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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不立 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 二十空門元不著
진불립 망본공 유무구견불공공 이십공문원불착
一性如來體自同 心是根 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일성여래체자동 심시근 법시진 양종유여경상흔
痕垢盡時光始現 心法雙亡性卽眞
흔구진시광시현 심법쌍망성즉진
반갑습니다
3월 23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이틀 쉬었는데 모두 잘들 지내셨죠 학생들은 아주 그 쉬는 날이 많으면 좋아하죠 이틀 놀고 하루 강의 하고 (웃음) 또 이렇게 이틀 쉬었고 또 이제 이틀만 공부하면 또 이틀간 또 이제 노는 날이 주말이 다가옵니다 (웃음)
개인 사정으로 그렇게 이제 쉬게 돼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좀 부담이 적은 것이 모두 각자 안방에서 이렇게 뭐 음
듣고 싶으면 듣고 말고 싶으면 말고 하는 그런 그 관계라서
사실 저가 뭐 불의에 좀 쉴 일이 있어도 사실 부담은 훨씬 적어요.
그렇다고 또 책임을 안느끼거나 그런 건 아닌데 만약에 어디서 이제 그 오프라인에서 하듯이 그렇게 이제 어느 장소에 집회를 한다면은 멀리서 오고 또 시간 맞춰서 다른 시간 빼놓고 이제 오고 뭐 하는 그런 경우에 펑크를 냈다고 하면은 상당히 그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아주 발달한 시대에 우리가 사니까 그런 것들도 없이 아주 편리하게 됐습니다.
오늘 쉬는가보다 하고 이제 다른 공부 하면 되고
또 이제 뭐 공부가 있는 날은 또 이제 들어와서 공부하구요
강의하는 사람도 부담이 적고 듣는 사람도 뭐 덜 미안코 그런 경우인 것 같애요.
뭐 어쨌든 그렇고 오늘은 증도가
眞不立 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이라
진불립 망본공 유무구견불공공
라고 하는 부분부터 하게 됩니다.
여기에 진眞과 망妄의 관계가 상당히 여러 번 나오죠. 처음에도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그 이제 망상妄想이라고 하는 게 망妄이고 불구진不求眞하는 게 진심眞心이라 하든지 진실眞實이라고 하든지 진리眞理라고 하든지 그건 다 말이 달라서 그렇지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진眞과 망妄이 수차 그렇게 반복이 되는데
사람들의 관심사가 진眞과 망妄에 대한 그런 그 관심이 사실 많아요. 특히 진리를 추구하는 어떤 그 종교의 가르침에서는 특히 그런 것들을 많이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게 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문제를 깨달음의 안목으로 분석해 낼 때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된 것이냐 이런 것을 깨우쳐 주는 것 이것이 이제 종교의 어떤 그 지도자로서 또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로서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 분별해서 잘 가르쳐 줘야 할 그런 그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진眞과 망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죠.
다른 경전에도 진망眞妄에 대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또 조사스님들의 어록에도 진망眞妄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구요
여기도 오늘 첫마디가 진불립眞不立 망본공妄本空이라 그랬는데
진眞도 참된 것도 세우지 않고 또 망령妄靈된 것도 그걸 뭐 우리가 인정할래야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존재다
그 세우지 않는다는 것, 진眞도 세우지 않는다면 진眞이라 할 것도 사실은 없다는 거죠.
진짜 진眞이라고 하면은 그건 당연히 세워야죠. 주장을 해야 되고 앞에다 내 놔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세우지 않는다고 하는 걸 보니까 진眞도 별 것 아니고
망妄도 본래 공空하다고 했으니까 망본공妄本空이라 그거 뭐 굳이 공空한 망妄, 없는 망妄을 가지고 굳이 뭐 문제 삼을 것도 없고 그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이런 뜻이 돼요.
그러니까 진과 망에 대해서 중도적인 안목을 가지고 본다 하는 것이죠.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게 이제 우리 마음에 얼마나 체득이 되느냐 또 내 생활에 얼마나 적용이 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마는 뭐 이론은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생활에 사실 적용이 되고 내 살림살이가 돼야 되겠죠.
이론은 그래 진眞도 사실은 세울만한 것이 아니고 망妄도 본래 本來 공空한 것이라서 굳이 그것을 제거할려고 그렇게 끙끙댈 까닭이 없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유무구견불공공有無俱遣不空空이라
있다 없다 뭐 진이 있느니 망이 없느니 하는 그런 있다 없다 하는 그런 것들을 전부 같이 보내버린다.
구견俱遣 함께 보내 버리니 또 공하지 아니하면서 공하다
이게 이제 또 불교만이 할 수 있는 아주 독특한 논리인데
공하면 공하고 공하지 않으면 공하지 않아야 하는데
공하지 아니하면서 공하다 그랬어요.
공하지 않다는 말은 있다는 이거죠
또 있으면서 공하다 또 공하면서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같은 뜻이죠
그러니까 거기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꼭 있다 꼭 없다라고 이렇게 치우치지 아니하면은 그게 이제 함께 보내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은 있는 것도 공하지 아니하고 그러면서 또 치우치지 않았으니까 공한 것이구요
쉽게 우리가 이해하기로 하면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사실 우리가 있다고 믿는 것도 불교적인 그 어떤 조그마한 상식만 가지고도 있다고 우리가 인정을 하지 않잖습니까 모든 삼라만상이 본래 공하다
또 우리가 늘 잘 외우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것
무안이비설신의 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 無色聲香味觸法
해서 내자신 주관적인 내 육근도 공하고 없고 또 육근의 대상인 육경도 없다 이렇게 이제 보잖습니까
없는 것으로 말해놓고 부정을 한 번 거친 뒤에 다시 비로소 긍정을 하게 되면은 그때는 사는 것이 참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고 구름에 달 가듯이 어떤 삶도 정말 가볍고 아주 그 정말 어디에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로 그때 비로소 이제 사람으로서 사는 맛을 한껏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뭐 집착을 해가지고 아주 진하게 그래 사는 것이 사는 맛을 느낀다고 불교에서는 보지 않고요
정말 가벼운 마음이 됐을 때 객관적인 입장이 돼보세요
내 인생이 남의 인생처럼 그렇게 보일 때 그 때 참으로 아주 그 시원스럽고 아주 가볍고 아주 멋진 인생 대아大我 큰 나의 삶이 비로소 전개된다 그 때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 내가 공空하다고 보았을때 내가 텅비어 없다고 보았을 때 다시 말해서 무아無我를 제대로 체득했을 때 그때 정말 대아大我 큰 내가 실현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뭐 생멸도 두려울 것이 없죠.
어떤 정의를 위해서 보다 큰 일을 위해서 이 몸 하나 던지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흙 한 줌 공중에 뿌리는 거와 같이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 하는 그런 의미로 우리가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 이제 유무구견有無俱遣이라고 하는 것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거 있다고 여겨지는 것과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다 어디로 보낸다 구견俱遣 보낼 견遣자지요.
보낸다라고 했으니까 어디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거기에 치우치거나 편견에 떨어지지 아니했을 때 그것은 나에게 홀가분한 것이 되죠. 아주 홀가분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뭐 내 몸을 위시해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들 내 물건들 내 소유들 이런 것들을 전부 버려야 된단 말인가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죠.
그대로 잘 평소처럼 잘 활용을 하되 거기에 이제 치우치지 아니하고 너무 애착하지 아니하고 거기에 목을 매지 않고 그래서 썼을 때 크게 써도 크게 애착 없고 남을 줘도 그렇고 나에게 생겨도 그렇고 거기에 크게 끄달리지 않는다는 거죠
이제 끄달리면 그때부터 이제 힘들기 시작하는 거죠. 생겼을 때 끄달려도 마찬가지고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을 때 끄달려도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이제 그야말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듯이 내 주변의 모든 인연들 내 삶의 그런 그 여러가지 인생사들 이런 것들이 아주 수런 수런 스치고 잘 지나가는 그러한 그 입장이 되는 것 그게 이제 불공공不空空이죠.
공하지 아니하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또 공하지 아니하고
그래서 내 할 일은 다 하되 나는 끄달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집착하지 아니하면서도 내 할 일을 다 한다. 자식 키울 일 다 키우고 집안 살림살이 다 살고 사업할 일 있으면 다 사업하고 그 뭐 목을 맨다고 하 집착해서 목을 맨다고 그 사업이 꼭 잘되나요. 그런 거 아니죠.
어떤 의미에선 객관적으로 남의 일같이 이렇게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 훨씬 잘 보입니다.
잘보이면 사업도 잘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돈벌이도 잘하고 장사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참 그게 이제 인생을 잘 살 줄 아는 열쇠인데 그게 이런 불교 깨달은 성인들의 가르침은 실상을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참 이 아주 가깝게 느껴져요 어떨 때는.
가깝게 느껴지면서 다시 말해서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또 그게 쉽지 않고 쉽지 않으면서도 어떨 때는 또 이런 대목을 가만히 이렇게 음미하고 사유해 보면은 손에 또 잡힐 듯하고 그런 거죠.
그래서 진불립 眞不立 망본공妄本空
진과 망을 어떤 꼭 진에다 망에다 두고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상대적인 관계를 그렇게 진과 망에다 두고 이야기하면 되는 겁니다.
불교의 중도 이론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관계로 세상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상대적인 관계에 어디에 한쪽에 치우치면은 그건 병이된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양쪽을 다 함께 수용할 줄 알아야 된다.
부정도 하면서 함께 수용을 할라면은 부정해야 되요.
둘 다 부정할 줄 알아야 둘 다 수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게 이제 수용하는 것과 부정하는 거예요. 긍정과 부정이 사실은 그게 제대로 되려면 둘이 아닌 것이죠.
그것도 이제 불교 이론입니다. 뭐 긍정할라면 한쪽은 부정해야 되고 한쪽을 부정하려면 한쪽은 긍정해야 되는 게 아니냐 하지만 그게 아니죠
둘다 긍정하고 둘다 부정하고 둘다 부정하면서 둘다 긍정했을 때 비로소 둘 다 살아나고 원융무애하고 정말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사람이 모든 그 얽히고 설킨 관계속에 살아가면서 거기에 조화를 이루면서 아주 이상적으로 살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배가 강을 타고 내려가는 데 이쪽 강변에도 저쪽 강변에도 닿지를 않아야 그 배가 순조롭게 잘 가죠. 어느 한 쪽 강변에라도 가서 닿으면은 부딪치면 이제 파선이 되고 또 닿아서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은 강을 따라서 제대로 가지를 못하는 거죠.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비유들자면 이제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일상사에서 늘 접하고 있는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마치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갈 때 이쪽 언덕에도 저쪽 언덕에도 가서 닿지 않고 거기에 또 머물지 않고 중간으로 처억 이렇게 가면서 중간으로 잘 내려 가려면 어떻습니까.
이쪽 언덕도 있고 저쪽 언덕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쪽과 저쪽 양쪽을 다 인정하면서
양쪽 어디에도 가서 닿지 않는 거죠. 그건 닿지 않는 다는 말은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양쪽을 다 부정하면서도 양쪽을 다 인정하고
그랬을 때 조화로운 그런 행선行船
배가 진행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이치가 뭐 눈에 선하시죠.
그와 같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모든 그 얽히고 섥힌 관계들이 사실은 그렇게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그런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내가 소화를 하면서
원융무애하고 또 집착하지 않고 조화를 이뤄가면서 그렇다고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야 이게 참 묘미입니다.
아주 정말 불교만이 말할 수 있는 아주 기가 막힌 중도적 삶이죠.
그러니까 불상을 무슨 뭐 부처님이라고 껌뻑 넘어가게 그렇게 우리가 집착해도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나무로 만들었다라고 해서 무턱대고 불상이라고 무시해도 안되는 것이고 나무로 만든 불상이라고 이해하면서도 또 살아있는 부처님처럼 예배하고 존경해서 예불을 드리기도 하구요 또 그렇게 하면서도 한 편 저건 나무로 만든 조각이야. 추우면은 갖다 땔 수도 있어 아 이런 그 참 큰 마음 당당한 마음 이런 마음도 가질 줄 아는 것 이게 이제 좀 철들고 좀 성숙한 불자라고 할 수 있겠죠.
또 잘못 오해해가지고 또 함부로 할까 참 좀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염화실 가족들은 이제 뭐 불교의 바른 지견을 그동안 많이 훈련을 했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二十空門에 元不著 이라
이십공문 원불착
그랬어요.
불교에는 참 이 모든 존재를 존재 그대로 보는 것은 일차적인 안목이죠 그건 이제 불교나 비불교나 다 볼 줄 아는 안목입니다.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그런데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는 안목은 이것은 불교적인 안목이고 거기서 한차원 달리한 안목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것이 무의 철학이요 공의 철학이요 반야 600부의 가르침이고 그렇게 볼 줄 알 때 거기에서 비로소 이제 색다른 그런 그 지혜 정말 세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그 반야지혜가 거기서 나올 수가 있다. 또 그렇게 볼 줄 아는 그것이 반야지혜다.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이 그게 반야지혜거든요.
그래서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그 문제가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반야부 경전을 설하기 이전에는 전부 있다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됐다 그렇게 볼 수가 있어요. 불교 경전전체를 우리가 나눠놓고 보면은 그다음에 이제 그 21년간 반야부 경전을 설하셨다 그러는데 그건 이제 모든 있는 것에서 한 차원 달리 해가지고 완전히 바꿔가지고 없는 것으로 보는 안목을 거기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게 이제 경전이 제일 많아요.
600권이나 되는 그런 반야부 경전이고 또 부처님이 49년간 설했다라고 했을 때 무려 21년간을 없다고 하는 어떤 이치를 우리들에게 설해준 것이다 그래요.
그래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는 게 이게 상당히 어려운 문제고 또 차원높은 안목입니다. 그래서 이제 무無의 철학이니 공空의 철학이니 이런 것들이 불교 안에 아주 많지요.
우리가 반야심경에서 내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無眼界 내지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 뭐 끊임없이 없다 없다 없다 해도 뭐 어떻습니까
없다하는 말은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여전히 있어요. 있어가지고 거기에 없는 것으로 보기가 너무 힘드는 거예요. 고 관문 통과한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봐요.
그래서 부처님도 그렇게 오랫동안 많이 설하셨다 이렇게 이제 보는 것입니다. 21년간 600부나 되는 경전을 설하셨다. 아 그렇죠.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는 이 관문이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공空도 부정하는 공空도 이렇게 이십공문二十空門에 원불착元不著이라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건 이제 모든 사건, 모든 사물 일체제법이 다 공하다는 이치를 20가지로 그렇게 이제 설명하는 거죠.
스무가지의 공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스무가지의 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죠
예를 들어서 부산 허공 따로 있고 서울 허공 따로 있고 무슨 대전 허공 따로 있고 대구 허공 따로 있고 아니죠. 허공은 뭐 없는 것이니까 텅빈 거죠.
그러니까 뭐 부산 공이나 서울 공이나 대전 공이나 대구 공이나
광주 공이나 사실은 말이 있을 뿐이지 공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치 뿐입니다.
그런데 워낙 유有의 세계를 공空의 세계로 보는 그 관문이 너무 두껍고 너무 그 관문을 통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공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 보니까 스무가지 공이 이제 나오게 돼요. 이건 뭐 숫자를 이렇게 나열했지만은 하나인 공이다 이렇게 이제 이해를 하시고
그래서 내공內空 외공外空 그래싸요.
내공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게 육근六根이니까 말하자면은 무아다 무상이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그러죠. 그래서 이제 내공.
또 외공하면 안이비설신의의 대상인 뻔한 거 아닙니까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것은 이제 여섯 가지 경계인데 이것 역시 무상한 것이고 무아한 것이다.그래서 공이다.
또 내외공內外空 그걸 이제 반복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내공하고 외공하고 사실 내공하면 전부가 공한 거예요. 안이비설신의가 공하면은 뭐 일체가 공하죠 뭐.
근데 이제 또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공하다고 했고 그래놓고 또 이제 반복해서 거듭거듭 거듭 우리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내외공內外空이라 그래요. 그래 육근과 육경계가 다 공하다.
또 공공空空 그래요 그다음 네번째는. 공한 것도 다시 또 공하다.
공한 것이 남아있으면 안된다는 거죠 뭐 공한 것이 어디 남아있고 자시고 하겠습니까 그냥 공일 뿐이지.
서울공이나 뭐 부산공이나 대구공이나 대전공이나 광주공이나 무슨 뭐 미국공이나 어디 뭐 유럽공이나 다 그 뭐 하나인 공 공간일 뿐이지 거기에 무슨 뭐 공한 것도 공하다. 이제 철저히 공의 이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 뭐 대공大空 큰 공이다 그래가지고 동서남북東西南北사유 상하四維上下 시방세계가 다 공하다 그래 보면 큰 공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 다음에 이제 승의공勝義空이라 해가지고 아주 수승한 이치가 공하다. 그건 이제 열반이니 도리니 도니 깨달음이니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소립니다. 그건 이제 열반도 또한 공하다.
어떤 이런 말이 있어요.
설유일법設有一法이 과어열반過於涅槃이라도 아설역여我說亦如 몽환夢이라 하리라
설사 어떤 한 법이 있어서 열반보다 지나간다 하더라도 나는 공하다고 말하겠다.
이런 공종空宗의 아주 뭐 뭐라고 할까요 표어같은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반을 훨씬 지나가는 그 어떤 뛰어난 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공하다 하겠다.
공종空宗에서 이제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다음에 유위공有爲空 이거 유위공은 욕계 색계 무색계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죠 그다음에 무위공無爲空 이것은 생기입멸의 어떤 변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것 그것도 역시 무위지만 무위자연이지만 그것도 역시 공하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필경공畢竟空 그래서 끝까지 다 공하다. 어떤 존재도 철저히 공하기 때문에 철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필경에 공하다.
무제공無制空 끝없이 공하다 처음만 공한 게 아니라 중간도 공하고 끝까지 뒤에도 공하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뭐
산공散空 이건 이제 방산 뭐 기사 해가지고 모든 법은 사실은 전부 흩어지는 것이고 나로부터 떠나는 것이고 버려지는 것이고 놓아지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그런 식으로 산공이라 이렇게 표현하죠.
그다음에 이제 무변위공無變位空 변위하는 것이 없는 그런 것도 역시 공하다
본성공本性空 본성도 공하고 자성自性도 공하고 그다음 뭐 공상도 공하고 이상도 공하고 일체법이 다 공하고 불가득不可得도 가히 얻을 수 없는 것도 공하고 성품이 없는 것도 공하고 자성도 공하고 자성공이란 말 앞에서 했죠. 자상공自相空 저 앞에선 자상공이고 여기는 자성공이고 그다음에 무자성공 자성이 없는 것도 무성자성공이라 어떤 성품이 없는 자성도 공하고
이런 식으로 이제 공을 하나인 공을 가지고 스무가지로 이래저래 반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이렇게 공으로 붙여 본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공하지 않은 게 없다
그렇지만은 거기 이제 원래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게 철저히 스무가지로 공하다고 하고 또 공하지만은 거기에 공한 이치에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 불공공不空空이니까 공하지 아니하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또 공하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원불착元不著이라 고 하는 거예요.
이러한 존재들을 스무가지로 공하다 어쨌다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은 어떻습니까
이야기 하는 것은 어떤 그 이야기할 수 있는 사유능력이 있고
사유하는 본체가 있고 그렇지요.
그것을 뭐라고 해요
여래如來라고 할까요 우리 마음자리라고 할까 또 그런 것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 이런 이들의 그 뭐라고 지칭할 수 없는 그걸 뭐 마음이라고 하든지 일물一物이라고 하든지 그런 그 어떤 존재 그것은 모든 깨달은 사람들 다 같다.
일성一性 한 성품의 입장에서 보면 여래如來의 본체 本體가 저절로 같다.
一性如來體自同 이라
일성여래체자동
그랬습니다.
그건 이제 역시 우리 마음도 중도로 이해해야 되고 사물도 중도로 이해해야 되고 우리의 수행하는 행위도 중도로 이해해야 된다.
아까 뭐 불상에 대한 이해도 중도로 이해해야 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대적인 인연들 그런 그 사물들 나와의 관계들 이런 것들도 중도로 이해해야 되고 역시 마음도 또 부처도 우리 본성도 중도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렇게 이해해야 그걸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지 꼭 우리 마음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역시 또 있는데 집착하는 것이 되고 있는 데 떨어지는 것 그게 되는 거예요. 그럼 마음을 제대로 아는게 아니죠.
그 마음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있고 또한 없고 이렇게 중도를 설명할 때 그런 그 이치를 수용하는 입장이 돼야 마음의 실체를 어지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 일성一性이죠.
한성품 여래如來죠 일성一性인 여래如來
내 일성 한 성품의 여래나 여러분들의 한성품인 여래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한성품인 그 여래如來는 체자동體自同그랬습니다. 본체가 실체가 그 당체 자리가 저절로 동일하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뭐 만물萬物이 여아일체如我一體다
또 천지天地는 여아동근與我同根이다 하늘과 땅이 전부 나와 더불어 한 뿌리다.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 이런 표현들이 성립되는 거죠.
이건 이제 이것이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눈에 쏙 들어오듯이 그렇게 들어오게 하려면은 여기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있어야 되고
그야말로 어떤 깨달음의 눈이 있을 때 가능하겠죠.
일성여래 체자동一性如來體自同이라고 하는 것
이건 이제 대부정을 거쳐서 부정을 완전히 거쳐서 비로소 이제 긍정이 됐을 때 그 때 이제 그야말로 모든 존재가 그대로 여래고 진리고 그리고 나고 그리고 마음이고 이렇게 되는 거죠.
일체 것을 부정했을 때 비로소 내가 거기서 현현하는 그런 입장을 여기서 이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心是根 法是塵이니
심시근 법시진
마음은 뿌리가 되고 법은 진 경계 티끌이 된다 그랬는데 이건 이제 주객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심은 주가 되고 법은 객이 되고 그래서 이제 아법我法할 때도 그렇지요. 아는 주관이 되고 법은 객관이 되고 주객으로 나누어 지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항상 자기 자신은 이제 주인이 되고 주관이 되요. 그래서 그외 것은 전부 객관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兩種猶如鏡上痕 이라
양종유여경상흔
그랬어요. 두 가지는 마치 거울에 낀 흔적과 같다. 때와 같다.
그러니까 주관이니 객관이니 이런 것도 이미 나눠놓고 보는 것이니까 나눠놓고 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중도적인 안목에서는 벌써 허물이죠.
그걸 이제 나눠 놓되 거기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 수용하고 수용하면서 그것을 또 이렇게 나눌 때 나눠 놓을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되려면 그런 입장이 되려면은 그것을 일단 부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종유여경상흔 兩種猶如鏡上痕이라 두가지는 사실은 거울에 낀 때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痕垢盡時光始現 이라
흔구진시광시현
그랬잖아요.
흔적인 때가 다 제거 됐을 때 흔구진제痕垢盡除라고도 하는데 흔구진시痕垢盡時 때 시時자로 써도 좋습니다. 흔구진시광시현痕垢盡時光始現 흔구가 때가 다 했을 때 빛이 비로소 나타난다. 그 광명이 비로소 나타난다. 그렇죠.
거울에 때가 많이 끼었다고 봅시다. 그게 뭐 동으로 만든 거울이든 유리로 만든 거울이든 크게 상관없죠. 그런데 이제 흔痕자 같은 것은 뭐 유리로 만든 거울에도 깨끗이 닦아놔도 손한 번 짚으면은 흔적이 남죠 때는 아니지만은 그래서 이제 흔구라고 합니다. 어떤 흔적이나 때가 됐던 간에 다 깨끗이 닦은 다음에는 빛이 광명이 비로소 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을 우리가 나누고 분별하고 어디에 치우쳐서 생각하고 하면은 우리 본 마음자리가 빛을 발하지 못해요.
우리가 사실은 크게 당당하게 대아大我로서 큰 나로서 삶을 펼치지 못하는 이유도 어찌보면은 주관이라고 하는 내가 주가 되고 나머지는 객이다 하는 그런 그 분별심이 있어서 그렇게 이제 큰 삶을 살지 못하는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흔구가 다하면은 빛이 난다. 참말로 멋진 삶이 나타나고 대아의 삶이 거기서 이제 나타난다는 거죠.
그래서
心法雙亡에 性卽眞이라
심법쌍망 성즉진
심과 법 앞에 있었죠. 심시근心是根 법시진法是塵 했습니다 심은 주관이고 법은 객관이 되는데 주관과 객관이 쌍으로 없어졌을 때 쌍으로 없어질 때 내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부정됐을 때 본성 성품이 바로 진성이 된다.
여기서 진은 상대적인 진망의 진이 아니죠. 이건 뭐 정말로 표현하자니까 진이지 그야말로 우리의 참마음자리 성품이 곧 참마음자리다.
이 참마음 자리는 설명할 수가 도저히 없는 자리인데 상대적인 진과 망의 상대적인 그런 참마음이 아니고 본래심 하나뿐인 마음 온 우주가 삼라만상이 하나뿐인 이 마음
이게 이제 여기 진眞자 성즉진性卽眞이라고 하는 그 하나 뿐인 마음이 드러나려면은 주관과 객관이 다 사라졌을 때 제대로 이제 온 우주가 삼라만상이 마음이라고 하는 사실이 납득이 가고 또 내 공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 저 앞에서는 있음과 없음의 문제 또 진과 망 일반적으로 진과 망의 문제와 있음과 없음의 문제 이래서 이제 공으로 설명해오다가 여기 와서는 주관과 객관 그것도 역시 그건 이제 떨어지기가 더 어려운 것이니까. 그래서 이제 주관과 객관의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주관도 객관도 다 내 마음에서 사라졌을 때 진짜 내 마음이 나타난다. 심법쌍망心法雙亡에 성즉진性卽眞이라
성품이 곧 진성이 된다 정말 바람직한 성품이 된다.
이렇게 이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오셔서 공부를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동참하셔서 법석을 빛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꽃물들다님! 집안에 피치못할 바쁜일이 있나보군요. 우환이 아니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다음주엔 그런 일이 있어서 법우님들께 지금부터 양해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_()_
꽃물들다님! 원문을 올려 주셔서 복습하기에 더욱 좋습니다... 천천히 올려 주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_()()()_
꽃물님의 지혜에 감탄! 여유있게 올리셔요. 주말에는 편히 쉬시구요.._()()()_
대원성님 무영수님 미륵골님 일요일 아침입니다. 차 한잔 드리고 싶어요 ^^
꽃물들다님 ! 이렇게 좋은 불사를 해주셨서 감사합니다._()()()_
(엥? 꼬리말 코멘트가 왜 안되지?) 꽃물들다님! 주세요. 저와 무영수님은 커피로... 저는 달지않게... 미륵골님은 무승 차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뻐스? 대형 트럭?
하하 미륵골님도 그 차가 아닌 이 차를 원하실것 같은데요 ^^ 청소도 했고, 앵두나무 가지에 두번째로 꽃 피려는 작은 꽃이 조금 잎을 벌린 이 순간 저희집에 초대를 잠깐 해도 괜찮으시겠지요? 배달드릴까요? ㅋ
꽃물들다님! 녹취록 정리정돈을 넘 잘해주셔셔 머리에 쏘~~옥 ...감사합니다~수원영통동에도 차배달이 가능하신지요? *^^*
당근입니다 ^^ 기도다녀와 열공중이시군요~
고맙습니다...*^^*
꽃물들다님! 감사합니다... _()()()_
꽃물들다님!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수고해주신 덕택으로 저는 수월하게 공부하고 갑니다. 생방송 시간에도 수고 많으신데 님의 마음그릇이 얼마나 클까 싶은 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_()()()_
하하 마니주님 저를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친지들이 이 글을 꼭 읽어야 하는데 ^^ 처음들어보는 칭찬입니다. 그런데 조금씩 넓혀가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 참 가족들이 제가 공부하고 굉장히 좋아졌대요 ^^
감사합니다._()()()_
마하반야바라밀()()()
주관도 객관도 다 내 마음에서 사라졌을때 진짜 내 마음이 나타난다,,,그게 바로 바람직한 <성품(性品)>이다!
감사합니다._()()()_
내 숨쉬는 한 늘 바라보아야할 거울의 때.. 나는 누구인가..?! 과연 마음이란 무엇인가..?! 있기는 한 것인가, 마음이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심법쌍망(心法雙亡)에 성즉진(性卽眞)이라.ㅡ 성품이 곧 진성이 된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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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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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