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점점 빠르게 느껴진대."
1년이 마치 한 달처럼 훌쩍 가버렸다고 푸념하는 내게 남편이 던진 말입니다. "우리 막내시집가는 것 보고 죽어야 될텐데"라는 엄마 말에 막연히 불안감에 사로잡혀 엄마 품에 안겨 훌쩍거리던 어릴 적 기억이 선명한데 어느새 내가 엄마가 되어 딸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생각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어린이 같이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른이 아닌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올해는 내게 있어서 커다란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동화작가라는 이름-아직은 그 이름에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과 다정이 엄마라는 이름과 선생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날은 참 예쁜 눈이 오전 내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동화를 몇 번 보냈던 아동문예사의 박종현 주간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간밤에 좋은 꿈 꾸셨습니까?"
어리둥절해진 내가 미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또다른 질문을 해오셨습니다.
"분꽃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 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분꽃이 흔했거든요. 분꽃을 조심스럽게 따면 예쁜 구슬이 딸려 오거든요. 그것을 귀에 걸고 공주님 놀이를 했어요."
마치 몇 년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얘기를 하듯 박종현 주간님의 이야기 솜씨에 끌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참 친절하게도 내 동화에 대한 평을 해주시려나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얘기 끝에 뜻밖에도 기쁜 소식을 들려주셨습니다. 내 동화 '분꽃우정'이 아동문예문학상에 당선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예쁘게도 눈이 내내 내리던 오전에 뜻밖에 날아온 소식은 그 동안 힘겹게 간직해 왔던 내 꿈의 날개가 돋는 것을 보는 기쁨이었습니다.…언제부터인가 품게 된 꿈의 씨앗으로 인해 나는 나 자신을 자주 들여다보았고 슬픔을 느껴왔습니다. 나와 동화는 잘 어울리지 않는 친구처럼 색깔이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화를 짝사랑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화를 사랑하면서 그 동화에 나를 비춰 보면서 언제까지나 순수한 세계에 몸담고 살고 싶습니다."
-수상소감 중에서-
몇 주 뒤에 기쁜 소식이 또 날아들었습니다. 기독교 잡지 『고신』에 공모한 기독교문예신인상 동화 부문에 나의 동화 '샘 이야기'가 당선된 것입니다. 그때 받은 상금 50만 원으로 컴퓨터 프린터를 사고, 대구에서 컴퓨터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오빠에게 컴퓨터를 얻어 앞으로 더욱 열심히 동화를 쓰리라 결심했습니다. 실제로 다른 해보다 더 많은 동화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한편 내 배는 박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처럼 커져 있었습니다. 다정이와의 만남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정이가 몸 속에서 놀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감이 나를 휘감았었는데 그 신비감이 이제 뚜렷한 실체로 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3월 14일 오후 2시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실로 들어가 45분 동안 제왕절개 수술을 한 후 마취에서 깨어났습니다. 수술한 자리가 아파서 신음하다 아픔이 진정되고 마음도 안정되자 저녁 무렵 간호원이 다정이를 안고 왔습니다. 유난히 숱이 많은 까만 머리카락에 어딘지 모르게 고집스러워 보이는 아기였습니다. 첫눈에 나를 쏙 빼닮았다고 느꼈습니다.
나의 느낌은 맞았습니다. 아기 얼굴은 볼 때마다 변한다는데도 9개월 된 다정이를 안고 외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아유, 정말 예쁘다. 엄마를 쏙 빼닮았네. 국화빵이잖아!"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다정이를 키우면서 잠도 부족하고, 내 시간도 부쩍 줄어들었지만 불만은 없었습니다. 불만은커녕 그지없이 행복했습니다. 아기란 그처럼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요정 같은 존재였습니다. 내게는 시간이 그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습니다. 다정이가 까르르 웃으면 나도 웃었고 옹알이를 하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아기처럼 흉내내어 말하면서 이야기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내 손으로 키우는 내 아기란 어쩜 그리도 귀엽고 딸이란 어쩜 그렇게 사랑스럽기만 한 것인지….
다정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되기 전부터 육아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훗날 다정이가 커서 이것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사랑 받으며 자랐는지 알고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또 다정이에 대한 나의 마음을 기록해 두고 잊어버리지 않고 싶었습니다.
1995년 8월 19일 토요일
어느 날 아침이었지. 훌쩍 뒤집고는 엎드린 자세로 별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올려다봤단다. 꼭 '엄마, 나 좀 봐요. 내가 처음 뒤집었어요. 나 잘했죠?'하는 것 같았어. 그 모습이 얼마나 깜찍하고 귀여웠는지.
8월 2일 그러니까 5개월 끝 무렵에 다정이는 뒤집기 시작했어. 그러나 한번 뒤집었을 뿐 며칠은 그냥 보내더니 일요일에는 아빠가 집에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하루종일 뒤집기하느라 끙끙대는 너. 무척 더운 날씨인데도 부지런히도 뒤집더구나. 뒤집는 것이 무척 힘이 드는지 땀을 닦아주기가 무섭게 땀방울이 맺히는 너를 바라보며 내 이마에도 그렇게 땀이 흘렀지.
6개월에 들어선 다정이는 보행기에 익숙해진 듯 앉혀주면 안방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뒷걸음질치기도 한단다. 가끔은 옆으로도 가고. 넌 돼지띠인데 왜 게 흉내를 내는 거지?
아기는 볼 때마다 큰다더니 정말 그래. 6개월만에 16센티미터나 크고 몸무게는 2배 이상 늘었구나. 이젠 다정이가 내 뱃속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단다.
아빠는 다정이가 참 예쁘다고 침이 마르도록 말씀하신단다. 내 자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면서 다정이는 작품이래.
요즘 엄마, 아빠는 식사 때마다 밥알을 몇 개씩 네 입에 넣어주는데 오물오물 먹는 네 입모양이 예쁘기도 하다. 며칠 전부터 네 아랫이빨 싹이 돋았는데 엄마는 신기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확인하고 싶어진단다.
자꾸만 버둥거리고 꼬집고 얼굴을 더듬고 안경까지 벗기는 바람에 다정이를 안기가 힘이 들지만 이제 네가 엄마를 알아보는 것 같아서 무척 대견하다. 그전에는 나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더 잘 웃어주었는데 지금은 내가 조금만 얼러도 언제나 까르르 웃어주니 말이야.
수십 번, 수백 번 불러도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이름, 다정아, 사랑해!
일기 쓴 날짜에 맞춰 사진도 붙여놓고, 외사촌 형님이 육아일기에 아기 손톱을 붙여놓은 것을 보고는 나도 다정이 손톱을 깎아 기념으로 육아일기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았습니다. 꼭 문집을 꾸미는 기분으로 우리 결혼 앨범에 다정이 발 지문과 사진들과 예쁜 동물 그림, 귀여운 꼬마 그림들을 넣어서 보기좋게 꾸몄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혈압으로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전부터 몸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아프고 불편한 여러 증세를 말씀하시곤 하였지만 우리가 결혼하기 전부터 항상 몸의 불편한 여러 증세를 말씀해 오셨기에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막상 병원에 가서 종합건강진단을 비롯해서 여러 번 진찰을 받아봐도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밤늦게 남편이 집으로 퇴원한 어머니를 모셔오던 날 기운 없고 얼굴도 여위신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난 시어머니가 혹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겁이 났습니다. 항상 강해 보이셨는데 그날은 몹시 약해 보였습니다.
며칠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 나는 그전에 어머니가 한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네가 둘째아기 낳으면 다정이는 내가 데려다 키우고 싶구나. 너희들이 나에게 생활비나 좀 주고 나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었으면 좋것다. 몸이 괜찮으면 그런 생각이 안 나는데 아프기만 하면 자꾸 회사를 그만둬야지 하는 생각이 난다."
어머니께, 그전에 하신 말씀대로 하실 것을 권유해 보았습니다.
"그렇잖아요, 어머니. 그런 몸으로는 일 못 하세요. 돈도 중요하지만 어머니 몸이 훨씬 더 중요해요. 그러다가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큰일나요. 다정이 보는 것도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회사일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글쎄, 어떻게 할거나?"
남편도 그 얘기를 듣고 그렇게 하도록 어머니를 권유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다정이 기저귀랑 옷을 싸고 장난감이랑 보행기, 유모차까지 차에 싣고 안산 시어머니 집에 다정이를 맡겨놓고 오던 날 밤에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는 다정이가 7개월 되던 때였습니다. 우는 모습을 보고 옆에서 남편이,
"나도 서운하다. 그렇지만 자식이야 또 낳으면 돼고 다정이가 보고 싶으면 가까이 있으니까 언제라도 보러 갈 수 있잖아. 울지 마."
"금방 두고 왔는데 또 보고 싶어."
"마음 단단히 먹어. 그럴 자신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서 다정이 데려오든가."
나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웃으면서,
"아니야, 하지만 자기 이제부터 나에게 지금까지보다 더 잘해야 돼!"
"나보다 잘하는 남편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우리는 함께 웃었습니다.
한동안은 매일매일 다정이가 보고 싶었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남편 몰래 혼자 울기도 했습니다. 언제든지 다정이가 보고 싶으면 보러 오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지만 직장을 다니고 있기에 남편이 혼자라도 챙겨먹을 밥이 없거나, 마땅한 반찬이나 국이 없거나, 다음날 입고 나갈 와이셔츠가 없을 때는 다 팽개치고 어머니 집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음 먹으면 1주일에 2번은 다정이를 보러 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어머니께 드릴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글짓기 학원에 나가고 있습니다. 병아리 같은 31명의 아이들이 나에게 "선생님, 선생님!"하면서 이것저것 물어오기도 하고, 또 "선생님, 재미있는 얘기 해드릴까요?"하며 얘기도 해가면서 연필 꼭 잡고 부지런히 글짓기하며 배웁니다. 참을성이 없고 그리 너그럽지도 못한 나는 2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아이들의 마음에 쏙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늦게 보내준다고 화가 나서 글씨도 갈겨쓰고 반항하는 아이에게 거칠게 대하다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이 누그러져서 달래고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애와 악수를 한 후 보내놓고 털썩 주저앉아 방금 보낸 그
애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정화야, 넌 참 선생님 자격이 없구나. 저 조그만 애를 감싸안지 못하고 여린 마음에 상처를 준 건 아니니?'
어린이를 참으로 따뜻한 가슴으로 어루만질 줄 아는 날 어린이에게 좋은 감화를 줄 수 있고 내 동화도 날개를 달고 훨훨 자유로이 날아가 어린이들의 마음의 창을 두드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날을 꿈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