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내
“가시내가 많이 배워서 어따 쓸라고? 밥이나 혀!”
팔남매의 자식이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그 자식들 다 공부시킬 수 없으니 일단 여자는 배우지 말고 밥이나 하라는 아버지의 말은 상실의 시대에서 발생한 암흑 같은 말이었고 무덤 같은 말이었다. 누나는 책보를 내 던지고 남동생들 뒷바라지에 허리를 펼 날이 없었다.
동네에는‘단’이라고 하는 모내기 단체가 있었다. 줄을 잡는 두 명의 남자와 모를 심는 이십여 명의 여성으로 조직된 단의 힘은 매우 컸다.
모내기 줄 뒤로 이십여 명의 여성이 양팔의 길이만큼 떨어진 채 횡대로 줄을 섰고 한쪽 줄 끝을 잡은 동네 이장아저씨가 호각을 불었다.
“호로록”
단 뒤에서 나는 모를 심을 논의 모가 부족하지 않게 쪄낸 모를 군데군데에 놓았다. 스무 명의 엉덩이가 일순 올라가면 사십 개의 손이 일제히 바빠지기 시작했다.
왼손엔 모를 통째로 쥐고 오른손으로 심을 모 만큼을 뜯어 논바닥에 꽂는다.
왼손으로 쥔 손의 셋째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이 부지런히 뜯겨나갈 만큼의 모를 밀어내면 오른손은 거침없이 딱 그만큼의 모를 뜯어 논에 꽂는다. 보통 네 개 정도의 모를 한꺼번에 심는다. 발의 왼쪽부터 심어가기 시작한 모는 오른쪽 끝에 가서야 끝난다. 모는 못 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붙여진 끈 표시에 꽂아야 한다. 그래야 모가 자랐을 때 통풍이 잘 된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수백 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그 큰 논에 모가 전부 심겨진다.
아낙네는 마땅한 화장실이 없어 아직 모를 심지 않은 빈 논에 흰 엉덩이를 치켜세우며 볼일을 보곤 했다. 젊은 처녀들은 창피해서 근처 담배 밭까지 다녀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오는 누나의 종아리는 언제나 큼직한 거머리 두세 마리는 꼭 붙어 다녔다. 누나는 거머리를 떼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거머리는 쉬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거머리자체가 미끄럽기도 하려니와 그 빨판의 강도가 매우 센 탓일 게다. 거머리를 떼어내면 피가 쉬이 멎지 않는다. 어머니는 근처 밭두렁에서 삐비꽃을 꺾어와 피가 나는 곳에 붙였다. 신통하게도 피가 멎었다.
아버지는 모를 찌러 다른 집으로 일을 갔다. 시골의 일은 대부분 품앗이다. 여럿이 모여 하루는 우리 집, 하루는 이웃 집, 이렇게 돌아가며 각자 하루씩 일을 하는 것이다. 비가 온다거나 피치 못해 반나절 밖에 못했으면 나중에 반나절동안 다른 일을 해서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비료포대에 짚을 가득 넣고 묶어서 그 위에 앉아 모를 쪄냈다. 모를 쪄낸다는 것은 모를 심고자 못자리를 했던 논에서 모를 한주먹 씩 뿌리 채 떼어내 지푸락으로 묶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의 손은 거의 달인 수준이다. 양 손이 못자리를 몇 번 지나가면 금세 한 묶음의 모로 탈바꿈 되는 것이다.
장성한 둘째 형은 동네에 써레질을 하러 갔다. 소에 써레를 달아 써레가 회전하면서 논바닥의 흙을 가루로 만들고 써레 양쪽에 줄을 매달고 그 끝에 커다란 판자를 매달아 논바닥에 놓는다. 써레질이 된 흙이 물과 섞여 갈 곳 몰라 방황할 때 뒤따라오는 판자는 그 흙을 부드럽고 반듯하게 쓰다듬는 것이다. 소는 숨을 헐떡거리며 논 전체를 휘젓고 다녔다. 소가 된 일을 할 때 아버지는 찹쌀 죽을 끓여서 소에게 먹였다.
외숙은 산비탈의 땅을 갈아엎고 있다. 날이 깊은 쟁기는 소의 힘에 이끌려 사래 긴 논을 일일이 갈아엎었다. 쟁기는 미려한 곡선이 날에 얹혀있어서 땅을 파고 들면 파진 흙은 쟁깃날을 따라 쓰윽 올라가면서 이윽고 곡선을 따라 춤추듯 뒤집어지는 것이다.
외가댁 형은 양수기로 논에 물을 대고 있었다. 나는 이상으로 논에 물을 대면서 모를 심을 때까지의 순서를 역으로 되짚어 보았다. 시골 일은 뭐든 쉬운 일이 없다. 어릴 때 자라면서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람 잘 날 없었는데 이런 나에게도 사춘기는 오고 있었다.
외숙의 막내딸 윤자는 나랑 동갑이다.
그녀와 나는 사촌간인데 내가 생일이 일주일 빠르다. 그녀는 나를 오빠라 부르지 않았다. 우린 친구나 다름없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가면 그녀는 외숙 옆에서 장기와 바둑을 배우는 중이었고 그녀가 우리 집에 오면 나는 누나와 민화투를 치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개그우먼 뺨쳤고 나는 웃느라 늘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친구가 나의 친구가 되고 나의 친구가 그녀의 친구가 되었을 때 나는 어느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다.
그녀의 친구가 예뻐 보였고 그녀의 친구가 눈에서 어른거려 내가 잠 못 이룰 때 나의 성장 통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형과 형 친구가 숨겨온 문제의 여자 나체사진이다.
형은 형 친구가 준 문제의 나체 사진을 벽장에 숨겼다. 형은 잘 숨긴다고 수십 번 접어서 벽장 구석에 놓았지만 다락을 좋아했던 나는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몰래 벽장을 뒤졌다.
‘형이 아까 막시 벽장 구석탱이에다 뭔가를 숨겼는데 어디다 놓았지?’
나는 한참 만에 사진을 찾아 뒤란으로 갔다. 갈퀴나무가 산더미처럼 쌓인 나무를 들추고 햇볕이 들어오는 따뜻한 곳에 앉아 문제의 나체사진을 감상했다. 금발이 길게 늘어진 아리따운 처녀의 알몸 사진이다.
눈은 적갈색이다. 눈동자에서는 다이아몬드 같은 광채가 났다. 코는 면도날처럼 오뚝했다. 후 일 내가 본 그때의 나체 사진은 브룩쉴즈이거나 피비켓츠 이거나 소피마르소중 한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는 하얀 솜털이 푹신푹신한 양탄자에 드러누워 자유를 갈망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은 풍만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난생 처음 자세히 보는 그녀의 아랫도리는 검은 숲으로 무성했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중추신경은 막걸리를 마셨을 때처럼 몽롱했다.
‘아!’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의 완벽한 나체사진, 이따금 어머니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옷 벗은 외국 여자, 나는 충격이었고 그 충격은 반 년 동안 내 기억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다시 그 사진이 보고 싶었다.
벽장문을 열고 구석구석을 다 뒤졌는데도 그 나체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허탈했다. 그렇다고 형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잡지책에 나온 여자의 수영복을 입은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다. 선데이 서울에 나타난 표지 모델의 정윤희가 잡지에서 오려졌고 뒤이어 유지인의 비키니 수영복이 오려졌다. 유독 수영복 입은 여자의 사진만 잡지책에서 없어지자 누나는 나를 의심했다. 당대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미녀들의 수영복 패션은 곧 나의 역사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애써 모은 수영복 사진을 다 태워버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나는 나 스스로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사춘기가 시작되는 나의 성적 호기심은 이유 없는 반항으로 이어졌다.
같은 반 여자 아이가 언젠가 전학을 왔다. 내 짝꿍도 여자인데 나는 짝꿍에게는 손끝하나 건들지 않았다. 그 친구는 너무나 착하고 순진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옆 분단의 여자 친구 인자에게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가 시비를 걸어 싸우곤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순진하지 않거나 착해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야! 인자야! 너 여기 건너가려면 통행세 내고 가. 알았냐?’
인자가 앙칼지게 대들었다.
‘뭐? 이 통로가 네 것이니? 웃기고 있어.’
나는 얌전히 앉아있는 그녀를 발로 툭툭 건들었다.
“으앙, 너 자꾸 그러면 울 오빠한테 이를 거야!”
인자는 결국 나의 괴롭힘에 지쳤는지 오빠한테 일렀고 오빠는 나를 불러냈다.
“너 이 자식! 왜 약한 내 동생을 건들고 그러냐? 다시는 그러지 마! 알았냐?”
“예!”
그 후, 나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고등학교 때 같이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는데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나의 쑥스러움이, 아니 나의 소심함이 그녀를 멀리하게 했고 어쩌면 사과 한 마디 정도는 했을 인연이었는데도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30년이 흐른 어느 날 동창회에서 나는 인자에게 사과했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미안하다.”
“미안하긴 난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호호.”
나는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
고단한 날개 쉬어 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
외로움이 눈시울 질펀하게 드리우면 괜히 쓸쓸했던 적이 있다. 나조차 알 수 없는 나의 그리움은 밤하늘을 나는 기러기들의 날갯짓처럼 밤마다 푸드덕 거렸다. 나는 고독과 싸우며 나의 어린 날의 일기장에 고독을 묻었다. 찬 서리를 등에 지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날갯짓이 왜 그리도 쓸쓸하게 보였는지, 마을 굴뚝마다 소슬소슬 오르는 저녁 밥 짓는 연기가 왜 그리도 부럽기만 했는지, 왜 나의 행복은 없고 남의 행복은 크게 보였는지 어린 나는 몰랐다. 새벽 아침 짚더미에 쌓인 서리가 녹기 시작하고 퇴비에 쌓인 서리가 햇빛에 녹을 때 나의 고독도 녹고 있었다.
아침은 다시 햇빛이 떠오르는 찬란함의 시작이었으니까, 고독할 시간도 없이 등교하는 아침 시간은 어린 나였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첫댓글 긴장되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