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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강.롬9장30-10장8절.조창훈목사강해(칼빈주석에 근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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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강.롬9장30-10장8절.조창훈목사강해(칼빈주석에 근거)
들어가는 말
오늘도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그의 의와 축복과 모든 신령한 것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바란다. 주께서 오늘 주의 은혜의 말씀으로 우리를 더욱 의의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고, 그 은혜의 말씀을 잘 들어서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해주시기를 축원한다.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방인들의 의- 믿음에서 난 의
원어를 직역하면 “의를 추구하지 않는 자들인 이방인들이 의를 붙잡았다는 것을, 그러나(헬라어-데, 의미는 오히려) 믿음으로부터의 것인 의를”
의를 얻으려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이방인들은 거저 하나님의 복음을 단지 귀로 듣고 믿기만 하였는데,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었다. 이방인들이 한 것은 단지 선포되는 복음을 그냥 귀로 듣고 믿기만 한 것이었다. 결코 어떤 행위가 없었다.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아무 구원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이 의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그릇 행하여 곁길로 나아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값없이 그들을 용납해 주셨다.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 까닭에 구할 수가 없었던 의를 그들에게 제공해 주셨다(칼빈. 롬주석 9:30).
그런데 이 의는 값없는 화목에 기초하고 있다. 이 의를 얻는 수단은 바로 믿음이다(칼빈. 롬주석 9:30). 그런데 이 믿음도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미리 주셨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었다. 의도 은혜요 믿음 자체도 은혜이다. 믿음 자체도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칼빈. 롬주석 9:30). 그러나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칼빈. 롬주석 9:30).
하나님은 오직 그의 순전한 은혜를 높임 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들을 황송하게도 용납해 주셨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것 외에 아무 다른 원인을 생각할 수 없다(칼빈. 롬주석 9:30). 그런데 이렇게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에 근거한다. 구원의 최고의 원인은 이 예정이다. 이 예정보다 더 큰 원인들을 찾는 자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질서를 역행하는 것이다(칼빈. 롬주석 9:30).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이 모든 다른 원인보다 차원이 높은 것처럼, 경건치 못한 자들의 부패와 사악함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는 근거와 기회를 제공해준다(칼빈. 롬주석 9:30).
오늘날 여러분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다. 이것은 여러분이 어떤 가치 있는 행위를 하여서가 아니라 가치 없는 죄인들을 사랑하신 그의 말할 수 없는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더한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이곳에서 여러분들을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주의 은혜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복을 더하여 주시며, 평안을 더하여 주신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평안은 값없이 은혜로, 믿음으로 거저 얻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 평안,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노력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거저 얻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앞에 마음을 쏟아 놓는 자들에게 축복을 주신다. 그의 마음을 성령으로 채워주신다. 값없는 의로 우리를 덮어주신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상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자들에게 오직 그의 놀라운 자비로 상을 주시고, 복을 주시고, 평안을 주신다.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 행위에 의지함
원어직역 “그러나(헬라어-데) 의의 율법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은 율법을 위하여 도달하지 못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구한 것이 아니라 행위의 의인 율법의 의를 구하였다. 여기서 31절의 ‘의의 법’은 ‘율법의 의’를 의미한다(칼빈. 롬주석 9:31). 그들이 이렇게 행위에 기초한 의를 구하였지만 결국에는 얻지 못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의를 얻지 못한 이유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위에 근거한 공로는 대조된다. 믿음과 공로는 전적으로 서로 반대이다. 믿음은 그 자체의 공로를 생각함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행위에 대한 신뢰는 우리가 의에 이르는데 으뜸가는 장애물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신뢰할 수가 있는 것이다(칼빈. 롬주석 9:32).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행위에서 난 의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직책을 박탈하려고 하는 것이다. 32절에서 그리스도를 ‘부딪칠 돌’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33절에서는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라고 한다. 어떤 자들이 하나님께서 편한 길을 제시해 주셨는데도 자신들의 완악한 고집으로 의의 길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거침돌에 걸려 넘어진다. 그러할 때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원래 그리스도 자신이 거침돌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사악함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의에 대한 열심이 있는 체하면서 행위를 신뢰할 때마다, 그들은 발광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전쟁을 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칼빈. 롬주석 9:32).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의 양면성-걸림돌 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음
오늘 본문 3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파멸로 임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경건한 자들에게는 생명과 부활로 임하신다. 경건한 자들을 향해서 그리스도는 견고하고 보배로운 돌이요, 가장 튼튼하게 박힌 모퉁이 돌이시다. 그래서 그를 의지한 자는 누구나 결코 망하지 않는다(칼빈. 롬주석 9:33).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1:23,28). 바울은 ‘서두르거나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표현 대신에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한 것은 70인역 성경에서 취해 온 까닭이다(칼빈. 롬주석 9:33).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심
오늘 본문 10장 2-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무슨 종교를 믿든지 착하게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세상 종교를 믿는 자들은 엉뚱한 곳에서 땀흘려 열심이 절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단식을 하고, 열심히 봉사하면서 마음에 어떤 뿌듯함을 느낀다. 그것을 그들은 만족과 해탈이나 구원의 표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수많은 절을 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고 봉사를 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도 매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이들은 광적으로 열심히 찬송하고, 목소리를 다하여 기도를 한다. 매우 열심히 한다. 과거에 유대인들도 오늘날 다른 종교나 이단을 믿는 자들처럼 자기들의 열심히 구원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도 그들의 종교적인 열심히 죽인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노력하는 자들에게 구원이 있는가?
왜 이들은 예수님을 죽였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들의 행위에 근거한 자부심과 자랑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오히려 죄인됨을 회개하라고 하니 분노가 난 것이다. 자기 같이 선행을 열심히 하는 자들에게 어찌 회개하라고 하느냐며 화가 난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였다고 착각하였다. 자기들이 아니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없었다고 착각하였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봉사와 열심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다. 이들은 무엇이 참된 의인지 하나님의 평강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들은 마치 포도원에 일찍 불림 받아 일터에 나간 일군과 같았다. 자기 같은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뿐만 아니라 영광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도리어 자기들의 노력과 공로를 자랑하고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 민족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열심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들의 공로나 노력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받아들이라고 강조하자 이들은 반항하였다. 자기들이 왜 죄인이냐고 항거하였다. 자기들은 의인인데 왜 죄를 회개하라고 하냐며, 예수님을 미워하였다. 그 분노로 자기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여 죽였다. 뿐만 아니라 참 교회와 참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고 더욱더 착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불행이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오직 세상의 종교들을 믿는 사람들처럼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고의적인 악의가 없이, 다만 알지 못한 까닭에 선의로 저지른 과실은 어떤 것이나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칼빈. 롬주석 10:2).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잔인무도하게 사도들을 학대하고, 복음을 파괴하고 없애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들도 말할 것이다. ‘악의는 없었다’ 또는 ‘몰라서 그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은 모두 헛된 말들이다(칼빈. 롬주석 10:2).
유대인들의 어리석은 자만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데 있었다. 이들은 비록 열심을 가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쭐대게 하는 자만을 숨기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림으로 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며 반항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가 대조된다. 이 둘은 서로 반대이므로 함께 설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는 때에는 즉시로 하나님의 의가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칼빈. 롬주석 10:3).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의이다. 반면에 인간의 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거나 또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얻는 첫 단계가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의가 없으므로 다른데서 의를 구해야 한다. 이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칼빈. 롬주석 10:3).
구원은 열심히 하는 것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심판 때에 자기가 그리스도를 잘 몰랐으나 열심히 노력하였다고 변명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야 한다. 이 방법은 오직 은혜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뿐이다. 오직 값없는 은혜의 방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련해서 이 단순한 방법을 버리고, 자기들의 열심으로 구원받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의 왕이시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시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는 곳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 평화를 깨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다. 초신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위하여, 성도들의 평안을 위하여 하는 일들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통과 불화와 문제를 일으키게 될 때가 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 있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안에는 유대인처럼 이렇게 나의 수고와 노력과 선행에 대한 자부심으로 지나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보다는 영웅주의적인 생각은 없는가? 그러나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한다. 또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실뿐만 아니라 주의 영광된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직분까지 맡기심을 무한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설사 어떠한 봉사나 수고나 헌신과 순교의 노력을 하더라도 공로주의에 빠져서 교만해져서는 안되겠다.
정도로 천천히 가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중심에서 찾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에게 가는 올바른 길을 좇아가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탈선하여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는 정도로 느릿느릿 가는 것이 더 낫다. 만일 참으로 경건하고자 할 것 같으면, 락탄티우스가 말하듯이, 유일하고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칼빈. 롬주석 10:2).
여러분은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맹목적인 열심만 있고 참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 세상의 종교인들과 불신자들과 이단들이나 유대인들과 같이 되지 말고, 오히려 진리의 복음에 근거한 믿음으로 신앙 생활해야 하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사는 오늘 하루와 인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우리의 신앙의 처음의 기초와 최종 목적지도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임을 깨닫고 나의 힘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 시작하고 끝맺는 오늘 하루와 일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
오늘 본문 10장 4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였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올바른 길을 추구해 온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의에 전심전력해 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핵심과 정신은 거부하고서 죽은 문자만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비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힘쓰는 자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자들이다(칼빈. 롬주석 10:4).
행위주의자들은 말씀을 미워한다. 행위가 전부이지 무슨 말이 필요하냐고 한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자기들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것은 구원을 줄 수 없고, 행위가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내려온 말씀,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완전히 사회파괴분자요, 말장이요, 게으른 자였다. 무슨 하나님의 나라가 말로만 건설되냐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전혀 모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말씀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율법은 율법 자체 안에 완전한 의의 법을 제시한다.
율법은 그 자체 안에 너무나 완전한 그래서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을 정도의 완전한 의의 법을 제시한다. 이 측면에서만 보면 율법은 행위의 법이며, 은혜의 법인 복음과 대립된다.
율법을 전하여준 모세의 전체 직분은 두 가지였다. 모세의 첫 번째 직분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모세도 복음의 약속들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들은 산발적으로 나타나 있고 또한 이 약속들이 다소 흐릿하다. 모세의 두 번째 직분은 모세에게 특별히 위임된 부분으로서 율법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율법에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위하여 정하여진 명령들과 상급에 관한 것들이 나타나 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성격과,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어떤 형벌이 주어지는가를 보여준다. 모세는 그리스도와 대조된다. 즉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이것은 율법을 제한된 개념으로 본 것이다(칼빈. 롬주석 10:4).
또한 모세는 백성들에게 회개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 방식을 율법에 첨가하였다. 또한 백성들에게 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 주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의로운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상급과, 죄인들에게 임할 무서운 형벌을 선포하기 위하여 약속들과 위협적인 경고들을 첨가했다(칼빈. 롬주석 10:4).
율법은 율법 외에 다른 하나의 의를 증거한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율법의 마침이라”고 한다. 여기서 마침은 헬라어로 ‘텔로스’로서 끝, 완성 또는 성취란 뜻이다. 영어로는 대다수의 KJV, RSV, NASB등 영어성경이 the end로 번역하였다. 이 의미는 율법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셨다는 의미이다. 율법의 목적이요, 율법의 성취가 그리스도임을 의미한다.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직분은 경건을 위한 참된 규칙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회개와 믿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러나 믿음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약속을 제시했다. 모세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그가 이 직분을 충성스럽게 행했다. 이같은 사실은 많은 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백성들이 행해야 할 의무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방면에서 저주를 받을 만하였는가 하는 것과, 그들의 행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아무 것도 도무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의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절망 가운데 빠질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는 안식처인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도피하도록 하게 하였다. 이것이 모세가 행하는 직분의 목적이었다(칼빈. 롬주석 10:4).
율법이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하게 하려 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다(칼빈. 롬주석 10:4). 오히려 율법은 우리를 다른 의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사실, 율법의 모든 교훈과, 모든 명령, 모든 약속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의 모든 의를 벗어 던져버리고, 우리가 지은 죄악들을 깨닫고서 굴복해야 한다. 또한 공로 없이 거저 주시는 의를 오직 그에게서만 구해야 한다(칼빈. 롬주석 10:4).
믿음의 의는 이렇게 율법에 의하여 증거되었다. 즉 율법의 모든 부분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이 목표로 하는 그리스도에게 이르지 못하는 자는 아무도 율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상급을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이 죄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의가 필요하다. 그 의는 우리의 행위의 공로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까닭에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칼빈. 롬주석 10:4).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오늘 본문 10장 5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이 말씀은, 레위기 18장 5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율법은 행위의 의를 말한다. 율법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지키는 자들에게 생명을 약속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이 같은 완전에 결코 미치지 못해 왔다. 결국 이 율법의 가르침도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였다(칼빈. 롬주석 10:5).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이것은 아주 그릇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 의를 얻을 가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율법이 불가능한 조건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행위에서 나는 의를 세우기 위하여 율법의 약속들을 인용하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우리는 율법의 약속들에서 구원을 결코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일 그것들을 우리가 신뢰할 것 같으면, 틀림없이 저주가 임할 것이다. 공로를 입증하기 위해서 헛된 약속들을 붙잡는 것을 좋게 여기는 교황주의자들의 우둔함은 더욱 더 가증스럽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헛되이 약속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범죄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사망의 공포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그들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칼빈. 롬주석 10:5).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십자가와 부활
오늘 본문 10장 6-7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6절 말씀은 신명기 30:12에서 인용해 온 것이다. 이 말씀은 율법만을 말하고 있지 않고, 복음을 포함하고 있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교훈전체를 의미한다(칼빈. 롬주석 10:6).
6절과 7절의 ‘하늘’과 ‘음부’라는 단어는 인간들이 이르기에는 너무나 멀고 험한 처소들이다(칼빈. 롬주석 10:6). 6절을 보면 어떤 의심하는 자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가 영원한 하늘의 생명의 기업이 우릴 위해 준비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알고 있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의심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의심을 버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늘의 기업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란 말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의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하늘에 모셔 내리려는 것이다(칼빈. 롬주석 10:6).
7절을 보면 어떤 의심하는 자들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누가 영혼의 영원한 멸망이 육신의 죽음에 수반하는지의 여부를 알고 있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지옥의 공포에서 건져내 주셨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아직도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심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화시키는 것이요, 실로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칼빈. 롬주석 10:7). 바로 이 같은 의심들을 믿음에서 나는 의가 제거한다(칼빈. 롬주석 10:7). 그러므로 복음은 이 두 가지 십자가와 부활을 의심하는 것에 대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복음의 내용은 두 가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것은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만이 믿을 수가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더러운 죄인들을 위하여 가장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에서 죽은 나사렛 예수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만이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로 가장 큰 계시는 어떠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만세전부터 감추어온 비밀이며, 천사들과 선지자들이 살펴보고자 그렇게 바랐던 것이다. 이 두 가지 근거에 기초하여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주는 유익이 이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 두 가지 요소들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하다. 나머지는 모두 그 안에 포함된다(칼빈. 롬주석 10:6).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즉, 생명이 우리를 위해 획득되어 있다는 것과 사망이 정복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복음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사실들에 의하여 확증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해서 사망을 삼키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해서 그가 그의 권능으로 생명을 얻으셨기 때문이다(칼빈. 롬주석 10:6).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믿음의 말씀(8절)
오늘 본문 10장 8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제까지 어떤 의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자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 성경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가?
그것은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다만 사람들의 믿음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가르침은 결코 양심을 고요하게 해주거나 평온하게 해주지 못하며, 양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것으로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은 값없이 제공되는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평강을 주며, 구원의 확신을 준다(칼빈. 롬주석 10:8). 율법의 말씀은 그것이 복음에서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심어 넣기까지는 우리 심령 속에 단 한 마디도 거하지 않는다. 또한 중생한 후에도 율법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완전을 요구하며, 신자들이 완전에 이르려면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은 비록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마음 속에 거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불완전하고 허물된 것을 사해 주는 용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칼빈. 롬주석 10:6).
세상의 수많은 가르침들이 있다. 교양, 경제학, 의학, 심리학, 그 외 수많은 유익한 가르침들이 있다. 좋은 격언들이나 인생의 경험들이 있다. 매우 유익하고 감동과 눈물도 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으로 감동과 지식과 지혜를 얻어도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가르침도 때로는 서로 충돌하고 시간이 흐르면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가르침이 매우 유익하지만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생에는 유익함 외에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복음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하나님의 복음만이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지금 이 시간에도 듣는 것이다. 기도도 하나님의 복음에 근거해야 응답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불을 드린 나답과 아비후처럼 심판만을 그 머리에 쌓을 뿐이다. 우리는 오직 복음으로 시작하고 복음에 근거하여 기도하며, 복음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율법처럼 문자적이 아니라 영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복음은 이렇게 성령의 가르침이다.
8절에서 사용된 ‘믿음의 말씀’은 약속의 말씀, 복음 자체를 의미한다. 즉, 복음의 말씀은 “믿음의 말씀”이다(칼빈. 롬주석 10:8). 바울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그와 모세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있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 역시 신적 은혜에 대한 약속에서만 우리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칼빈. 롬주석 10:8).
하나님의 복음은 생명을 준다. 복음은 6절 말씀처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제시한다. 오직 복음은 어떠한 행위도 없이 오직 들음으로, 그 들은 것을 단지 마음에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복음으로 얻는 의는 그러므로 매우 신기한 의이다. 어찌 사람이 어떠한 행위도 없이, 단지 귀로 듣고 마음으로 믿기만 했는데 구원을 얻는단 말인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너무나 단순하다.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을 불신하고 의심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은 것이다.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천주교인들에게 핍박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말하면 핍박을 받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이 제시하는 내용은 세상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받은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그러나 이 율법조차도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였다. 세상의 수많은 가르침들도 많은 유익과 감동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들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에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복음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 하나님의 복음은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다. 바로 성경말씀이 선포되고 이 선포된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히4:12)“한다.
나오는 말
이제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교회를 위하거나 이웃을 위하거나 간에 선행과 봉사에 대한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그 봉사의 힘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이다. 오직 주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수고나 노력을 자랑하지 말고, 그것을 어떠한 공로나 자랑이나 교만의 근거로 삼지 말고,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그의 거룩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거룩한 직분까지도 주셔서 주의 일에 봉사케 하신 은혜에 또한 감사해야 할 것이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통하여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