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신과 쓰러짐, 금가루와 금이빨등의 현상적인 집회 요즈음 ‘영성’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물론 성경에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단어가 없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 ‘영성’이라는 용어는 중세에 가톨릭 수도사들의 육체를 가학하는 금욕주의나 고행을 뜻하는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있었고, 또한 영성이라는 용어를 육체와 분리시켜서 내면적인 영의 훈련과 잠재력을 개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원론적인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에 의해서, 은사남용주의를 뜻하기도 하고, 유치한 표적과 기적을 지칭하는 집회를 언급하는 용어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영성’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영성이라는 단어를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에서 ‘영성’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 받는 사랑과 은혜같은 수동적이며 내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최근에 ‘영성운동’ 혹은 ‘성령운동’ 혹은 ‘내적치유’등의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들이 많지만, 그들이 보이는 유치한 기적과 표적은 “영성을 빙자한 현상주의”일 뿐이다. 그들이 자주 강조하는 입신이라는 현상과 쓰러짐, 유치한 기적과 표적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입신
사람이 죽지 않고 천국과 지옥에 다녀올 수가 있을까? 한마디로 공상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들이 지금 기독교에서 대유행을 하고 있다. 너도 나도 천국과 지옥에 다녀왔다고 간증을 하기에 이르렀고, 기독교서점에까지 이러한 책들이 넘쳐나고 있다. 과연 성경에서 언급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여 이러한 주관적이며 임의적인 개인의 체험 간증이 성경외에 추가로 필요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는 책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오히려 우리는 비성경적인 천국 지옥 간증 때문에 건전한 신앙에 걸림이 되는 문제가 나타날 수도 있으며, 자칫하면 위험한 신비주의 성향에 빠질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실제로 천국 지옥 간증을 하는 사람들에게 비성경적인 문제점들과 함께 심각한 이단성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예를 들면, 신사도운동에서 말하는 소위 입신(入神)이라는 용어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로서, 단지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고 말한다. 입신(入神)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의 용어가 아니고 또한 무속적인 용어의 뜻과도 다르다. 무속신앙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람의 몸에 들어오는 것, 혹은 무아지경에 이르는 상태 등을 입신 혹은 접신이라고 말한다. 신사도운동을 도입하는 사람들은 예배 중에 쓰러지는 현상을 입신이라고 말하는데,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현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것이다.
즉 신사도운동이 말하는 입신은 기독교적인 사상이 아니며, 무속신앙에서 말하는 입신과도 전혀 다르며, 특별히 성경은 무속신앙적인 입신과 접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27).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1). 최근에 일부 목사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무속화되고, 비성경적인 내용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들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주장으로 기독교를 무속적인 종교로 만들고 있을까? 입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성경적인 근거로 바울도 낙원을 다녀왔다는 것을 예로 들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입신인지 성경본문을 살펴보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고후 12:2~6). 첫째, 바울은 낙원에 다녀온 것을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 제 삼자의 입장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6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지나치게 생각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 본문을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든 이유는 워낙 요즈음 천국과 지옥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의 간증을 듣거나 그 책을 읽어보면 바울과 많은 차이점이 보인다. 게다가 대부분이 비성경적인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 것이 염려하여 제 삼자의 입장으로 글을 기록하는 반면에, 요즈음 천국과 지옥에 다녀왔다는 사람은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기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비성경적이며 자의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특수한 경우를 보편화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다”(창6:24, 히11:5)는 구절을 인용한다. 이러한 특수한 경우가 다른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일어났는가? 예를 들면, 엘리야의 경우(왕하 2:11)와 같이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승천한 경우가 다른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일어났는가? 특수한 경우를 보편화 한다면 예수님과 같이 물 위를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더욱이 에녹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다는 것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다. 셋째, 바울은 자신이 낙원을 간 것이 “몸 안인지 몸 밖인지를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천국간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영혼이 몸에서 이탈되어 영혼만이 갔다고 말한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왜 몸 밖에서 유체이탈되었다고 단정하는가?
그렇다면 왜 바울은 몸 안인지 몸 밖인지 몰랐다고 말할까?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바울의 체험을 그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고후11장23-25절에서 그는 거의 죽을 뻔했던 많은 체험들을 말하며, 행 14:19에서 바울은 돌에 맞아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내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입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특히 큰믿음교회나 주님의 교회, 혹은 천국간증에 대한 책을 쓴 토마스주남이라는 여인과 같이 수십번을 습관처럼 아주 쉽게 갔다 왔다는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신사도운동을 하는 미국의 목사들이 그러한 주장을 자주하고 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원하기만 한다면 천국과 지옥을 가서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다. 그들의 간증의 공통점이 있는데, 자신이 매우 특별한 사명을 갖고 다시 돌아왔다는 것인데 그것이 모두 비성경적인 주장이라는 점이다. 넷째, 바울은 그러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경고를 받았다고 말한다.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특히 KJV영어성경과 NIV영어성경이 모두 그러한 번역을 하고 있다. 바울은 왜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들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성경의 내용과 달리 자유롭게 자랑을 하고 있을까? [표준새번역] 이 사람은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현대인의성경] 나는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도저히 표현할 수도 없고 또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는 말을 들었습니다.
[KJV] How that he was caught up into paradise, and heard unspeakable words, which it is not lawful for a man to utter.
[NIV]was caught up to paradise. He heard inexpressible things, things that man is not permitted to tell. 다섯째, 물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경우가 지금도 간혹 있다. 문제는 기독교뿐 아니라 타종교, 혹은 무신론자도 그러한 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의학적인 견해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 가사상태라고 말하기도 하며,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만일의 가능성을 위하여 죽은 사람을 곧 매장하거나 화장을 하지 않고, 삼일장을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러나 타종교인과 불신자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그러한 입신은 기독교만의 상황이 아니라고 말해야만 하지 않는가? 심장이 멈춘 사람의 경우, 의학적으로는 죽음의 상태이지만, 인공호흡이나 심장에 전기적인 충격을 줌으로서 소생시키는 방법도 있다. 분명한 것은 죽은 지 오랜 시간(며칠)이 경과한 후에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경우는 없다. 어쨌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꿈을 꾸었다는 경험담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 체험이 모두 다르며, 특히 자신이 평소 갖고 있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불교인도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불교적인 내세관으로 말하고, 타종교인 심지어 이단교회도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말한다. 이러한 체험도 하나님의 역사인가?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오히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욥 7:9-10).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잠2:17-19).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여섯째,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한다. 성경은 “영혼없는 몸은 죽은 것”(약 2:26)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전12:7) 또한 스데반은 죽임을 당하기 직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부르짖었으며,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모두 죽음의 상태가 영(spirit) 혹은 혼(soul)이 사후에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자 “그 영(sprit)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 나거늘”(눅 8:55)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나니아와 그 아내가 사도들의 발 앞에 팔았던 밭의 값을 속이었을 때에도 "혼(soul)이 떠나갔다"(행5:5. 5:10)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부자의 죽음에 대해서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눅12:20).
성경은 사람이 죽지 않고 영혼과 몸이 분리된 경우를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의 경우도 그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도바울도 몸 밖으로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8-10).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2~24). 요즈음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히 신사도운동과 관련된 목사들이 그러한 주장을 많이 하는데,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책을 쓴 토마스 주남이나 K집사와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특히 한때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던 문제의 사람들이 최근에 다시 천국과 지옥 간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 임의대로 천국을 황당하게 묘사한다거나,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거나,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험이 어떤 목적을 가진 거짓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만일 그러한 체험이 가사상태에서 느끼는 꿈과 같은 환상이라면 우리는 개인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천국체험으로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개인의 비성경적이며 주관적인 간증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을 믿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무속적이고 미신적인 속설에 미혹되지 말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 대해서, 헬라어는 ‘이방적(godless)이고 늙은 부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old wive's tale)’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쓰러짐은 성령의 사역인가?
과연 쓰러짐이 성령의 역사인가? 그렇다면 쓰러지지 않은 사람들은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사람들인가? 말을 바꾸면, 쓰러져야만 성령의 내주를 확인할 수 있는가? 이스람교와 힌두교, 불교와 같은 타종교와 이단집단에서도 이러한 쓰러짐과 같은 현상은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이것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필자도 이러한 집회에 참석하여 안수를 받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면 왜 인간의 의지를 강권하여 쓰러지게 할 수 없었을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관점에서 이 쓰러짐의 현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쓰러짐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함이 있으며 쓰러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2) 쓰러짐은 성경적인가? (3)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은 무엇인가?
(1) 이러한 집회를 하는 어떤 목사들은 쓰러짐을 ‘안식’이라고 불렀다. ‘성령 안에서 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쓰러짐을 안식이라고 표현한 성경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어떤 신사도운동을 하는 목사는 입신이라고 하여 쓰러질 때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혹간 천국과 지옥을 다녀올 수도 있다고 주장을 한다. 필자는 예배시간에 교회 바닥에 누워서 안식을 하는 것보다 집에 가서 편안하게 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쓰러져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도 없으며, 쓰러짐이 우리에게 유익한 점도 하나도 없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쓰러짐을 왜 예배시간에 하고 있는가?
(2) 성경에 성령을 받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는가? 성경은 그러한 경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귀신이 아이를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땅에 엎드러져 구르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막 9:20)
또 귀신이 사람에게 나오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였던 적이 있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4:35)
빈야드운동을 하는 목사가 몇가지 쓰러짐의 경우를 성경적으로 인용하는 글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격한 사람들(모세, 이사야. 요한등)의 경우에는 그 사람이 경외함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이 땅에 엎드린 것이지, 성령을 받았거나 혹은 성령의 충만한 사역으로 쓰러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이 넘어졌다(요18:6)고 말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권위 때문에 뒷걸음을 치다가(went backward) 넘어진 것이며, 무엇보다도 군사들은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또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이 넘어진 경우(마28:4)를 말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무덤에 나타난 천사를 보고 무서워서 기절하였다(죽은 사람과 같이 되다, like dead men)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땅에 엎드린 것이라든지(행9:4), 요한이 밧모 섬에서 쓰러진 일(계1:17)등을 비유하는데, 그러한 것들은 성령에 의하여 쓰러짐이 아니라, 본인이 두려움과 놀라움에 의하여 땅에 엎드린 것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쓰러짐이라고 이해할 수 없으며, 모두 쓰러짐을 인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억지 해석의 경우가 될 것이다.
(3) 성령의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가?
필자는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이며 기적을 행하시는 분임을 믿는다. 또 필자 역시 하나님께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축복을 위하여 기도를 드린다. 또한 필자는 목사님들이 병의 치료를 위하여 안수기도를 해주는 것에 대해서 전혀 부정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의 집회는 성경에 없다. 또한 어떤 집회에서 전혀 유익하지 못한 유치한 기적과 표적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성령을 파송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개인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효과적으로 적용시키기 위하여, 구원을 보증하고 인치심을 주시며, 성도를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파송하신 본질적인 이유가 된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 1:22)
쓰러지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하루에 100번을 쓰러져도 그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답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집회에서 한번도 쓰러지지 않았지만 신실한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만일 누군가가 쓰러져야만 구원을 받는다거나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잘못된 구원관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쓰러짐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예배시간에 안식하기 위함인가? 쓰러짐은 아무런 효과나 어떤 유익을 가져오지 않는다.
문제는 힌두교, 이스람교, 불교에도 소위 ‘큰들리니 현상’이라고 하는 동일한 쓰러짐의 현상과 발작, 진동등이 나타나며, 이단이라고 불렸던 교회의 집회에서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볼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된다.
성령을 기껏 손바닥에 가짜 금가루나 만드는 분으로 왜곡시키지 말고, 아무런 이유도, 유익도 없는 쓰러지는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설명할 어떤 이유도 없다. 그러한 현상을 보여줌으로서 자신들의 집회와 사역이 성령이 충만한 사역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왜 이러한 집회를 하는 목사들은 가짜 금가루 대신에 벽돌이 통째로 순금으로 변하거나, 마 14:29의 베드로와 같이 물 위를 걷거나, 왕하 6:6의 엘리사와 같이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는가?
우리는 쓰러지지 않아도 예수를 믿음으로 충분히 구원을 받으며, 그러한 무질서한 예배의 형태가 없이도 충분히 구원을 받는다. 다시 말하여 아무런 현상과 표적이 없다고 하여도 우리의 믿음과 구원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무질서한 예배의 형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본질적인 복음이 아니며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요20:29)고 말씀하셨다. 특히 그러한 쓰러짐이나 이상한 현상들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과장하는 집회가 아래에서 언급한 내용과 동일하다고 판단이 들면, 여러분들은 그 집회를 더 이상 참가하지 말고 나오는 것이 좋으며, 그 시간에 기도를 하거나 성경구절을 하나라도 더 읽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본다.
1) 비본질적인 현상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절대화시켜 과장하는 경우 2) 성령의 사역을 이유로 헌금을 강조하고자 하는 경우 3) 전혀 유익하지 않은 무질서한 예배의 형태(쓰러짐, 진동, 구역질, 웃음, 짐승소리, 유치한 표적과 현상, 치유만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를 계속 집회에서 보이려고 하는 경우
어떤 집회에 갔더니 금이빨로 변했다는 몇사람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빨이 집회 전에는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다. 캐나다의 의사협회에서는 금이빨로 변했다는 교인들에게 과거 치과적인 진단이력서를 요청하였으나 단 한명도 응하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보았다. 금이빨은 순금이면 몸에 아주 해롭고 그 강도가 약하므로 이빨의 기능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 치과기공소는 여러가지 합금의 성분으로 금이빨을 제작한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문제가 있는 이빨을 치과기공소와 같은 합금의 성분을 사용하여 제작하여 금으로 씌워주신다는 결론이 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보자. 눈이 나쁜 사람이 눈이 좋게 하여 달라고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콘택트렌즈나 금테 명품안경을 주셨다고 가정하자. 이 콘택트렌즈나 금안경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며, 그것은 안경점에서 맞추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무릎 관절이 아픈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티타늄으로 된 인공관절을 무릎 안에 넣어주셨다고 어느 교인이 간증을 하였다면, 그것을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콘택트렌즈나 안경을 주실 필요가 없이 눈을 좋게 하여 주시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티타늄으로 된 인공관절을 무릎 안에 넣어주실 필요가 없이 그냥 자연적인 무릎을 치료하여 주시면 되지 않는가? 왜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자연상태로의 회복을 사용하지 않고, 인간이 대체하여 만드는 2차적인 방법을 사용하실까? 이빨에 문제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왜 자연적인 생이빨로 온전한 치료를 하여 주시지 않고, 치과기공소와 같은 합금 성분의 이빨로 대체시켜 주셨을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오직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야만 하며,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이다.
3. 기적과 표적에 대한 성경적인 결론
우리는 성경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리를 해 볼 수 있다.
(1)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을 미혹하기 위하여 사단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2)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기적과 표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가시적인 현상을 보고 추구하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
(3)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권능과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 7: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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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대체 왜 그렇게 입신이니 기절이니 하는 특이한 현상에 집착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은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왜 굳이 죽은 다음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그렇게 매달리는 지도 잘 모르겠어요.
현재의 삶을 통해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닐까요?
지금 현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닐까요?
요약하자면,
신앙의 길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의 길에 있어서,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도 없다고 보구요^^*
범돌님께서 완존 정답을 주셨네요.
격투기에서 아마추어는 무조건 휘두르지요. 그러나 고수는 공격을 두려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범돌님이 하신 말씀!"신앙의 길은..."더 어려운 것이 없다"라는 것이 참으로 두려운 것인 것 같습니다.
선무당 사람잡듯이 천국가는 청룡열차 빨리 타서 손오공과 만나고 싶나 봅니다.
알바인 우리 학생이 하는 말 "사장님! 사람들은 가끔 무식의 한계점을 잘 드러내요(우스겟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