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은 주인공 조나단 리빙스턴이 뭇 갈매기들이 먹이를 위해 다투고 제 삶의 터전에서 아옹다옹 살아가는 것과는 달리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자유자재로 비상하는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중 좋은 스승을 만나 빛나는 삶을 사는 내용을 우화로 쓴 글이다. 이 책이 1970년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고 우리나라에도 1973년에 번역 출판되어 나오면서 갈매기를 통해 우리의 이상이 새롭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펼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해운대 바닷가 모래밭에 발을 모래 속에 비비적거려 묻고 바다를 바라보고 앉았노라면 발 끝에 닿는 감촉이 간지러움으로 느껴지다가 이내 온몸의 긴장감이 풀리고 뒤이어 가슴이 뚫리면 갯바람이 온몸을 시원스레 감싼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또렷한 수평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위를 배가 떠가고, 가까운 하늘엔 괭이갈매기가 난다.
“야오- 야오-”
어선들이 만선의 깃발을 날리며 미포 포구를 향해 들어오면 더욱 요란스럽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흰 포말로 부서지면 괭이갈매기는 곡예비행 하듯 낮게 날았다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오래전 일이다.
고3시절 후반 처음 생긴 대학입학예비고사 원서를 쓸 즈음.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정리하는 새벽 수업을 받기 위해 잠자리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사흘간 같은 증세로 새벽수업을 빼먹었다. 교무실로 불려갔다. 그날 오후 물 건너 제창의원에 가서 X-ray 검진을 받았다. 물에 젖은 필름을 들고 나오신 원장님과 교장선생님이 전화 통화를 하신 후 교장선생님께서 당장 부산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리셨다. 다음날 아침 일찍 친구들과 작별인사도 없이 보따리를 싸서 해운대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후 2년 요양, 8년간의 주사 및 투약으로 간신히 죽음에서 탈출, 폐결핵에서 해방되었다. 그 겨울 부산에 출장오시면 우리 집에 주무시고 가시는 교장선생님을 졸라 졸업만 시켜달라고 했다. 당시 결핵은 지금의 암보다도 더 무서운 질병이었고, 심하게 각혈까지 하고 있었던 나에게 휴학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졸업식 날 초췌한 모습으로 학교에 불쑥 나타난 나를 담임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부르셨다. 졸업장과 앨범을 주시면서 휴학으로 처리해 앨범에서 사진을 뺐다는 것이었다. 그 때 내게는 졸업장도, 그 말씀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 동안의 절망으로 헤매다가 벼랑을 감지한 후 생각을 바꾸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해운대 바닷가를 같이 걷고 싶으시다고, 음식은 마음대로 먹을 수 없으니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그만두시고 인도 유학 중이셨는데 심한 위장병으로 귀국, 복음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시고 부산에서 요양을 하시고 계셨다.
해운대 버스종점에서 만난 두 환자는 강냉이 뻥튀기를 한 봉투 사서 해운대 바닷가 모래밭에 나란히 앉았다. 갈매기들이 머리 위를 날고, 모래밭 가장자리를 걷고, 파도가 밀려오면 날아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말없이 강냉이를 먹다가 갈매기들을 향해 던져주었다. 그러면 갈매기들이 다투며 다가와 강냉이를 먹는 것이 귀여워 되풀이했다. 문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 물가 모래에 찍힌 발자국들이 파도에 쓸려 흔적도 없어 사라지지.
그 발자국들 속에 여기 해운대에 신혼여행 와서 아내와 함께 걸으며 찍었던 내 발자국들도 있었어.
우리 인생도 저 발자국들과 마찬가지야. 그래도 흔적을 남기고 또 남겨야 되는 거야! 의미 있는 흔적을...”
“그리고 행복은 우리에게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 때 나는 솔직히 선생님께서 하신 그 말씀의 뜻을 몰랐다. 그러나 그 말씀이 나의 투병생활에 활력소가 되어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사는데 바빠(?), 무심(?)해서 선생님의 안부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몇 년 전 미국 서부여행을 하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고3 때 한 방에서 하숙했던 김현갑목사를 36년 만에 만났다. 그 때 친구로부터 담임선생님께서 목사님으로 로스엔젤레스에서 목회하시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언젠가 때가 되면 뵈올 수 있으리라.
요즘도 가끔 해운대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 유람선을 따라 떼 지어 나는 괭이갈매기들을 볼 때마다 ‘갈매기의 꿈’에서의 ‘조나단 리빙스턴’과 스승 ‘차오’를 생각하고 당시 불편하신 몸으로 해운대까지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제자를 일깨워주셨던 무표정의 해맑으신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린다.
‘비록 지워지고 없어지더라도 의미 있는 흔적을 남겨라!’
‘행복은 그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괭이갈매기: '야오,야오'하며 지르는 소리가 고양이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갈매기의 이름임.
첫댓글 자네 글이 출판되면 내 이름도 책에 올라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나. 좋은 글 고맙다. 고통이 자네를 더욱 성숙하게 했나보다 글 속에 깊은 맛이 있다.
hyun, 반갑소, 우리 신용규담임선생님 잘 계시지요?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하셨겠지요? 궁금!!!
벌써 은퇴하신지가 꽤 되신 것 같네. 건강이 좀 좋지 않으셔서 수양중에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회복되셔서 설교도 하시고 큰 불편없이 생활하신다고 들었네. 자네가 와서 함께 방문하면 무척 좋아하실거야. 그렇겠지.......
괭이 갈매기, 광안리 바닷가에 겨울마다 나타났다가 봄이 되면 사라지는 무리들. 나도 사진도 제법 찍어 두었고, 글도 딲아 논 것이 있다. 시간 나면 여기 붙여야지. 보통 갈매기 보다 덩치가 크서 오리만 하다. 날개를 활짝펴고 나는 뒷모습은 독수리 보라매 부럽지 않다. 그런데 앞에서 보면, 표정이 착하고 순하게만 보여 안쓰럽다.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아 물고기 조각을 들고 손을 매밀면 와서 받아먹고 간다. 광안리의 한 풍경이다.
장안의 인생에 이런 시간이 있었구나. 그래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하여 지금은 무척 건강해 졌나보다. 그래서 인간적 품성이 크고 넓어졌구나. 신용규 선생님도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눈치 챘었는데, 나한테는 외6촌 형님이시다. 단 한번도 따듯한 말 해주시지 않았다. 평원목사님이 씨름 잘했지. 2반 선수였고 나는 1반 선수 였는데, 내가 지고 자기반 학생(평원)이 이기자 막 좋아하시면서 평원만 응원하셨다. 당시 내가 얼마나 섭섭했으면 지금까지 기억하랴.
당시 평원목사님은 몸이 좋아 씨름뿐이 아니고, 트럼펫도 잘 부셨지요. 찬송가 외에도 응원가로 많이 불리었던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가를 잘 부셨던 걸로 생각되는데... 너무 부러웠소. 존경하오!
풍이씨 미안하이 내가 풍이를 이겼었나. 난 별로 기억이 없는데. 부러워하지 마소 그렇게 부러워 할 것도 아니잖아요. 좋은 이름 붙여주어서 오늘 바꾸었다오. 이름대로만 살면 쓸만한 사람이 되지않을까 싶은데.........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