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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불평등은 신학의 문제입니다” |
=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살펴본 기독교와 경제 문제 = |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가톨릭 신학자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거짓말
성서를 구석구석 다 뒤져도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말은 없다. 성서에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은 있어도, 부자가 천국 간다는 말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거짓말이 버젓이 설교되고 있다. 성서를 속이는 사람들이 교회와 성당 안에서 악마처럼 날뛰는 사악한 시대다. 불의한 세상에서 악마의 세력에게 효과적으로 끈질기게 저항하려면, 신뢰하고 연대하는 믿음의 동지가 꼭 필요하다. 독자들께도 그런 동지가 계실 것으로 생각한다. 박득훈 목사님이 내게 그런 분이다. 예수 찾아 걷는 길에서 우리는 만났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같은 주제로 고뇌하는 신앙의 동지를 만나는 것은 인생 최고의 행복 아닐까. 나는 행복하다.
지난 5월호 연재글에서 박득훈 목사님은 종교와 경제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오늘 한국교회의 개혁과제를 찾아보려 했다. 한국교회는 경제영역에서 그동안 어떤 역할을 해 왔고, 어떤 점에서 개혁되어야 하는지 밝히려는 것이다. 한국 사회와 교회가 일제 지배, 분단, 한국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치명적 트라우마를 입은 역사를 박 목사님은 잊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이런 논쟁적인 주제를 열린 마음으로 논의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역사적 사정을 드러낸 다음 그는 이론적 논의를 시작한다. 자본주의가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이며, 자본주의 정신이 개신교 윤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착각을 먼저 폭로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교회가 평등경제를 지향해야 할 신학적 신앙적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글 말미에서 박 목사님은 “한국교회여, 평등경제를 함께 꿈꾸며 힘차게 나아가자”고 외친다.
마땅하고도 옳은 말씀이다. 그의 글을 읽고 사색하는 동안 브라질 해방신학자 프레이 베투(Frei Betto) 신부의 말이 떠올랐다. ‘교회는 교회의 재산 소유를 인정한 자본주의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베투 신부가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나눈 대담을 엮은 책 《카스트로, 종교를 말하다》(살림터)에서 한 말이다.
가톨릭을 내용적으로 잘 알고 싶은 개신교 성도에게 3권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20세기 중반 이후 가톨릭의 방향을 알려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읽는 것이 적절하다. 개신교와 대화, 시대와 학문과 교류 등 가톨릭 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끄는 가톨릭의 방향은 권고 《복음의 기쁨》(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이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교황은 이 책 1항에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교회가 걸어갈 새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라고 썼다.
한국가톨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4년 방한 연설에서 자세히 조언한 바 있다. 한국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라고 충고한 당시 연설과 그에 대한 신학적 해설이 담긴 방한 기록집 《교황과 98시간》(메디치미디어)을 추천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떻게 선출되었고, 그가 어떤 인물인지, 가톨릭의 위기와 출구는 무엇인지 좀더 알고 싶으면 《교황과 나》(메디치미디어)를 보셔도 좋다. 가톨릭에 대해 공정하고 정직하게 쓴 책 중 하나다.
가톨릭과 정치 경제의 관계를 다룬 분야를 가톨릭에서는 ‘사회교리’라고 부른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교리를 대체하거나 경쟁한다는 뜻에서 붙인 단어가 아니다. 사회교리는 성서와 교리를 보충하는 역할을 맡는다. 신론, 구원론, 삼위일체, 기독론, 성령론 등이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실천되어야 하는지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밝힌 가르침인 것이다. 사회교리가 절대 불변의 진리라는 뜻은 아니다. 사회교리에는 당연히 교황 무류권이 담겨 있지 않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과 교황들이 발표한 문헌에 담겨 있는 사회교리는 사실상 19세기까지는 가톨릭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후 2014년 처음 발표한 문헌인 권고 《복음의 기쁨》과,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경제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이 잘 나와 있다. ‘권고’와 ‘회칙’이라는 명칭은 교황이 펴낸 문헌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전문 용어다. 회칙이 권고보다 중요성이 조금 더 높은 단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두 문헌을 중심으로 가톨릭과 경제에 대한 21세기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존경하는 개신교 성도들에게 간단히 소개하고 싶다.
1.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이 때문에 비참한 결과가 빚어지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 심지어 강대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사람들조차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기쁨이 자주 퇴색되고,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이 갈수록 결여되며, 폭력이 증가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52항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하는 말 같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 220여 개 나라 중에 경제에서 아주 혜택받은 나라에 속한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가 그리 많지 않다. 70억 세계인구 중 3분의 2인 45억이 아시아에 살고 있고, 45억 아시아 인구의 3분의 2인 34억이 가난한 계층에 속한다. 아시아는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대륙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며 사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그 통계를 잊지 않고 사는 한국 개신교 성도와 가톨릭 신자는 얼마나 될까.
“오늘날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제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배척입니다.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경쟁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면서 힘없는 이는 힘센 자에게 먹히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배척되고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자리도, 희망도, 현실을 벗어날 방법도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52항에서)
경제학자의 논문이나 대통령 후보의 선거 연설이 아니다. 경제와 아주 거리가 멀 것 같은, 하늘나라 이야기나 하고, 죽음 너머 이야기나 할 것 같은, 그래야만 마땅할 것 같은 교황의 글이다. 일부 개신교 성도들이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하는 교황이 지금 인류의 현실을 이렇게 심각하게 걱정한다. 적그리스도라고 비난받기도 하는 교황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한다. 골프장에 나가는 신부들, 부자들과 고급 음식을 즐기는 목사들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자유 시장으로 부추겨진 경제 성장이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낙수 효과(trickle-down) 이론을 여전히 옹호하고 있습니다. 사실로 전혀 확인되지 않은 이러한 견해는 경제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선의와, 지배적인 경제 제도의 신성시된 운용 방식을 무턱대고 순진하게 믿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54항에서)
‘낙수 효과’는 먼저 부자들의 잔에 돈을 가득 채우면, 가득 찬 잔에서 흘러넘치는 돈 일부가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돌아가지 않겠느냐는 이론이다. 교황은 그 이론이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견해라고 지적하면서 신자유주의 핵심 경제이론중 하나인 낙수 효과를 반박하고 있다. 낙수 효과 이론에 속지 말라는 뜻이다.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생활양식을 유지하고자, 또는 이기적인 이 이상을 좇고자, 사람들은 무관심의 세계화를 펼쳐왔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절규 앞에서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다른 이들의 고통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그들을 도울 필요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지 우리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54항에서)
뼈아픈 말이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정면으로 모순이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자본의 세계화, 욕망의 세계화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무관심에서 무책임이 나온다. 우리 시대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2.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은 안 된다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지배하도록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금융 위기는 그 기원에 심각한 인간학적 위기가 있다는 것도 간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곧 인간이 최우선임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탈출기 32,1-35 참조) 돈에 대한 물신주의라는, 그리고 참다운 인간적 목적이 없는 비인간적 경제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복음의 기쁨》, 55항에서)
오늘날 우상은 물신주의와 비인간적 경제독재라는 새롭고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우상 숭배는 기술과 자연과학이 발전하지 않은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며, 학문과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후진국 이야기도 아니다. 기술과 자연과학, 학문과 경제가 가장 발전했다는 오늘날, 선진국, 고학력층,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우상 숭배가 가장 노골적이고도 교묘하게 행해지고 있다.
“소수의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동안, 대다수가 이 행복한 소수가 누리는 번영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시장의 절대 자율과 금융 투기를 옹호하는 이념의 산물입니다. 이 이념은 공동선을 지키는 역을 맡은 국가의 통제권을 배척합니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고 때로는 가상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독재가 출현하여 일방적이고 무자비하게 자기 법과 규칙을 하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56항에서)
시장의 절대 자율과 금융 투기 탓에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인류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이 생기고 있다. 시장의 절대 자율은 새로운 독재를 낳고 있다. 시장의 절대 자율이라는 새로운 이념과 독재는 언론, 광고, 시장, 심지어 종교에서도 무자비하게 자기 욕망을 선전하고 실현하고 있다.
3. 봉사하지 않고 지배하는 금융 제도는 안 된다
“이러한 태도 뒤에는 윤리와 하느님에 대한 거부가 숨어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윤리를 경멸에 찬 냉소의 눈길로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윤리가 돈과 권력을 상대화하기 때문에 비생산적이고 지나치게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을 조작하고 타락시키는 것을 단죄하기에 윤리는 위험하다고 느낍니다. 궁극적으로 윤리는 시장의 범주를 벗어나는 책임 있는 응답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를 이끕니다.”(《복음의 기쁨》, 57항에서)
돈과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윤리를 싫어한다. 그러나 돈과 권력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 필요하다. 윤리는 하나님께 연결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행동은 마르크스 같은 사회주의자의 요청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교가 죄 문제에만 집중하는 일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메시지를 축소하고 배신하는 일이다.
“금융 개혁에 윤리적 고려가 반영되려면 정치 지도자들의 강력한 태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 돈은 봉사해야지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복음의 기쁨》, 57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금융 개혁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제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금융 제도에 고칠 점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경제는 정치경제임을 교황은 모르지 않는다. 경제는 정치경제일 뿐 아니라 경제는 곧 정치경제종교다. 가난과 불평등 문제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신학 문제인 것이다. 가난과 불평등 문제는 경제학자와 국가만 다룰 영역이 아니다. 가난과 불평등은 그리스도교가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영역이다. 가난과 불평등 문제를 고뇌하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아직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4. 폭력을 낳는 불평등은 안 된다
“사회 안에서 다양한 민족들 사이에 배척과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 한, 폭력이 뿌리채 뽑힐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못사는 민족들이 폭력을 유발한다고 비난을 받지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온갖 형태의 공격과 분쟁은 계속 싹을 틔울 토양을 갖고 언젠가는 폭발하기 마련입니다. … 단순히 불평등이 제도에서 배척당한 이들의 폭력적 반응을 유발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경제 제도가 그 뿌리부터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 한 사회에 밴 악은 언제나 분열과 죽음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59항에서)
폭력의 주된 원인이 무엇인지, 누가 폭력을 진짜로 부추기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폭력을 없애려면 불평등부터 없애야 한다. 불평등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정책이나 공권력이나 감시 체제도 사회를 평온하게 유지하거나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 운영 체제는 무분별한 소비를 부추기고, 그 결과 걷잡을 수 없는 소비 지상주의가 불평등과 결합되어 사회 조직을 이중으로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불평등은 결국 폭력을 낳습니다. 군비 경쟁은 그 어떠한 해결책도 되지 못하고 또 될 수도 없습니다. … 터무니없는 일반화에 빠져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자업자득이라며 비난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들을 진정시키고 길들여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교육’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수많은 나라에, 그 나라의 정부와 기업과 기관 안에, 그 지도자들의 정치 이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매우 널리 퍼져 있고 깊이 뿌리박혀 있는 부패가 사회적 암덩어리로 자라나고 있는 것을 소외된 이들이 본다면, 그러한 주장은 더욱 기막힌 일이 될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60항에서)
오늘날 경제 체제는 소비 지상주의와 불평등을 낳고 있다. 불평등은 결국 폭력을 낳는다. 군비 경쟁은 오늘 경제 체제가 낳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해마다 무기를 엄청나게 사들이고 있다. 사드(THAAD)를 보라. 가난한 이들을 비난하고 길들이는 교육도 해답이 아니다. 널리 퍼진 부패가 소외된 이들을 더 절망에 빠지게 하고 있다.
5. 사회 문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나는 사회문제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3원칙을 발견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통렬하게 자각하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삼아, 우리가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다.”(19항에서) 이는 1987년 엘살바도르에서 군인들에게 살해된 해방신학자 에야쿠리아(Ignacio Ellacuria)가 말한 현실 인식 3단계와 비슷하다.(Hacia una fundamentacion filosofica del metodo teologico latinoamericano, Estudios Centroamrericanos 322-323[1975], 419) 에야쿠리아는 1.지적 차원에서 현실을 알기, 2.윤리적 차원에서 현실의 고통을 내 것으로 껴안기, 3.실천적 차원에서 현실 개혁에 책임지기를 제안했다. 그의 동료이자 나의 스승인 소브리노는 이에 더해 4.은혜 차원에서 현실이 우리를 안고 가기를 덧붙였다.(Fuera de los pobres no hay salvacion[2007], 2)
1.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 나서라
“여러 학문의 기여를 받아들여, 교회의 목회자들은 인간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있습니다. 복음화 사명은 모든 인간 존재의 전인적 진보를 포함하고 또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게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특히 사회 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합니다.”(《복음의 기쁨》, 182항에서)
오늘날의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을 하고서 그리스도교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혼이 천국 갈 준비만 하는 것이 종교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목회자들은 인간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을 바꾸고 예수를 받아들임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질서에 대한 재검토까지도 그리스도인의 회개에 포함된다. 의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려 애쓰지 않는 회개는 아직 그리스도교적 회개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국가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 가톨릭교회는 교리의 성찰 단계든 실천 단계든 사회 분야에서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의 노력에 기꺼이 동참합니다.”(《복음의 기쁨》, 183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교회 외부를 향해서만 하는 말이 아니다. 정치 경제 전문가들, 선의의 시민들, 이웃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 놓으려 하는 이들, 종교는 국가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고 국가 사회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도 말아야 한다고 우기고 가르치는,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우기고 가르치는 추기경·주교·신부·수녀·평신도들에게 교황이 하소연하는 말이다. 교황을 우습게 알고 교황 말을 따르지 않는 성직자와 신도가 한국에 하나둘이 아니다. 태업(怠業)이요 집단 항명이다.
“신자들 가운데에서조차도 해결책을 찾는 데 방해가 되는 태도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문제 자체의 부인과 무관심, 냉정한 체념이나 기술적 해결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14항)
2. 교회는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라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잘 들어주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 가난한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도구인 우리가 그러한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계획을 거스르는 일입니다.”(《복음의 기쁨》, 187항에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다.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배신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하나님께 가는 길은 없다. 가난한 이들을 배신하면 구원은 없다.
“자비의 복음과 인간 사랑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정의를 요구하는 울부짖음을 듣고 있으며, 온 힘을 다 기울여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가 6,37) 하신 명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고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발전을 촉진하도록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딪히는 구체적인 곤경에 대처하는 연대성의 작은 일상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 이는 소수의 재화 독점을 극복하고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사람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전제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88항)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라.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발전을 촉진하도록 일하라.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교회에 요구하고 명령하는 말이다. 소수의 재화 독점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의 삶을 먼저 생각하고, 일상에서 서로 연대하라. 회개는 이렇게 해야 한다. 교회가 할 일이 이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세계적 불평등(48-52항)이라는 제목에서 가난 문제를 다시 다루고 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든 환경 훼손에서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습니다.“(48항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수십억 명에 이르러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오늘날 국제정치와 경제 토론에서 이들이 언급되며 부수적 피해자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그들 문제는 부가적으로 거의 마지못해서 또는 피상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게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서 보면 가난한 이들의 문제는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많은 전문가, 여론 선도자, 통신 매체, 권력의 핵심들이 부유한 도시 지역에 위치하여 가난한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가난한 이들의 문제에 거의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만남의 결여는 종종 도시의 해체로 촉발되며 양심을 무디게 하고 현실에 있는 것을 무시하는 편향된 분석을 낳습니다.”(49항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목성이나 화성을 잘 모르는 것처럼, 전문가들조차 가난한 이들의 문제들을 잘 모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직접적인 접촉과 만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직접적인 접촉과 만남이 부족하니 양심이 무디어지고 현실을 무시하고 편향된 분석이 생긴다는 말이다.
마지막 구절은 나의 머리를 겨울잠에서 깨우고 말았다. 목사와 장로, 신부와 수녀들이, 개신교 성도와 가톨릭 신도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잘 모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직접적인 접촉과 만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는 대형교회 목사나 가톨릭 주교가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보거나 집에서 지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교는, 성직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몸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를 낳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는 것은 언제나 위급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임시방편이 될 뿐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노동을 통하여 존엄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커다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 128항에서)
자선은 언제나 임시방편이다. 가난한 이들이 노동을 할 수 있도록 구조 변화가 필요하다. 착한 사마리아인을 칭송하는 데 그치지 말고 강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참다운 혜택을 누리게 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고용 기회가 계속 축소되고 있는데, 단지 경제적 자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에 명예롭지 못한 모순된 주장입니다.”(《찬미받으소서》, 128항에서)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권리가 어느 정도 제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제한의 사유재산권을 가톨릭교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어느 부자도 가난한 사람들을 죽일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3.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화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실’(2코린 8,9)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97항에서)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입니다. …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해왔습니다. …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 속에서 고통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사람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에서)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남보다 잘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일정한 자기 권리를 양보하여야 한다”(《팔십 주년》, 23항에서)라고 말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일이 있다. 곧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우고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복지의 수혜자요 대상자가 아니라 복음화의 주체로 보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서 변두리 구경꾼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중심이다. 교회의 중심은 목사나 장로나 신부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다.
4. 부자와 교회는 회개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로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을 호소했다. 그가 기발한 해답을 제시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생각이 학문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 그의 말은 부자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에 주는 말이다. 가톨릭에 대한 내부 고발이다. 부자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말이 생각난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재산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라자로에 대한 설교, II. 6) 세상의 부자들은 이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부자 그리스도인들은 똑바로 들어야 한다. 부자 교회는 귀를 열어야 한다.
예수는 부자들의 회개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하나님과 돈을 같이 섬길 수 없으며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부자들은 눈 뜨고 보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면 부자들의 삶과 신앙은 실패한 것이다. 경제 문제는 경제 이전에 신학 문제다. 지금 그리스도교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불평등이다.
개신교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에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경제학자나 해방신학자나 정의구현사제단의 글이 아니다. 가장 보수적일 것 같은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답답할 것 같은 교황의 글이다. 한국 가톨릭 주교들과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 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글이란 말인가. 이렇게 고마운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인가.
개신교는 가톨릭을 공정하게 보아야 한다. 16세기 부패한 가톨릭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 가톨릭은 가난한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16세기 가톨릭을 비판하여 21세기 개신교를 세우려는 일부 개신교 인사들의 논리는 이해하기도 찬성하기도 어렵다.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두 질문에 마주 한다. 첫째는 인간이 신에게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눅 3:10) 둘째는 신이 인간에게 하는 질문이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눅 18:41)
인간의 최종 답변은 무엇일까. 여리고의 시각장애인처럼 나는 이렇게 겸손하고 진지하게 말하고 싶다.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눅 18:41)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역사 현실을, 예수의 삶과 죽음을, 믿음과 경제의 관계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다.
김근수
가톨릭 성도신학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광주가톨릭대학에 입학, 2학년 때 독일 마인즈 대학에 유학하여 신약성서를 전공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예수’를 주로 공부하다가 ‘예수를 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해 남미 엘살바도르 UCA 대학에 유학했다. 해방신학의 대가 혼 소브리노(Jon Sobrino)에게 해방신학과 기독론을 배웠다. 서양철학사, 4복음서, 해방신학에 관심이 있으며 종교 간 대화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제주시에서 가족과 살고 있다. 《슬픈 예수》 《행동하는 예수》 《교황과 나》를 썼고, 《해방자 예수》 《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를 번역하였다. 공동 집필로 《교황과 98시간》 《쇼!개불릭》 《지금, 한국의 종교》가 있다. 〈가톨릭프레스〉 초대 편집인이었고 해방신학연구소를 만들어 소장으로 있다. 팟캐스트 “쇼!개불릭”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