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즌은 또한 리그에 흑인 선수의 첫 입성으로 주목받았다. 척 쿠퍼는 그가 보스턴에 지명됨으로써 드래프트 되어진 첫 흑인 선수가 되었고, 낫 '스위트워터' 클립턴은 뉴욕과 계약하며 NBA 계약을 한 첫 흑인 선수가 되었고, 얼 로이드는 NBA 정규시즌 경기에 출전한 첫 흑인 선수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소속팀이었던 워싱턴이 다른 팀들보다 하루 먼저 개막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로체스터가 1951년 파이널의 첫 3경기를 가져갔을때만해도, 닉스가 빨리 나가떨어질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닉스는 6점, 3점 그리고 7점 차이로 내리 3경기를 이기며 맹렬히 뒤쫓았고, 시리즈를 7차전으로 끌고가 승부는 로체스터에서 열리는 마직막 경기에서 결정되게 되었다.
로열스는 전반전동안 16점차 정도의 격차를 유지하는 등 줄곧 앞서갔으나, 닉스는 맹렬히 뒤를 쫓아 경기 막판 2분을 남기고 2점차로 따라붙었다. 결국, 종료 40초를 남기고 동점이 된 상황에서 (로체스터의) 데이비스가 바스켓을 향해 드라이브인을 시도하여 파울을 얻어냈고, 자유투 2개를 성공시켰다. 덕분에 로열스는 79-75로 승리를 움켜쥐었고, 미네아폴리스 왕조를 잠정적이지만 가로막았다.
1951 NBA Finals: Rochester 4, New York 3
- "Royals Reign, Despite Knicks' Unlikely Comeback"
NBA Fi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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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hester 4, New York 3
Apr. 7: Sat., New York 65, at Rochester 92 Apr. 8: Sun., New York 84, at Rochester 99 Apr. 11: Wed., Rochester 78, at New York 71 Apr. 13: Fri., Rochester 73, at New York 79 Apr. 15: Sun., New York 92, at Rochester 89 Apr. 18: Wed., Rochester 73, at New York 80 Apr. 21: Sat., New York 75, at Rochester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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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ern Division |
Western Division |
Division Fi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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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3, Syracuse 2 Mar. 28: Wed., Syracuse 92, at New York 103 Mar. 29: Thu., New York 80, at Syracuse 102 Mar. 31: Sat., Syracuse 75, at New York 97 Apr. 1: Sun., New York 83, at Syracuse 90 Apr. 4: Wed., Syracuse 81, at New York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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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hester 3, Minneapolis 1 Mar. 29: Thu., Rochester 73, at Minneapolis 76 Mar. 31: Sat., Rochester 70, at Minneapolis 66 Apr. 1: Sun., Minneapolis 70, at Rochester 83 Apr. 3: Tue., Minneapolis 75, at Rochester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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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ision Semifi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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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2, Boston 0 Mar. 20: Tue., New York 83, at Boston 69 Mar. 22: Thu., Boston 78, at New York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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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hester 2, Fort Wayne 1 Mar. 20: Tue., Fort Wayne 81, at Rochester 110 Mar. 22: Thu., Rochester 78, at Fort Wayne 83 Mar. 24: Sat., Fort Wayne 78, at Rochester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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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racuse 2, Philadelphia 0 Mar. 20: Tue., Syracuse 91, at Philadelphia 89* Mar. 22: Thu., Philadelphia 78, at Syracuse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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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neapolis 2, Indianapolis 1 Mar. 21: Wed., Indianapolis 81, at Minneapolis 95 Mar. 23: Fri., Minneapolis 88, at Indianapolis 108 Mar. 25: Sun., Indianapolis 80, at Minneapolis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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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에 가입한 이후 처음으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는 정규시즌 리그 최고 승률팀이 되었다. 마이칸은 2번의 이전 시즌과 마찬가지로 1950/51시즌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스케줄이 종료될 시점에 다다르면서 레이커스의 운은 좋지않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이칸은 발목 미세골절로 고통받았지만 (다행인지 아닌지)시즌 아웃당하진 않았다.
"그는 계속 경기에 출전했어요. 하지만 스피드가 절반 수준으로 줄어버렸죠."라고 코치 존 쿤드라는 말했다.
그럼에도, 레이커스는 또다시 서부 디비전 파이널에 올라 그들의 오랜 라이벌인 로체스터 로열스와 대결했다. 미네아폴리스는 홈에서 먼저 1승을 챙겼다. 그러나 로체스터 코치 레스 해리슨이 레드 홀츠먼을 스타팅 라인업에 기용했고, 이후 로열스가 시리즈를 지배했다. 마이칸이 부상으로 인해 느려졌고, 레이커스의 저력이 빠르게 무너지면서 그들은 내리 3경기를 내줬다. 미네아폴리스의 탈락에 대한 실망은 (한편으론)프로농구를 굉장히 흥미있게 만든 몇 개의 사건들 중 하나였다.
NBA의 짧은 역사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파이널인 - 서프라이징 닉스와 업셋 로열스, 두 뉴욕 팀들이 펼치는(로체스터는 미국 뉴욕州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 - 1951년 파이널이 다가왔다. 이 시리즈의 뉴스적 가치는 비록 농구가 스포츠 섹션 앞면에서 MLB(미프로야구) 기사를 대체하진 못했지만, '더이상 신문 뒷면에 한 두 줄로 취급받는 일은 없게 만들었다'는 거라 하겠다. (이 시리즈 후) 프로농구는 대중들의 눈에 의심할 여지없는 인상을 심게 되었다. 더 좋은 것은 (비록 시리즈가 처음엔 스윕으로 향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리그 사상 처음으로 파이널 7차전 승부까지 갔다는 것이다.
Royals'1951 백코트에서 밥 데이비스와 짝을 이룬 선수는 세턴 홀 대학 시절 그의 동료들 중 하나였던 '올 아메리칸' 바비 완저였다. 또한 후일 2번의 '챔피언십 닉스'의 코치가 되는 레드 홀츠만이 벤치에서 거들었다. 완저는 최고의 세트슛터였고, 데이비스는 후일 명예의 전당에 오른 훌륭한 가드였다. 이 조합은 로체스터를 속공 상태에서 (레이업이 아닌)오픈 세트슛을 사용하는 팀으로 만들었다.
1951년 로열스의 득점은 어니 라이즌이 평균 16.3득점으로 리드했고, 데이비스가 평균 15.2득점으로 그 뒤를 이었다. 로체스터는 또한 준수한 프론트코트 득점원으로 6'7"(201cm)의 잭 콜먼(평균 11.4득점)과 벌키 어니 존슨(평균 9.4득점)을 데리고 있었다. 비록 라이즌이 평균 12리바운드, 콜먼이 평균 9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놀랍게도 로열스는 리그에서 리바운드가 약한 팀중 하나였다. 그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부 디비전에서 미네아폴리스에 3경기 뒤진 41승 27패로 시즌을 마쳤다.
반면에, 닉스는 동부 디비전에서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에 뒤진 3위로 마쳤다. 그러나 그들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보스턴을 꺾었고 디비전 파이널에서 최종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시라큐스를 물리쳤다. 5차전 4쿼터 10분이 남았을 때 시라큐스 내셔널스는 12점차로 앞서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뉴욕은 승리를 위한 맹렬한 추격을 개시했고 파이널 한 자리를 차지했다.
닉스는 뉴욕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세인트 존스 대학의 前 코치였던 전설적인 조 랩칙이 지휘를 했다. 그들은 강한 빅맨이 없었지만, 할렘 글로버트롯터스(흑인 농구팀)에서 그들이 데려온 6'6"(198cm) 냇 '스위트워터' 클립턴으로 충분히 메우고 남았다.
NBA계약을 한 최초의 흑인 선수인 클립턴은 평균 8득점과 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더 좋은 수치를 기록할 수도 있었던 그는 (수치에서 보이는) 그런 제한된 롤에 국한될 선수가 아니었다. 또한 그와 함께 해리 갈라틴(6'6")은 평균 12.8득점을 기록하며 리그에서 그들보다 훨씬 큰 프론트라인을 상대로 싸우는 거친 임무를 해냈다. 또한 전선에는 3년 전 볼티모어의 우승에 기여한 6'8"(203cm) 코니 시몬스가 함께 했다.
세인트 존스 대학의 스타였던 리처드 '트릭키 딕' 맥과이어는 닉스의 플로어게임을 주도했고, 평균 6.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필라델피아의 앤디 필립에 이어 리그 2위로 마쳤다. 득점의 태반은 시카고의 프랜차이즈 슈퍼스타였으나 시카고 스택스가 사라진 후 닉스로 오게 된, 막스 야슬로프스키와 평균 14.9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이끈 2년차 선수인 6'4"1/2(195cm) 빈스 보리라가 해주었다. 백업 멤버에선 농구선수이자 또한 의과대생으로서 경기와 실습을 병행했던 어니 밴더웨이(미래의 NBA 선수인 키키 밴더웨이의 아버지)가 있었다.
이런 닉스가 파이널에 오른 것은 '제69연대 병기창'의 모든 팬들과 뉴욕 언론들 다를 놀래켰고 또한 기쁘게 했다. 그들이 챔피언십을 차지하리라 정말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닉스가 로체스터 로열스에게 첫 3경기 중 하나도 잡지 못하고 빨리도 뒤쳐졌을때는 그것을 놀라워 한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어찌되었든 뉴욕은 지난 3년간 로체스터의 에저튼 파크 스포츠 아레나에서 열린 경기에서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었다. 그 징크스는 1차전에서 65-92로 그들이 나가떨어지면서 계속 이어졌다. 닉스는 2차전에 84-99로 패함으로써 그나마 조금은 나아진 듯 보였지만, 그건 단지 수고했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걸로 보였다. 데이비스는 24득점, 라이즌이 19득점으로 로열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시리즈가 '병기창'으로 옮겨졌지만 닉스는 홈에서도 나아지지가 않았고, 라이즌에게 27득점을 내주며 인사이드를 붕괴당하며 71-78로 패하여 3차전을 내줬다. 시리즈는 4차전 4쿼터에서 뉴욕이 17점차 리드를 날려먹고, 10분보다 적은 시간을 남기고 6점차로 뒤졌을 때 이미 끝난 걸로 보였다.
그러나 닉스는 1라운드에서 시라큐스를 맞이하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깨어났고, 로열스와의 점수차를 단숨에 줄였다. 랩칙은 난조를 보인 맥과이어 대신에 벤더웨이를 스타팅으로 결정했었고, 경기가 막바지에 흘렀을 때 벤치 선수인 도니 라벨리, 조지 카프턴과 레이 럼프가 클러치 상황에서 해냈다. 인사이드 전투에서 클립턴과 갈라틴이 득점을 보태며 69-69동점을 이루었다. 경기에서 영웅을 꼽아야한다면, 그건 뉴욕이 79-73으로 이기는 막판 득점과 파울을 이끌어낸 클립턴이었다.
그러나 희망은 여전히 저 멀리 높은 곳에 있었다. 닉스는 시리즈 전적 1-3으로 뒤지고 있었고, 그들은 한번 더 이기기 위해 로체스터로 가야만 했었다. 다행히도, 시몬스가 5차전에서 슛팅 감각을 찾아 9/13의 야투율을 적중시키며 26득점, 그리고 야슬로프스키가 24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경기 내내 (상황을 뒤집기엔)그조차도 충분해보이진 않았다.
로체스터는 닉스가 분위기를 타기 전에 하프타임까지 내내 앞섰고 3쿼터까지 10점차 이상으로 리드했다. 승부처에서 시몬스는 라이즌이 5파울을 안은 채 수비를 자제하며 플레이하는 동안 다양한 훅슛을 적중시켰다. 야슬로프스키는 3점차 리드를 잡는 자유투를 성공시켰지만 40초를 남기고 원핸드 러닝슛을 미스했다. 로열스가 리바운드를 잡았지만 이미 넘어간 경기분위기를 돌리기엔 충분하지 못했다. 뉴욕에서 온 아이들은 불가능을 이겨냈고 로체스터에서 92-89로 승리했다.
닉스는 더 많은 저력이 요구되는 6차전을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또다시 그들은 벤더웨이의 완벽에 가까운 플레이와 함께 야슬로프스키가 23득점, (전 경기들에서)스타팅 자리를 잃었던 맥과이어가 6어시스트와 9득점을 보태며 80-73으로 승리했다. 초반 5일간 닉스는 스윕을 당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그들 자신을 찾았고, 타이틀을 차지할 기회를 거의 손에 쥔채 3-3 동률에서 로체스터로 머리를 돌렸다.
4월 21일 토요일, 로열스가 NBA에서의 3시즌동안 92승 16패를 기록했었던 경기장에서 점볼이 시작되었다. 로체스터는 뉴욕의 기세를 재빨리 끄기 위한 시도를 했고 경기 시작 후 13-3 리드, 이후 그건 32-18로 늘어났다. 그러나 닉스는 2쿼터에서 남은 여력을 찾았고 전반 종료까지 40-34로 따라붙었다. 양팀은 경기 막바지까지 접전을 벌였고, 마침내 6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69-69 동점을 만들었다. 클립턴이 얼마 후에 파울 아웃 당했지만, 닉스는 갈라틴의 레이업으로 71-70 리드를 잡았다.
74-72로 늘어난 리드. 종료 2분여를 남긴 상황이었다. 그러나, 라이즌이 시몬스의 6번째 파울을 끌어냈고, 닉스는 프론트코트에 갈라틴 혼자 남게 되었다. 라이즌은 로체스터에 75-74 리드를 안겨주는 훅슛 득점과 자유투를 성공시켰다. 이에 맞서 닉스의 보릴라는 1분 29초를 남기고 자유투로 동점을 만들었고, 공격권은 넘겨졌다.
데이비스는 드라이브인을 시도했고 블록을 노리던 맥과이어에게서 파울을 얻어냈다(물론 , 뉴욕은 오펜스 차징 콜이 불려졌어야 했다고 따졌다). 데이비스는 77-75로 리드를 잡는 자유투 둘 다 성공시켰고, 그 때 룰에 따르면 팀들은 경기 마지막 2분 동안에는 슛팅 파울을 한 후에는 (자유투 2구를 준 후) 점프볼을 해야했다. 로체스터가 점프볼을 잡았고, 홀츠만은 콜먼이 득점하며 최종스코어 79-75로 경기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다 소비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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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체스터 우승의 주역, 밥 데이비스 |
피버's Comment
물론 뉴욕 닉스의 홈코트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입니다만, 왜 '69연대 병기창'이 왜 나오냐 싶을 겁니다.
저 역시 이 해석이 어려워 운영진 -Ty- 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아래는 -Ty-님의 답변입니다.
예전, 약 50~60 년대의 NBA 는 미국에서 거의 인지도가 없는 스포츠 리그였습니다. 때문에 지금과 같이 자신만의 홈코트를 가지고 있는 팀이 거의 없었지요.
당시 가장 큰 팀 중 하나였던 닉스도 만약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스케쥴이 빈다면 언제든지 그 곳에서 경기를 할 수 있었지만, 만약 도시에 다른 연례 행사(서커스나 무도회)나 스포츠 팀이 들어오면 구장을 떠나 2~3 곳의 예비 경기장으로 가서 경기를 해야했죠. 그 중 하나가 저 69 연대 병기창입니다. 인지도가 떨어지기도 하고,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농구는 단지 코트와 공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냐, 라는 식이었습니다.
닉스와 마이칸이 있던 레이커스뿐만 아니라 모든 팀에게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인데요, NBA 팀들이 자신만의 구장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아직까지 리그엔 공격 제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종료 2분을 남기곤 슛이 성공하면 점프볼로 공격권을 가립니다. 그래서 종료 1분 정도 남기고 2점을 뒤져도 뒤집는게 쉬운 일이 아닌거죠. 위 상황에서 마지막 40초를 남기고 닉스가 볼을 잡지 못했기 땜에 이후 시간은 로열스가 볼을 주구장창 돌리기만 하면 되는 거엿습니다.
어찌되었든 로체스터(현재의 새크라멘토)의 우승이지만, 글의 초점은 역시 닉스에 맞춰져 있더군요. 그리고, 투혼의 닉스는 다음 시즌 다시 파이널에 오릅니다. 그럼, 못다 푼 우승의 한을 풀 수가 있을까요? ^^ 결과는 다음 파이널스에서 확인해주세요.
예나 지금이나 닉스가 살아야 리그가 삽니다. 다만, 그 당시 닉스의 모습을 지금은 찾기가 힘들단 사실,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