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 김기명
조회 : 9 |
농업협동조합 운동과 이상농촌건설에 바친 일생
전남 고흥군 금산면 단위농협 조합장 박 종 안
1. 어린 시절과 나의 인생관
제가 사는 고장은 고흥반도에서도 최남단인 녹동 항에서 국립나병원이 있는 소록도를 지나서 뱃길로 30분 가게 되면 도서 면인 금산이 있습니다. 이 섬은 옛날 거금 도라고 했으며, 우리나라 도서 중 일곱 번째로 큰 섬이라고 합니다. 총면적 60km² 인구는 2만 명이며 경지면적은 밭이 1,260정보, 논이 426정보밖에 안 되는 전작 지대이며, 농산물은 주로 보리, 고구마 등이며, 쌀은 연간 4천여 가마를 외지에서 사먹고 있습니다. 해산물로는 김 주산지로 되어 있으며, 연간소득은 농산물이 10여억 원이고 해산물도 10여억 원 되는 반농반어의 고장입니다. 그리고 이 고장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국창(國唱) 고 김연수 선생, 그리고 프로 레슬러 김 일 선수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합니다.
가. 일본유학
저도 이 섬에서 태어났으며 12대조까지 묻혀있는 고장입니다. 어린 시절의 이 고장 사정을 살펴보면 당시는 개간도 거의 되지 않아 경지면적이 더욱 협소하였으며, 영농방식도 지극히 원시적이었으며, 빈곤의 테두리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늦은 봄이 되면 풋보리를 베어 볶아서 풋대 죽을 쑤어 먹는가 하면 늦여름이 되면 덜 자란 고구마를 캐어 먹고, 김이 생산되면 식량을 사다 먹고, 초봄이 되면 해초류를 말려, 많은 사람들이 이고 지고 바다건너 육지에 나가 문전결식하다시피 식량과 환매하여 먹고사는 그야말로 참으로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저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사시는 숙부님의 덕분으로 일본 대판부립농예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동안 민족적 천대를 많이 당하였고, 또 많이 보아왔으며 조국 없는 서러움을 통감한 어린 시절의 나는, 이를 악물고 노변의 풀처럼 굳세게 살아가며 조국을 되찾을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의 나의 애국 관, 민족 관을 길러주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라서 젊은 사람은 거의 전쟁터에 나가 없고 농촌에는 40 또는 50세 되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으나 그래도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온상육묘를 하여 오이, 가지, 토마토, 호박 등을 풍성하게 가꾸어 대판시장 출하규격에 의하여 포장하여 자기 집 앞에 놓아두면, 그곳의 협동조직인 「신용구매판매이용조합」이라는 긴 간판을 붙인 조합에서 「트럭」에 실어 시장에 보내 팔면 그 대금은 신용구매판매이용조합에서 청산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여가가 나는 대로 과수원, 양계장, 농사시험장 등을 찾아다녀 보았으며, 하기방학 때는 직접 농가에 들어가 일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 농촌을 알고 보니 그 어려웠던 내 농촌과 비교해 볼 때 무척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이러한 것을 보고 느낄 때마다 차근차근 나의 가슴 한구석에 쌓이게 되었고 생을 농촌에 태어나 뼈를 농촌에 묻힐 사람으로서 내 고향에 밑거름이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하였고 이것이 곧 나의 일생의 진로를 결정짓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5년간의 학교생활을 마치게 되었으며, 졸업논문을 쓸 때 먼저 이상농가를 꾸며 보고, 교육생활, 문화생활, 다음에 사회봉사의 순으로 꾸며 내 일생을 설계하였으며,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한 때도 변하지 않고 실천해 왔으며 이것이 오늘까지의 내 인생의 전부인 것입니다.
나. 이상농촌건설을 위한 무언의 지도
이렇게 생각한 나는 졸업과 동시에 곧 귀향하여, 먼저 자립한 이상농가를 만들어 남의 모범이 되고, 이웃 사람들이 보고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는 무언의 지도이념을 세워 이를 실천하는 뒷받침으로 당시 녹동금융조합 금산지소 서기로 취직을 하게 되었으며 6km나 되는 곳을 11년이나 통근하였습니다. 당시 나이 19세였는데 먼저 착수한 사업이 미리 예정해 두었던 마을 뒷산에 있는 중부님의 임야를 환지하여 개간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개간이란 것은 거의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뒷산에 나가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나무뿌리를 파고 떼 뿌리를 파내고 괭이로 돌을 캐는 힘겨운 일을 하다가 시간이 되면 출근해야 했고, 근무 중에는 잘 졸기도 하여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끝나면 바로 퇴근하여 개간 작업을 하여 직원들과 어울리지도 못하였고 일반인들에게서 미친 짓한다고 손가락질 당하기도 하면서 2년에 걸쳐 3,000평을 개간하였던 것입니다. 이 개간지에 먼저 감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조성하였고 한편 온상육묘 하여 고등원예도 재배하여 상품화하는 등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금융조합을 그만두고 직접 영농에 투신하여 양계, 한우, 양돈, 양봉, 양어 등 그야말로 학창시절에 배웠던 다각농업경영체로 이끌어 자립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 과학영농
영농을 착수하면서 지금까지 영농일지를 기입하고 있으며, 매년 구정 초 한가할 때 영농일지를 정리하고, 이월 된 해의 결산과 신년도의 영농계획을 수립하여 전년도의 불합리한 점을 보완하는 데 노력하여 차질 없는 계획실천에 힘쓰고 있으며, 매월 초에는 일별 실천계획을 세워 영농을 더욱 충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편 자연을 상대로 하는 영농은 기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고 간이 기상관측시설을 마련하여 최고, 최저, 평균기온, 강우량, 강상, 강설, 초상, 만상 풍속 등 20여 년간에 걸쳐 조사하여 이 지역 기상사정을 알게 되었으며 한편 동절기 중 고기압의 형성 여하에 따라 (겨울동안 몽고지방에 1,040mm 이상의 고기압이 발생하면 대체로 2,3일 이내 한파가 닥쳐 옴) 한파가 오는 것까지 예측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영농에 많은 도움이 되는 한편 이 지역의 특성을 살려 안심하고 판매할 수 있는 밀감, 파인애플도 재배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4,5월 출하할 수 있는 조생양파 작목을 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지역과 연관성 있는 농산물 시세조사를 10여 년간 실시하여 유리하게 판매할 수 있는 작목생산과 출하시기조절 등 생산과 판매에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라. 지역특성에 알맞은 밀감 개발
이렇게 하여 과수원이 성수기에 들어가서 많은 생산이 되고 보니 다음 벽에 부딪힌 일이 판매문제였던 것입니다. 배(梨)라는 것은 먹으면 시원한 감이 납니다. 당시 배의 수요를 살펴보면 고온 기에는 수요가 많아 조생 배는 겨우 제대로 판매하였으나 추석이 넘어 냉기가 접어든 때는 수요가 격감되어 많은 만생계의 배는 판매가 잘 되지 않았고 특히 낙도의 사정도 있어서 판매에 무척 어려움을 당하는 반면 경영면에 문제까지 있어 고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민 끝에 기상조사 결과 당시 5년간에 걸쳐 최저기온이 영하 6℃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일본에서 본 밀감이 (감귤류 중 온주밀감을 말함) 이곳에서도 될 수 있지 않을 것인가 하고 생각되어 거기서 깨달은 것이 선조가 물려주는 이 지역 특성을 살려, 생산된 것을 앉아서 마음 놓고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을 생산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밀감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 고장에 일제 강점기 밀감을 먹고 버려서 나온 실생묘가 자라서 매년 많이 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웃면에 일본사람들이 심어두었던 밀감나무 몇 그루가 결실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바로 쫓아가 확인하고 접수를 하여 탱자에 접속하여 약간의 묘목을 가지게 되었고 일본에서 전문서적을 구입하여 공부하면서 시험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1959년 전남도청으로부터 일본산 밀감묘목 100여분을 공급받아 재배에 착수하게 되었고 그동안 문전 비옥한 밭에 탱자나무를 심어 묘를 기르게 되었는데 모두들 일본까지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더니 숙전에 가시나무를 심었다고 미친 사람이라고 수군거리기도 하였으나 묵묵히 희망을 바라보며 일해 왔습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니까 그 보람이 나타나 64년도부터 결실이 되어 가을에 노란 밀감을 볼 때 참으로 기뻤으며 미쳤다고 말했던 마을 사람들도 기적을 낳았다고 칭찬하며 이 지역에서도 밀감이 재배된다는 것이 인정되어 밀감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내 자신도 20년 가까이 가꾼 배, 복숭아 등을 베어버리고 밀감으로 대체하였고 그야말로 미래를 위한 일대용단인 것이라고 지금도 다시 생각납니다. 한편 66년도부터 원예시험장 김해지장으로부터 남해안 밀감 내한성 시험포를 저희 농장에 위탁 실시하여 7년간을 시험하였던 바 남해안밀감 내한대책의 방안이 결정되기도 하여 남해안지대의 밀감개발에 선도적 역할이 되었다고 자부하겠습니다. 한편 밀감묘목 구입 차 65년도에 제주에 갔을 때 서귀농고 온실에 파인애플이 결실한 것을 보고 이것도 내 고향에 개발 작목으로 재배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66년 이곳 국회의원인 신형식 의원이 일본에 나가게 된 기회에 묘목을 위탁하여 신 의원께서 뜻한 바 있어 500본의 묘목을 가져오셔서 이것을 정성껏 가꾸어 성공을 보게 되었으며, 67년도부터 수확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밀감 2정, 파인애플 철제하우스 250평, 일반농사 3정, 한우 3두, 양돈 20여두 규모의 영농을 하고 있습니다.
2. 농촌운동과 농협운동
가. 농촌연구회
이렇게 하여 산을 개간하여 과수원을 마련하고 내 자신 자립의 토대가 마련되자 나 혼자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 지역개발을 위하여 농촌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러기 위하여 동조자 7명으로 47년 봄 「농촌연구회」를 조직하고 도로변에 방 한 칸을 마련하여 간판까지 걸었습니다. 운영 면에 있어서는 매주 토요일 밤에 집합하여 전주의 반성과 내주의 사업 토의를 하면서 우선 회원의 자기완성과 자립을 목표로 원예 사업에 역점을 두고 실천하였던바 성과를 거두게 되었으며 이것이 기본이 되어 온 마을에 파급되어 이 지역일대에 채소를 완전 공급할 만큼의 원예단지까지 개발되기도 하였고 한편 영농기술 지도까지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1) 보리 파종시기별 전시포 운영
이 고장의 주작인 보리파종 적기를 알아야 해서 노변에 밭을 빌려 10월 10일부터 10일 간격으로 11월 20일까지 5구로 파종하여 전시하였던 바 광주지대보다 10여일이 늦은 10월 25일 경이 이 지역의 보리파종 적기임을 알게 되었으며 일반도 이에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2) 보리 파종 율 전시
이 고장은 산물의 전체가 환금되는 해태(김)에 치중하고 따라서 자급도 부족한 보리는 너무 등한시하고 조방재배를 하고 있어 이를 시정하고자 이것 역시 도로변에 밭을 빌려 3할 파종 율, 4할 파종 율, 5할 파종 율, 6할 파종 율 등으로 나누어 전시하였던바 결국 5할 파종 율의 광파 식 재배법이 유리하다는 것이 인식되어 경종방식을 개선하게 하여 다수확을 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타 보리 시비개선 전시포를 경영하여 시비 지도를 하기도 하였고 한편 유축농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마을에 양돈 계를 조직하여 자돈을 금융조합융자금으로 공동구입하여 공급하는 등 부락개발에 힘써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순반란사건이 있었던 후부터 집회금지 등 난세에 따라 중단하고 말았습니다만 이 지역개발에 많은 자극을 던져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 후계자 양성을 위한 청소년운동
어느덧 세태도 다시 정상으로 회복되어 다음으로 착수한 것이 「향진회」라는 청소년운동인 것입니다. 당시 초등학교를 나온 10대 청소년들의 모습을 볼 때 경제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어 진학은 못하고 나날을 어정거리며, 겨울밤이면 사랑방에 모여 나쁜 짓들을 하는가 하면 여름철 밤이면 처녀들 뒤나 따라 다니며 희롱하는 등으로 허무하게 보내고 있는 것을 볼 때 어린 나이의 이 시절이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시절인데 이처럼 허무하게 보내고 있는 청소년들의 장래가 너무 불쌍했고 미래의 농촌 후계자양성을 위해서라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처음 16명이 모여 「향진회」를 조직하여 중학과정 교과서로 야간교육을 꾸준히 시키는 한편 때에 따라 마을 봉사 작업에도 점점 참여하여 마을청소년 36명이 모이는데 장소가 좁아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매년 음력 설날이면 첫 새벽에 일어나 마을 안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깨끗한 설을 맞이하는 한편 오전 중에 세배를 끝마치고 오후에 부형들과 같이 모여 지난해의 회고와 새해의 희망이라는 작문 발표회를 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모든 회원들이 금년에는 우리의 힘으로 회관을 마련하겠다고 하자 부형들도 안타깝게 생각하여 초 3일부터 시작한 매굿(농악)에서 마련한 자금을 향진회 회관건축에 사용해 주셨고 마을 산주들에게 나무 몇 그루씩 희사 받아 17평짜리 회관을 마련하게 되었고 더욱 활발히 운영해 오다가 4H 클럽으로 개편되었고, 전국 업적경진대회 때 2위까지 한 바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마을지도자인 새마을지도자, 이장, 협동회장, 어촌계장, 총대 등을 모두 옛날의 향진회 회원들이 맡고 마을을 잘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제와서 옛날의 정성에 보람을 느끼며 오늘날의 이 사회 도의문제도 청소년을 잘 육성시키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다. 농촌운동과 지도이념의 변화
그러는 한편 농촌진흥은 지도사업만으로 이룰 수 있다는 신념아래 옛날 진공관식「앰프」(확성기)를 마련하여 「배터리」와「앰프」를 지게에 지고 조석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 시기별로 농사지어도, 정신계몽을 하고 철에 따라서 이웃마을까지 외치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면단위 농촌진흥회를 조직하여 면장, 지서장들과 함께 부락별로 순회하면서 지도사업을 하는 등 무척 많은 노력을 다해 보았습니다만 57년도의 해태와 보리의 대흉작으로 매일 자고 나면 「된장 퍼갔네, 장 퍼갔네, 아무개 곳간 털어갔네」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저의 부락에서도 아사자가 2명이나 나는 등 그야말로 전전긍긍할 정도로, 참으로 어려웠으며 당시는 이 참사에는 누구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저의 지도이념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앓아 누워있는 사람에게 위생적인 지도만으로 나아지지 않으며, 당시 만병통치격인 페니실린 주사라도 놓아 치료해 주어야 하지 않을 것인가! 교민(敎民)이 앞서야 하는가? 양민(養民)이 앞서야 하는가? 하는 문제점에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농촌진흥은 지도사업에 앞서 경제사업이 더 앞서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경제사업을 주도하는 농협운동이 보다 더 시급하다고 생각하였고 직접 농협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라. 농협운동과 그 보람
협동조합하면 먼저 일본에서 보고 느꼈던 신용구매판매이용조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농협의 전신인 지도식산계를 동정리농업협도조합으로 개편 조직하여 조합장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구매사업부터 시작하였으며 탈곡 조타면 등도 시설하여 협동이 잘 되었고 면모가 갖추어지자 62년에는 이웃 4개 부락을 합병하여 265명의 조합원을 가진 조합이 되었으며 「전 조합원에게 「앰프」시설까지 하여 지도사업에 활용한 바도 있고 동력산분무기 4대를 구입하여 구역 내 병충해의 완전공동방제 등도 실시하여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초창기 리단위 농협운동을 수년간 이끌고 나오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을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보리증산과 인심
동정 지도식산계 때부터 탈곡기를 마련하여 보리탈곡을 마을전체 공동 탈곡으로 5년간 실시하였던바 250가마에서 물보리 때 400가마를 초과하지 않았으며 생활은 비참의 연속이었습니다. 동정농협이 조직되자 그해 보리 밑거름을 신청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유안만이 금비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질소 편중의 시절이었으며 민수비료와 관수비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맥기비 공동구입시 유안 량에 적당비례로 과석과 가리비료를 구입하여 무조건 공급하였던바 다음해 59년 보리수확량이 거의 배인 700가마나 수확되어 식량 문제가 해결되고 보니 그처럼 어려웠던 인심이 따스한 날 눈 녹듯이 풀려 나갔으며 이것이 전 면내에 소문이 나게 되었으며 다음 해인 59년도에는 어협에서 해태대금을 정산할 때 전면에 과석을 사다 공급하여 전면적으로 보리 배 증산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 섬에서는 그 당시 도둑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 오늘날까지 도둑맞았다는 말을 들은 바 없을 정도이면 농협운도 중 가장 잊히지 않는 흐뭇한 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자가발전과 소득증대
이 고장은 반농반어지대이며, 그중 해태는 면 단위로서는 전면적으로 월등히 많이 생산되는 곳이며, 해태는 엄동설한에 낮에는 바다에서 원료를 채취하여 야간에 호롱불과 촛불을 켜 놓고 점치다시피 원료를 선별하여 좋은 품질의 해태를 생산하면 가격에 많은 차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장의 소득을 높이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해태 품질개선을 위한 자가발전을 시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시설을 할 때 처음 어렵게 마련한 자체자금 100만원으로 착수하였습니다만 기술면이나 자금 면에 무척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한 때는 법적문제까지 될 직전에 할 수 없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를 매도하려고 하였으나 그 처지에 있는 토지를 누구도 사려고 하지 않아서 진학중인 장남을 불러 유언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가사일체를 맡기는 일까지도 있었으나 다행히 여러 사람들의 따뜻한 협조와 조합원들의 단결된 협동으로 그 어려움을 모면하게 되었고 결국은 300여만 원을 들여 3,300V의 고압으로 8개 부락에 2,000여 동까지 전등을 켜게 되었습니다. 그 편리하고 유익한 것이 면내 전체에 파급되어 결국 7개 이동조합에서 자가발전을 시설하게 되었고 농협의 자가발전으로 면내 70%까지 전기의 혜택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매사가 순조롭지만 않았습니다. 67년 1월 어느 날 밤, 태풍과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고압 전주가 넘어지면서 초가지붕에 고압 전선이 걸쳐져 화재가 나자 일가 5명이 뜰에 늘어져 있는 전선에 감전되어 사망하게 되었고 이웃집 큰 애기도 이 전선에 감전되어 6명의 감전사고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그날 출타하였다가 다음날 아침 첫 배편으로 돌아와 보고 이 비보에 접하여 허둥지둥 뛰어가 보니 집은 잿더미로 변하였고, 시커멓게 타죽은 사체를 멍석으로 덮어 둔 것을 보았을 때 매우 비통하였습니다. 이 지역개발에 밑거름이 된다고 나서서 일하여 온 결과가 이처럼 되고 보니 인생의 허무감에 잠겨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수, 서장님들께서는 그 낙도에서 애써 일하다가 참변을 당하였는데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저렇게 농촌에서 일하겠는가 하고 애써 주셨습니다. 덕분에 사건을 무사히 수습하게 되었고 조합에서 집을 지어 주고 남은 자녀 결혼까지도 돌봐주는 어려운 시련을 겪었으나 이 낙도에 한전이 들어오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시설을 완전 보수하여 다시 송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농협운동에 경합자이고 또 가장 친한 친구였던 우두리 농협조합장이던 고 김기석 조합장도 자가발전에 의한 자금난으로 병들어 순직까지 한 바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은 발전 사업으로 주민들은 더욱 안전한 전기를 갈망하고 있던 차 67년도에 박대통령각하께서 이 지역 순시 시 이 딱한 사정을 건의하여 각하께서 곧 한전 기술진을 보내셔서 한전을 가설하게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제일 멀리 월강되어 동력선까지 면내 95%가 한전 전기의 혜택을 보게 되었으며, 해태품질개선에 의한 소득도 1억 원을 추산할 때 농어촌 전화 사업으로서 우리 고장이 제일 많이 혜택을 보고 있다고 생각되며, 다시 한 번 각하에게 단좌 합장하여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마. 부락개발사업
농협사업을 이끄는 동안 우리 마을(동정) 개발 사업을 소개말씀 드리자면, 먼저 해방과 동시에 산림이 남벌되어 비가 올 때마다 홍수로 전답이 유실되어 이 막대한 손실을 막기 위하여 마을 뒷산 250정보를 부락자체간수를 두어 보호하고 밤나무 3,000여 주를 심고 조림하였던 것이 이제는 울창하게 자라서 홍수피해를 전혀 모르고 사는 고장으로 되었습니다. 다음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마을회관이 좁아서 회의 시 단합이 잘 되지 않아 25평 현대식 슬래브 콘크리트 회관을 62년도에 금산면에서는 제일 먼저 신축하였으며, 사라호 태풍 때 많은 해태채취선(소형목선)이 파손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64년도부터 2년에 걸쳐 1,000여만 원 상당의 선착장을 겸한 선유장을 완전자력으로 완성하게 하였는데 연 9,000여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67,68년도에는 보 시설 보조로 양곡 5t 받은 것을 기본으로 상수도, 해태용수, 농용수를 겸한 다목적 「댐」을 만들었고 3년에 걸쳐 70년도에 여과지, 배수지를 갖춘 완전상수도를 시설하여 연재 120호 전호에 수도를 시설하여 도시 못지않은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상수도를 3년에 걸쳐 완공하는 동안 한때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락민의 원성도 많이 받아 한때는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을 개발사업은 거의 새마을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되었으며 새마을사업으로는 주로 농로개설과 소득증대 면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3. 면단위 농협활동
이상과 같이 이 단위의 영세한 조합을 10여 년간 경영을 해 보았으나 규모가 작으니까 협동은 어느 정도 잘되는 편이었으나 경영면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규모에 따라 성장에 한도와 제한을 받게 되고 따라서 경영의 불합리를 초래하여 조합원들로부터 불신을 받게 되고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아도 성장에는 그 여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69년 단위농협 경제권을 중심으로 한 면단위농협으로 합병 방침이 세워지자 미래를 위하여 재빨리 합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우리 농촌에는 씨족 또는 권력 파벌이 있어 마을육성에도 많은 애로가 있었는가 하면 면단위로는 지역적으로 인위적 장벽이 있어 지역개발에 반대가 서로 맞서 많은 애로가 있었습니다. 우리 면도 예외가 될 수 없이 동부, 서부로 갈라져 있어 농협을 면 단위로 합병하자고 하니까 「묻지 마라 갑자 생…….」. 동부조합, 서부조합으로 갈라지게 되자 동, 서부 각각 유지들에게 쫓아다니며 설득하여 결국 면단위조합으로 합병하게 되어 제가 다시 조합장으로 추대를 받아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동부에 살고 있고 사무실은 서부에 있으니까 동부의 일부인사들은 “ 저 자식이 조합장 해 처먹으려고 이완용같이 동부를 팔아먹은 놈이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앞날을 잘 본 것이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소단위 농촌운동에서 대단위 농촌운동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합장으로 취임하면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운영의 기본방침을 몇 가지 세웠습니다. 첫째, 믿게 일하고 믿음 받는 조합으로 만든다. 둘째, 주종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최대 봉사하는 조합으로 만든다. (주인인 조합원에 대하여 조합장은 큰 머슴, 직원은 작은 머슴 격으로) 셋째, 지도생산의 특색조합으로 육성한다. 위와 같은 방침과 신념으로 농협목적인 조합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하여 5년여에 걸쳐 꾸준히 일 해오면서 느낀 결과를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가. 역점의 지도사업
이 고장은 반농반어의 곳입니다만 농산물은 대부분 자급되고 수산물은 전량 환금되고 있고 부족한 식량도 수산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경농중어(輕農重漁)하는 경향이 짙어 농협으로서는 먼저 중농중어하는 방향으로 지도사업에 역점을 둘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중대한 문제를 시정하기에는 우리 농협의 힘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되어 「달라고 하지 않고 주고만 다니고 있는」농촌지도소와 합세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고장에서는 농촌지도소가 없고 출장지도하고 있어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농촌지도소를 유치해야겠다고 생각하여 군 당국과 협의 하에 농협에서 사무소를 마련하여 지도사 2명이 상주하는 금산농촌지도소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기동력인 오토바이까지 배치 받아 농협과 일체화된 지도사업으로 경종, 비배관리의 개선 및 농용자재의 적종 적기공급을 도모하는 한편 병충해방제를 위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각 부락에 나가 지도방송을 하는 한편 농협에 입하된 농약 기타자재 안내를 하는 등 지도사업으로 특효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농협사업도 이중효과를 거두게 되는 것을 볼 때 일선 면단위에서는 농촌지도소와 농협이 일체화되어야겠다고 생각되었으며 이것이 제도화 되어야겠다고 도 생각합니다. 다음은 전 직원의 농업기술요원 화를 위하여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지도사업을 위한 각종 홍보기자재인 확성기, 대형녹음기, 환등기, 「카메라」「지프차」까지 마련하여 지도소직원과 같이 시기별로 가두방송, 부락순회지도 등으로 새마을 정신계도 농사기술지도와 농협사업 홍보 등을 계속하였던바 먼저 조합과 조합원간의 밀착, 부녀회 활동의 촉구, 증산에의 직결 등 참으로 보람을 느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한 예로서 부인들을 농사작업 (특히 하절기의 호미제초)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관심을 집중시켜 전작에 대한 제초제와 그 사용방법을 지도하였던 바 전작지대인 이곳에서 서로 다투어 제초제를 사용하게 되었고 성력농업으로 부인들을 제초에서 해방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그 후 전체조합원의 힘으로 아담하고 말끔한 지도소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고 고흥군 농촌지도소 금산지소로서 정식 인가받은 지도소가 마련되었고 직원도 충원되어 더욱 잘되고 있습니다.
나. 소득증대사업과 작목반
지도사업에 이어 직접 소득증대에도 참여하였는데 그 방향을 어떻게 하면 전체 소득증대를 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이 지역 특수성을 살리는 작목개발과 작목반에 의한 소득증대 두 가지로 나누어 실시하였습니다. 첫째, 전체면의 소득증대 방안에 대하여 전작지대인 이곳에서는 전작 증산에 역점을 두어야 하겠다고 판단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보리, 고구마의 종자갱신사업이 앞서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고구마 종자 갱신사업으로 우량품종인 수원 147호를 20여 가마씩 구입하여 조합공지에 인분 ․퇴비 등을 충분히 사용하여 70년도부터 3년간에 걸쳐 조합에서 직접 묘를 키워 생산된 모종을 각 부락 독농가에게 공급하였던바 재래종인 칠복종 보다 거의 배가 증산된다는 것이 인정되어 앞 다투어 종자갱신을 하게 되어 현재 80% 이상 갱신되었습니다. 또한 경종방법에 있어서도 맥 후작 고구마 다수확의 첫 요건인 조기삽식을 위하여 「비닐멀칭」육묘를 지도하여 전농가가 「멀칭」육모를 하게 되어 육묘용「비닐」만 매년 300~600통을 공급하는 등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 결과 71년도까지 절간고구마 매상실적이 2만 가마에 대금으로 45백만 원을 넘지 않았는데 74년도에는 매상실적이 3만 8천 가마에 1억 1천만 원이나 되고 보니 조합원의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되어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조합원들에게도 그 공을 인정받고 있으며 75년도에는 4만 5천원 가마 매상에 1억 5천만 원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보리종자 갱신사업인데 행정면에서도 수도종자 갱신사업은 역점을 두고 있으나 도서인 이곳 전작지대의 보리종자갱신이 극히 부진한 형편에 있고 또한 농민들도 해태에 의존도가 높아 도외시하는 바람에 더욱 종자갱신이 부진하였고 바람이 많은 이곳에서는 5월에 유숙기의 도복여하가 보리수확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므로 단간다수종인 「세도하다가」종을 농촌진흥원의 지도하에 대량구입․공급 갱신하였던 바 그 우수성이 인정되어 급진적으로 전면에 보리종자 갱신이 80% 이상 되어 보리증산에 획기적인 실적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실증으로 금산면 보리매상실적을 따져볼 때 70년도 이전까지의 금산면 보리수매량이 3천 가마를 넘지 않았는데 74년도 실적이 7천 6백가마나 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전체 증산은 무척 많았을 것입니다. 둘째, 작목반으로서 이 지역의 온난한 특수성을 살려 개발된 조생양파, 밀감, 마늘작목반을 육성지도하고 있습니다. 그중 조생양파는 일반양파보다 1개월 이상 수확을 앞당기는 양파단기출하를 목표로 68년도부터 시험 재배하여 성공하자 면단위로 합병과 동시에 70년도부터 작목반을 조직하여 종자, 자재 전체를 공급하여 재배하였던바 생산은 잘 되었으나 시장개척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71년도에는 제주산과 경합하여 판매에 손해를 보게 되어 무척 어려움을 당했으며, 다음 참가 인원이 많이 줄었는데 72년도에는 풍작에 품질개선도 되어 잘 된 사람은 평당 6백 원까지 소득을 내는 사람도 있게 되자 다음에는 다시 참여 희망인원이 너무나 많아 이를 억제, 80여명으로 조정 재배하게 하였습니다. 73년 4월 상순부터 엽부양파로서 서울에 출하하여 제주산을 제압하여 유리하게 판매되자 전 조합원의 주목대상이 되었으며, 다시 참여인원 증가에 따라 계획생산과 계획출하를 위하여 인원조절에 고심하여 다시 100여명으로 조정, 재배하게 하였습니다. 74년도 판매는 조기출하 하면 유리하게 판매된다는 예상에서 오는 경합출하에서 오는 손실을 막기 위하여 10일 단위 대금 풀(pool)제 정산을 하여 판매를 유리하게 이끌어 1,900여만 원의 판매실적을 올리기도 하여 이 지역에 각광을 받는 작목으로 육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외 마늘판매도 녹동시장에서 자유판매에서 많은 낭비와 손실을 보게 된 것을 이제는 이 섬에서 완전 판매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밀감작목반도 이제는 성공하여 맛좋은 밀감 만들기 운동과 기술교육, 농협저장고시설에 의한 저장, 골판지 포장판매실시 등 사업에 애로는 많았으나 밀감재배의 붐이 다시 일어나고 있어 농협운동을 통하여 조합원 소득증대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 새마을훈장과 철강도선
74년 3월 5일 경제동향보고에서 저의 반평생을 농촌운동에 바친 지난 과정이 박대통령각하에게 보고되어 새마을훈장을 받았고 75. 5. 16.에 5.16 민족상의 대상까지 받았으며, 남은 인생을 더욱 성실하고 열성껏 지역사회의 개발에 봉사하여 각하의 은총에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새마을훈장을 받을 때 이 고장 발전에 가장 갈망하고 있는 철강도선을 지원해 주시도록 건의하였던바 각하께서 그 긴요 성을 인정하시고 천만 원이라는 유례없는 많은 돈을 하사해 주셔서 3천 5백만 월을 들여 사람 2백 명과 「트럭」2대를 동시에 실을 수 있는 70t급 철강도선을 신조하여 농협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도선을 운항하고 보니까 지금까지 없었던 「트럭」이 매일 5,6대씩 화물을 싣고 드나들게 되었고 금년농산물 출하만 보더라도 150여대가 이 도선으로 반출되었습니다. 왜 농협에서 도선건조 이야기가 나왔는가?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할 것입니다만 오늘날 농가소득증대에 있어 증산 다음 판매여부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농협에서 판매를 담당하고 보니까 이러한 문제가 절실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 고장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산물은 녹동시장에 나가 중간상인들에게 헐값에 팔고 견물생심으로 긴요하지도 않는 상품까지, 또한 주식 등의 낭비에 시간의 허비 등 빈 손으로 돌아온 것이 일쑤였고 이 고장이 못 산다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생산과 소비를 직결시켜 유리 하에 판매하는 것이 소득증대에 직결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고 모든 물동이 자유롭게 유통되는 등 마치 육교역할을 맡고 있어 이 철강도선이야말로 이 지역개발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철강도선은 연간 3백여만 원의 잉여가 나고 있는데 농협에서는 도선특별회계로 경리하고 그 잉여금은 이 지역사회개발에 충당하도록 방침을 세워두고 75년도 잉여금은 면민의 숙원인 고등학교 부지매입자금에 충당하고자 합니다. 이리하여 각하께서 하사하신 이 배를 기리 보존하여 이 지역을 빛내고자 합니다.
4. 새마을사업과 농협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새마을사업이 온 국민의 지대한 관심 하에 성공리에 진행되고 있음은 민족중흥의 계기가 된다고 믿어지는 바입니다. 이 새마을사업의 성패는 분명히 이 민족의 흥망을 결정하는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사업임은 그 누구도 이론이 없을 것이며 우리 3천 5백만 민족은 모두 자각하고 성실히 참여하여 미래의 번영된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사명감에서 꼭 성공시켜야 하겠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10월 유신 이후 정신면이나 경제향상 면이나 환경조성 면에서 무척 좋아졌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 농촌 새마을운동을 냉정히 바라다 볼 때 환경조성사업에 편중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화합하면 움직이고 그렇지 않으면 정지하는 경향으로 번져간다고 생각할 때 매우 걱정되는 바입니다. 새마을운동은 반드시 자각에서 오는 자전의 영속화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새마을 지도자연수원은 바로 이 새마을운동의 자전의 영속화를 위한 새마을정신 혁명도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면에 있어 앞으로의 새마을운동의 방향은 먼저 새마을 정신혁명운동에 보다 더 역점을 두어야 하겠고 또한 강력한 힘으로서 총 진군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각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새마을사업은 잘살기 운동이며 따라서 소득증대사업을 위한 운동인데, 이 두 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한다면 풍요한 내일이 기약될 것이며 환경조성사업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소득증대사업은 정책의 강력한 지원 하에 자재의 적기공급과 기술지도로서 생산된 산물을 합리적인 유통과정을 통한 유리한 판매로서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이 과정은 행정부와 지도기관의 협조 하에 농협이나 어협에서 주도해야 하며, 따라서 소득증대사업은 농협에서 전담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소 문제되는 것은 관공서나 모든 기관은 그 대상이 동일한 농민인데 「네가 잘했다」「내가 잘했다」는 식의 공명심 때문에 유기적으로 일체화되지 못하고 불화하고 상호간 비협조적이어서 새마을운동의 방향이탈과 부진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든 지도자는 굳은 신념으로 새마을운동에 적극참여, 미래의 번영을 기약합시다.
5. 결언
저는 50평생, 인간은 공수래공수거 하는 법이며 성공이나 행복도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다고 믿고, 농촌운동을 신념으로 생활화해 온 저의 과거사를 말씀드리고 보니 마치 자랑이나 하는 결과가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되며 잘못된 점이 있더라고 관용하시고 더욱 많은 지도편달을 바라며 끝으로 우리 모두 이 새마을운동을 우리 힘으로 꼭 성공시켜 번영된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다 같이 사명감에서 힘써 일할 것을 다짐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단위조합장반 제7기 수료생) 본 사례는 1975년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에서 발간한 성공사례집 ‘새마을로 가는 길에서 전재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