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東歐의 聖地 프라하
체코 국경지대는 아직도 회색빛으로 보이고 국경에서 통관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들도 사회주의 군복차림에 딱딱하고 경직된 자세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입국하는 승용차 트럭들이 즐비하게 서고 우리가 탄 관광버스로 국경경비병이 올라와 여권을 몽땅 회수해 가버렸다. 독일어도 영어도 서투른 유고기사가 왔다갔다 하지만 빨리 통관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를 인솔하는 여행사 가이드 아가씨는 이곳이 초행이라면서 “어둡기 전에 빨리 프라하로 들어가야 예약된 식당을 찾아갈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하지요”라고 안타가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이제껏 버스 안에서 분위기주도권 싸움을 하던 이들도 아무 말이 없고 서로 처다만 보고, 야전에 세워 논 간이 화장실마저 잠겨져있다. 나는 여기까지 관망하고 있다가 결국 버스에서 내려 국경사무실로 찾아가 패스를 살짝 보여주고, “나 한국에서 관광 온 인터폴 켑틴인데 당신들 화장실 좀 사용합시다. 도대체 관광객들에게 화장실 문까지 잠겨 놓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요”라고 호되게 영어로 따지면서 “프라하로 구경 가는 관광객들을 이렇게 붙들어 놔도 되는 거요, 당신들 책임자가 누구요.”라고 강하게 항의하자 책임자 되는 경사가 나와 거수경례를 절도 있게 하고 나서“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바빠서 그렇게 되어 죄송합니다. 곧 통관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한 후 경비병이 여권 뭉치를 가져오고 우리가 탄 버스는 통과되었다.
나는 60년대의 영화 데보라카와 율브린너 주연의 <旅路>가 생각난다. 소련연방 국경에서 자유세계로 탈출하려는 (데보라카와 그의 남편)오스트리아인과 소련군 수비대 소령(율브린너)사이에 있었던 묘한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버스 안 분위기 이상해졌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온갖 자랑을 다 꺼내놓고 주도권 싸움을 하던 분들이 내 눈치를 보기시작 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자랑삼아 털어내 논 것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누군가의 입에서“우리 일행 중에 국제경찰 높은 사람, 인터폴 켑틴이 있어서 국경을 쉽게 넘었대.”라고 둘러서 경계하면서 감사의 말을 흘리고 있다.
점점 어두워 가는데 겨우 프라하 거리에 들어섰다. 모두들 시장기를 느끼고 있는데 우선 예약된 식당을 찾아가다가, 버스기사가 식당으로 가는 길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고 대형차량 출입금지구역으로 들어가 차를 세우게 되었다. 언제 알고 왔는지 교통경찰차가 달려와 교통위반을 했다고 딱지를 떼고 벌금을 물리려고 버스기사를 연행하려는 것이다. 일이 난감해졌다. 버스안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집중되고 서슴없이 “어떻게 해결해주셔야지 않겠습니까?”라고 애원하는 부탁이다.
나는 60년대 미8군 後方司 대구 캠프헨리에서 카투사 헌병대장을 지내면서 미군들과 같이 근무하면서 짧은 영어회화와 교통경찰업무에 대한용어와 지식을 조금은 알고 있다. 이때를 위하여 라고 하는 마음을 다져 먹고, 버스에서 내려 프라하 교통경찰에게로 다가갔다. 예의 패스를 잠간 보여주고 물론 영어로 “당신들 수고 많소. 나, 한국에서 휴가차 프라하에 관광 온 이런 사람이요.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기사가 이곳 지리에 서툴러서 길을 잘못 들어 선 것 같은데 나를 봐서 우리일행이 저녁을 아직 안 먹었으니 한번 선처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역시 국제경찰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떡이면서 뒤쪽 차에 있는 누구에게 보고를 하더니 책임자 상관이 내게로 왔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인사를 건네면서 “전 일 밤 2002 월드컵 한국과 폴란드전을 보았느냐”고 우리나라가 첫 번 상대로 폴란드에게 이긴 것을 상기해 주었다. 왜냐하면 “체코가 동구대표로 나갈 것인데 그만 폴란드에게 졌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갚아주었다. 언제든지 한국에 와서 나를 찾으면 기꺼이 도와주겠다”라고 대화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 했는데, 그대로 라면 벌금 천불정도를 그들에게 집어주어야 해결된다는 것이다. 나는 뜻밖에 일약 스타가 되었다. 버스 안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해주고 식당에 가니 체코인 식당주인이 허리를 굽혀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면서 저녁식사메뉴에 신경을 써주었다.
프라하의 아침, 위대한 체코의 종교개혁가 존. 후스(1369-1415)가 화형을 당하면서 복음의 불을 지폈던, 東歐羅巴의 聖地 프라하의 시가지다. 소비에트 연방의 위성국가로 전락하여 社會主義의 공산체제하에서 핍절하게 지내다가 그 휘장을 벗어 버린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사회주의의 회색빛이 악의 흔적처럼 이곳저곳에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체코의 국민적 음악가 드보르작(1841-1904)의 신세계교향악처럼 거리를 가득 매운 관광객들에게서 생기를 풍기고, 고색창연한 교탑아래 유유히 흐르는 프라하 강에는 유모레스크의 선율처럼 유람선이 평화스럽게 떠다니고 있다.
중세의 고풍이 짙게 깔린 시청 앞 광장에는 순교자 후스의 피가 서려있어, 이제는 무신론주의의 허상은 무너지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의 분위기가 넘친다. 나는 막연하게 관광차 왔지만 이곳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 줄은 이전에 미처 몰랐다. 유럽을 다 뒤져봐도 어쩌면 로마나 파리보다도 더 아름다운 곳이 프라하가 아니겠는가 싶다.
나는 육이오 전란을 심하게 겪은 세대라 체코에 대한 남다른 이미지가 있다. 전쟁 때 인민군이 매고 내려온 무기 중에 체코제 경기관총과 기관단총은 그 성능이 대단했던 것을 기억하고 1950년대 초 부산 미군 하야리라부대에는 체코와 폴란드 중립감시단 와있었다. 그 때 상황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중립국 감시단이 간첩행위를 했다고 부산시민들이 미군부대로 몰려가 “체코, 폴란드 물러가라! 체코, 폴란드 물러가라!”하고 대모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체코는 대단한 나라다. 사회주의 시절까지는 체코슬로바키아였는데 이제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었다. 세계 2차대 중에는 연합군이 다른 곳은 다 폭격을 하면서도 프라하는 너무 아름답고 동구라파의 성지라 공습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은 물론 유모레스크를 너무 좋아한다.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로마처럼 기독교 박물관이고 성지순례코스라고 볼 수 있다. 프라하강위에 놓여 진 해묵은 찰스교탑과 다리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像은 복음을 위한 예술품의 극치로 보여 진다.
로마나 다른 성지에서 느낄 수 없었던 동구의 중세문화로부터 엄숙한 중압감을 느끼면서 로마의 스페인광장에 버금가는, 바츠라프 광장에 들어서니 체코의 영웅 바츠라프의 기마동상이 살아 움직일 듯이 기풍 있게 서있다. 그리고 시청광장에는 체코 종교개혁의 순교자 존 후스의 동상이 서 있어 프라하의 거리는 한마디로 중세 기독교 예술품과 일찍이 발달한 금속기술의 일면을 보여주는 전시장 같다.
프라하의 날씨도 고약하다. 한국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탓인지 우리화폐를 그냥 받아주고 거리의 노점상들도 한국말을 건네면서 호객을 한다. 며칠을 두고도 다 못 볼 곳인데 시간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구의 신사 대통령이 집무하는 고전적인 대통령궁을 찾았는데 요즘은 하벨 대통령의 인기가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년 전에 대통령이 사별을 하고 새로 재혼 했는데 미모의 젊은 영부인이 사치가 심해서 체코국민들이 싫어한다는 것이다.
舊시가지와 카를다리의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의 像과 여러 가지 聖像을 보고, 많은 전포들이 건물 안의 좁은 곳에 모여 있는 迷路같은 황금소로를 구경하고 나오니 프라하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내일은 다시 체코의 국경을 넘어 독일로 갈 예정이다. (2006년 2월 8일 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