놀면서 꽃봉오리가 위로 올라간 것은 ‘오’자라고 하고, 옆에 붙은 것은 ‘어’자라고 하는 등, 나무 가지에서 글자를 알아맞히는 글자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10세에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고 책이 쌓인 서고에 들어가 독서에 몰입하여 경전, 정주학, 제자백가 등을 숙독하는 일로 일과를 보냈고, 11세 때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병을 낳게 하려고 10년을 하루같이 시탕하였다.
30세에 호를 ‘입재’라고 논어의 구절에서 따 왔는데 ‘입재’라는 호가 이 고장에 사는 다른 어른 분과 같아서 바꾼 적도 있다. 32세에 청리 율리로 이사했다가 34세에 다시 우산으로 이거하였다.
72세에는 사림들이 뜻을 모아 우산에 서당을 지어 선생의 강의소로 삼았는데 여기가 바로 도존당(道存堂)이다. 이때부터 매년 강회를 열었는데 매회 수 백명이 모여 들었고 남한조를 강사로 초빙하기도 하였다.
폭넓은 학문교유를 하고 살았으며, 상주에서는 혁혁한 공이 있는 선비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당대 영남지역의 가장 명망 높은 선비로 평생을 보냈다.

가족이야기

: 정주원(鄭?源)
생부 : 정인모(鄭仁模)
: 부림홍씨, 충주박씨
형제 : 정재로(鄭宰魯)
집안 이력, 가족 이야기 등
선생의 선고(先考)는 20대 초반에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건강을 잃은데다 선생이 태어나던 30세 이후로는 몸이 더 쇠약해져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세월을 병석에서 보냈다.
엄격한 조부의 가르침 아래 인자한 할머니의 정이나 어머니의 정을 맛보지 못하고 자라면서도 효성이 지극하여 생모가 아닌 어머니를 받든 효행 또한 뛰어났다. 12세의 어린 나이 때부터 친부와 조부의 병환에 약을 달여 시탕하는 것은 반드시 남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 또 소학을 배껴서 소매에 넣고 다니며 암송했다는 것은 행동을 그 만큼 신중히 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세가 되던 봄 2월부터 4월까지 연달아 상을 당하였는데, 2월 18일 조부상을 당하였고, 3월 9일에 숙부 상을 당하였으며, 5월 21일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때부터 종가를 책임져야하는 종손으로 역할을 하였으며, 어머니와 두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을 부양하는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두 달 동안에 연달아 밀어 닥친 부친상, 조부상, 숙부상을 치러내고 집안 일 처리에 향중의 귀감이 되었으며, 그 후 62세가 되던 해에 모친상을 당할 때까지 43년간 그 홀어머니를 털끝만큼도 성품을 거역하지 않고 극진히 봉양한 효행은 주위의 감탄을 자아냈다.
환갑의 고령에 임금님의 특별한 배려로 강령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84세의 노모에 대한 봉양 때문에 사임을 한 것은 바로 그 효심의 증거인데 더욱 후세에 귀감이 되는 것은 그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이하여 우산 칠리 강산을 둘로 똑같이 나누어 이복동생인 통덕랑공 재로(宰魯)에게 분재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우산(下愚山)으로 분가시킨 후 어머니는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남으로서 극진히 봉양했다. 그리고 종가의 형세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토지재산의 분재를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후손에게 유언으로 남기기를 “앞으로 분가할 때 종가의 토지를 분할하지 말고 현물 곡식으로 분가하여 종가의 토지를 줄이지 말라.”고 하였다. 이런 일로 인하여 종가는 자손들을 분가랄 때까지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고 살되 경작지를 분재하는 제도가 없어지게 되었다.

학문이야기

향사 : 도존당
학파 : 퇴계 학파
스승, 배움 이야기 등
39세가 되는 해 영남의 큰 선비들과 함께 학문과 사상을 토론하고 교유하는 여행길에 올라 학문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때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남야(南野) 박손경(朴遜慶),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예방하여 학문을 교류하고, 이어 의성의 사촌에 들러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과 교유하고 안종의 병산서원의 서애선생 묘우에 참배했다.
당대의 유학자로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남야(南野) 박손경(朴遜慶),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영남삼노(嶺南三老)라고 높이 일컬었는데, 세 선생을 모두 방문하여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 가운데 대산 이상정 선생에게 3일간 머물면서 학문에 영향을 받은바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족적을 남긴 바가 커서 지금에 와서 영남의 명가에는 선생의 문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대산 이상정, 입재 정종로 세 선생을 당대의 퇴계학파삼고봉(退溪學派三高峰)이라고도 하고, 당대의 생존한 인물을 심으로 말할 때는 ‘좌대산우입재(左大山右立齋)’라고 하기도 했다.
퇴계선생의 성리학은 서애 선생을 거쳐 우복 선생에게 전수되었고, 가학연원으로 입재 선생에게 이어진 것이다. 세칭 도산재전지적통(陶山再傳之嫡統)이라고 하여 항동의 도산서원 학문적 정맥을 이어 받았다고 말한다.
영조와 정조 시대 영남의 큰 선비로서 그 명성이 알려져 안정복과의 학문 교류도 빈번하였다. 그런 가운데 중앙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번암 채재공의 추천에 의해 산림으로서 중앙정계에 부름을 받았다. 이러한 산림징소(山林徵召)는 그 당시를 통하여 볼 때 유일한 경우이다.
또 근기지방에서 내려와 상주에 우거한 식산 이만부(李萬敷)의 문집을 입재선생과 그 문도들이 북장사에서 교정을 보고 간행을 한 관계로 근기학파와 영남학파가 접목되었고 그 중심에 선생이 위치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근기학파의 대종인 미수 허목과 성호 이익의 학문이 또한 선생을 통하여 연맥되어 영남학파가 북상하는 현상마저 있게 되었다. 이런 결과로 입재의 문인 중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학자들이 여러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40세에 제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배출된 문인은 250여 명에 이를 정도이었다.
선생의 문학은 도문일치(道文一致)를 추구하는 가운데서도 도학을 기본으로 하고 생활의 여가에서 문학작품을 남겼다. 한시의 경우 특별히 고답적이거나 의도적이 창작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감회이고 산문의 경우에는 실용학문으로서 학문교류를 통한 작품이고 특히 서간문과 비문 등이 많다.
그는 이선기후(理先氣後)를 주장하여 이(理)의 일차성을 인정하였다. 한편 주돈이(周敦)의 "태극이 동(動)하여 생(生)하고 정(靜)하여 생한다"라는 말과 주희(朱熹)의 "태극에 동정이 있으니 이것이 천명(天命)의 유행(流行)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태극의 동정과 이동(理動)을 주장하였으며, "이가 기를 떠나지 않고 또 기와 섞이지도 않으나 기의 주재(主宰)는 다만 태극을 말한 것이다. 태극의 동정은 그 주재하고 음양을 낳는 뜻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심성론(心性論)에서는, 심은 이기(理氣)의 합(合)이라는 전제 하에 심은 이에 의해 주재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사단과 칠정을 논할 것 없이 이미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부터 감발(感發)하고, 감발할 때 따르는 기가 다만 허령(虛靈)한 것이니, 이제 비록 이로써 심이 기라고 할지라도 어찌 이를 방해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단과 함께 하는 까닭에 비록 칠정의 감발이 중절(中節)한다 하더라도 필경은 기의 감발일 뿐이라고 함으로써 칠정의 기발을 인정하였다.
그는 또한 인물성(人物性)에 대해서, 일원(一原)에서는 이가 같은 것이지만, 분수(分殊)에서는 성(性)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이란 이가 기 중에 들어있는 것이므로 기질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의 성이 다르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오상(五常)에 대해서도 오상을 인·의·예·지·신으로 고정할 것이 아니라 사물에 따라서 각기 부동(不同)한 오상이 있다는 생각을 말하였다. 또한 그는 인격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주일무적(主一無適) 곧 경(敬)을 위주로 하는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후 이진상(李震相)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저작이야기

집필, 편찬 이야기 등
이승배(李升培)가 지은 행장에 의하면, 저자는 졸하기 이틀 전에 장손 정민수(鄭民秀)에게 유문(遺文)을 수습하여 보관할 것을 명하였다. 이로 보아 사후 문집 간행을 염두에 두고 평소 어느 정도 원고를 정리해 왔으리라 여겨지며 사후에 바로 간행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으리라 짐작된다. 그럼에도 저자가 사망한 1816년부터 근 20년 뒤인 1835년에 문집이 간행되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걸린 것은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문집 간행이 우선되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조카이자 문인인 상상리(鄭象履)의 행장에는, 1821년에 연보와 부록을 포함하여 8권 4책으로 문장공의 「우복집(愚伏集)」 별집을 간행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저자의 유지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간에도 아들 정상진(鄭象晉), 정상관(鄭象觀) 등이 저자의 유문을 꾸준히 모아 오다가 1826년 저자의 천장(遷葬)을 단행하고 나서야 적극적으로 저자의 문집 간행에 매달린 것으로 보이니, “23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이승배(李升培), 정필규(鄭必奎), 강세규(姜世揆)와 조카 정상리(鄭象履)가 1829년 북장사(北長寺)에 모여 분담하여 교감하였다.”(柳尋春年譜)든가 “20차례에 걸쳐 교정하여 간행하였다.”(鄭象履行狀)는 기록이 나타난다. 여기서도 보이듯이 「입재집」을 교정하고 간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조카 정상리인 듯하다. 「입재집」 교감이나 간행에 대한 소회를 읊은 여러 首의 詩라든가, 정상진을 대신해 문집출간고유문(文集出刊?由文)을 지은 것, 또 「입재집」뿐만 아니라 문장공 별집(1821)과 연보의 개간(改刊)(1832), 외증조인 강필신(姜必愼)과 외조인 강세진(姜世晉)의 문집에도 관여하였다는 것이 〈제암행장〉을 비롯하여 곳곳에 나타나 있어, 당시 학자로서 명망이 있던 제암이 일가의 문집 간행을 주도하였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정상리가 문인 유심춘(柳尋春), 이승배(李升培) 등과 함께 편차, 교정한 뒤 1835년에 목록 2권과 더불어 원집 48권 24책을 상주(尙州)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별집(別集) 간행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라곤 오직 연보에 1910년 별집 4책을 간행하였다는 기록밖에 없어,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편차되고 간행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연보(年譜)는 원집이 간행된 1835년 이전에, 저자의 장자 정상진이 정원선(鄭元善)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면서 행장, 유사와 더불어 연보를 따로 보내 주었다는 기록(鄭元善 撰, 墓碣銘)으로 보아, 애초에 어느 정도 정리된 초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2년 11월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사우(士友)들과 연보를 간행할 것을 계획하고는 이 두가지를 상호 보완해가면서 도존당(道存堂)에서 초교를 보고, 북장사(北長寺)에서 재교를 보며 충분히 숙의한 끝에 정고본(定稿本)을 만들어 4년 만인 1926년에 6세손 정재붕(鄭在鵬)의 주도 아래 2권 1책의 목판으로 간행된 것이다.
본집은 원집 48권 24책, 별집 9권 4책 합 28책으로 되어 있으며, 원집과 별집 모두 머리에 총목록이 실려 있을 뿐 권별 목록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원집은 목록이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서문과 발문 모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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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11.25 00:44

    첫댓글 군계일학님의 블로그 "수산"에서 펌 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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