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20)
준제진언 (准提眞言)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3번)
아금지송대준제 我今持誦大准提 즉발보리광대원 卽發菩提廣大願 원아정혜속원명 願我定慧速圓明 원아공덕개성취 願我功德皆成就 원아승복변장엄 願我勝福遍藏嚴 원공중생성불도 願共衆生成佛道
마니는 마니주라고도 하죠. 여의주라고도 합니다. 여의주가 뭐겠습니까. 뜻대로 되는 구슬, 그것을 마니주. 우리의 본심을, 우리의 근본 불성자리, 마음자리를 바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상에 뭐가 여의주가 되겠습니까. 뜻과 같이 되는 것은 결국은 마음 밖에 달리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마니라고 하는 것은 구슬을 뜻하지마는 그러나 따지고 보면은 여기서는 옴의 의미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 우리의 근본, 우주 삼라만상의 핵, 근원,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마니 곧 마음이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반메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빠드메'라고 표현을 해야 되겠죠. 빠드메인데 이것은 연꽃입니다, 연꽃. 연꽃인데 홍련입니다. 붉은 연꽃을 빠드메. 또는 파드마라고 발음하기도 하는 대목이 있죠. 빠드메. 흔히 묘법연화경은 백련(白蓮)이라고 그럽니다, 흰 연꽃이라고 하고. 여기서 반메는 붉은 연꽃입니다. 흰 연꽃은 '분다리카'라고 그러죠. 또 인도에는 푸른 연꽃도 있습니다. 푸른 연꽃, 그것은 '가마라'라고 합니다. 경전에 보면은 가마라라고 해서 푸른 연꽃을 이야기하는 대목들도 간혹 있습니다. 보통 우리 경전에 소개되기는 분다리카하고 반메, 파드마, 또는 빠드메, 이 붉은 연꽃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죠.
불교에 있어서 이 연꽃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불교의 꽃이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불교는 늘리면은 팔만대장경으로 설명되어지지마는 그것을 줄이면은, 간추리면은 한송이의 연꽃으로 표현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연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연꽃은 여러 가지 표현을 하는데 처렴상정(處染常淨), 더러운 데 있으되 항상 깨끗하다. 늪 속에서 자라는 것이 연꽃입니다. 또 늪이 아니면은 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더러운 늪 속에서 자라지마는 그 꽃과 꽃잎은 참으로 깨끗하기 이를 데 없는 것, 이것이 연꽃의 연꽃됨입니다.
그리고 이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있습니다. 대개 다른 식물은 꽃이 지고 열매가 맺게 돼 있죠. 그러나 연실(蓮實)이라고 하죠. 연씨, 그것은 꽃과 동시에 생기는 것. 그래서 어떤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연꽃의 한 기능이고 한 의미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연꽃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불교를 늘이면은 팔만대장경이고 좁히고 하나로 요약하면은 연꽃, 한 송이의 연꽃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
바로 그래서 불교의 꽃을 연꽃이라고 하고 연꽃 속에는 우주 삼라만상이 다 표현돼 있고 다 담겨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이 연꽃이라고 하는 것 속에 다 설명되어지고 또 연꽃 속에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연꽃은 불교의 꽃이고 연꽃 하나로서 불교 전부를 대신하기도 하고 불교 전체를 또 나타내기도 하는 그런 꽃이 바로 연꽃입니다. 그렇다면은 이 연꽃이 의미하는 것, 그 진실한 의미가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쉬이 짐작하리라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것이 반메입니다.
그 다음에 훔 자는 이구청정(離垢淸淨)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훔. 떠날 이(離) 자, 때 구(垢) 자, 그리고 보통 우리가 말하는 청정(淸淨)이죠. 때를 떠난 청정이다 하는 것입니다. 본래 청정이 아니라 있는 때를 없애는 청정입니다. 훔 자죠. 훔이 그런 청정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구청정인 까닭에 본래의 청정이 아니라, 본래의 청정, 본래의 완전, 본래의 부처의 모습은 옴 자 속에, 마니 라고 하는 것 속에, 또 반메, 빠드메, 연꽃이라고 하는 것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훔 자에는 이구청정이다, 이것은 결과적인 청정, 또 어떤 수행을 통한 청정, 어떤 노력을 기울인 뒤의 청정, 그것이 어떤 결실로서 또 마지막 귀결로서 훔 자가 대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옛날 노장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은 대개 범서는 다른 글자는 못 써도 훔 자는 쓸 줄 알았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훔 자를 직접 써 보여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마는.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이 불가의 전통이죠. 아무 음식이나 닥치는 대로 먹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행각을 할 때 또 살던 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옮길 때 또는 유행을 할 때 말하자면 별별 음식을 다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있겠고 또 먹지 못할 그런 음식도 만나게 되죠. 그랬을 때 그 변한 음식, 먹어선 안될 음식, 그런 음식에 대해서 훔 자를 범서로 씁니다. 그러면 그 음식은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청정한 음식, 깨끗한 음식으로 변한다고 해서 그 음식에다가 대고 손가락으로서 범서를 써 보이죠. 음식에다가 대고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그런 어떤 인을 만듭니다. 그랬을 때 깨끗한 음식으로 전환을 한다, 그래서 어떤 음식이든지 먹도록 돼 있다. 뭐 어차피 안 먹고는 안 될 그런 처지인 까닭에 그렇게 훔 자를 씀으로 해서 수행자가 먹어도 되는 그런 음식으로 변하는, 청정한 음식으로 변한다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범서로 훔 자 만은 쓸 줄 안다 하는 그런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죠.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수행을 통한 청정. 옴, 마니, 반메, 이것은 본래 청정이라면은 본래 지닌 우리의 마음의 어떤 불성이라면은 이것은 본래의 불성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밝혀내는 의미가 훔 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이 옴 마니 반메 훔 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불교의 핵이고 또 불교의 핵이자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 인생과 이 세계의 모든 원리가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모든 이치와 닦아야 할 그 수행까지도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본다면은 참 옴 마니 반메 훔이라고 하는 이 진언이야말로 진언 중에 왕이죠. 그야말로 대명왕진언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영험도 있는 것이고 또 이것만 외우는 것으로서 훌륭한 수행으로 삼는 이유도 충분히 우리가 이해가 됩니다.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옴 마니 반메 훔, 그야말로 우주의 핵이요, 또 마니, 우리의 마음의 실체, 또 빠드메, 연꽃이라고 하는 것, 결국은 우주의 실상,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불성, 마음 그 자체, 본래 부처인 그런 모습들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것을 결론적으로 훔 자로서 종결을 짓습니다.
(다음 방송분) 옴 마니 반메 훔은 설명 드린 대로 대단히 중요한 진언으로 취급 되어지고 있고 또 불교인들은 이미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와 맞게 그 의미를 어제 낱낱이 살펴봤는데 역시 불교의 핵심, 나아가서 인생과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그 핵심적인 의미가 옴 마니 반메 훔 그 한 대목 한 대목에 사실은 다 들어있다고 하는 것을 대강 엿봤습니다.
말씀난 김에 옴 마니 반메 훔은 범서로 많이 써서 붙히고 또 흔히 유행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범서가 좀 잘못 써지고 있다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범서는 범서대로 쓰는 순서가 있고 또 우리의 철자법처럼 그 돌아가는 획이 분명히 있는데 그런 순서와 법칙을 모르고 쓰다보니까 우리 쓰는 식대로 그만 써 버릇하고 또 그 원리를 모르고 그냥 그 모양만 그리는 입장이죠. 그래서 잘못 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옴 마니 반메 훔도 예외없이 많이 잘못 써져서 흔히 전해지고 있죠. 그런데 옴 자를 쓸 때도 위의 점 부터 먼저 찍고 또 위의 점을 이렇게 둥글게 해서 그 안에 공간을 만듭니다. 이것 다 잘못 쓰는 글씨예요. 위의 점은 공간이 없어야 되는 것이고 또 그 점은 마지막에 찍어야 옳습니다. 훔 자도 마찬가지고. 위에 있는 훔 자의 점은 공간이 없이 점이어야 되고 또 마지막에 찍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 시간에 낱낱이 그려보여 드리지 못한 것이 좀 유감입니다마는 옴 마니 반메 훔이 너무나도 많이 통용이 되고 있는 까닭에 곁들여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범서는 쓰는 순서라든지 원리 이런 것을 모르고 단순하게 그리는 입장이다 보니까 잘못 쓰여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다음은 준제진언(准提眞言)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준제보살, 또는 준제공덕취라고 하는 그런데서 이 준제에 대한 내용을 살펴봤습니다마는 준제는 청정(淸淨)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번역하면 청정진언, 이렇게 되겠죠.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그렇게 돼 있죠. 나무는 뭐 아시는 대로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그런 뜻입니다. 사다는 칠(七)입니다, 칠. 저 앞에서 나무 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이라고 한 것과 여기에 상통하고 있습니다. 남 자는 칠이다 보니까 저절로 복수죠. 저절로 따라오는 복수를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삼먁삼못다는 아시는 대로 정등각(正等覺)입니다. 삼먁삼못다, 삼먁삼붓다나 삼먁삼못다나 역시 정등각이다, 하는 그런 뜻이고. 구치남은 준제보살에 대한 이야기에서 봤듯이 역시 구치는 천만 또는 억, 그래서 흔히 천만억 이렇게 부른다고 했죠. 그 다음에 남 자는 역시 천만이다 보니까 복수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복수를 표현하는 글자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다냐타는 ~고 설하되, ~고 설해 가로되, 말하자면, 이런 의미가 다냐타가 됩니다. 다나탸는 두고,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이것을 번역을 하면은 칠천억 정등각 삼먁삼못다죠, 정등각은 곧 부처님입니다. 칠천억 부처님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그렇게 되죠. 저기에 칠천억 부처님을 출생해 낸 어머니, 나무 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이라고 하는 대목이 있었잖습니까. 그런 까닭에 그것이 연결이 되죠. 그래서 준제진언이 거기에 왔어야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여기에, 옴 마니 반메 훔 다음에 들어 있습니다. 어쨌건 준제진언의 뜻은 역시 나무 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이라고 하는 것 하고 뜻이 상통하고 있다 라는 말입니다. 칠천억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게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입니다. 그 다음 다냐타, ~ 고 설하대,
옴, 옴은 반복해서 말씀드렸죠.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인데 자례는 동회, 움직일 動 자, 돌아갈 廻 자, 또 유행(遊行), 다닌다, 돌아다닌다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움직이고 돌고 또 돌아다닌다. 그래서 인칭으로 그것을 동회유행존(動廻遊行尊)이시여, 이렇게 흔히 표현을 합니다. 진언은 그 진언의 뜻을 인격시해서 존이시여, 존(尊) 자를 붙히죠. 그 다음에 주례는 두상(頭上), 머리 위에 또는 정계(頂髻), 정계도 역시 이마 위에 있는 육계죠.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례는 두상정계존(頭上頂髻尊)이시여 하는 그런 뜻이고 준제는 청정이라고 말씀을 드렸죠. 청정임과 동시에 묘의, 미묘한 뜻, 묘의라고 하는 그러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묘의청정존(妙意淸淨尊) 이시여, 이렇게 부릅니다.
이것은 준제보살을, 다시 말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달리 한번 부르는 그런 의미가 여기에 포함돼 있습니다. 동회유행존(動廻遊行尊) 하는 것은 중생을 구제하려 온갖 곳으로 옮겨 다니는 분. 또 두상정계존(頭上頂髻尊)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높은 분, 최고의 지위에 있는 분, 또 존경해 마지않는 분, 그런 의미. 그 다음에 묘의청정존(妙意淸淨尊), 준제라고 하는 것은 아주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고 또 훌륭한 분, 청정, 청정은 훌륭하다 하는 그런 의미죠. 청정하고 훌륭한 그러한 분. 그런 분께 사바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에 부림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륜왕(頂輪王)의 종자다, 이렇게 합니다, 부림. 정륜왕, 이마 頂 자, 바퀴 輪 자, 왕 王 자입니다. 이것도 역시 밀교 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죠, 정륜왕. 이것은 가장 높은, 그러면서 또 이마 위에 모시고 다니는 어떤 법륜, 그 법륜도 높히, 크다, 아주 위대하다 하는 그런 뜻으로, 또 왕 자를 붙혀서 이마에 모시고 다니는 법륜의 왕의 종자, 그런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 해석이 그동안 제가 연구한 대로의 해석입니다. 뭐 꼭 이대로다, 그렇게 자신있게 말씀을 드리기에는 뭣합니다마는 그동안 범어의 내용을 연구한 것으로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석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울러 말씀을 드립니다.
칠천억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고 설하대, 옴, 동회유행존이시여, 두상정계존이시여, 묘의청정존이시여, 사바하, 성취 있으소서, 또는 길상 있으소서. 부림, 정륜왕의 종자. 이 종자는 부림,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됩니다. 뜻이 정륜왕의 종자다 하는 그런 이야기죠. 역시 말씀드렸듯이 종자는 거기에 몇 천배 만배의 어떤 그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게 역시 종자죠. 그래서 부림이라고 하는 이 말 속에 정륜왕이, 가장 위대한 법륜이 한없이 한없이 펼쳐져 나온다 하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아금지송대준제는 내가 지금 지송한다, 가져서 외운다. 무엇을, 대준제, 큰 준제를, 준제진언을, 그런 의미도 되고. 또 훌륭하고 청정한 또 여의(如意), 뜻과 같이 되는 그런 도리를, 그런 이치를, 그것을 내가 지금 가지고 외운다. 그러므로 곧 그로 인해서 즉발보리광대원, 보리를 깨달을 수 있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광대한, 넓고 큰 원을 발합니다, 발합니다, 곧 그러한 원을 발합니다.
원아정혜속원명, 원컨대 정과 혜가 속히 원명해지이다. 계, 정, 혜가 되겠죠. 그런데 계는 생략을 하고 정과 혜를 여기서 쓰고 있습니다. 원컨대 나에게 계, 정, 혜, 삼학이 빨리 원만하고 밝아지이다. 또 원아공덕개성취, 원컨대 나에게 모든 공덕이 다 성취되어지이다, 그런 의미입니다. 이것은 준제라고 하는 데 큰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이런 원을 發합니다. 물론 준제진언도 되겠고 준제보살도 되겠습니다. 또 궁극적으로 준제진언, 준제보살은 바로 우리들의 진실한 생명을 여기서 의미하고 있고 또 불교의 생명, 말하자면 불교의 대의도 이 속에 다 포함되어 있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한 것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음의 크고 넓은 願을 곧 내고, 그런 원을 發하고 그런 원을 통해서 계정혜가 빨리 원만하고 뚜렷이 밝아지이다. 그래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다시 말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의 능력, 그것을 한껏 발휘해지이다. 원아공덕개성취를 그렇게 표현하면 되겠죠. 원컨대 나에게 모든 공덕이 다, 다 성취되어지이다. 그 다음에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藏嚴)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원아승복변장엄, 나에게 훌륭한 복이, 수승한 복이 두루두루 장엄되어지이다. 이건 아주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죠. 우리가 한 가지 복만 가지고는 살아가기가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골고루 다 갖추어야 우리가, 인간이 삶을 영위해 가는데 불편이 없고 보다 더 행복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흔히 지혜의 복과, 지혜에 관한 복, 그리고 물질적인 어떤 유루복, 이런 것들을 비교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죠. 물질적인 그런 유루복만 많은데, 유루복은 많이 있는데 지혜에 대한, 어떤 문화적인 또는 지식, 또는 지혜, 종교적, 이런 복이 없다면은 그 사람 또한 곤란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또 도니 진리니 종교적인 그런 차원의 관심, 또는 그런 데 대한 능력, 그러한 복, 그런 것을 청복(淸福)이라고 그러죠. 그런 복만 또 수승하고 다른 물질적인 복이 없다면은 이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아주 불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두 가지가, 지혜와 또 유루의 복이 함께 원만해졌을 때 우리의 바람직한 삶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지혜가 없이 유루복만, 물질적인 복만 잔뜩 많이 가진 사람은 상신(象身)에 괘영락(掛瓔珞)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상신(象身), 코끼리 몸이라는 거죠. 코끼리 몸에다가 영락 구슬, 아주 이 세상에서 진귀한 보물인 그 영락 구슬을 몸에다 걸치는 그런 격이다. 그러니까 마음에는 아무런 지혜도 없고 어떤 종교성, 문화적인 그런 소양도 전혀 없는 사람이 물질적인 풍요만 한껏 누리고 있을 때 그 모습은 마치 코끼리가 영락 구슬을 몸에 두른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하는 그런 이야깁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실생활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았을 때 아주 시사하는 바가 많죠. 그래서 사실은 인간이 제대로 인간의 구색을 갖춰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고 또 두루두루 여러 가지 조건들을 골고루 갖춰야 됩니다.
또 그렇다고 지혜만 출중하고 어떤 종교적인 그런 것만 넘치고 물질적인 복이 전혀 없다면은 그것 또한 큰 문제입니다. 그것은 이제 큰 문제로서 옛날에 소산(疎山)이라고 하는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은 그야말로 도(道)를 이루고서도 밥 한 그릇 제대로 못 얻어먹는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사는 산에는 나무도 흔치 않았다. 그래서 성길 소(疎) 자, 뫼 산(山) 자, 나무가 듬성 듬성 있는 그런 산이었다 라고 하는 그런 스님도 계셨고, 또 나한(羅漢)이 승공박(僧供薄)이라, 나한이 밥 한 끼를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그런 경우까지가 있다. 너무 지혜, 종교적인, 도의 차원, 이런 것만을 편중해서 우리가 수행을 할 경우, 그리고 다른 복들의 문제를 도외시 했을 경우는 나한이 돼서도, 도를 이루었어도 공양도 제대로 얻어 먹을 수 없는 그런 입장에까지 이르는 그런 경향도 없지 않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원아승복변장엄이라고 하는 이 구절은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많죠. 그래서 여러 가지 훌륭한 점들을 두루두루 다 제대로 구색을 갖춰야 된다. 그런 지혜와 물질, 두 가지만 여기서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사실 두 가지 뿐만 아니죠. 뭐 사회생활을 한다고 하면은 사회적인 지위 또는 지식 또는 가족적인 그런 문제, 자녀에 대한, 아내에 대한, 남편에 대한, 또는 부모에 대한, 이런 모든 것들을 사실은 골고루 제대로 구색을 갖췄을 때 살만한 삶이 전개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단순히 지혜와 물질의 복, 두 가지 만을 볼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를 다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원컨대 모든 중생들이 다 불도를 이루어지이다(원공중생성불도) 하는 대목까지 오늘 공부했습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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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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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마니반메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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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무량서원학 원해여래진실의. 법문무량서원학 원해여래진실의. 법문무량서원학 원해여래진실의. _()()()_ mary 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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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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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