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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庵 門人 청봉청운 선사 의역 강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의 현상이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것이 물질의 현상과 다르지 않아, 물질의 현상이 곧 빈 것이고, 빈 것이 곧 물질의 현상이니
색불이공은 일체 사물의 현상(色)을 볼 때 그것이 무상(無常)하여 본질적으로 空(빔)하고,
볼 줄 아는 마음의 실상이 본질적으로 공하니 색이 곧 공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또한 둘이 아니다.
공불이색은 마음이라는 공한 본체(眞性)가 본질(본성)이 공한 색
곧 의식하는 형상, 소리, 냄새, 맛 등 물질적 현상을 나투므로
물질이 곧 마음과 같아 어머니는 아들과 다르지 않아 어머니(空)가 곧 아들(色)인 것이다.
따라서 색(空)도 또한 공이 아니요 비어 없음 또한 아예 없음이 아닌 것이다.
색과 공이라는 것이 실다움이 없는 이름이요, 환이니,
환은 항상하지 않으므로 멸하여 사라지는 것이므로 필경은 빈 것(공)이다.
따라서 색과 공이 모두 실이 아닌 명사이니, 실은 색이다 공이다 하는 것도 환과 같은 이름일 뿐인 것이다.
색과 공이 필경에는 진공으로 돌아가나 다만 환 아닌 것은 멸하지 않으니 멸하지 않는 것은 공적한 진여 자성뿐이므로 眞空妙有라 한다. 따라서 공(진성인 공)은 공이요,
색(항상하지 않으며 있다고 하는 것들은 모두가 자체의 자성이 없으며 필경 공으로 돌아감)도 공이라,
내라는 내가 공(我空)하고 모든 색이 공(法空)하니 둘 다(아공, 법공=2공) 공한 것이어서 일체가 공하므로 둘 아님(不二의 眞性空)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색즉시공은 (따라서) 물질의 현상이 빈 것과 다르지 않고
공즉시색은 (따라서) 빈것으로부터 나투어진 현상이 곧 물질의 현상이니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 경의 대의라 쉬우면서도 쉽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에 자세히 또 자세히 거듭 비유해서 설명을 하겠다.
먼저 공(빔)에 대한 도(道)의 이치(理)를 계합해야 한다.
공의 원리로 볼 때 불성은 공(빔)이기에 일체의 상이 없이 공적하므로 걸림이 없고 갓(끝, 변)이 없어 일체에 두루 없이 있어서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이며,
모든 있다고 생각하는 상(相)은 항상함이 없어 생했다 멸하는 덧없는 것이건만 범부는 일체의 현상법을 차별적인 성격으로 고정하여 있다고(有相) 생각하여 있음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체(體)의 원리로 보면 불성(佛性)은 공하기 때문에 생멸을 받지 않고,
옳고 그르고 길고 짧은 능소{能所: 능은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부리는 것(주), 소는 동작 지시를 받는 것(객)}인 상대적인 相을 초월(超越: 모든 가능을 뛰어 넘어)하여 항상(有常)하고,
현상계의 일체 제법은 일시적으로 인연 결합에 의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으로 환과 같으므로 필경 멸하는 것이라 멸하면 공(空)하고,
생멸변화를 잠시도 쉬지 않고 변전하므로 덧없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이다.
눈은 색(相)이니 능히 보지 못하고(시체의 예) 비어 있으나 유무를 초월한 묘한 있음(眞空妙有)으로 비어 없으되(空) 두루 갖추고 쓸 줄 아는(妙用) 것이 능히 보니 눈 아닌 것이 보는 것이며, 귀 . 코 . 혀 . 몸 또한 이와 같다.
온 몸이 공하고 일체가 모두 이러한 것이다.
일체가 이 공으로 돌아 가니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보면 본래 두 가지가 없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몸과 마음 즉 색과 공을 있다, 없다는 한쪽으로 치우쳐 고집하여 변견에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니 몸과 마음이 평등하여 둘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 줄 알면 공도 색도 보지 않게 되고 사물의 끄달림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색이 여러 인연이 모여 생긴 것으로 실체도 자성의 형상도 필경 없고 이름만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幻化라 하니 환화인 몸(色身)이 멸하여 빈 것이 되므로 곧 법신인 빈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색이 곧 공인 줄 알면 공이 곧 색이라,
색과 공이 다르지 않으니 서로 여의지 않는 참공의 묘한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이르면 한 생각 일으킬 줄 아는 변하지 않는 것(본체 자성공)과 인연 따르는 것인 모든 현상인 색과 성품인 체와 용이 본래 한 때이므로 곧 그것도 아니며, 아닌 것도 아니며 또는 그것도 되며, 아닌 것도 되는 것이다.
眞如門으로 살피면 만법이 둘 아니어서 이것을 곧 그것이라 하며
差別門으로 보면 삼라만상이 완연히 벌어져 이것을 비(非), 아니다, 다르다고 하는 것으로 상대를(相) 세우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날 때는 삼라만상이 나고 생각이 끊어지면 바탕인 무(공)로 돌아가니,
알려는 생각(색)이 끊어져 정(定)에 들어 일체가 공적해서 둘 아니게 합일할 때 체를 알게(證悟: 見性) 되는 것이요,
마음(진성인 마음)에서 일체를 알게 되는 것은 공에서 일체가 남을 혜로써 알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성상이 모두 한생각 가운데 있으므로 공한 자성과 일체의 색이 자체성품이 공함을 깨달으면 보리도 열반도 세우지 않고, 따라서 차별 경계도 세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불심이며 보리열반이며 이것을 깨달으면 해탈지견(解脫知見) 즉 일체의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함을 아는 지혜가 발현되는 것이다.
세우거나 안 세워도 되며 가고 옴이 자유로워 막힘도 걸림도 없으며,
경우에 따라 작용하고, 말에 응해 대답하며 널리 화신으로 나투되 자성을 떠나지 않으며,
곧 자재신통(自在神通) 즉 스스로 갖추어 구속과 방해 없이 마음대로 쓰고 유희삼매(遊戱三昧: 고요한 가운데서 누리는 즐거움을 얻을 것이 없이 얻어 가지는 것)이나,
묘한 작용은 인연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환과 같은 것을 범부들은 생멸(생사)이 있는 듯이 잘못 생각하여 눈에 보이는 함이 있는 차별상인 것(유루: 유위: 無常)은 믿으려 하나 오히려 실상인 볼 수 없는 함이 없는 것(무루: 무위: 眞性)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움직임이란 마음(공) 가운데 움직임이요, 움직임이 곧 작용이니,
마음은 작용하지 않는 마음(자성의 성품)이 없으며 작용하는 마음 바탕(자성)은 움직임이 없다.
참 마음인 본체의 작용은 여여적적하고 부동인 가운데 그 성품이 인연따라 만가지 형상에 응하여 나투고 사라지거늘,
망녕되게도 허망한 형상을 집착해서 덧없는 형상을 항상 하는 듯 여기는 것은
공과 색을 미혹한 자들이 잘못 알아 형상 없다 있다라고 하여 그에 의지하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용(色)은 본체로부터 일어나는지라 작용이 본체(空)를 여의지 않았고,
본체(空)가 능히 작용을 일으키는 지라 본체가 작용(色)을 여의지 않으니, 둘 아님으로 즉, 곧, 이것이다, 같다, 둘 아니다라고 하는 것으로, 곧 파도는 물을 여의지 못하고 물은 파도를 여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좀더 공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중도상(中道床)원리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중도상이라는 것은 중간에 상주한다는 것이니
있음과 없음인 색과 공에 치우치지 않고 시공을 초월하여 머무는 것으로
이 중도에 항상 머문다 하는 것은 끝이 없는 무한대의 가운데 머묾이니 처소가 없고
가운데 아닌 가운데 즉 머무는 곳이 없이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곳이 모두가 가운데가 되어 안과 밖이 없는 그 가운데 머무는 것이어서
나고 듦에 두 끝인 양변을 여의게 되어 일체처에 두루한 공한 머묾을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하나를 세우면 반드시 상대가 되는 대대(對對)가 있게 되어 차별상이 성립된다.
이때 쌍방이 나를 내세워 고집하고 집착하게 되므로 서로가 너는 없고 나만 있다 하여,
있음이 아니요(너), 없음이 아니다(나)라는 부정이 성립되어 부정과 부정 쌍방의 동시 부정으로 서로를 버리게 되어서 동시에 쌍방이 멸하게 된다.
이때 쌍방 동시에 긍정이 또한 성립된다.
왜냐하면 부정할 상대가 쌍방부정으로 없어지므로,
서로 동시에 비춰도 방해 받지 않아 서로 걸림이 없게 되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융합회통(融合會通: 하나로 어우러져 서로 통함)하게 되어,
진공묘유가 현전(現前: 눈앞에 당장 분명하게 드러남)하게 되어,
있다 없다를 초월하여 없는 것도 되고 있는 것도 되는 있음인 것이니,
따라서 텅 비어 갓 없는 중간이 없는 중간에 두루 머물면서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작용하고, 말함에 있어 밖으로 색에 있으나 상을 여의고 안으로 공에 있으나 공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에도 색에도 집착할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공이란 것은 상을 세우면 막힘(遮)으로써 쌍방 부정이 성립되고 따라서 동시에 양단이 같음은(공) 걸림 없이 비침(照)으로써 긍정이 성립된다.
양단을 버리게 되므로 하나의 빈(공)것이 되니 이것은 양쪽을 부정함(쌍차)과 동시에 긍정(쌍조)하는 것이 되는 까닭인 것이다.
이 까닭을 다시 이르면
그 하나가 둘 이므로 하나의 공이 둘(공, 색)과 같아 원융무애하므로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어 둘(색)이면서 하나요(공) 하나이면서 둘이라
그 하나 가운데 일체 삼라만상이 건립되고(雙遮) 구족되어 있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遮照가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다.
부정과 부정은 쌍방부정이므로 쌍방이 멸하고 긍정과 긍정은 쌍방긍정이 되는 것은 서로 걸림이 없이 투과하도록 없이된 상태의 걸림 없음인 공적한 것이므로 중도에 머묾(중도상)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도상(진공)은 두 가지 상이 없고 모든 번뇌의 마음조차 없는 것이며
한생각 일어나기 전과 한생각 나툰 차별적인 것에 치우치지 않고
그러한 차별상을 구족하고 또한 여읜 것으로,
생각은 진여본성을 상대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진여는 곧 생각의 體요, 생각은 곧 이 진여의 作用이다.
그러므로 有가 곧 공이요 유가 곧 색이니 그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인 것이다.
차별상으로 보면 그 하나와 둘이라는 것을 세워(상) 걸리는 듯 하나 서로 뚜렷하여
평등문에서는 하나의 공이 색과 둘 아니어서 원융무애(圓融無碍: 모자람이 없이 한가지로 걸림이 없음)한 상이 없는 것이므로 양단을 버린 공은 공이라는 말도 없는 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색, 공)이면서 하나(빈공)요, 하나면서 둘이니
하나 가운데 삼라만상 일체가 건립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시공을 초월한 절대평등(空: 진제: 理)과 차별작용(相: 속제: 事)도 깨닫게 되어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임을 확철히 알게 되는 선지(禪旨: 참 이치에 밝아 도의 이치가 밝은 보리지혜)가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할 것은
상에 집착하면 사견(邪見) 즉 바르지 않는 삿된 소견(현상으로 있다는 것이 항상함으로 생각) 특히 인과의 도리를 무시하는 소견을 기르게 되고
공에 집착하면 단멸공(斷滅空) 즉 멸하여 아주 없다고 고집하고 생각(인과를 무시)하는 삿된 소견에 떨어져 무지(無智) 즉 理와 事에 어둡고 명료하지 못한 미혹한 어두움(無明)에 쌓이게 되는 것이니,
삿된 것에 사로잡혀 진리에 어두워 나라는 것에 집착하여 생기는 번뇌망상의 근본이 되며 윤회의 因을 기르게 된다.
이것을 변견 즉 한쪽에 치우쳐 고집하고 집착하는 소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이치는 이러하나 도는 문자나 말에 있지 않으므로 직접 자신과 우주 본체인 마음(본원)을 꿰뚫어 깨달아 알지 못하면 아는 지식에 머물 뿐이다.
양개선사가 깨치고 난 뒤 스승 운암선사를 회고하며
"스승의 도의 높음을 장하게 여김이 아니라, 가르쳐 주지 않았음을 감사한다"고
한 것도 스스로 의심하게 의문을 심어 줬음을 감사한다는 것이니
바로 체득을 하기 위해서는 깊이 참구, 정진하여 미세망념(微細妄念: 최소로 남은 작은 번뇌, 망상)인 객진번뇌[客塵煩惱: 근본체(主)를 벗어난 티끌처럼 작은 번뇌망상(客)까지]마저 모조리 떨어져 나가 내외가 명철[內外明徹: 안으로 육근이 없으므로 나라는 것이 따로 없고(空) 밖으로 육진(경계)이 없으므로(空) 안팎으로 걸림이 없어 내외라 하나 안과 밖이 없이 밝고 환한 경계에 이르게 되는 것]하게 되어
이 공적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곧 체인, 체달로 증득하여야 만이 일체 종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근본에 계합하여 이로써 일체가 나퉈지고 작용하는 바른 이치 곧 진리를 역추(逆推)하게되어(되 거슬러 알지 못하던 것을 밝게 알게 되는, 거슬러 추리) 보게 됨으로써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도리를 확철[確撤: 확실하게 꿰뚫어 모든 것(일체종지)을 깨달아 알게 됨]하게 될 것이며,
깨달은 이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고 부처님의 설함이요, 불경이라고 하였음을 알 것이고,
남의 말에 속지 않고 깨달은 진리의 내말(?)을 설하게 될 것이다.
미혹 할 때는 지식이나 깨치고 나면 지혜라 하나니 그러므로 지식과 지혜는 호리의 차이면서 천지현격인 것이다.
허환한 몸(색)이 멸(없어짐)하면 허환한 마음도 멸하고,
마음이 멸하므로 허환한 경계도 멸하고, 경계가 멸하니 환도 멸도 멸해 빈 것(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만 환 아닌 것은 멸하지 않으니 그것이 우리의 둘 아닌 법신체인 것으로 소소령령하고 공적영지한 공한 것임을 깨쳐 알아야 한다.
공적 영지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나와 우주의 본래면목이며 空한 것으로 이 공적한 것이 體요 定이며 묘공, 묘유인 것이고,
영지한 것이 작용이며 지혜이니, 이 혜가 묘용인 것으로 색을 나투는 것이다.
따라서 정은 체요, 혜는 곧 용이며, 정인 체는 혜인 용의 근본바탕이니, 정이 곧 혜며, 체가 곧 혜로써, 용이 되므로 체 용, 정 혜가 곧 둘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공이 곧 색이요 색이 곧 공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