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않는 비극의 역사는 반복된다 했다.
역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고, 잊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잊어야 하는지는 우리의 몫이다.
조선의 멸망은 외부의 요인과 내부의 요인이 있다. 지난 100여 년 간 우리의 시각은 외부에 대한 원인이 더 우세했다.
제국주의가 요동치던 세계사적 입장에서 볼 때 약소국인 조선은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선 역시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어느 강대국에 의지해야 할 것인가가 임금과 신하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조선의 붕괴 원인은 내부의 원인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그의 저서인 ‘김대중 옥중서신’에서 “고종 등극부터 일청전쟁(1894년)까지의 30년은 황금의 기회였다. 일본은 감히 한국을 병탄할 생각은 못하고 한반도가 청국이나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중립적 입장을 취해주는 데 최대의 기대를 거는 형편이었으며 영·미·독·불 등도 모두 같은 태도였다.
당시 우리만 제대로 나라를 이끌고 갔던들 러·일·청·영 4대국을 적당히 견제 작용해서 태국과 같은 중립적 완충 국가로 독립을 능히 보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라며 “조선왕조의 망국은 어떻게 보면 자멸이라 할 임금과 집권층을 잘못 만난 인재였다”고 말했다.
무능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덕수궁 안에 6개의 건물을 신축했다고 덕수궁 안내판에는 기록되어 있다. 나라는 망해 가는데 왕은 궁궐을 짓는다.
답답하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럴 돈이 있으면 대포 등 신무기를 구입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겠는가?
하수구가 없어 서울은 악취를 뿜어내는 데도 정비하려 들지 않았다. 무능했다는 결론이다.
신하들은 어찌 했는가.
개화파 윤치호는 군부대신을 지낸 아버지를 평하기를 "관직을 지키려는 욕심이 너무 커서 아무 수치심이 없었다"고 했고,
"왕이나 위정자들에게서 애국심이나 명예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고 일기에 써 놓았다.
망국의 날인 8월 29일에도 나약한 임금 순종은 훈장을 수여하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완용등 고관대작들은 그 며칠 전에 훈장을 이미 받아 놓았다.
나라가 없어지는 판국에 훈장이 무슨 소용이었을까? 그것은 일본으로부터 연금이나 하사금을 받는 데 필요 했다고 한다.
나라를 팔아서 자신의 안위를 챙기자는 수작들이었다.
권력 주변의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동학당의 일부와 서자로 설음을 받던 송병준 등은 일진회를 만들어 쓰러져 가는 나라의 권력을 놓고 양반과 다툼을 벌였다.
나라가 망해서 없어졌는데도 무슨 정치를 하며, 그 권력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왕과 신하는 애국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비 상태였다.
왕이 무능하니 간신들의 무기인 시기, 모함, 견제가 먹혀들어 능력과 도덕성과 실력을 갗춘 인재들이 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가 없다.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무능한 임금과 애국심이 없는 신하뿐인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도 의식과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아직까지도 일본 탓만 할 수 있는지 되집어 보자.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들을 반성하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집중해서 연구하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해야 할 때 인 것이다.
사회문제도 내가 못사는 것이, 내가 실패한 것이, 다른 사람의 탓이요, 제도의 탓으로 생각 할 때, 결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를 생각하고 실천할 때 사회와 나라는 발전 할 것이다.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고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국민 스스로가 깨어 있어야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지금은 한.미 동맹을 더욱 굳건히 다져 자유민주주의를 유지 발전 시킬 때이다.
한.미 동맹이 굳건할 때 만이 중국도 일본도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할 것이다.
모든 정치인들이 명심 또 명심하기 바란다.
사람은 스스로를 모독한 다음에야 타인으로 부터 모독을 받는다는 문구는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포천문화원 부원장
포천신문 고문
이 중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