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東 우탁은 누구며, 천년이 지난 오늘 왜 그를 다시 부르는가
단양, "丹陽"은 "밝은 아침"이란 뜻이다.
역사 속 단양은 항상 첩첩산골 변방이었다.
고구려에서 신라에서 백제에서 변방이었고, 고려에서 조선에서도 역시 한 점 변방이었다.
그러나 단양은 고구려,신라,백제의 보루였다. 요세였다. 콩 한 되 심을 땅도 드물 정도로 조각조각 조각보 같은 비탈이지만, 이 변방이 그토록 중요한 삼국의 꼭지점이 된 것은 천혜의 남한강과 소백산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무너지면 북으로는 한강까지, 남으로는 땅 끝 전체가 흔들리는 고대 전쟁의 지정학적인 지형 때문이다.
남에서 볼 때는 큰 호랑이 같은 소백산이 남한강을 앞에 놓고 있으니 이만큼 든든한 지형이 또 어디 있겠는가. 북에서 보면 남한강으로 배수진 친 호랑이가 버티고 있으니 그 진지는 죽느냐 사는냐의 땅인 것이다.
인체로 말하자면 허리다. 소백산맥과 남한강은 생생히 살아있는 허리가 된다.
허리를 쓰지 못하면 사람도 힘 한 번 쓰지 못한다. 이런 상징성도 이상하게 역사 속에서 맞아떨어진 땅이 곧 단양이다.
그렇기에 신라적성비가 있으며 강의 남쪽이나 북쪽이나 구름띠를 두룬 것처럼 성곽이 끊임 없이 펼쳐져 있다.
백두산 下가 통일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는 중앙무대에서 볼 때 별 쓸모없는 오지에 불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중앙무대로 정신의 한강줄기와 소백산맥을 틀어간 사람이 단양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역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역사 반 설화 반이지만 고려의 중앙무대에서 석양을 맞이한 한 가문이 있고, 같은 고려의 변방에서 조선의 아침을 연 불씨 같은 사람이 있다.
단양우씨 가문과 삼봉 정도전이 바로 그들이다.
2000년을 한 발 앞 둔 1997년 중앙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1000년 전 타임켑슐이 나왔다.
서울이 정도 6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시대에 상징되는 물건을 땅 속에 묻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타임켑슐은 지금처럼 모든 정보가 기록되는 시대에도 역사가 아득히 흐른 후세에 그 기록의 증거가 된다. 아득하여 기록이 없는 역사의 수수께끼를 우리는 유물유적을 통해서 푼다. 특히 무덤 속 부장품들은 그 시대, 그 시대의 문화와 풍속과 소통 할 수 있는 중요한 언어와 기록이다. 그래서 고대무덤과 부장품은 타임켑슐이다.
1997년 적성면 현곡(玄谷)리 중앙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1000년 전 고려돌무덤 34기, 조선시대 토장무덤 2기에서 단양 호족의 세력를 가늠 할 만 한 귀중한 유물이 나왔다.
(사진1) 이 유물은 단양 현곡리 고려 고분군유적에서 출토된 고려백자 찻잔이다 돌덧널무덤인 30호분에서 출토되었다. 피장자의 머리맡에서는 청자운학문대접을 비롯해 청자백퇴화무늬 잔받침, 청자상감 국화무늬 참외모양 주전자, 백자잔, 청자잔, 자기병이 나왔고 피장자의 허리와 허벅지 사이에서 금동 허리띠장식이 나왔다.
(사진2) 이 유물은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군 유적에서 발견된 동경으로 돌덧널무덤인 3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원앙당초문팔릉경(鴛鴦唐草文八稜銅鏡) 형태는 8릉화형이다. 경뉴와 내구 사이에는 원앙을, 그 주변에 곤충과 물방울, 당초문을 섬세하게 돋을 새김하였다. 내구와 외구 사이에 당초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사진3) 이 유물은 단양 현곡리 고분유적에서 출토된 것인데 참외모양으로 형상하고 상감수법으로 당초문, 국화문, 연꽃문 등을 시문했다. 귀때 부리는 바깥면을 모나게 하여 부리모양을 두드러지게 하였고 골이 진 풍만한 몸체에 각 면마다 도장 찍듯이 국화 꽃가지를 세로로 상감했다. 30호 고분에서 나왔다.
12세기 중엽으로 보는 상감청자다
고려의 수도 개성과 고려의 변방 단양은 도대체 어떤 관계였기에 이런 고급 유물이 묻혔을까?
이 고급 유물을 사용 할 만 한 호족이 살만한 땅이었는가?. 아니다. 이 좁은 땅에 호족이라고 해봤자 겨우 밥 안 굶을 정도 밖에 더 되었겠는가, 인구라야 또 몇 명이나 되었겠는가? 왕건이 지방의 많은 호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은 기록 중에 단양 사람은 없다.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사람이 이 척박한 땅에 살며 중앙의 고급문화를 향유 했는가?
사진1의 고려백자 찻잔은 매우 희귀한 유물이다. 국립중앙 박물관에도 없는 희귀한 물건이다. 고려백자는 청자 만 개 중에 하나가 있을까 할 정도다.
중국은 송원대에 백자가 생산되어 우리보다 200년 정도 앞섰다고 보는데 이 유물은 앞의 견해를 수정해야 할 증거물이 될 것이다.
사진2의 능화형 동경도, 동경 중에 매우 고급 거울이다. 唐鏡이후에 나타나는 이 능화형은 왕실에서나 쓸수 있는 아주 고급이다. 동경은 고대사회에서는 태양을 의미하며 지배자의 상징이었는데, 고려 중엽이 되면서는 실제 얼굴을 비쳐보는 거울로의 기능을 가진다. 이 때는 권위의 상징과 미용의 실용이 병존 할 때다.
사진3은 12세기 왕실에서나 사용 할 수 있는, 궁궐에 진상하던 강진 관요에서 만든 최고의 상감청자다.
사진1과 사진3의 청자는 30호 고분에서, 사진2의 동경은 31호 고분에서 나왔다.
피장자는 12세기 중앙권력에 대단한 영향을 가진 부부의 무덤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탁의 조부 문화시중을 지낸 우중대의 1~2대 선대무덤이 아닐까?)
고려초 이곳에서 세거한 단양우씨와 중앙집권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타임켑슐이다.
적성은 品達이라고 한다. 풍수에서 3정승이 나온다는 것인데, 고려시대 역동 우탁과,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지수제 유척기를 꼽으며 아직 한 사람이 더 나온다고 구전 구전 된다.
하지만 역동의 조부 우중대가 문하시중(지금의 총리)를 시작으로 우중대의 아들 5형제가 모두 장관과 총리등급의 관직에 오르는 등 그 하대로 易東家門에서는 무수한 사람이 품계에 올랐다.
고려말 조정은 목은 이색가문과 역동 우탁 가문이 지배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적성을 품달이라고 했다는 견해가 더 합리적일 것이다. 풍수는 앞으로 희망의 메세지를 꼭 한자락 깔고 유혹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 했을 것이고.
麗末鮮初는 단양과 관계된 인물과 가문이 중심이 되어 펼쳐진 한 편의 드라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태조실록등 역사의 고증이 분명하지만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위 이야기들은 역동 우탁 앞의 배경과 역동 뒤의 그늘을 비쳐 본 것이다.
역동은 누구인가?
단양 적성에서 1262년에 태어났다.
세상의 변화와 이치를 암호적인 도안과 숫자로 기록한 周易을 아무도 푸는 사람이 없었으나 역동이 잠깐 동안에 풀이했다고 하여 중국에서 역이 동으로 갔다, 역동으로 호칭되었다고 한다.
그가 47세인 1308년 8월에, 충선왕이 즉위하고 10월 24일에 부왕(父王)인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淑昌院妃)를 범간(犯奸)하는 패륜을 자행하자, 감찰규정이었던 역동은 이튿날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군왕의 비행을 직간한 역동의 충의와 기개에 근신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고, 군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사단(史斷)에서 이르기를,
“탁(倬)이 항소(抗疎)하여 감히 말하고 스스로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여 조금도 몸을 돌보는 마음이 없었으니 임금도 얼굴빛이 변하고 좌우의 신하들도 두려워 떨었는바, 천년 뒤에도 그 사람을 상상하여 볼 수 있고, 그의 고충(孤忠)과 준절(峻節)은 우뚝하여 범인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벼슬을 포기하고 향리인 단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그 뒤 진현관 직제학(進賢館 直提學)에 임명되었고 또한 성균관 제주 종삼품(成均館 際酒 從三品)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역동은 관학의 확립을 의논하였으며,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강명(講明)하여 고려 말기에 새로운 학풍으로서의 신유학 진흥에 힘썼다. 또한 당시 성균관 제생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경사백가(經史百家)를 읽는 것은 뜻을 깨달아 도를 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 말을 익히고 그 체를 본받아서 마음에 배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훈유(訓諭)하여 성리학의 이론적 바탕과 함께 실천적 태도를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말기에 이르러 인륜의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사회질서가 해이하여 졌으며, 더욱 충렬왕 대에는 원나라와 예속적 관계에서 그 여폐(餘弊)가 우리의 의복 등에까지 이르자, 역동은 정주(程朱)의 의리학을 정연(精硏)하여 통달하였던 학문적 바탕을 가지고 천도(天道)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패관사(稗官史)에 보면 그 상소문의 대강을 알 수 있으니, 즉 그 구체적 내용이
족혼(族婚)을 금하고 상례를 정하고, 사학(四學)을 설치하며 주현(州縣)에 학교를 세우는 것
등이었다. 비록 이러한 역동의 상소가 가납(嘉納)되어 전부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1308년 11월에 양반의 종친들은 외종, 이종형제 간의 근친혼을 금한다는 충선왕의 교지가 반포 되는 등 이풍(夷風)의 사회적 풍속이 점차 미풍양속으로 변하게 되었다.
여러번의 상소가 받아 들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벼슬에 뜻이 없었던 역동은 특히 당시 상황에서 정도(正道) 구현이 어려울 때임을 알고 치사(致仕)한 뒤에 복주의 예안현(현재의 안동군 와룡면 선양동, 댐의 건설로 수몰됨)에 퇴거하였다. 그 뒤 충숙왕이 역동의 충의를 높여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342년(충혜 3) 2월 7일 81세로 생을 마치었다.
그의 학맥은 영남학맥의 뿌리가 된다.
역동의 학문과 덕행을 지극히 흠모하였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그를 기리며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였고,
聖學十圖, 理氣一元論등은 거슬러 올라가면 역동에 가 닿는다.
역동의 학행을 숭상하는 기풍이 조선조 유림들에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동은 개경에서 벼슬을 하며 자주 사인암을 찾았다고 한다.
“舍人”이란 벼슬을 할 때 사인암에 머물러 “舍人岩”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2008년 100주년을 맞이했다.
지금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를 보면 실로 詩의 세상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는 춤과 노래의
바탕이 되는 시가 몸에 베인 민족이다.
자유시 이전 100년 전 우리민족의 시는 時調였다.
작가가 알려진 시조 작품 중에 우탁의 탄로가 2수를 가장 최초의 것으로 우리는 기리고 있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져근 덧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 밋태 해묵은 셔리랄 녹여볼가 하노라
(풀이)
봄 산에 눈을 녹인 바람 잠깐 불고 어디론가 가고 없다.
잠시 동안 그 봄바람을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백발)을 어디 한 번 녹여나 볼까.
(감상)
때는 이른 봄, 아직 높은 산에는 희끗희끗 잔설이 남아 있고 바람은 훈풍이다. 그 훈풍이 잔설을 녹이고 간다. 눈을 녹이고 간 그 봄바람을 잠시 조금 빌어다가 서리 같이 하얗게 된 귀밑머리를 녹이고 싶구나.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면서 달관한 여유가 깊다. 은유의 가락이 유장하다. 남한강을 바라보면서 키워 온 가슴을 느낄 수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싀 쥐고
늙난 길 가싀로 막고 오난 백발(白髮)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白髮)이 졔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
(풀이)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은 가시 덩굴로 막고, 찾아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발이 (나의 속셈을)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감상)
이 노래는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과 함께 우탁할아버지의 탄로(歎老)에 대한 작품이다.
자연의 법칙은 나고 성장하고 늙고 죽는 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만물에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이 법칙에서 예외 일 수는 없는 법. '백발'의 늙음과 그 늙어감의 길인 세월, 그것을 뭐 가시로 막고 막대로 친다고…농담도 잘하셔!. 天理를 달관한 경지는 죽음도 이렇게 익살과 가벼움으로 날려보낸다. 이것도 남한강을 품지 못하면 어림도 없지...시에서 강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時調는 무엇인가?
우리민족이 짓고 부른 詩歌다.
왜 詩가 아니고 時인가?
인생은 시간 속에 세월 속에 희노애락으로 가득 차 있다.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것이 그 감정이다. 정치인은 정치의 영역에서, 학문을 하는 선비는 선비로서, 기생은 기생으로서, 그 처지의 희로애락이 있다. 기쁠 때도 있고, 분노할 때도 있다. 그런데 제 성질데로 다 행동으로 옮기며 살 수는 없다. 이것을 은유적인 詩를 빌어서 가슴을 풀어내는 것이다.
시시때때로, 또는 그 시절 그 역사의 마당에서 기쁨과 한탄, 분노를 은유적인 詩를 빌어서 가슴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時의 詩라는 뜻이다.
왜 調인가?
그런데 詩로서는 다 못 풀어낸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고달픈 생활을 푸념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혼자 중얼중얼, 그러다 어느 순간 신세 한탄이 되는데 그것이 소리로 변한다. 그리고 “후유”하고 찌꺼기 한숨을 털어낸다.
그것은 바로 호홉이다. 숨고르기다. 호홉법으로 가슴에 울화를 풀어낸다.
지금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데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호홉법으로 울화를 삭혔다.
마음을 다스리는 호홉, 숨고르기란 뜻이다. 시조는 그래서 창으로 불렀는데 그 호홉이 매우 길다.
노래 중에는 이미자 노래가 느린데, 같은 글자 수로 놓고 볼 때 이미자 노래의 5배 정도로 긴 호홉이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는 말이 있다. 몸은 스스로 푸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속에 것을 털어낼려면 긴 한숨 긴 호홉이 필요하다.
시시때때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다스리는 詩와 호홉이 바로 時調다.
唱과 誦, 시와 음악이 붙어있던 時調가, 현대로 오면서 음미하는 詩로 발전하며 정형의 틀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다.
역동 기념사업회와 시조춘추
2006년 9월 23일 환갑을 바라보는 한 상이군인이, 서울 석수역에서 단양 사인암까지 550리길을 13시간만에 자전거로 주파한다.
김영덕(63), 단양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단양에서 나오고, 시조시인이 된 그가 사업을 접고, 귀향길은 성화봉송을 하듯 불편한 육체를 끌고 자전거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단양이 時調의 뿌리인데 누가 이 불씨를 다시 살릴 것인가? 그 화두를 던진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사단법인 시조문학진흥회(옥경국 이사장)"와 "출판사 C-1(시조문학진흥회에서 창건)"이 발행하는 "시조춘추"가 있다.
이를 계기로 시조춘추는 매년 500만원의 상금을 걸고 "역동신인시조문학상"을 공모한다.
올해가 그 원년으로 작품이 이미 선정 되었고 시조춘추3호를 통하여 발표될 것이다.
외부 단체에서도 時調의 뿌리 단양을 찾고자 하는데, 본 고장에서 구경만 하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 한 뜻 있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바로
단양에 연고를 둔 사람들로 구성된 "역동우탁선생기념사업회"다.
역동기념사업회는 우려스러움도 있다. 자칫 한 문중의 빛을 찬양 한다는 오해소지다.
그러나 우탁은 한 문중, 한 지역의 인물을 넘어 역사의 인물이 틀림 없다.
그리고 그의 시조 2수는 時調문학의 始祖다.
우선 이 확실한 우리나라 시조문학 장르를 주축으로 전국적인 활동을 할 것이며
오해소지가 없어지고, 정서가 자연스럽게 잡힐 때 그의 학문의 영역까지 외연이 확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국적으로 많은 문학기념사업이 있다. 평창 메밀꽃 필무렵의 이효석, 춘천의 김유정, 진천의 정지용, 영월의 김삿갓 등등...
시조작가를 기리는 지방의 기념사업도 활발하다. 김천의 백수 정완영 기념관은 생존작가이지만 몇십억의 예산으로 기념관을 짓고 있으며 여름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고성의 이조년, 청도의 이호우 이영도. 익산의 가람 이병기 등등...
時調의 고향 단양, 時祖의 始祖 역동 우탁!
시조의 뿌리가 있는 이 단양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것은 후손된자의 무지와 수치다.
(역동우탁선생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