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있는 독립운동가 최용신을 기념하는 박물관.
개설
최용신기념관은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운동 및 독립운동을 펼친 최용신
(崔容信)[1909~1935]의 생애와 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박물관이다. 최용신은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현재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시작
하였다.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유학하였다가 신병으로 귀국하여 샘골
에서 요양하면서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하던 중 사망하였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1964년 최용신봉사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설립목적
최용신기념관은 독립운동가이며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인 최용신의 생애와
사상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안산시에서 건립하였다.
변천
1995년부터 최용신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어 오다가 2004년 10월 7일 최용신의
제자인 홍석필이 1억 5천만 원을 기탁함으로써 건립 사업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2005년 9월 5일 건립 공사 설계를 시작하여 2006년 2월 1일 완료하였으며, 2006년 6월
27일 건축 공사에 착공하여 2007년 6월 7일 최용신기념관 건물이 준공되었다.
2007년 11월 20일 최용신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2008년 4월 8일 1종 전문박물관 등록[경기도
지사, 08-박-08호]을 마쳤으며, 2008년 5월 9일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국가보훈처, 13-1-23]
. 2008년 5월 20일 경기도박물관협의회 회원으로 등록되었으며, 2008년 6월 30일 민속생활사
박물관 협력 기관으로 가입하였다. 2008년 9월 30일에는 한국박물관협회 회원으로 등록되었다.
주요사업과 업무
개관 이후 체험 및 교육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하여, 최용신 애국 계몽 정신을계승하는
동시에 관련 자료를 꾸준히 수집하여 후세들을 위한 전시·연구·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최용신기념관에는 최용신의 건국훈장, 『상록수』 초판본[1936년]과 국어 교재, 『성경』
등의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에 마련된 영상물 검색대에는 영상에세이, 생존
제자의 인터뷰 등이 수록되어 있어 최용신에 대한 생동감 있는 증언을 만날 수 있다.
문화관광해설사가 최용신의 일생 및 묘역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안내를 하고 있다.
현황
최용신의 얼과 정신이 담긴 ‘샘골강습소’가 있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소재한 상록수
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가까이에는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된 최용신 선생 묘와 심훈문학
기념비·표석 등이 있다. 연면적은 462.8㎡이다. 지하 1층~지상 1층 규모로 지층에는 전시실·영상
실이 있고, 1층에는 사무실·교육실·수장고가 설치되어 있다.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이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참고문헌
『경기도사자료집』-일제강점기편(경기도사편찬위원회, 2008)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경기.안산/최용신 기념관
사동에서 본오동은 다리 하나
건너면 되는 거리다. 2007년 최용신 기념관이
건립 완공 될 때부터 한번 가봐야지 했던 것이 이제야 가게 되었다.
본오동 먹자 골목이라서 그간 수없이 근처에 갔지만
공원인지도 묘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지나치곤 했다.
몇 십년전에 "심훈"의 상록수를
읽었지만 긴 역사 속에 30년대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잠재 의식 속에 있었다. 안산에 살게 되면서 상록수역
안에 걸려있는 상록수역 유래를 보면서 또한 상록수역을 나와 주차장으로 오면서
심훈의 상록수란 작품무대 비를 보면서
찡한 관심을 가져왔었다.
개발에 밀려 지금의 자리가 흔적 없이
사라질뻔했던 시기에 샘골교회가 개발 보상금을 받고도
끝까지 버티고 있어 오늘에 최용신 기념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파트빌딩숲이 있는 작은 동산, 약혼자를 두고 짧은 생애를 마친 최용신의 묘, 그냥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공원의 동산 언덕 바지에 그의 약혼자가 죽어
옆에 나란히 하니 한 시대에 꽃처럼 스러져간 최용신의
무덤은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주창장에서 올라가는
계단앞에 있다. 올라서면 기념관
2층이 보인다
샘골은 삼리 서쪽, 현 월드아파트
서쪽에 있던 마을이다. 이곳은 샘이 많은 곳이라하여
샘골이라 하였으며 일제 때 화성군 반월면에서 수질검사를 한 결과
이 마을 샘물이 제일 우수했다고 한다.
샘골은 조선조 말엽에남양홍씨
문화공파들이 세거한 이래 남양홍씨 집성촌으로
폐동 때는 40여호 중 절반이 남양홍씨였을 정도였다. 샘골은 신도시
개발전 반월면에서는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샘골(천곡)교회는
1907년 7월에 6칸짜리 예배당으로 처음 지어졌다. 1931년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선생이 농촌계몽운동지도자로 처음 부임하여
교육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최용신 기념관 1층 전시실
처음에는 교회를 빌려 야학으로
시작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정식
교사를 지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촌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교육내용은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강습 뿐만 아니라 산술·재봉·수예·가사 및 농촌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기술, 애국심과 자립심을 북돋우는
의식계몽 등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 수원고농 한국인 학생들은
최용신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여러방면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에 유학하였으나 신병으로
귀국하였고 샘골에서 계몽운동을 계속 전개하다가 1935년
1월 23일 장중첩증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용신봉사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으며 안산시에서도 1990년부터 최용신봉사상을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더욱이 1995년 정부에서는 국가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심훈의 소설「상록수」의 무대가된
곳중의 하나가 샘골이며 여주인공 채영신은 최용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에 문화관광부에서는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심훈의 문학비(안산성포예술광장내 위치)를 상록수 작품의
고향인 안산시에 세웠다. 최용신은 2001년도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하는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최용신 기념관 2층,
현재 학당으로 사용되고있다.
1층은 전시실이다.
최용신기념관은 1930년대
나라를 잃었던 암울한 시대에 가난한
샘골(현 본오동) 아이들을 ‘조선의 빛’, ‘조선의 싹’ 으로
키워낸 최용신 선생님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기념관이다.
최용신기념관은 2007년 11월
20일에 개관되어 ‘상록수의 얼’을 이어갈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선생의 애국계몽정신 계승과 후세들을 위한 전시,
교육, 연구 활동을 할 계획이다.
전시실 입구 최용신 상
촤용신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농촌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순교자인 활동을 한 애국지사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애국지사,농촌계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 함경남도 원산출신, 아버지는
창희(昌熙)이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협성여자신학교
(현 감리교신학대학교) 농촌과에 재학하면서 황에스더 교수의 지도로 농촌계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학업을 중단하고 농촌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심, YWCA
농촌지도교사로 경기도 화성군 샘골(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파견되어 농촌교육을 시작 하였다.
샘골강습소 주춧돌과 향나무
최용신 유훈비
심훈(상록수 저자) 문학기념비
심훈이 '상록수'를 쓰게 된 동기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맞이하여 장편소설 공모하였다. 상금 500원을 걸고
(당시 소 한 마리 값 60원) '조선농어촌문화'에 기여 할 수 있는 소설을
모집한 것이다. 당시 심훈은 부모님이 낙향하여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살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장질 심재영이 청년 십 여명 과 농촌계몽에 앞장서서 인근
마을까지 활동하고 있었고, 이때 샘골의 최용신의
부음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회 장으로
치루어 졌으며 그녀의 업적이 소개되고 ,영원불멸의
명주, 무산아동의 자모, 선각자중의 선각자라는 글로 신문 첫줄을 장식하였다.
심훈은 샘골을 세 차례 정도 방문하여 자세히
기록 한 후 '상록수'를 썼다.
1935년 5월 4일 쓰기 시작하여
6월 26일에 탈고하고 그 해 9월 10일 석간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 15일 까지 127회에 걸쳐 연재 되었다.
1936년 영화화하려 했으나 일제 당국의 불허로 실패. 같은 해 8월 28일 한성도서
주식회사에 의해 책으로 발간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책의 표지 그림은 청전
이상범(동아일보 전속 화가) 이 그렸고
서문은 벽초 홍명희가 맡았다. 1936년 소설을 영화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9월 쟝티프스에 걸려 고열로 사망(36세)하였다. 소설'상록수'
채영신의 모델 최용신, 박동혁의 모델 장질 심재영과
약혼자 김학준, 청석골의 모델 샘골
(출처- 민족저항 시인 '상록수'의 작가 沈熏의 문학과 생애-申庚林 編著에서 발췌)
70년 전 최용신 선생이
강습소를 운영했던 샘골교회.샘골(천곡)교회는
1907년 7월에 6칸짜리 예배당으로
처음 지어졌다.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아주 오래된 종이 외롭게 달려 있었다.
상록수 공원안 쉼터
최용신 선생의 묘
소 재 지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시대 : 묘 - 일제강점기(1931∼1935)
꽃다운 나이에 꿈을 마음껏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25년
6개월이란 짧은 생을 마감한 최용신.
최용신 선생의 유언장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샘골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해 주시오.
김군과 약혼한 후 10년 되는 금년 4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샘골에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니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유골을 샘골강습소 부근에 묻어 주오
추모비
소박한 최용신 선생 묘소
오른쪽에는 1926년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였던
故 김학준 교수(장로)의 묘가 있다. 그는 살아 생전 입버릇처럼
'내가 죽으면 최용신 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75년 3월에 김학준이 타계하자 지금의
본오동 안산여상 뒷산에 있던 묘를 그 해 6월 유적지 안으로
이장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최용신의 묘도 원래는 지금의 상록수 전철역 부근
일리 공동묘지에 있었는데 김학준의 묘를 이장하면서 함께 모셔온 것이라고 한다. 죽으면 샘골학원이
잘 보이고 종소리가 잘 들리는 곳에 묻어 달라는 용신의 유언에 따라 언덕
양지 바른 곳 공동묘지에 모셨었다고 한다.
역명은 일제 강점기의 문학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역인데서 제정되었다.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 최용신
소설 상록수(常綠樹)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며 연재되었다. 그 이전인 1932년 춘원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재직하면서 장편소설 '흙'을 연재해 전국 농촌
계몽운동에 활력소을 불어넣기도 했다.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황토십리길(한양대역앞~대동서적앞 왕복 5.2km)
친환경 황토십리길 조성으로
시민들에게 건강을 증진하고자 가족과 함께하는
“황토십리길 맨발로 걷기 행사”가 오는 23일 상록구 한 대역 앞
교통광장에서 개최된다.
바로 옆에는 과거 이곳에
수인선 협궤열차가 다니던 선로가 그대로 있다.
누가 찔레순을 꺽어을까?
어릴적 추억을 떠 올리며 회한에 젖었겠지....
그 옛날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상록수공원 최용신 기념관에서
구불구불한 나무 계단으로 샘골교회 쪽으로 내려와
태영아파트 속 을 빠져 나오면 수인선 협궤열차가 달리던 양쪽엔 많은
운동기구와 푸른 숲이 조성돼 계절마다 꽃들을 볼 수 있고
시민들의 산책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처음 이사 와서는
나무그늘 아래서 삼겹살도 구어
먹기도 했었지만..... 여름 오후엔 앞뜰에
승용차들이 놀랍게도 많아 무슨일이 있나보면 가족 별로 가득 모여
해온 음식들을 먹곤 한다.
또한 이번에 새롭게 황토 십리길를
만들며 여러 종류의 꽃들과 특히 백합이 많이 심어져 있는
꽃 길을 걸어오니 아직 피지는 않았지만 푸른 안산에 긍지를 갖게 된다.
새벽에 뒷산을 가다 보니 이곳에선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
저녁 먹고 여유롭게 걸으면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