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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동(崇義洞)
⚫독갑다리
⚫옐로우 하우스
숭의동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多所面)에 속해 ‘장천리(長川里)라 불리던 곳이다.
1871 년에 나온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 보면 다소면 관할 9개의 동네 가운데 장천리가 나와 있다. 1899년에 나온 「인천부읍지」에는 다소면 관할 10개 동네 가운데 역시 장천리가 들어 있다.
‘長川(장천)’이란 ‘기다란 개천’이라는 뜻이다. .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한자 이름인 장천리가 아니라 원래 우리말 이름인 ‘장사래말(마을)’로 불렀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 매립과 복개가 되고 건물들이 들어서 완전히 달라졌지만,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바닷가에 맞닿아 있고, 동네 앞으로 갯벌이 넓게 펴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 가운데로 기다란 개천이 하나 흘렀는데, 그 개천이 길고〈長:긴 장〉, 또 꾸불꾸불 흐르는 모양이 뱀 〈蛇: 뱀 사〉 모양과 같아서 ‘장사래말’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온다.
그런데 ‘長’자는 그렇다 해도, 뱀처럼 흐르는 모양이 왜 ‘사래’라고 불리게 됐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물론 같은 말에서 시작했어도 나중에는 서로 전혀 다른 모양을 갖게 되는 것은 땅 이름에서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런 만큼 ‘사(蛇)’가 ‘사래’로 모양을 바꾼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뱀 모양으로 흐르는 물과 관련해 붙는 땅 이름은 ‘뱀 내’ 또는 한자로 된 ‘사천(蛇川, 泗川, 巳川)’이다. 따라서 ‘사래’는 뱀과는 전혀 다른 뜻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를테면 ‘사래’는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하는 옛시조에서 보듯 논이나 밭의 이랑을 뜻하는 순 우리말일 수도 있다.
또 앞의 ‘장’도 ‘길다’는 뜻이 아니라 ‘잔가지’ 등의 단어에 쓰이는 것처럼 ‘가늘고 작다’는 뜻을 가진 접두사 ‘잔―’의 발음이 바뀐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장사래말’은 ‘잔사래말’이 되고, 그 뜻은 ‘작은 논밭들이 있는 동네’ 정도가 된다.
이 동네 에서 오래 산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940~50년대까지도 지금의 숭의2동 행 정복지센텨 일대를 비롯해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주변까지가 온통 밭이었고, 그 사이로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큰 밭은 없이 모두 조그만 밭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고 하니 ‘잔사래’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장천리는 그 뒤 여의리(如意里), 장천리, 독각리(獨脚里)의 3개 동네로 나누어진다.
1910년에 나온 「인천지지자료(仁川地誌資料)」에 보면 이들 3개 동네에 ‘如意里’는 ‘여의실’, ‘長川里’는 ‘장사래’, ‘獨脚里’는 ‘독갑다리’라는 우리말 이름이 함께 표시돼 있다. 이는 사람들이 각각 ‘여의실, 장사래, 독갑다리’라고 평소에 부르는 이름을 한자로 바꿔 쓴 것이 ‘如意里, 長川里, 獨脚里’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들 동네의 진짜 이름은 ‘여의실, 장사래, 독갑다리’이며, 이중 ‘여의실’은 ‘여우실’ 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고 한다.
‘여의실’은 이 마을에 있던 한 절에서 소원을 빌면 ‘뜻〈意〉대로〈如〉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너무 막연하고 억지스러워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이다.
지금 미추홀구청 일대는 옛날 이 여의실에 들어가는 땅이었는데, 이곳은 조선의 개국공신 인 경주 김 씨 계림군(鷄林君) 김균(金梱: 1341~1398)이 임금으로부더 하사받은 땅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이곳에서 살았고,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그 집안사람들이 이 동네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갖고 있었다.
현재 미추홀구청이 있는 자리에는 그 이전에 인천교육대학이 있었다. 이 학교는 원래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피란을 온 개성사범학교가 그 전신(前身)이다. 당시 이 학교가 인천으로 와 학교를 지을 곳을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을 때 학교 지을 터로 이곳 땅을 내준 것도 바로 이 집안이다.
그래서 미추홀구청 앞 꽃밭에는 이런 사실과 함께 「여우실 경주 김 씨 종가터」라고 쓴 표지석이 서 있다. 하지만 이들 집안의 이야기도 ‘여의실’ 또는 ‘여우실’ 라는 이름의 유래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보다는 ‘여의실’이 ‘여우실’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는 점으로 미뤄 ‘야트막한 언덕 마을’ 정도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이 동네에 자그마한 언덕들이 많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一‘여우실’에 대해서는 남동구 ‘도림동 + 여무실’ 편 참고)
이 동네에 오래 산 사람들이 남긴 인터뷰 자료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다음은 그 중 한 예이다.
“1948년도에 승의동 장사래 마을로 이사를 왔어요. 그때 동네는 전부 다 농토고, 높은 산은 별로 없었어요. 큰 왕릉 크기의 비슷한 산, 조그만 산들이지요. 현재 남구청(미추홀구청) 정문 자리에 그런 게 있었어요. 구릉이자 무덤 같은 산이에요. 그게 조그만 산이었지. 근데 거기 6·25 때 탱크들도 와서 숨어있었고, 탱크 지나간 다음에 미군이 야포부대를 만들었어요. 그러고 있다가 몇 년 뒤에 사범학교를 지으니까 그게 싹 나가버렸어요.”
이를 보면 동네에 산(山)이라기보다는 야트막한 언덕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고, 여기서 ‘여우실’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한자로 바꿀 때 대략 비슷한 발음에 뜻도 좋은 글자들을 따서 ‘如意里’라 한 것이다.
독갑다리
‘독각리’는 지금도 ‘독갑다리’ 라는 지명에 남아있는 이름이다.
숭의동 교차로에서 ‘평양옥’과 ‘이화순대’ 등의 음식점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지 역 일대를 말하는데 ‘독각다리’ 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한때 속칭 ‘니나노집’이라 했던 술집들이 여러 곳 모여 있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던 동네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 니나노집이 있던 곳 대부분에 각종 공구(工具)를 파는 상가 등이 들어서 이전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또 비가 조금 많이 내리기라도 하면 물이 넘쳐서 주변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어 놓은 개천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개천도 모두 복개돼 옛일을 떠올리기 어렵게 됐다.
‘독갑’ 또는 ‘독각’ 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우리말 ‘쪽다리’, 곧 ‘긴 널조각 하나로 걸쳐놓은 외나무다리’가 있어 외나무다리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獨脚(독각)’이 동네 이름이 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옛날 이곳이 바다에 닿아있다 보니 물건을 사고팔기가 쉬워 옹기장수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여기서 독을 사고 팔 때 주고받던 ‘독값’이 ‘독갑’으로 바뀌었다는 해석이다.
이와 달리 장독과 같은 독에 흙을 채운 뒤 이를 다리기둥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설명도 있고, 이 동네 주변에 ‘도깨비산’이라 불리던 산이 있었기 때문에 ‘도깨비다리(도까비다리)’라고 불리던 다리 이름이 바뀌어 독갑다리가 됐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런데 이곳에 대한 이전의 기록을 보면 이 중 어느 것이 맞는다고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한 예로 고(故) 김상봉 전 인천일보 고문이 남긴 기억은 이렇다.
“제가 어릴 적에 보면 숭의공설운동장 앞에 전부가 백사장입니다. 거기가 전부 모래판이었죠. 제가 어렸을 적에 그 모래판에 항아리장수, 독장수들이 많았어요. 옛날에 숭의운동장 앞에서 승의3동으로 넘어가는 그 길 앞에도 물이 많아서 미나리광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물이 독갑다리 쪽으로 내를 이루고 모래바닥 사이로 흘렀어요. 제가 어렸을 적의 기억으로는 거기를 건너다니기 위해 냇가 그 사이에 전부 다리를 놓았는데, 제 기억으로는 그때 관뚜껑으로 많이 다리를 놨어요. 네. 그랬습니다. 또 독장수들이 많았다는 데서 얘기하시는 분들은 독갑이 그러니까 독 깨진 거, 항아리독 깨진 것들을 전부 밟고 다니게 그렇게 놨답니다. 그래서 거기서 유래가 돼가지고 독갑다리라고 그런 얘기가 나온 게 아닌가 말씀하시는 촌로도 계셨는데요…”
이 내용을 보면 이곳에 다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그것도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다리를 대부분 관뚜껑으로 놓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장례식 때 쓰는 관(棺)의 뚜껑(덮개)우로 놓았다고 했으니, 그것들은 주로 널빤지 비슷한 나무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깨진 독으로 다리를 놓았다”는 것은 그 당시의 다른 노인들이 그렇게 얘기한 것을 들었다는 얘기이지, 자신이 직접 보았다거나 그때 그랬다는 말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칫 번째 해석, 곧 ‘긴 널조각 하나로 걸쳐놓은 외나무다리’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외나무다리’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한 개의 통나무로 놓은 다리”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통나무가 아니어도 나무다리가 하나밖에 없을 때 이 단어를 쓴다. 그런데 이곳에는 관뚜껑으로 만든 다리가 여러 개 있었다고 했으니 ‘외나무다리’라는 말이 맞지 않는다.
이래저래 ‘독갑다리’의 이름 유래는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독갑다리’ 가 앞에서 말한 ‘도깨비다리(도까비다리)’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라는 주장이 재미가 있다.
예전에 이곳은 시의 외곽지역으로 주거 환경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고(故) 신태범 박사가 「인천 한 세기」에 적어놓은 다음 구절을 보면 짐작이 간다.
“공설운동장(지금의 인친축구전용경기장) 앞 소방서가 있는 언덕에는 화장장과 전염병자 격 리병원인 덕생원이 있었다. 이 언덕 아래를 흐르고 있던 개천에 다리가 있었는지 이 근방을 독갑다리라고 불렀다. 독갑다리는 서울의 수구문(水口門―시구문) 밖 같은 음산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여기 보면 덕생원과 화장장(火葬場) 이야기가 나온다.
덕생원은 전염병자들을 격리시켜 따로 수용하고 치료하던 병원이다. 흔히 ‘피병원(避病陶’이라 불렸던 곳으로, 지금 중앙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에 있었다. 원래는 중구에 있다가 1921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는데, 건물은 6·25 전쟁 때 폭격으르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오래 산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병원이나 화장터가 요즘과는 달라서 예전에는 깨끗하게 관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비가 오는 날이면 화장텨에 묻혀 있던 뻣조각들이 드러나면서 빛(燐光:인광)을 내비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빛을 ‘도깨비불’이라 불렀고, 화장터가 있는 언덕을 ‘도깨비산’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 도깨비산 쪽에 있는 다리라고 해서 ‘도깨비다리’ 또는 ‘도까비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 말이 바뀌어서 ‘독갑다리’가 됐다는 말이다.
어쨌든, 장사래말이나 독각리는 모두가 이곳에 다리를 놓아야 건널만한 개천이 흐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의리와 장천리, 독각리는 1914년에 새로 생긴 부천군(富川郡)으로 편입되며 한데 합쳐져 장의리(長意里)가 된다. 이는 장천리와 여의리에서 한 글자씩 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 장의리가 광복 뒤인 1946년 1월 그간의 이름과는 관계없이 ‘숭의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다.
‘숭의’는 일제(日帝)로부티 벗어난 광복을 경축하면서 “옛 신령(神靈)들을 숭상(崇尙)해 뜻을 이루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말뜻은 좋은지 모르나 곁국 이전의 역사와 아무 관련도 없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옐로우 하우스
한편 숭의동에는 인천의 대표적 사창가로 알려졌던 ‘옐로우하우스’가 2019년까지도 대부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는 일제 강점 기 때부터 중구 선화동 일대에서 기생들이 운영했던 ‘유곽(遊廓)’이 옮겨와 생긴 것이다.
1961년 들어선 군사정부는 사회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이들 유곽을 시내인 선화동에서 시 외곽이었던 숭의동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들이 새로 건물을 짓고 영업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사창가가 자리를 잡게 됐다.
‘옐로우 하우수’라는 이름은 이곳에 새로 지은 영업집들이 모두 노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가 전해 온다.
첫째는 당시 인천의 각 행정·사법 기관장들이 회의를 열고 사창가인 이 지역을 다른 지역과 구분 짓기 위해 건물을 모두 노란색으로 칠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근처 미군부대에서 나무와 페인트 등을 많이 얻어 썼는데, 그때 미군부대에서 많이 갖고 있던 노란색 페인트를 주로 얻어 썼기 때문에 노란색 건물이 많아져 생긴 이름이라는 얘기다.
이 중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건물이 대부분 노란색이 된 결과는 똑같다. 그러나 그 뒤 이곳의 노란색 판잣집들이 지역의 인상을 좋지 않게 만든다며 구청이 붉은색 벽돌로 건물을 새로 짓게 함에 따라 노란색 집들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옐로우하우스’라는 이름은 여전히 살아남아 지금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