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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使徒行傳)》 등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사울이다. 그는 그리스 문화의 교육을 받고, 로마시민권을 가졌으며 고명한 율법박사(律法博士) 가믈리엘의 제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열렬한 바리사이파로서 그리스도 교도들을 잡으러 다메색으로 가던 중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출현을 경험하고, 3일간 실명 상태가 되어 소명(召命)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3회에 걸친 대전도여행(大傳道旅行)으로, 로마에까지 그 발자취를 남겼다.
바오로 생애
1.개요 바오로는 초대교회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북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의 주요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중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리스도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오로은는 지성이 없이 열정만 있는 맹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열정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를 구약성서를 근거로 변증하는 지성적인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2.이름 바오로는 그리스세계에서 흔하게 사용된 그리스 이름이며, 그의 히부리어이름은 ‘사울’(Saul) 또는 ‘샤울’이다. 해외파 유대린들도 히브리어 이름과 그리스 이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그리스어 이름인 바울과 히브리어 이름인 사울을 모두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사울이 바울로 개명했다는 일부 그리스도교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몰라서 생긴것이다
3.생애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가던중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교인이 된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하지만 성 바울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리스도교가 독립종교가 아니라,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던 즉, 나자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교 소종파였기 때문에, 개종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새편집> |
사도행전 연구에서 전승과 편집의 문제는 성서학자들의 오랜 관심사이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사도행전 연구는 저자의 편집 활동에 집중되었으나 최근에는 사도행전에 담긴 전승에 더 높은 관심을 보인다. 전승과 편집의 문제를 다루는 데 특별히 베드로와 바오로의 선교 설교들은 결정적 구실을 한다. 루카로 알려진 사도행전의 저자가 자신이 전수받은 초대 교회의 원(原)전승을 이 선교 설교들에 담아 후대에 전달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원전승은 케리그마, 곧 사도들이 짧은 설교 형태로 선포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바오로의 선교 설교의 경우, 이 케리그마와 더불어 바오로의 친저 서간과 일치하는 바오로 전승을 포함한다. 본 소고는 루카가 바오로의 편지를 알고 있었고 사도행전 집필에 그 내용을 원용했으리라 추정한다. 사도행전 집필 연대를 대략 90년경으로 볼 때, 그즈음에는 바오로 서간들이 여러 교회에서 회람되었을 것이고 루카가 바오로의 생애와 전도 여행을 다루면서 바오로의 서간들을 굳이 외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다 회당에서 행한 선교 설교는 바오로의 다섯 선교 설교들 가운데 가장 길고 내용도 풍요롭다. 이 설교는 그 형식과 내용에서 사도행전의 전반부의 베드로 선교 설교들을 닮았으면서도 바오로 특성을 잘 드러낸다. 우리는 루카가 이 설교를 통해서 초대 교회의 원전승인 케리그마와 바오로 전승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전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The issue of redaction and tradition in the study of the Acts of the Apostles has been a long debated problem for biblical scholars. From 1950’s until 1980’s, the study of Acts focused on the redactional activities of the author of Acts, but in the recent years more interest has been given to the traditions contained in Acts. Peter’s and Paul’s missionary speeches, in particular, have a decisive role in dealing with the issue of redaction and tradition. For the author known as Luke attempted to transfer the proto-tradition of the Early Church, which was delivered to himself, through these speeches to the next generations. This proto-tradition is nothing but the Kerygma, that is, the life and teaching of Jesus as proclaimed by the Apostles in the form of a short speech. As for Paul’s missionary speeches, they embrace not only the Kerygma but also the Pauline tradition which coincides with the indisputable letters of Paul. This article presumes that Luke would have known Paul’s letters and used their content. Taking into account the composition date of Acts in 1990’s, Paul’s letters must have been circulated throughout many churches at this time and there is no reason for Luke to have disregarded the letters in his writing Paul’s life and missionary activities. Paul’s missionary speech in the Jewish synagogue at Pisidian Antioch is the longest and shows the richest content among his five missionary speeches. This speech in its form and content resembles to Peter’s missionary speeches in the first half of Acts, nevertheless manifests some Paulinisms. Through the analysis of this speech, we can affirm that Luke faithfully preserved and transmitted the Kerygma, that is the Proto-tradition of the Early Church, and the Pauline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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