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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터어키 천주교 소리울림 성당 형식 건축
'동방예의지국'은 당현종 복위 허기 터키 포로부대 석공이 건축
백제가요 정읍사곡을 기독교찬송 예배형식으로 네델란드 하멜이 유럽 미주에 찬송가로 힛트
신라 동악 산신제사 토함산에 로마기독교 소리울림구조 찬송에 맞는 이스람교회당 건축에 석가모니상으로 지었다
목사의 찬송가 설교 소리는 다수 합창 메아리로 울려서 천둥소리로 신도에게 들리게 해야 한다
한국의 천주교는 당나라 시대에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흑치상지와 태인허씨 허국공은 백제 부흥군으로 당나라에 항복 서역 실크로드 사천성에서 100년간 살며
당현종을 황제로 만든 구테타 중심부대로 터기로마군 전투마다 승전하여 포로군사 기술자 다수부대였다
756년 실각한 당현종은 가무 석공 도공 보물을 신라에보내 황제복권 지원군사를 요구하여 그 석공이 석굴암 도공이 부안에 고려자기를 만들었다
예술품에서 중국보다 뛰어난 예술품은 석굴암 고려 청자기 음악 (농악) 거북선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 근본 이유를 모른제 "한국인 우수"라고 만 가르친다
당나라로 간 백제 흑치상지 장군이 정벌 영토확장 서역 청해성 실크로드 변장으로 100년 간을 터어키군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대대로 고선지장군 허기장군이 서역방위를 주로 담당하고 측천무후의 막강한 지원하였고 백제족 허씨부인이 음악 황제 당현종을 죽음에서 구테타로 성공 시키는 백제족으로 백제가요 정읍곡을 개선가와 찬송가 음악으로 사용했다
음악 공예등 성숙하게 이룩하고 반대 세력 무삼사 위황후 등등 역모조작 고문 등등 위험한 위치에서 당현종 이융기는 왕모중, 허기 등 고구려 백제족 무술군사의 도움으로 구테타를 성공하여 당나라 현종 황제가 되어 크게 예술이 발달되었다
755년 당나라 안록산의 반란으로 서촉 실크로드 지역으로 당현종이 피난하자 황제아들 태자(숙종)가 황위를 찬탈하여 황제가 되어 버렸다
당현종은 다급한 이곳 방위군 허기장군을 수양아들로 성왕에 봉하고 터어키에 구원군 요청용 댓가 용도였던 보물과 악공. 도공. 석공등 기술자를 황제 호위대장 진현레. 성왕 허기장군에게 주어서 신라국으로 급히 빼돌려 보내고 황위를 되찾으려 했다
신라국에 온 이들 중에서 석공은 동로마제국 포로 기능공이 많고 기독교 신봉 석공들로서 기와집 건축 능력이없다
이들은 신라 동악 산신제사 토함산에 로마기독교 소리울림구조 찬송에 맞는 이스람교회당 건축에 석가모니상으로 지었다
목사의 찬송가 설교 소리는 다수 합창 메아리로 울려서 천둥소리를내어 하늘님 위상으로 신도에게 들리게 해야 했다
한국과 중국은 하늘새 환웅 단군 새소리 내는 피리소리인데 서양신앙은 태양의 소리로 천둥으로여겨서 큰소리 울림 나팔악기, 웅장한소리를 교회건물, 구조로 확성기 효과를 내어야 했다
그 소리를 봉덕사 큰 종소리로 대신하고 태양모양 지붕모양 건축을 다보탑으로 둥근 태양모양에 유사하게 4각층 탑위에 8각층과 원모양 태양으로 건축했다
불국사 사찰지붕은 비들기 날개 색채 이고 석가탑 4각형 하늘을 당현종 수양아들 허기 장군이 데려온 터키군 석공이
태양모양 지붕모양 건축을 다보탑으로 둥근 태양모양에 유사하게 4각층 탑위에 8각층과 원모양 태양으로 건축했다
로마성당 정면 위쪽을 장식하고 있는 네 마리의 청동 마상은 원래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에 있던 것을 십자군이 여기로 가져온 것이다.
중국의 로마제국 접경에서 100년 살아온 백제인은 기독교 풍속에 감염되어 신라 동악 산신제사에 정읍곡에 불교찬송가 가사를 붙여 '도세도세 108번 도세' 탑돌이노래 에서 최근 1894년 동학군의 '새야새야파랑새야 ' 그리고 기독교 '예수사랑하심이' 모두 가사만 다르고 악곡은 정읍곡 변주곡이였다
전라도 노인들은 모두 말 대답마다 "아먼" 그렇치 아먼 즉 "아멘" 소리를로 대답한다
신라궁중에 석굴암을 건축하고 도공은 전라도 청해진과 강진. 부안으로 정착하여 도자기를 만들고 . 음악가. 여가수는 정읍에서 성왕당 찬송
무녀로 살면서 향악 정읍과 당악 처용을 합하여 삼대목으로 만들었다
백제가요 정읍사 정읍곡은 백제 고구려 신라 당나라 4국의 동물신앙 통합소리로서 1정읍만기 2정읍중기 3정읍급기 4처용 만기 5처용급기오 5악장인다
고려에 이어서 조선시대 까지 궁중에서 궁중음악 왕의 행차주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654년 네델란드 하멜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효종왕의 궁중호위군사로 속하게 하고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 ‘기쁨조’ 같은 업무를 시켰다
3년동안 효종왕의 경호원겸 가무 향연 행차에서 주악으로 연주되는 정읍곡 동동곡 처용가를 주야로 들어 서양식 빠른 4박자 행진곡풍으로 가무로 보여준다
하멜일행은 조선궁중 음악 동동 정읍등 전통음악을 3년동안 자주 듣고 10년 동안 각설이 구걸패로 호남을 순회 노래로 생계를 하고 가무를 습득하고 1666년에15명이
탈출 하여 유럽과 미국 남미에 정착하여 가는곳마다 백제가요 정읍곡은 대힛트하여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애국가는 유럽미주 찬송가 민요 가요 거의 백제가요 정읍의
작곡구조 즉 5새소리 모방소리 순서로 되어있다
서양음악의 계명 음계 화음은 전혀없고 오로지 새소리 순서가 정확하다
하멜표류기 출판으로 유럽의 선교사 탐험가가 조선을 다투어 찾앗다
5000년 탕왕 비류 고주몽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왕이 창시한 찬송가는 황조가 정읍 동동곡 뿐이다
이곡외의 곡은 중국아악 변주곡으로 찬송가 가요 민요에 없다
일본은 임진난에 소서행장이 가무악공을 병자호란에 용골대가 가무악공을 잡아가서 진귀함을 알고 덕천가강이 사신을 보내 음악책을 간절히 요구해 가저갔다
일본에 들어온 스페인고 네델란드의 식민지 미국과 맥시코민요가 한국가요와 유사하고 맥시코만 과 뉴욕에서 딕시랜드 째즈곡 은 백제가요 정읍곡과 너무나 같다
정조대왕을 영조왕 계비 정순왕후가 독살하고 천주교 학살과 5000년 국악의 뿌리를 자르고 중국아악 느린소리에 나례 구나 등 으로 300년간 느린 아악으로 변질되어
정읍곡은 미국' 딕시랜드' 항가리무곡 터키행진곡 찬송가' 로엘로엘'이 백제가요 정읍과 가장 유사한 노래이고
전통국악으로 백제가요 정읍멜로디를 보존한 것은 정읍농악 새납소리인데 대한민국 문화재법칙으로 농악에는 멜러디가 없고 불교중의 범패와 무당굿 재굿에만 지정하게 헌법으로 되어있단다
농악은 장구와 꽹가리 리듬만 문화재로 인정하고 전세계 힛트음악의 몸통 한국농악 멜러디는 한국국법으로 말살되고 잇다
일본은 연변 기독교인이 정읍곡에 '예수사랑 하심이'가사를 붙여 부른 우리 찬송가를 일본 기미가요 애국가로 아주느리게 느리게 변주하여 부르고 제주도 벗꽃을 국화로 만들었다
미국거주 한국인 동포여 식민지 미국이 독립운동으로 영국을 물리친 미국군가 .딕시랜드는 백제가요 정읍곡에서 정읍만기. 정읍중기 .정읍급기. 3악장을 모두 4박자로 모방한 딕시랜드 !! 영국. 프랑스. 독일에도 없다
뉴욕 을 개발한 네델란드의 하멜이 배워간 딕시랜드 그 미국 땅의 소리는 단군 5000년 한국의 전통소리다
딕시랜드는 찬송가 영광영광 할랠루야. 성조가로 모두 정읍곡을 모방하엿다
성조가가 세계에서 가장느리노래 그 이유는1893년 시카고 박람회 10명악사가 미국연주하여 이를보고 백제가요 정읍 3악장을 모두 성조가로 모방하고
생일축하 노래 역시 이해 미국 보스톤 학교 교사가 채보 작곡하였는 데
이소리는 정읍농악 오채질굿 장단으로 한국이 원산지 이라는 증명을 제시할 농악 멜러디 문화재를 한국은 금지하고 있다
즉 농악은 멜러디 새납(태평소)악기 불교 범패와 무당굿소리로만 허가를 하고 미국인 해이만이 국악학교에서 미국 성조가를 불어도 유사하다
베에토밴의 터키행진곡은 황조가 경기도농악 멜러디 이고 모짜르트 곡 터키 행진곡은 정읍농악 멜러디를 재구성편집하였다
이태리 싼타루치아곡은 정읍급기 2부를 모방했다
일제에 국토를 빼앗겨서도 미국 중국 러시아에서 애국 독립군이 국토를 찾아 냈다
한류음악은 미국의 재즈 딕시랜드가 근원이고 선진 일본이 먼저개발 하였으나 5000년 조상에서부터 눈.귀. 심장으로 계승한 한국인의 기질이 한류로 세계를 진동한다
한국에서 울밑에선 봉선화를 왜색가요 친일가요로 몰아 아름다운 가요 거의 금지가요 역사이며 국악에서 유일한 5000년 전통 정읍농악으로 살아 남은 5악장 정읍사멜로디를 전수할곳이 한국에는 전혀없다
프랑스에서 직지심경 한권 빌려오는데 떼제베 고속철 건설을 주어야 했다
박병선 박사가 애타게 귀환을 관청에 요구에도 귀찮아 했다
서양의 모든종교는 새가 아니고 태양이다 교회의 내부는 소리가 울려 천둥소리가 되어야 하고 야외 음악당도
신의 소리로 울리게 설계하였다
정읍 삼대목은 현재 정읍농악이 그 모습을 재현하고있다
동로마제국 실크로드 교역과 전투에서 터어키 토번족 기독교 포로 기능공들이 다수 허기장군 군사에 소속되어있다
백제 흑치상지장군에서 허기장군까지 100여년 사천성 티벳지역에서 서구 기독교 종교 건축 기술자가 신라 경덕왕 시대 동방예의지국으로 지명하였다
기독교회당 건축 방식으로 석굴암이 토번(토함)산에 지어진다
서양은 태양 숭배 천둥 울림소리가 하늘의 소리이고 동양은 새소리가 하늘 신의 소리로 여기고 반드시 화음 합창울림소리로 찬송했다
서양 이스람 기독교 등 모두가 교회가 항아리 속 같이 공모양이다
석굴암은 터어키 천주교 소리울림 성당 형식건축
석굴암은 기독교회당 구조에 석가모니 신상만 다르다
당현종은 경덕왕15년에 양자강을 타고 들어온 신라국 허기 장군에 동방예의지국이란 호칭을 주고 신라국의 식민지격의 낮은지위 군소읍 면이 당나라의 주현 군과 똑같은 등급으로 경덕왕때 모두승격시켜주고 당현종 복위 지원군을 신라에서 징발했다
절강성 강소성과 대만 홍꽁 등지까지 허기.장보고 김웅원 최치원등 신라군이 장악하여 후백제 세력이 된다
그래서 당나라가 망한뒤 중국 후당 후량의 기록에 절강 강소성을 백제 땅이라고 했다
당현종 복위 허기 장군은 흑치상지 장군 때부터 대대로100년간 동로마 터키군과 전투 승전하여 터키포로 집단군사들로 천주교 군사와 기술자들이였다
756년 당현종은 유일하게 남은 당현종 추종장군 허기장군을 당현종의 아들로 천명되었다
중국 일본 한국의 종교신당은 비들기 색채 재색기와로 비들기 모방 건물을 신상으로 보이게 건축한다
그러나 서양천주교는 태양을 모방하여 둥글게 빨간색 벽돌을 사용한다
비들기소리 꾀꼬리소리 등은 가는 피리소리로 찬송한다
그러나 서양은 새가 아니고 하늘의 천둥울림 소리를 태양신의 소리로 알고
피리가 아니고 나발 파이프올겐등에 독창노래는 없고 다수합창소리를 낸다
삼국시대에 전무한 불교 대형종과 석굴암의 소리울림 천정건물 경덕왕시대
모두 유행된다
마동왕자의 노래에 반하여 시집온 선화공주 그것을 보고 자란 후손 흑치상지 장군이 당나라에서 백제가요 정읍곡에 개선가로 붙여 전투마다 승전 그포로들이 허기장군의 터키 천주교군사들이였다
여기서 호위대장 진현례 후손 진훤(견훤)는 신라왕족 아자개의 양자로 신라의 왕권을 도전하려다가 진짜 신라왕족 궁예가 나타나자 이를 포기하고 금산사 정읍 청해진 무등산 지리산 지역의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 후백제를 세운다
석굴암의 부처는 중국에서도 측천무후를 생불로 조각한 그 석불과 모양이 같고 석굴암을 지은 곳이 진재 진성 토함 (吐含 )산등은 진현례 토번과 유사한 이름 이다
이 토함산 이름을 일본어로 토후구 터어키 含(후구) 토이키 발음인데 이것은 허기장군이 터어키 접경의 방위대장으로 대를이어 살아서
터어키산이라는 이름과 진현례이름과 같은 지명 고개이름도 이를 증명한다
허기장군은 후손은 태인 허씨 시조 허사문이고 허사문의 차남 허겸이 이허겸으로 인천이씨 시조이며 고려 현종의 왕비 부터 이자의 이자겸 이의방 그리고
최충헌의 정권을 제거시킨 이장용이고 이의방의 동생 이한이 조선태조 이성계의 조상이다
성당 정면 위쪽을 장식하고 있는 네 마리의 청동 마상은 원래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에 있던 것을 십자군이 여기로 가져온 것이다.
국보24호경북 경주시 진현동 891 석굴암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1)역사
석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부속암자로서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였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대상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 되었다. 그는 전세(前世: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다가, 774년 김대성이 죽자 석굴암을 신라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따라서 석굴암은 김대성 개인이 창건했다기보다는 신라 왕실의 염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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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의 명을 받아 김대성이 현재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착공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 보아 불교가 가지는 호국불교(나라를 지키기 위해 부처님의 힘을 빌리는 것)의 의미로 볼 때 석굴암을 지어 부처님에게 나라를 수호해 달라는 바램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석굴암(石窟庵)은 대한민국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위치하여 있는 석굴 사찰(石窟寺刹)이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불국사를 대대적으로 증수할 때 처음 세워졌으며,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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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이 [삼국유사]에 거둬들인 이 이야기만으로 우리는 김대성의 존재를 전달받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다분히 설화적이다. 좀 더 사실적으로 접근해, 역사학자 이기백(李基白)은 [삼국사기] 경덕왕 4년 5월조의 “중시 유정(惟正)이 물러나고 이찬 대정(大正)이 중시가 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대정을 대성이라 하였다. 그러나 대정이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고, 글자가 비슷하다 하여 대정을 대성으로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런가 하면 모량(牟梁), 밀양(密陽), 대성(大城)이라는 마을 이름을 가지고, 이들은 상당 부분 서로 겹치고 있으니, 김대성의 대성은 실제 이름이라기보다는 대성 출신의 김 씨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김대성의 집안이 가난했고, 이 무렵 모량리 사람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연관시켜, 본디 모량리 출신인 대성이 김문량의 집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대성의 재탄생은 입양의 설화적 표현으로 보았다.
어느 쪽이 되더라도 [삼국유사]의 대성 이상의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김대정이 어떤 사람이며, 그가 과연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었는지 알 수 없다. 대성이란 마을에 살던 김 씨라고 하면 더욱 그렇다. 그가 김문량의 집에 양자로 가서, 낳아준 어머니와 양부모를 잘 모셨다는 이야기 전개에 무리는 없으나, 그것으로 대성의 정체가 속 시원히 밝혀지지는 않는다. 입양의 증거 또한 없다.
대성의 재탄생 같은 설화적인 구조를 가진 이야기는 다른 예에서도 나온다. 신라 통일기에 활약한 죽지랑(竹旨郞)이 그렇다. 술종공이 삭주도독사로 나가는데, 죽령을 넘어가다 헌칠한 거사 한 사람을 만난다. 두 사람은 호감을 가진 채 헤어지는데, 삭주에 부임한 다음 어느 날 밤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의 부인 또한 같은 꿈을 꾸었다. 이로 인해 아이를 가졌거니와,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은 결과, 꿈을 꾼 같은 시간에 죽었다는 것이다. 술종공은 거사가 자신의 집에 태어날 징조라 여겼다. 이 아이가 바로 죽지랑이다. 죽령에서 만난 거사가 다시 태어났다 하여 지은 이름이었다.
대성이 김문량의 집에서, 거사가 술종공의 집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구조는 같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다만 김대성의 경우, 금빛 간자에 이름이 쓰여 있어서 확실한 증거로 삼은 점은 다르다. 대성을 입양하면서도 친자임을 강조하려 생겨난 보강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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