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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대전도심 … 피난민들 '자유의 움막촌'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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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대전·충남 6·25 참상...치열했던 대전전투 상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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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는 1950년 7월 14일부터 7월 20일까지 대전시내 일원에서 벌어졌다. 미국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를 계속하자 일본에 있던 24사단을 급파해 전선에 투입했다. 그러나 24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최정예 1군단(군단장 중장 김웅)에 일방적으로 밀렸다. 1군단 소속 3사단(시단장 소장 이영호), 4사단(사단장 소장 이권무), 105전차사단(사단장 소장 류경수)은 서울 점령을 주도한 부대로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다. 미 24사단은 대대 혹은 연대 단위로 저지선을 폈지만 오산-평택-천안-조치원-금강(대평리) 전투에서 연패했다. 미 8군 워커 사령관은 7월 18일 대전비행장을 방문, 24사단 윌리엄 에프 딘 소장에게 20일까지 대전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미국에서 증파된 후속부대가 영동-김천-대구-부산를 잇는 경부 축(軸)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딘 소장은 주력 34연대를 유성에서 갑천을 건너 대전시내 이르는 길목인 월평산성쪽에 배치하고, 영동에 있던 19연대 2대대와 금산의 수색중대를 대전으로 이동, 지원토록 했다. 본격적인 전투를 7월 19일과 20일 이틀간 벌어졌다. 미군은 월평산성에 주력을 배치하고 청주로 이어지는 읍내동, 논산으로 연결되는 정림동에 각가 1개 소대를 펼쳤다. 19일 새벽부터 북한군은 야크 전투기와 전차를 동원하여 대전시내 진입을 시도했다. 유성과 대전의 서쪽 가수원, 남쪽 보문산 진출을 시도했다. 미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인 방어에 나섰다. 여러 곳에서 미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20일 오전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워 미군 진지를 유린하면서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사방을 포위한 채 공격하면서 소규모 부대를 보내 남쪽으로 빠지는 금산과 옥천쪽 도로를 차단했다. 북한 전차는 미군 저지선을 뚫고 대전역까지 진출했다. 미군은 딘 사단장과 34 연대장 찰스 뷰챔프 대령까지 3.5인치 바추카포로 북한 34-전차를 파괴하며 분전했지만 병력 열세와 지휘계통 붕괴, 퇴로차단으로 인한 혼란까지 겹치면서 급격하게 무너졌다. 이날 오후 미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금산과 옥천으로 빠져나가면서 전투가 끝났다. 이로써 대전은 7월 20일부터 9월 29일까지 67일간 북한군이 지배했다. 대전전투에 참전한 미군 3933명 중 전사 48명, 부상 228명, 실종 894명의 손실을 입었다. 북한군은 보병은 큰 타격이 없었으나 105전차사단이 보유한 T-34 탱크 150대 중 15대를 잃었다. 24사단이 패배했지만 미군이 전선을 추스를 시간을 얻었기 때문에 '전투는 북한군 승리, 전략은 미군 승리'라는 해석을 낳았다. 금산방면으로 후퇴하던 딘 소장은 길을 잃어 북한군 포로가 됐다가, 정전협정이 이뤄진 뒤 석방됐다.
김재근 기자 kim88@daejonilbo.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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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