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강
이 편지는 방편과 실법에 관계되는 그런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뒤에 유명한 三咄狀(삼돌장)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전래된 경전이나 어록을 공부하고, 또 그 공부한 역사가 깊고 그러다 보면 증시랑에게 보낸 편지를 증개장, 또 이 ‘장’자를 써서 그렇게도 하고, 또 그 안에 삼돌에 대한, 돌이 세 번 나온다고 해서 삼돌장, 이런 이야기도 있고.
유교에서는 ‘장’ 이라는 말을 잘 쓰죠. 본래 잘 씁니다. ‘곡속양 무제의’ 라고 하는 그런 구절이 있어서 곡속장, 누가 뭐 ‘곡속장이 과거 시험에 나온다’ 라고 아주 미련한 친구를 놀린다고 서당 친구들이 그렇게 했더니 아~ 이 사람이 진짜 그렇게 알아듣고는 그 곡속장만 열심히 읽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시험 문제가 곡속장에서 나왔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도 있고. 전통이 깊은 데는 어디 없이 그런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옵니다.
여기도 또 그렇게 했네요.
又(五) [正印方便入道 兼顯夢覺一如]
正印方便入道(정인방편입도)
방편을 통해서 도에 들어가는 것을 바로 인가한다, 인정한다. 그러면서
겸하여 나타낸다. 몽교일여. 몽교일여라는 것이 삼돌장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承諭(승유)호니 外息諸緣(외식제연)하고 內心無喘(내심무천)이라사 可以入道(가이입도)는 是方便門(시방편문)이라
承諭(승유)호니
유가 편지입니다. 깨우쳐준다, 가르친다. 상대를 존경해서 편지를 유라고 ‘깨우칠 유’ ‘가르칠 유’ 또는 우리가 흔히 요즘 쓰는 말로 ‘유시’라는 말이 있죠? 이 자를 써서. 유시가 자주 나오는 게 안 좋죠? 안 좋은 시대에 유시가 많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나라에. 편지를 받으니
外息諸緣(외식제연)하고 內心無喘(내심무천)이라사 可以入道(가이입도)라
심여장벽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사실은 되는 거죠.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가이입도라. 네 구절이죠. 外息諸緣(외식제연) 內心無喘(내심무천) 그 다음에 心如墻壁(심여장벽) 可以入道(가이입도). 이렇게 네 구절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인용하는 분이 한 구절 생략한 걸로 봐야겠죠. 밖으로 모든 인연들을 쉬고, 내심무천- 안으로 마음이 헐떡거림이 없어야 한다. 헐떡거림 속에서 무엇이 자꾸 일어나서 부산하게 알려고 하고, 찾으려하고 뭔가 안정이 안 되고 그런 사람들 있죠? 그걸 선방에서도 보면 ‘저 사람 되게 헐떡거린다’ 이런 표현을 써요.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천’자를 쓰는데 마음이 헐떡거리는 것도 역시 숨 헐떡거리는 듯이 한다 해서 ‘천’자를 씁니다. 그래서 마음이 장벽, 담처럼 꽉~ 막혀버려야 그런 헐떡거림도 없고 해서 바깥 인연도 쉬었고 그래야 도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是方便(시방편)이라, 方便門(방편문)이다.
借方便門(차방편문)하야 以入道則可(이입도즉가)어니와 守方便而不捨則爲病(수방편이불사즉위병)이라하니 誠如來語(성여래어)라
借方便門(차방편문)하야
방편문을 빌려서 도에 들어간즉 가하거니와
守方便而(수방편이)
방편을 지켜서 버리지 아니한 즉은 병이 된다 라고 편지에 했다는 거여. 상당히 아는 소리 했죠?
誠如來語(성여래어)라
진실로 보내온 말과 같다. 사실 그건 당신 말이 옳다 이거야.
山野(산야)- 讀之(독지)에 不勝歡喜踊躍之至(불승환희용약지지)호라
山野(산야)가 讀之(독지)에 不勝歡喜踊躍之至(불승환희용약지지)호라
산야, 대혜 스님 자신을 산야라고도 표현합니다. 운문이라고도 하고. 그것을 읽으매
歡喜踊躍之至(환희용약지지)
환희용약이 지극한 것을 이기지 못했노라. 야!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거죠.
今諸方漆桶輩(금제방칠통배)는 只爲守方便而不捨(지위수방편이불사)하야 以實法(이실법)으로 指是人(지시인)이라하나니 以故(이고)로 瞎人眼(할인안)이 不少(불소)로다
今諸方漆桶輩(금제방칠통배)는
제방에 칠통배, 옻이라고 하는 그것이 본래 검잖아요? 그것을 통에 담아서 운반도 하고, 팔기도 하고, 다른데 쓰기도 하는데 얼마나 검겠어요? 옻이 조금만 있어도 새카맣지 않습니까? 옻칠하면 새카만잖아요? 칠만 해도 새카만데 그걸 통에다 가득 담았다 했을 때 그 통 속의 옻이 얼마나 검겠어요? 그렇게 캄캄하다. 캄캄한 무리들. 이런 말이 있죠.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리산 칠불암에 打破漆桶觀(타파칠통관)이라고 해서, 여름에 타파칠통관할 때가 많이 있지요. 지금 돌아왔네요. 여름 결제하고. 우리의 무명 업식을 칠통이라 이야기를 하고요, 그리고 세상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칠통과 같다. 그 옻을 담은 통과 같이 캄캄해서 아무 분별이 없다 이거야. 지금 제방의 칠통배들은
只爲守方便而不捨(지위수방편이불사)하야
다만 방편을 지켜서 버리지 아니해서 실법으로서 사람에게 지시한다. 라고 하니 이러한 까닭에
瞎人眼(할인안)이 不少(불소)로다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 적지 않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잘 모르니까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所而(소이)로 山野(산야)- 作辯邪正說(작변사정설)하야 以求之(이구지)호라
所而(소이)로 山野(산야)가 作辯邪正說(작변사정설)
사와 정을,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가려내는 학설을 지어서
以求之(이구지)호라
그 글을 지어서 막 퍼트려 사람들에게 알리고, 잘못 가고 있는 사람을 구제했노라.
近世(근세)에 魔强法弱(마강법약)하야 以湛入合湛(이입담합담)으로 爲究竟者(위구경자)- 不可勝數(불가승수)며 守方便不捨(수방편불사)로 爲宗師者(위종사자)- 如麻似粟(여마사속)이로다
近世(근세)에 魔强法弱(마강법약)하야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해서
以湛入合湛(이담입합담)으로 爲究竟者(위구경자)가 不可勝數(불가승수)라
담입합담, 고요한 것으로 깨끗한 것으로서 깨끗한데 들어가 합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6식, 7식이 맑아져서 다시 8식의 맑은 경계에 들어가는 것. 그래서 말쑥한 깊은 정신 상태, 맑고 깊은 정신 상태가 되는 것. 그걸 가지고 究竟(구경), 공부 끝난 것이라고 삼는 사람들이
不可勝數(불가승수)다 이거야.
그래서 자꾸 망상 던지고, 던지고, 휴거, 휴거, 쉬고, 쉬고 해서 망상이 하나도 안일어나가지고 아무런 사량분별이 없는 그런 상태, 거기에 강렬한 의심이 거기에 있어야 되는데 그저 고요하기만하고, 편안하기만 하고, 조용하기만 한 그런 상황, 그런 정신 상황은 누가 흔들어버리면 또 흐려지죠. 흔들면 흐려지는 그런 상태의 공부니까. 화두라는 것은 아주 망상, 오히려 화두가 큰 망상이죠. 모든 망상을, 하나의 망상을 집약시켜서 그 망상이 말하자면 터트려졌을 때, 폭파가 되었을 때 그 때 모든 망상이 다 뿌리 채 뽑히는 그런 방법이라고. 이 화두를 드는 것은 그런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르죠. 不可勝數(불가승수)라
守方便不捨(수방편불사)로
방편을 지켜서 버리지 않는 것으로서 종사를 삼는 자
如麻似粟(여마사속)이라
삼과 같고 조와 같이 그렇게 많다.
山野(산야)- 近?與衲子輩(근 여납자배)로 擧此兩段(거여차양단)호니 正如來書所說(정여래서소설)하야 不差一字(불차일자)라
그래서 산야가 근래 일찍이 납자배들과 더불어 이 양단을 드니, 두 가지 일을 드니
正如來書所說(정여래서소설)하야
바로 보내온 글의 이야기와 같아서
不差一字(불차일자)라
한 글자도 어긋나지 않았더라. 앞에서 방편문을 빌어서 도에 들어가면 좋지만 방편을 지켜서 버리지 아니하면 병이 된다 하는 이야기와 똑 같더라 이거지.
非左右-留心般若中(비좌우-유심반야중)하야 念念不問斷則不能洞曉從上諸聖(염념불문단즉불능통효종상제성)의 諸異方便也(제이방편야)니라
非左右-留心般若中(비좌우-유심반야중)하야,
좌우가, 그대가.
아주 웃지 못할 이야기가 이 정식 과정을 밟지 아니하고 서당에서 공부를 상당히 했다고 해서 어느 큰 절에서 강사로- 강사가 귀할 때 - 강사로 모셔서 <서장>을 가르치게 되었어. 그래서 유교식으로 글을 보면 뭐 돌아가야지? 도대체 짐작이 안되고 좌우가 나오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하나? 하다가 좌우지간 이렇게 해석을 했다고 하는...(웃음) 그런 이야기도 있어요. 누구라고 말하면 지금 큰스님으로 생존해 있는 스님인데.
시자를 좌우에 두고 산다하는 그런 뜻에서 상대를 바로 지적하지 못하고 시자를 지적하는 말이죠. 좌우라고 하는 말은.
좌우가 마음을 般若中(반야중)에 머물러서 念念에 간단하지 아니한즉
不能洞曉從上諸聖(불능통효종상제성)의 諸異方便也(제이방편야)니라
능히 종상제성, 과거의 많은 성인들의 가지각색으로 베풀어 보이는 다른 방편들을 통효하지 못했을 것이다. 좌우가 반야중에 말하자면 마음을 머물지 아니했으면 그렇다 이 말이지.
公(공)이 已捉着파柄在手(이촉착패병재수)어늘 何慮不捨方便門而入道耶(하려불사방편문이입도야)아
公(공)이 已捉着파柄在手(이촉착패병)이라
공은 이미 공부하는데 칼자루를 잡았다 이거야. 자루가 손에 잡힌 것이다.
기득패병재수어니- 이미 칼자루를 얻어서 당신 손에 있다. 공부하는데 이미 어느 정도 길을 찾았다 이거죠.
何慮不捨方便門而入道耶(하려불사방편문이입도야)라
어찌 방편문을 버려서 입도에 들어가지 못할까? 근심하겠는가? 염려하겠는가? 벌써 길을 찾은 사람인데 뭘 염려할게 있겠느냐?
但只如此做工夫(단지여차주공부)호대 看經敎(간경교)와 幷古人語錄(병고인어록)과 種種差別言句(종중차별언구)도 亦只如此做工夫(역지여차주공부)하며
但只如此做工夫(단지여차주공부)호대
단지 이와 같이 공부를 짓되
看經敎(간경교)와
경교를 보는 것
아울러 古人語錄(고인어록)보는 것
그리고 種種差別言句(종종차별언구)보는 것, 이런 것도 또한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지으며
如須彌山放下着(여수미산방하착)과 狗子無佛性話(구자무불성화)와 竹篦子話(죽비자화)와 一口吸盡西江水話(일구흡진서강수화)와 庭前栢樹子話(정전백수자화)에도 亦只如此做工夫(역지여차주공부)하고
또 須彌山下放着(수미산방하착)과 狗子無佛性話(구자무불성화)와 竹篦子話(죽비자화)와 一口吸盡西江水話(일구흡진서강수화)와 庭前栢樹子話(정전백수자화)
이건 참 1700공안 중에서도 아주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공안이죠. 특히 狗子無佛性(구자무불성)은 특히 <서장>에서도 대혜 스님이 자주 권하는 바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선객들 한 80%가 狗子無佛性(구자무불성)을 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데이터를 내본 것은 아닌데 그전에 한번 씩 이야기를 해보면 대개 그렇더라구요.
竹篦子話(죽비자화), 一口吸盡西江水話(일구흡진서강수화), 庭前栢樹子話(정전백수자화)에도 亦只如此做工夫(역지여차주공부)하고
다 방편이다 이거야. 방편인줄 알라. 亦只如此(역지여차), 또한 다만 이와 같이 라고 하는 것은 방편을 방편으로 알고 방편을 통해서 실법을 깨닫는 것. 그러니까 방편은 나중에 버리고, 지키지 말고 버리라는 거지. 방편을 버리는 것. 그것이 방편문을 빌어서 도에 들어가는 진실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이게 무슨 죽비자화니 구자무불성이니 일구흡진서강수화니 무슨 정전백수자화니 또 판칠생무니 그게 뭔가 있는 거냥 알면 그건 공부인이 아니다. 다 방편의 말이다. 방편.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라 라고 하는 말은 방편, 여긴 방편의 이야기니깐. 방편과 실법의 이야기거든요.
更不得別生異解(갱부득별생이해)하며 別求道理(별구도리)하며 別作伎倆也(별작기량야)어다
更不得別生異解(갱부득별생이해)하며
다시 더 이상 따로 알음알이를 내지 말며
別求道理(별구도리)하며
따로 도리를 구하지도 말며
別作伎倆也(별작기량야)어다
따로 기량을 짓지도 말지어다. ‘아니 불’ 자가 다 그렇게 먹히죠.
公(공)이 能向急流中(능향급류중)하야 時時自如此提掇(시시자여차제철)하고 道業(도업)을 若不成就(약불성취)하면 則佛法(즉불법)이 無靈驗矣(무영험의)리니 記取記取(기취기취)어다
公(공)이 能向急流中(능향급류중)하야
그대가 능히 급류중을 향해서, 일상사, 급히 흐르니까. 이거 안하고 못배기지 않습니까? 잠 올 때 자야 되고, 또 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해야 되고, 그게 다 급류예요. 급히 흐르는 그런 가운데서
時時自如此提掇(시시자여차제철)하고
때때로, 수시로 스스로 이와 같이 이끌어 가고, 제철-챙기고
道業(도업)을 若不成就(약불성취)하면
그리고도 만약에 도업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곧 佛法(불법)이 無靈驗矣(무영험의)니라
불법이 영험이 없을 것이다.
記取記取(기취기취)어다
부디 기억하고 기억하라. 그렇게 제대로 해나가기만 한다면 정말 틀림없다 이거야. 공부 성취는.
그리고 여기서 부터는 삼돌장에 해당됩니다.
承(승)호니 夜夢(야몽)에 焚香(분향)하고 入山僧之室(입산승지실)하야 甚從容(심종용)이라하니 切不得作夢會(절부득작몽회)하고 須知是眞入室(수지시진입실)이니라
承(승)호니
편지에 이런 말을 했나 봐요.
夜夢(야몽)에 焚香(분향)하고 入山僧之室(입산승지실)하야
밤 꿈에 향을 사르고 산승의 방에 들어갔는데
甚從容(심종용)이라
우리가 조용하다, 아주 조용하다고 하는 말이 이거예요. 조용하다, 고요하다는 그런 우리말의 뜻하고 같습니다. 매우 종용했다하니
切不得作夢會(절부득작몽회)하고
그러니까 하도 대혜스님을 사모하고, 대혜스님의 지시대로 공부를 하니까 대혜스님을 꿈에 뵙나 봐요. 그런데 아무 대화도 없고 조용한 그런 환경만 기억에 남았나 봐. 절부득작몽회, 그 때 꿈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꿈이라는 생각하지 말고, 몽회, ‘회’자도 알음알이예요.
須知是眞入室(수지시진입실)이니라
모름지기 알라. 꼭 알아야 된다. 須知. 반드시 알아야 된다. 진실로, 참으로 내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라. 진짜 들어온 걸로 그렇게 알라 이거야. 그렇게 결론부터 말씀을 해놓고 옛날 경전에 나온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不見(불견)가 舍利佛(사리불)이 問須菩提(문수보리)호대 夢中(몽중)에 說六波羅密(설육바라밀)호니 與覺時(여교시)로 同(동)가 別(별)가 須菩提-云(수보리-운)호대 此義(차의)는 幽深(유심)하야 吾不能說(오불능설)이라 此會(차회)에 有彌勒大士(유미륵대사)하니 汝往彼問(여주피문)하라하니 咄漏逗不少(돌루두불소)로다
보지 못했는가?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묻되 夢中(몽중)에 내가
六波羅密(육바라밀)을 설했는데
與覺時(여교시)로 同(동)가 別(별)가
꿈 이야기할 때 꿈 깰 ‘교’라고 발음해요. 이럴 때는. ‘각시’라고 하면 안맞아요. 꿈을 깬 때로 더불어 같은가? 다른가? 이렇게 하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는데, 수보리가 받아서 말하기를 “아, 그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데. 이 뜻은 幽深이라, 아주 어려워서
吾不能說(오불능설)이라
나는 이야기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 회중에 미륵대사가 있어. 그러니까 그대는 그에게 가서 물어라” 이렇게 수보리가 대답을 한 거요. 꿈에 육바라밀을 설했는데 깨달았을 때, 꿈 안깼을 때 하고 이게 같으냐? 다르냐? 그걸 물었어요. 그러니까 미륵대사에게 가서 물어라.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게 대답이예요. 이런 대답에 꼭 넘어가기 일쑤죠. 가서 물어라 하니까 덮어놓고 가서, 그야말로 할로축개죠. 그러니 돌, 이것은 대혜스님이 “돌-!” 한 겁입니다. 누구에게 ‘돌-’ 했겠어요? 사리불이 그렇게 물으니까 수보리가 미륵대사에게 인계를 했는데 ‘돌-’을 누구에게 했느냐? 대개 사리불에게 한 걸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는데 사실은 사리불에게 하는 이유가 뭐냐? 사리불이 그렇게 물은 그 질문이 문제가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고, 또 수보리에게 하는 경우도 있어요. 수보리에게 자기가 대답을 한 것인데 이 대답이 미륵보살에게 미뤄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수보리에게 ‘돌-’을 대혜스님이 던졌다. 이래서 여기는 옛날부터 강원에서 심심하면 삼돌장 가지고 이야기가 될 정도로 많은 스님들 시간을 뺏은 대목이예요.
그리고 漏逗不少(루두불소)
그랬어요. 허물. ‘루두’라고 하는 것은 허물이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허물이 적지 않다. 내 생각은 수보리에게 하는 것으로 그렇게 볼 수가 있어요.
그 다음에 뒤에 보면 그런 것이 짐작이 갑니다.
雪竇云(설두운)호대 當時(당시)에 若不방過(약불방과)어든 隨後與一剳(수후여일답)어늘 誰名彌勒(수명미륵)이며 誰是彌勒者(수시미륵자)오 便見氷銷瓦解(변견빙소와해)로다하니 咄雪竇-亦漏逗不少(돌설두-역루두불소)로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설두 스님이 말하기를
當時(당시)에 若不방過(약불방과)하고, ‘하고’라고 하는 것이 좋아요. 隨後與一剳(수후여일답)어늘
그 때 예를 들어서 수보리가 사리불이 그렇게 물어왔을 때 수보리가 당장에, 말하자면 뭐 인지하거나 그러지 말고 바로 한 번 내질러 줘야 한다. 답이라고 하는 것은 내질러 주는 것, 주먹을 한번 내지른다던지, 발로 걷어차던지 그렇게 아프게 화살을 쏘듯이 그렇게 해주는 것을 ‘일답’이라고 합니다. 저 앞에서 멱살을 잡고 넘어뜨린 이야기라던지, 황벽과 임제의 그런 관계처럼 그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한 번 찔러주느냐?
誰名彌勒(수명미륵)이며
그러니까 사리불이 수보리의 말을 듣고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거여. “미륵에게 가서 물어라” 했으니까 수보리보고 미륵은 무슨 미륵이야? 누가 미륵이야? 누가 미륵이라고 말했어?
誰是彌勒者(수시미륵자)
또 누가 미륵이냐? 이렇게 미륵이라고 이름하는 사람과 진짜 미륵이라고 하는 사람, 도대체 어디 있냐? 이거지. 그렇게 했으면
便見氷銷瓦解(변견빙소와해)
수보리가 완전히 거기서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되었을텐데.... 하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두 번째 ‘돌-’이예요. 대혜스님은 ‘돌-’, 설두도 漏逗不少(루두불소)로다. 설두도 그런 식으로 수명미륵이며 수시미륵자오, 이렇게 한 번 쏘아주어야 되는데, 그랬으면 참 좋았을텐데 그 말이야. 변견빙소와해라는 말은. 그 말도 내가 보기에는 틀렸다. 설두도 역루두불소로다. 또한 허물이 적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或有人(혹유인)이 問只如曾待制-夜夢(문지여증대제-야몽)에 入雲門之室(입운문지실)이라하니
어떤 사람이 묻기를
다만 저 증대제- 증시랑이 꿈에 雲門(운문), 내 방에 들어왔다 라고 했으니 또한 한마디 일러보아라.
且道(차도)하라 與覺時(여교시)로 同(동)가 別(별)가하면 雲門(운문)은 卽向他道(즉향타도)호대 誰是入室者(수시입실자)며 誰是爲入室(수시위입실자)며 誰是作夢者(수시작몽자)며 誰是說夢者(수시설몽자)며 誰是不作夢會者(수시불작몽회자)며 誰是眞入室者(수시진입실자)오하리니 咄亦漏逗不少(돌역루두불소)로다
與覺時(여교시)로 同(동)가 別(별)가하니
꿈 깼을 때, 꿈 안꾸고 들어온 것 하고 그게 같은가? 다른가? 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雲門(운문)은 卽向他道(즉향타도)호대
나는 곧 묻는 사람을 향해서 말하되
誰是入室者(수시입실자)며
말이 좀 많아요. 누가 내 방에 들어온 사람이며
또 誰是爲入室(수시위입실자)며
여기는 입실함이 된 사람이냐? 그러니까 앞에는 입실한 사람이고, 요것은 말하자면 입실을 당한 사람이 돼요. 두 번째는. 입실이 된 사람이냐? 하는 이 말은 ‘爲’자가 있는 것은 입실을 당한 사람, 입은 사람. 이런 말이죠. 입은 사람이냐? 대혜냐? 이 말이죠. 누가 대혜냐? 그 말이죠.
誰是作夢者(수시작몽자)며
누가 꿈을 꾼 사람이며
誰是說夢者(수시설몽자)며
누가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며
誰是不作夢會者(수시부작몽회자)며
누가 꿈이라는 알음알이, 생각을 짓지 않고 진실이다, 실제로 방에 들어온 것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냐? 앞에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또 誰是眞入室者(수시진입실자)며
누가 참으로 방에 들어온 사람, 참으로 방에 들어온 사람인가? 라고 하리라.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됐는데 이것은 꿈꾼 사람도, 또 꿈도, 그 꿈을 통해서 방에 들어오고 그 방에 있었던 당신도, 그리고 꿈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않는 사람, 참으로 꿈에 방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 참으로 방에 들어온 그 사람, 그 모두를 싹 부정해 버리는 거죠. 사실은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여기서. 그냥 말일 뿐이예요. 그래놓고 그걸 대혜스님이 알았던지
咄亦漏逗不少(돌역루두불소)로다
또한 허물이 적지 않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말로서 표현하고자 했던 그 어떤 실제의 이야기를, 진실을 그렇게 자기 허물을 쓸어버린 그런 입장이라고 흔히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 ‘돌-’ 세 번 있었다고 해서 삼돌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불교에서는 꿈이라고 하는 것을 흔히 뭐 인생은 꿈이라고 그러죠. 현실을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고.
월창거사 <술몽쇄언>, 불교서적으로서 아주 명저죠. 크게 오래된 책은 아니지만 2~3백년 됐나요? 한 이백년쯤 됐나? <술몽쇄언>이라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아주 잘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이런 식으로 뜻은 같죠. 뜻은 같은데 꿈과 진실은 둘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에 내가 들은 이야기가 꿈이라고 하는 것은 한 생각 일으킨게 꿈이고, 한 생각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또 현실, 사실하고 다르지 않다. 한 생각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한 생각 일으킨 것은 벌써 ‘나’다 이거야. 망상을 했던지 그게 말로 안따르고 행동으로 안따랐다고 해도 내 생각 그것도 ‘나’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그걸 우리가 무시하면 안된다. 그래서 여기도 보면 참으로 입실한 것으로 그렇게 여겨라. 그렇게 여길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이다. 참으로 입실한 것이다. 꿈에 입실해서도 참으로 입실한 것이다. 이렇게 대혜스님의 속뜻은 그것입니다. 앞에도 본인도 이야기했지만.
옛날 오래된 중국 역사에 헌재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하도 해몽 잘한다는 사람을 불러다가 한번 시험해보려고 그 사람을 불러왔어요. 불러놓고 거짓 이야기를 했어요. 어제 밤 꿈에 내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한번 해몽해 보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왕궁에 기왓장이 떨어지더니 난새라고 하는 아주 이상한 전설상의 새가 되어서 하늘로 날아가더라. 이런 꿈을 자기가 지어내어서 꿈도 안꿨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맞추는가? 어디 한 번 보자. 꿈을 꾸고 질문을 해야 꿈을 제대로 맞출 걸 아니겠어요? 아예 꿈도 안꾸고 만들어서 해몽을 시킨거라. 그러니까 이 해몽하는 사람이 “대왕님, 불상사가 생길텐데요. 불상사가 곧 생길텐데요.” 그래. “무슨 불상사가 생기냐?” “지금 궁녀들이 싸워서 아마 사람이 하나 상할 겁니다.” 한 사람 상할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 “자네가 내 꿈 이야기를 듣고 하는 소리냐?” 그렇다는 거야. “내가 꿈도 안꾸고 자네를 시험하려고 한 소린데......” 그러니까 이 꿈해몽하는 사람이 “한 생각 일으킨 게 이미 꿈입니다.” 한 생각 일으킨 게 이미 꿈이라. 그렇기 때문에 왕이 꿈에 그런 꿈을 꿨든, 아니면 여기서 생각을 일으켜서 그렇게 꿈을 만들었든 똑 같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금방 보고가 오는 거야. 대왕에게. 궁녀들이 싸우다가 뭘 잘못 던져서 죽었다는 거야. 한 사람이. 그래서 왕이 탄복을 하는 거야. 그래서 꿈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의 한 작용이기 때문에 그 생각의 작용이라는 게 홀로 망상을 했든, 꿈속에서 꿈을 꿨든, 혼자 흘러가는 마음으로 생각을 했든 간에 이미 그것은 당신의 일이다. 왕의 자리에서 말 함부로 하는 게 아니죠. 어지간한 어디 시시한 단체장만 되어도 말 함부로 하면 밑에 사람들은 “어우~, 지금 어떻게 가고 있다고, 어떻게 할 계획이라고” 그렇게 안다고요. 그런데 왕의 자리에서 말을 함부로 했고, 그 말은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니까 그게 그렇게 그냥 될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한 고전도 있습니다만, 전부 우리 마음의 한 작용이죠. 다른
게 아닙니다. 꿈이든 망상으로 우리가 꾸며서 이야기를 만들었던 간에.
그 다음 여섯 번째 증시랑에게 보낸 편지는 마지막인데요. 이건 활구선, 활구 참선 그러죠? 활구선의 어떤 가치관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又(六) [勸勿求速效 但修般若]
勸勿求速效(권물구속효)
권 물구속효라. 속효, 빨리 효과가 나기를 구하지 말기를 권하고
但修般若(단수반야)라
반야만 닦아라. 이것도 권한다. ‘권’자가 해석해야죠. 속효를 빨리 구하지 말고, 말하자면 반야 닦기만을 권한다. 그러면서 참선에 대한 가치관, 또는 진정 이것이 생사를 걸고 모든 인생을 다 바쳐서 할 만한 일이, 그런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도 좀 언급되어 있습니다.
來書(내서)를 細讀數過(세독수과)코사 足見辨鐵石心(족견판철석심)하며 立決定志(입결정지)하야 不肯草草(불긍초초)호라
來書(내서)를 細讀數過(세독수과)코사
보내온 편지를 세독, 자세히 읽기를 여러 번 읽었다 이거야. 그리고
足見辨鐵石心(족견판철석심)하며 立決定志(입결정지)해서
족히 보았다. 무엇을? 철석같은 마음을 마련하고 있다. ‘판’자 이거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고, 아주 결정적인 뜻을 세우고 있다고, 그래서
不肯草草(불긍초초)라
대단한 어떤 결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초초하지 않음을 알았다. 족히 보았다. 여기 초초하다는 말은 시시하다,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는 그런 게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음을 내가 알았다.
但只如此崖到臘月三十日(단지여차애도납월삼십일)하면 亦能與閻家老子(역능여염가노자)로 廝抵(시저)하리니
但只如此崖到臘月三十日(단지여차애도납월삼십일)하면
다만 그런 마음 자세로서 납월 30일까지만 밀고 나간다면, 납월 30일에 이를 때까지 밀고 나간다면, 끝까지입니다. 여기서 납월 30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말 섣달 그믐날을 납월 30일이라고도 하지만 죽는 순간을 납월 30일, 견성 성불해서 마치는 것을 납월 30일, 끝까지를 납월 30일. 중국에서 이 섣달그믐을 그렇게 다양하게 썼나 봐요.
亦能與(역능여)
또한 능히
閻家老子(염가노자)로
죽음으로 더불어. 여긴 그런 뜻입니다. 죽음으로 더불어
廝抵(사저)하리니
겨루게 될 것이다. 염가노자로 더불어 겨룬다. 뭐 염라대왕 만나서 씨름 한바탕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죽음이 닥쳐와도 그 죽음을 대적할 만 하게 될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更休說豁開頂門眼(갱휴설활개정문안)하고 握金剛王寶劍(악금강왕보검)하야 坐毗盧頂上也(좌비로정상야)어다
更休說豁開頂門眼(갱휴설활개정문안)하고
그러니까 정문안을 활개, 이마 사이의 제 3의 눈, 그게 정문안입니다. 깨달음의 눈이죠. 정문안. 정문안을 열고 또
金剛王寶劍(금강왕보검)을 握(악)- 잡아서
毗盧頂上(비로정상)에 내가 앉아야 된다.
이런 소리 하지 마라 이거야. 철석같은 마음, 결정적인 뜻, 이것만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가면 됐지, 더 이상 무슨 유식하게 말이지 정문안을 활개하고, 금강왕보검을 손에 잡고, 그래서 비로정상에 비로자나불의 이마위에 내가 척 한 번 앉을 거야. 그건 뭐 소영웅심에서 하는 소리지, 그런 이야기하지 마라 이거여. 근사한 표현 같지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某_嘗謂方外道友曰(모_상위방외도우왈) 今時學道之士_只求速效(금시학도지사_지구속효)하고 不知錯了也(부지착료야)하야
某가 嘗謂方外道友曰(모_상위방외도우왈)
내가 일찍이 방외도우들, 이건 거사들을 두고 하는 소리죠. 거사들에게 말하기를
今時學道之士(금시학도지사)
요즘 도를 배우는 선비들이
只求速效(지구속효)하고
다만 속효만 구하느라, 속히 효과가 나기를, 빨리 좀 견성하는 방법이 없나? 이거. 이런 식으로 한다 이거야.
첫댓글 "한 생각 일으킨 게 이미 꿈이라."--불퇴지님의 녹취의 공덕으로 제 마음도 풍성해짐을 느낍니다. 가을하늘과 같으신 불퇴지님 늘 감사드립니다. _()()()_
_()()()_
밖으로 모든 인연들을 쉬고, 마음이 장벽처럼 꽉 막혀서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야 도에 들어간다.是方便門이라.방편을 방편으로 알고 방편을 통해서 실법을 깨달아 진실(도)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나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곧 병이된다...불퇴지님 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更不得別生異解(갱부득별생이해), 다시 더 이상 따로 알음알이를 내지 말며 別求道理(별구도리), 따로 도리를 구하지도 말며 別作伎倆也(별작기량야), 따로 기량을 짓지도 말라......불퇴지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_()()()_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이라사 可以入道는 是方便門이라... 밖으로 모든 인연들을 쉬고,안으로 마음이 헐떡거림이 없어야 도에 들어간다. 이것이 방편문이다...불퇴지님, 고맙습니다. _()()()_
방편을 방편으로 알고, 방편을 통해 실법을 깨닫기..... 하다보면, 인연이, 감정이 얽히고 설키며 어디까지가 방편이고, 어디까지가 실법인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래도 어떨땐 스스로의 판단이 두렵고, 외롭습니다. 늘 공부하시는 염화실 법우님들이 계셔서 조금은 덜 외롭습니다. 청복을 누리시는 법우님들, 고맙습니다._()()()_
_()()()_
_()()()_
꿈이라고 하는 것은 한 생각 일으킨게 꿈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한 생각 일으킨 것은 벌써 ‘나’다 ... 불퇴지님! 감사드립니다... _()()()_
“한 생각 일으킨 게 이미 꿈입니다.” 그리고 꿈은 곧 현실이다...불퇴지님 고맙습니다._()()()_
감사 합니다._()()()_
감사합니다._()()()_
꿈에 육바라밀을 설했는데 꿈깼을 때하고 꿈 안깼을 때 하고 같으냐, 다르냐하고 물으니까 "미륵대사에게 가서 물어라"고 하는구나! 감사합니다.
^^ _()()()_
勿求速效但修般若 ..._()()()_
감사합니다._()()()_
삼배 올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_()()()_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