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배달(본명 최영의), 일본명 오야마 마스다쓰. 그에 관한 수식은 쉽게 압축할 수가 없다. 전설의 파이터, 신의 손( God’s Hand ), 가라테마스터, 소뿔을 꺾은 사나이에서 바람의 파이터라는 제목까지. 한 사람에 붙여지는 수식이라고 하기에는 다분히 많은 숫자지만 그 정도로 최배달은 존경 받는 무도가로서의 생을 살았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를 통해 다시 한번 재조명 되고 있는 최배달, 그의 삶은 대체 어떠했길래 아직까지도 우리를 흥분하게 만드는 것일까?
하늘을 나는 파일럿은 되지 못했지만
1923년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에서 태어난 최배달은 어렸을 때 겁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래서 곧잘 일본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는데 부농이었던 아버지가 고용한 하인에게서 차력, 혹은 중국무술인 남권을 익혔다고 한다. 1938년 16살이 되던 해 최배달은 어릴 적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해탄을 건넌다. 일본 야마나시 소년 항공학교에 입학하게 된 최배달은 이때 처음으로 가라테에 입문하게 된다.
1945년 당시 일본은 패망 후 모든 것이 부족했고, 인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있었다. 최배달 역시 춥고 배고픈 낭인시절을 보내야만 했는데 어느 날, 도쿄 시부야 공원에서 위험에 처한 야쿠자 보스를 구출하게 되어 6개월간 그의 보디가드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야쿠자들의 방탕한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재일교포 단체인 거류민단에 투신하게 된다. 또한 일본에 체류하면서 수많은 폭행 사건의 주범이던 미군들로부터 겁탈의 위험에 처한 일본 여인들을 구해내 ‘구라마덴구(막무시대의 영웅)’ 이라 불리며 처음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 덕분에 그는 CID(범죄수사국)에 수배를 받게 되었고, 훗날 입산수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가르침대로
미국범죄수사국의 추격을 받으며 고된 낭인생활을 지속하던 그에게 또 한번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것은 에도 시대 검의 달인 미야모토 무사시의 사상이 담긴 오륜서 한 권이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힘없는 정의는 무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이라는 한 구절은 자신과 세상을 뛰어 넘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냈고 그는 그 길로 지바현 남부에 있는 기요즈미 산으로 뼈를 깎는 수련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입산수련 과정에서 그는 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서고 딱히 상대가 없던 산속에서 참나무와 폭포의 얼음덩어리, 돌덩어리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속세가 그리웠지만 그때마다 한쪽 눈썹을 번갈아 밀며 자신을 세상과 격리시키며 의지를 다졌던 최배달은 미친듯이 뛰고 닥치는 대로 격파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비워 있음(空)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는 끝끝내 깨지지 않았던 자연석 격파에 성공하며 고단했던 입산수도를 마치고, 일본무도계 정의의 첫발자국을 내딛게 된다.
무도여행
최배달이 기요즈미산에서 하산한 1947년 봄, 쿄도 마루야마 공화당에서는 패전의 울분을 씻고, 전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 아래 전후 최초로 전일본 공수도 대회가 개최된다. 공수도 전유파가 참여한 가운데 격파와 대련으로 이루어진 전일본 공수도 대회에서서 우승을 차지하며 무도계에 파란을 예고했다. 그리고 전일본 공수도대회를 통해 상대방 앞에서 가격을 멈춰야 하는 기존 공수도에 다시 한번 염증을 느끼고, 진정한 실전 공수도의 길을 가기 위해 일본 각지에 숨어있는 고수들을 찾아 무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는 공수도의 원류라는 교토 니조도장의 니조 십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수들을 격파해 나가며 최배달식 실정공수를 알리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최배달에게는 민족주의 성향의 과격파들로부터 엄청난 협박이 날아들었다. 패전 후 겨우겨우 자존심을 세워나가던 일본인들에게 최배달이라는 조선인의 존재는 눈엣가시 같이 일본의 자존심을 짓밟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매일밤 숙소에 돌이 날아들었고, 습격에 대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숙소를 옮겨야만 했다. 최배달은 온통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폭풍 같은 대결들을 멈추지 않았다. 고베의 가미소리(면도날)라 불리던 모리, 나고야의 닌자 미와, 검귀 료마를 비롯하여 자신의 공개처형을 선언한 일본내 고수들과의 30:1의 무사시노 혈전, 심지어 싸움소와의 대결까지 그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증명해 보였다.
세계를 제패한 사나이
무사시노 대혈전을 통해 일본 무도계를 평정한 최배달에게 더 이상의 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무도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종류의 무도에의 호기심은 그의 눈을 세계로 돌리게 만들었다. 무도 여행은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미국으로 이어졌고 그의 불패의 기록들은 불패의 무신으로 신화의 사나이로 그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와 책이 쏟아져 나왔으며 일본 청소년이 선정한 [위대한 인물 10걸] 중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1961년 극진회를 창립한 최배달은 1959년과 1962년에 시카고, 뉴욕, 캘리포니아 등지에 분관을 설립, 30개의 기왓장을 격파하는 등 격파술 시범이 전파를 타면서 미국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끌어낸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집필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해 ‘가라데 바이블’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994년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산 배달
그러나 그는 유독 조국인 한국에서는 잊혀진 이름이었다. 숀 코너리에게 무술고문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방한 했을 때에도 조국은 그를 일본에서 활동하는 태권도의 고수로 소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조국은 평생 그리움이었다고 한다. 재일 동포 아주머니를 찾아 눈물을 흘리고 극진 공수도의 정착을 위해 귀화를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산 배달’이라는 뜻의 오야마 마쓰다츠로 개명했고 끝내 한국 국적을 소멸시키지 않았다.
방학기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1989.8.11~1993.7.20 스포츠 조선 연재)를 통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상 최강의 승부사 최배달. 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제자들에게 손수 차를 끓여줄 만큼 자상한 사람이었고 항상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얘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꽃 모양 뒤에 사자의 모양을 그려 넣은 싸인을 가지고 있던 그는 생전 강함과 약함 아름답고 용맹한 것은 같은 것이라 얘기했고 만화를 그린 방학기의 부인에게는 속옷을 선물할 만큼 섬세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능력보다는 스스로의 의지의 중요함과 남자답게 큰 배포를 가질 것을 권유했던 스승의 가르침을 회상하는 현 극진 공수도 총재 마쓰이(문장규)관장은 영화 <바람의 파이터>가 강해지는 것 보다 강해진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인터뷰에서 피력했다. <바람의 파이터> 양윤호 감독은 강하기 전에 약한 최배달이 있었고 약해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온 인생을 내던져 자신을 단련시켜 나간 최배달이 있었기에 영화화가 가능했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우리는 <바람의 파이터>를 통해 전설의 파이터이기 전 인간 최배달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