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연구 목적 및 방법
1. 당초 연구의 목적, 필요성 및 연구목표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 중의 한 명인 박찬욱의 최근작 <박쥐> (Thirst, 2009)의 영화미학, 특히 미장센과 색채 미학을 분석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한 키워드로서 본 연구는 ‘필름 누아르 (Film noir)’의 대안적 개념인 ‘필름 블랑크 (Film blanc)’를 제시하고자 한다.
■ 분석의 매개체: ‘필름 블랑크 (Film blanc)’
▪ ‘필름 블랑크’ - 개념의 이해
필름 블랑크는 토마스 엘제서 (Thomas Elsaesser)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Rainer Werner Fassbinder)의 흑백영화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 (Die Sehnsucht der Veronika Voss, 1982)을 분석하면서 처음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이 영화 속의 지나치게 밝은 실내 공간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영화와 큰 대조를 이루며 현실의 이중성 또는 복합성에 고통 받는 여주인공을 망각의 세계로 밀쳐내고 있는데, 이는 마치 그림자가 없는 인간에게는 삶 그 자체도 없으며 따라서 영혼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이렇게 영화에서 색채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극단적인 ‘하양’으로 강조된 정신병원의 공간은 결국 인간성의 상실과 타락, 그리고 (성적) 도착과 그로 인한 죄의식의 형상화를 위한 실험실로 기능하고 있다.
▪ ‘필름 블랑크’와 영화 <박쥐>
제 62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박쥐>는 사랑을 베풀고 스스로를 희생해야하는 가톨릭 신부가 - 본의 아니게 - 뱀파이어가 되어 다른 인간에 기생하게 되고, 친구의 아내까지도 탐한다는 역설적인 내용으로 뱀파이어 장르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을 내놓은 영화이다. 특히 이 영화는 염세주의적 색채를 강조하는 로우키와 명암의 대조를 통해 박찬욱 감독이 이제껏 탐구해 왔던 원죄와 죄의식에 대한 고뇌, 그리고 존재적 불확실성과 삶에 대한 허무주의를 필름 느와르적 스타일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박쥐>는 ‘검은 영화’라는 의미의 필름 누아르보다는 앞에서 제시한 ‘하얀 영화’, 즉 필름 블랑크라는 개념을 통해 보다 더 적극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새하얀 병실의 벽 위로 나부끼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문이 열리면 신부 상현이 들어온다. 사면이 하얗게 칠해진 병실 창문을 통해 매우 밝지만 전혀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는 빛이 들어오는데, 이 창백한 공간은 상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의 환유라 할 수 있다. 세상은 곧 병실이며, 그 누구라 한들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상현은 뱀파이어가 된 후 햇빛을 피하기 위해 집안의 모든 창을 봉하고 내부 공간을 온통 하얀 페인트로 칠해버리는데, 이렇게 정신분열증을 유발하는 듯한 폐쇄적인 공간에서 자신이 신부임을 망각하고 다른 인간들을 살해하며, 결국 친구의 부인인 태주와 함께 피의 향연을 펼친다. 여기서 극단적인 하얀색이 지배하는 공간과 하이키 조명을 통한 미장센은 폭력성과 성적 욕망 및 쾌락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데, 엄청난 빛을 발산하지만 따스함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이 시퀀스는 동시에 인간의 고뇌와 고통 그리고 죄의식에서 분출되는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영화를 냉혹하게 광기어린 자기소멸의 장으로 몰고 간다. 이러한 공간들이 <박쥐>를 필름 누아르가 아닌, 바로 ‘필름 블랑크’로 만드는 요소인 것이다.
▪ ‘필름 블랑크’를 넘어 ‘필름 블랭크 (Film blank)’
또한 이 시퀀스에서 바로 영화 자체는 일종의 망각의 매체가 되는 듯한데, 뱀파이어 커플은 자신들이 제어할 수 없는 삶을 피해 빛의 저편으로 몸을 숨겨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퀀스는 필름 블랑크뿐만이 아닌, 망각의 영화 속의 여백의 공간, 즉 ‘필름 블랭크 (Film blank)’를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완전한 백색은 기억의 상실과 더불어 영혼의 상실과 자기 소멸,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의 사심과 원죄로부터의 자기 정화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 영화적 장치 (Filmic apparatus)로서의 ‘필름 블랑크’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박쥐>는 장르 영화에 대한 대중적 기대치와 감독들의 작가주의적 열망 사이에서 국내외적으로 무수히 많은 찬반양론을 양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보다 더 적극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렇게 장르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메소드로서, 즉 영화적 장치 (Filmic apparatus)로서의 필름 블랑크라는 개념을 통해 박찬욱의 <박쥐>의 미장센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그 속에 담겨있는 인간의 욕망과 인간성의 상실 그리고 죄의식이라는 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