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담마 철학의 과오 1 - 마음
인지와 식별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은 식별을 정의하는 문장과 인지를 정의했던 문장과의 유사성에서도 발견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식별이라고 부릅니까?
식별한다고 해서 식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식별합니까? 신 것도 식별하고, 쓴 것도 식별하고, 매운 것도 식별하고, 단 것도 식별하고, 떫은 것도 식별하고, 떫지 않은 것도 식별하고, 짠 것도 식별하고, 싱거운 것도 식별합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식별한다고 해서 식별이라고 합니다.”(상3-278)
이 인용문에서 ‘식별하다.’ 대신에 ‘인지하다.’를 쓴다면 맛에 대한 관념적인 규정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식별한다는 말은 ‘분별해서 안다.’는 앎의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다시 말해 대상을 알기는 아는데 비교·대조, 차별·분석하면서 아는 경우를 말할 때에는 ‘식별한다.’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보통 맛을 감별한다고 하듯이 식별하는 예로는 여러 맛의 차이를 드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물론 느낌의 세 가지, 즉 즐거움, 괴로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식별의 예로 들기도 한다.(맛2-291)한 가지 유념할 점은 부처님이 식별을 ‘식별하다.’의 명사형이라고 밝힌 것은 인지처럼 식별도 동사적인 작용의 의미를 갖는 단어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후대 대승의 유식철학처럼 식별이 형이상학적인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아비담마 철학에서는 이러한 식별을 마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남북방을 통틀어 아비담마 철학의 3대 과오를 들자면, 법의 자성화, 심·의·식(마음·정신·식별)의 동일시, 명색(名色, 명칭과 방해물)의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심의식의 동일시의 과오는 심·의·식을 비교·대조해 보면 드러나게 된다.
① 결론적으로 마음이란 인지와 느낌이 결합하고 증폭하는 형성작용이다. “인지와 느낌은 ‘마음에 관계된 것’입니다. 이 법들은 ‘마음으로 얽힙니다.’그러므로 인지와 느낌은 ‘마음의 형성작용’입니다.”(상4-584, 맛2-325)아비담마 철학은 마음 자체라는 ‘궁극적인 실재’를 따로 상정하기 때문에 ‘마음에 관계된 것’이라는 용어를 ‘마음부수’라고 해석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마음부수는 마음 자체에 항상 수반하면서 일어나는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마음 자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② 정신(意, mano)은 어근 √man(생각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다. ‘여섯 가지 감각기능’(六根)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어근에 입각해서 ‘파악하고 생각하는 기능’이라고 보면 된다.다시 말해 정신은 법을 파악하는 감각기능의 하나일 뿐이다. 정신은 ‘다른 감각기능들’前五根의 귀결처paṭisaraṅa여서 그들의 범위visaya와 반경gocara을 재경험한다.(상5-586)정신의 기능은 식별과 마음이 사라진 상수멸의 경지에서도 다른 감각기능들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순수한 상태로 살아남아 있다.(맛2-307)그런데 “정신은 법의 선구자”라고 선언된다.(법-228)이것은 도표 9에서 ‘정신작용’(作意, manasikāra)이 법들을 생겨나게 한다는 설명과 상응한다. 마음도 이 정신작용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모든 법들이 생겨난다는 주장은 ‘기원에 맞지 않는 정신작용’이다.
③ 여섯 가지 식별의 기본유형 외의 식별이란 근본불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눈의 식별, 귀의 식별, 코의 식별, 혀의 식별, 몸의 식별, 정신의 식별이 식별의 전부다.(상2-99, 디3-421)이 여섯 가지 식별은 결코 마음과 혼용되는 경우가 없다. 식별의 발생은 마음과는 전혀 다르다. ‘정신을 따라서 법에 대해 정신의 식별이 생겨나고’ 정신意根과 법法境과 ‘정신의 식별’意識, 이 셋의 만남을 ‘정신을 통한 접촉’(意觸, mano sam-phassa)이라고 한다.(상4-210)마음은 이러한 접촉 이후에 생겨난다.이것이 기원에 맞는 정신작용이다.
④ 마음이든 식별이든 대상과 대면하면서 생겨난다. 논리적으로는 식별이 마음에 앞서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접촉으로부터 느낌과 인지가 생겨나고(상4-209)마음은 그러한 인지와 느낌이 결합되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별은 인지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든 식별이든 항상 인지를 동반하게 된다. 결국 마음이 있는 곳에 식별이 있고 식별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이 식별을 항상 대동帶同한다는 의미이지 식별이 마음의 중심개념이라는 말은 아니다. 마음의 중심개념은 느낌과 인지다. 식별을 마음의 중심개념으로 잡은 것은 아비담마 철학의 중대한 실수였다.
⑤ 마음이든 정신이든 모두 형성작용(saṅkhāra, 行)이다. 마음의 형성작용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밝혔다. 몸의 형성작용과 말의 형성작용 다음에 마음의 형성작용이 거론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정신의 형성작용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아난다여, 스스로가 정신의 형성작용을 형성시킬 때에도, 그 연유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납니다.”(상2-193)여기에서는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느낌의 원인을 다루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미 느낌을 구성요소로 갖는 마음을 원인으로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래서 좀더 근원적인 정신을 통해 기원을 밝힌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⑥ ‘정신意의 식별識’을 줄여서 ‘의식’意識이라고도 한다. 정신이 다른 다섯 가지 기능의 귀결처이기 때문에 ‘정신의 식별’도 다른 다섯 가지 식별들을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몸이 다른 네 가지 감각기능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촉경이 다른 외부 영역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다시 이 촉경이 법경法境에 포섭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만 각각 특이한 고유 영역을 가지고 있어서 분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신의 식별도 고유한 영역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바로 ‘무한허공의 영역’空無邊處과 ‘무한식별의 영역’識無邊處과 ‘아무 것도 없는 영역’無所有處이라는 세 가지 무방해물에 고정된 경계는 다섯 가지 감각기능을 벗어난 ‘청정한 정신의 식별’(parisuddha mano-viññāṇa)로 이끌어진다.(맛2-298)
⑦ 마음 · 정신 · 식별은 모두 ‘앎’(知, ñāṇa)과 관련되어 있다. 정신은 앎을 형성시키는 근원지이고 식별은 정신에서 파생되어 대상을 구체적으로 분별하고 차별하면서 아는 작용을 말한다. 마음은 앎의 직접적인 주체는 아니지만 마음의 구성요소인 인지와 느낌이 앎의 한 측면들이기 때문에 앎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아비달마 철학에서는 마음 · 정신 · 식별을 동일시하는 경전적인 증거로 다음의 문장을 제시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배우지 못한 범부는 마음이라고도 정신이라고도 식별이라고도 부르는 그 곳에 대부분 정떨어질 수 없고, 퇴색할 수 없으며 풀려날 수 없습니다.”(상2-291)
아비달마 철학의 논사들은 위 인용문에서 ‘이라고-도’(iti-pi)라는 접속어를 필요충분의 동격 접속사로 파악하며 마음 · 정신 · 식별을 동의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음의 문장에서 그 오류가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출가수행자나 신성인은 사유하는 자이자 점검하는 자입니다. 그는 사유해서 맞춰보고 점검하며 추적해서 스스로 이렇게 표현하길, ‘눈이라고도 하고 귀라고도 하고 코라고도 하고 혀라고도 하고 몸이라고도 부르는 이런 자기(我, attā)는 무상하고 계속되지 않고 영원하지 않으며 변하는 법이다. 그러나 마음이라고 혹은 정신이라고 혹은 식별이라고 부르는 이런 자기는 항상하고 계속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법이어서 영원 속에 그대로 머무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디1-124)
이렇게 ‘눈-이라고-도’(cakkhun-ti-pi)에서 동일한 표현이 등장한다. ‘마음-이라고-혹은’(cittan-ti-vā)이라는 비슷한 표현도 등장한다. 아비달마 논사들의 주장이 옳다면 눈 · 귀 · 코 · 혀 · 몸은 동의어야 할 것이다. ‘이라고도’(ti-pi)라는 표현은 비슷한 관련계열을 나열할 때 쓰는 단순 반복형 접속사일 뿐이다. 위의 문맥에서는 자기라고 착각하기 쉬운 외면적인 요소들과 내면적인 요소들을 대조해가며 예로 들어서 나열한 것이다. 마음은 기본적으로 인지와 느낌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음이 곧 형성작용이자 ‘지배적인 영향력’까지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항상 식별을 대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도 살펴봤다. 물론 이렇게 마음은 사실상 방해물色을 제외한 내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정신이나 식별과 헷갈릴 수도 있고 자아라고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이것은 후대에 마음이 만병통치약으로서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과 정신과 식별은 엄연히 다르다.
남방상좌부에서는 심의식의 혼동이 마음으로 혼합되고 극대화되어 ‘마음의 진행과정’(vīthi-citta)을 17단계로 분할한 이론을 주장하게 된다.(아길-357 참고)누가 창시했는지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이 이론은 인지 과정인지, 식별 과정인지, 마음 과정인지, 정신 과정인지, 도통 구분할 수 없는 모순들로 버무려져 있다. 예컨대 17단계 중의 제5단계에서는 식별이 성립하는데, 이렇게 되면 마음의 과정 안에 다시 마음과 동의어라고 주장하는 식별이 생기는 것이므로 자체적으로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한 제1단계는 ‘지나간 바왕가’(atīta bhavaṅga, 과거로서의 잠재의식)를 세워 두었다. 그 이유는 “마음이 물질인 대상을 인식할 때, 일어나는 순간의 물질은 미약하고 빨라서 마음은 이를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마음순간이 지나가 버린다.”(아길-356)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을 인식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의 바왕가(잠재의식에 해당하는 이 용어는 근본경전에는 나오지 않으며 아비담마 철학에서 창안된 용어다.)가 지나갔다는 주장은 모순이다. 이 세상에 인식 대상이 하나만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남방아비담마 철학에서는 마음이 한 번에 하나의 대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이 매우 빠르게 이쪽저쪽 뛰어다니며 파악하고 있다고 상상했던 것이다. 지독하게도 디지털적인 고지식함을 보여주는 아비담마 철학의 사고방식이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외부 환경의 여러 대상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악보를 보며 열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짚어가면서 노래하는 경우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이 이론에 의하면 마음은 물질보다 16배 빠르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에서 입자가 소멸하는 반감기는 10⁻²³초밖에 안된다고 한다. 북방의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물질의 최소 단위의 시간을 찰나(刹那, kṣaṇa, 빠알리어로는 khaṇa.)라고 하는데 요즘 시간으로는 1∕75초(0.013초)에 해당한다.(구사2-552) 그리고 마음은 16배 더 빠르게 생멸하면서 그 한 찰나에 하나의 식별이 완료된다고 한다. 이것은 현대 인지과학에서 확보한 최소한의 사실들과 부합하지 않는다. 현대의 인지과학이나 뇌과학의 연구 결과를 보면 감각정보는 모두 신경세포(뉴런)에 의해 전달되는데 그 전달속도는 보통 1초에 100m를 넘지 않는다. 뇌신경의 정보처리 속도도 마찬가지다. 또한 사람이 사물을 인지하는 속도는 약 1/20초(0.05초)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인지속도는 물질의 생멸속도보다 오히려 느리다. 더욱이 최근에는 사람의 인지속도보다 25배 빠른 5G 이동통신이라는 물질기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물론 아비담마 철학에서는 헷갈려 하고 있지만, 이것은 마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지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들을 어떤 근거로 해결할 것인가? 아마도 아비담마 철학의 찰나적 인식론에서 파생되는 많은 모순들은 부처님이 ‘내가 설한 것은 설한 대로 수지하고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대로 수지하라’는 말을 무시한 결과일 것이다.
아비담마 철학에서 마음 · 정신 · 식별을 동일시하고 마음으로 통합한 혼동과 마음 자체라는 궁극적 실재의 상정은 후에 대승의 유식철학에서 제8식을 상정하는 것과 『화엄경』에서 마음이 궁극적인 관념적 · 일원적 실체로 등장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모두 망상적인 규정에 불과한 것들이다.
|
첫댓글 정신의 기능은 식별과 마음이 사라진 상수멸의 경지에서도 다른 감각기능들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순수한 상태로 살아남아 있다.(맛2-307)
정신의 기능은 상수멸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이때 정신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글쎄요…. 이건 좀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아 새벽은 본 카페에서 난독증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난독증을 고치고자 문장을 되새겨 보는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니 신경쓰지 말고 진행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정신의 기능은 식별과 마음이 사라진 상수멸의 경지에서도 다른 감각기능들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순수한 상태로 살아남아 있다.(맛2-307)//.....라는 경문의 출처는 어디인가요?
맛2-307이라는 표시는 중부 제2권 307쪽?[pts기준]
질문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인용하였으면서 출처를 묻고 계시네요.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새벽이 볼 땐, 봄봄님께서는 원문을 보고 싶어 그런 것 같습니다. 봄봄님의 뜻은 다시 한번 확인하시구요.
(맛2-307)은 PTS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맛지마니까야 2권(PTS)은 272쪽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PTS 기준이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NDP판에서 (맛2-307)이 나올까요?
저에게는 NDP판 니까야가 없기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네요....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님!...^^ (ID가 길어서 .... ㅎㅎ)
질문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마음'은 citta(心)를 의미하는지요?
그리고 '정신은 mano(意)이고,
'식별'은 viññāṇa(識)를 의미한다고 보면 됩니까?
Citta는 마음이며 원의미는 '생각하게 되어짐'이고
마노는 정신이며
식별은 식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