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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회맹의 의병대장 벽산 김도현 선생 | ||||||||||||
95주기 추모 전례(奠禮) 봉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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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신문 master@ycnews.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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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는 벽산 김도현 선생 숭모회가 주관하고 영덕, 영양군수, 경주보훈지청장 및 지역유림 등 3백여명이 참석하였다. 예천군에서는 처음으로 김종배 예천문화원장과 이석종 예천향토문화연구회장이 회원들과 함께 전례에 참석하였다. 벽산 선생과 예천의 인연은 을미의병에서부터 시작된다. 구한말 일제의 국모시해에 격분한 지방 유생들이 국권수호와 일제타도라는 의기를 들고 일제히 봉기하였다. 이 때 경북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7읍의 의병들이 1896년 3월 28일 예천 산양(당시 예천 땅)에 집결하여 함창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목표로 연합 의진(義陣)인 예천회맹을 결성하였다. 이 회맹(會盟)의 주역 중 한 분인 벽산 김도현 선생은 3백여명의 대부대로 편성된 예안 의진을 이끌고 여기에 합세하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 시작된 태봉 전투는 십 수명의 왜적을 사살하는 등 전과가 있었으나, 마침내 훈련 부족과 화력 열세로 저녁 무렵에는 모두 패퇴하고 말았다. 이 때 벽산 선생은 남은 수하를 이끌고 용궁, 경진을 거쳐 학가산으로 물러났다. 선생은 유림출신 의병장으로 그 후에도 각지에서 국권회복에 앞장서 오다가 을사늑약체결 이듬해인 1906년 초에는 왜경에 체포되었는데, 마침 호명 원곡 태생으로 장화식 대감의 아들인 대구진위대장 장봉환(1869∼1929) 참령이 의롭게 구해준 소중한 인연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벽산 선생 주손이 100여년이 지난 후 지난 해 11월 장 참령 묘소에 보은의 참배를 다녀간 뜻 깊은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답례로 이번에 장 참령 댁에서는 종손자 장연석씨가 예천 일행과 함께 참석하여 양가의 의로운 인연을 되새겼다. 벽산 선생은 그후 1909년 고향 영양에 영흥학원을 개설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도 전개하였는데, 경술국치 후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1914년 11월7일 동포에게 드리는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앞바다에서 도해(蹈海) 순국하였다. 이 자리에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내려주신 천추대의(千秋大義)라는 친필을 돌에 새겨 비를 세우고 그 자리는 도해단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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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9월 10일 14:39:09 / 수정 : 2009년 09월 10일 14:41:01 |
첫댓글 벽산의 도해를 어찌 상촌이나 노중련의 도해와 비교 되겠는가? 벽산은 진정 바다를 걸어들어가 망한 나라 묻힐 땅이 없다고 도해 순국 하셨는데 그 얼이 오늘날 점점 바래지는 세태가 아쉽습니다. 벽산 추모를 영남 선비들에게만 맡겨야 하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