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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상형문자란? Egyptian Hieroglyphs?
고대 세계의 모든 문자들은 상형문자, 즉 그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불편함 때문에 대부분의 초기 상형문자는 오늘날 여러 나라의 문자모양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획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형태로 단순화되었다. 하지만 고대 문자 중에서 이집트의 것은 3000년 역사 전체에 걸쳐서 그림문자의 표준화된 정확한 형태가 지속되었다. 따라서 서기전 2400년경 기록된 피라미드 내부의 기록이나 서기 395년에 기록된 필레 섬의 신전 벽의 기록에 나타난 그림들의 모양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3000년 내내 정교한 상형문자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신전 벽이나 비문 등에는 정자체의 상형문자들을 사용했지만 일상생활에 필요한 문서로서 파피루스에는 상형문자의 흘림체인 초기의 사제문자(Hieratic)와 후기의 민중문자(Demotic)를 사용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 초기에도 기록되다가 서기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이교도 말살정책으로 수많은 이집트 신전들이 폐쇄되고 사제들이 해산되면서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지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잊혀진 상형문자는 1822년 프랑스의 샹폴리옹에 의해 해독됨으로써 1500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로제타 석비 The Rosetta Stone
1799년 7월 15일 프랑스 공병대가 지중해 연안의 로제타 근처에서 쥴리앙 요새를 건설하기 위하여 오래된 건물을 허물었을 때 한 병사가 새카맣고 단단한 석판 하나를 발견했는데 한 쪽 면에는 촘촘히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높이 114센티미터, 폭 72센티미터, 두께28센티미터의 이 현무암 석비에는 상형문자(hieroglyph)와 이의 흘림체인 민용문자(demotic), 그리고 그리스어(greek) 등 모두 세 종류의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지휘 책임자였던 삐에르 부샤르(Pierre Bouchard) 대위는 이 유물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석비를 알렉산드리아의 프랑스 탐험대 본부로 옮겼다. 프랑스 학자들은 우선 쉽게 읽을 수 있었던 맨 밑의 그리스어 비문을 해독한 결과 이 석비는 서기전 196년 3월 27일에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피파네스)의 업적을 찬양하는 공적비로서 당시 북부 이집트의 중심 도시였던 사이스(Sais)의 한 궁전 마당에 세워졌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군대가 1801년 9월 영국에게 이집트를 양도하는 항복문서에 조인하였기 때문에 그 동안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수집한 수많은 유물들은 고스란히 전리품으로서 영국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로제타 석비도 1802년부터는 대영 박물관이 소장하게 되었다. 로제타 석비는 훗날 프랑스의 샹폴리옹이 이를 토대로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논문]
상형문자와 한자 비교연구 [오문의].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