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과 허물없는 친구가 되어 지내는 일은 이민와서 사는 한국사람에게도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는 일입니다. 웬지모르게 마음이 닿지 않고, 마치 뻣뻣한 행주처럼, 섬세한 우리네 마음속의 구석과 모퉁이를 야무지게 닦을 수 없는 듯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사람들과 깊은 정을 나누지 못하고, 꿔다놓은 보리자루 모양, 절반은 어색함, 절반은 지나친 친절로 거리를 두게 되는 듯합니다.
다른 문화권 사람과 편견없이 친근하게 만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우리에게 그 일이 쉽지 않은 까닭은 우리의 습성 안에 남과 우리를 가르는 배타성이 배여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얼핏, 영어소통수준이 주된 요인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그것은 현상이지 본질은 아닌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비약을 하자면, 우리사회의 호남/영남간의 지역감정 이나, 이민객/유학생 사이의 쪼잔한 인식차이 등도 우리의 습성에 배여있는 배타성의 표증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가끔, 쉬고 싶은 일요일에 지하실에 있는 낡아 빠진 골프채 짊어지고 동네 골프장에 혼자 터벅터벅 나가는 때가 있습니다. 보통 네 사람이 치기 때문에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만나 같이 치게 됩니다. 미국사람일 때도 있고, 한국사람일 때도 있는데, 문화적 습성의 차이를 여실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미국사람과 같이 치게 되면, 처음에 서로 이름 얘기 하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다음에는 곧 꺼리낌없이 농담도 하고 웃으며 친근해져 재미있습니다. 18 홀을 마칠때 쯤이면 그사람이 이혼을 몇 번 했는지, 여자친구나 아내의 취미가 뭔지, 어제밤 섹스를 했는지, 혹은 자기집 다락에 묶어둔 할머니가 있는지 없는지 (ㅎㅎㅎ a figure speech to mean the kept secrets) 도 알게 됩니다. 하물며, “야.. 어쩌면 그렇게 못 칠 수 있냐?” 라고 허물없이 놀리며 하뭇한 재미를 공유 할 수 있게 됩니다.
반면에, 한국사람들에 끼어 치게 되면 몇가지 눈시험을 치루어야 합니다. 곁눈짓으로 아래위를 훑어 본다든가, 어딘지 모르게 자기편(?)이 아닐꺼 같은 미심쩍은 눈초리를 건네주고 난 후에 이름을 얘기 하는데, “저는 박입니다, 아.. 나는 김입니다” 라고 성씨만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 네 반갑습니다, 나는 이 아무개입니다” 라는 또박스런 나의 대답에 “흠, 이사람은 조금 다른 구석이 있네” 라는 반응이 역력히 읽혀 집니다. 일단, 그 다름이 확인 되고난 후에는 잡담 주고받는 것을 영 어색해 합니다. 그중 사교적인 사람은 “골프를 몇 년 치셨습니까?” 라든가, “미국에 오신지 몇 년 되었습니까?”라는 연배에 관련된 상투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마치 자기는 두꺼운 철갑옷을 입고서 남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일방성을 고수 합니다.
대체로 미국사람들은 삶의 보편적인 사실들을 공유하고 그것에 대한 구차한 설명이나, 섣부른 도덕적 비난을 (judgmental) 입바르게 하지 않습니다. 삶의 보편적인 사실들이란 이를테면, 이놈의 골프는 아무리 쳐도 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은 앞뒤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뭐 사상가냐?; 내가 말은 그럴듯하게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나는 탐 크루즈가 아니다; 너의 비밀들은 알고보면 사실 비밀꺼리도 아니다; 세상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나에 대한 인신공격이 아니다, 왜냐면 나는 그다지 대단한 사람이 아닌게 뻔하기 때문이다. (I will not take things personally)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만나서도 스스럼없이 얘기 나눌 수 있는 공감대인 것 같아요.
당연히, 한국사람들도 이런 것들을 동감하고 공유하는 것들이지만, 차이는 한국사람들의 습성에는 그 공유의 대상을 임의로 좁혀놓고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는 것 같습니다. 서양문화의 배타성은 적대적이기 때문에 공격적이지만, 우리문화의 배타성은 소극적이며, 개인적이여서 넓은 곳에 가면 쓸쓸해지는 것 같습니다.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을때, 무뚝뚝한 대답이 나오면, 그것이 나와 말을 하기 싫다는 것인지, 그 분이 혼자 조용히 골프만 치고 싶다는 것인지 조심스러워 진다는 말이지요. 서로 어색하게 약 10리 길을 걷기는 쓸쓸한 일입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미국인 한 부자와 같이 골프를 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은퇴한 경찰간부였고, 아들은 현역 경찰이였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보통 아는 사람들끼리 곧 잘 내기를 하기 때문에 제법 심각하게 치는 것과 달리, 미국사람들은 골프친다는 것 보다, 서로 바쁜생활 속에 여유를 찾기 위한 의미가 더 많은데, 이 부자도 역시 그랬습니다. 공이 잘 맞지 않으면, 놀리며 같이 웃는 일이 됩니다. 나도 이 재미있는 부자사이에 끼여, 같이 이얘기 저얘기 하며 치게 되었습니다. 중간 쯤 되서,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한 아들이 먼저 공을 때렸는데 그만 헛 맞아서 멀리 가지 않았지요. 푸르럭 대며 아들은 먼저 걷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뒤에 작달막하고 뚱뚱한 이 아버지가 공를 쳤는데 그만 힘없이 날아가 앞에서 걷고 있는 아들의 등에 맞았습니다. 멀리서 돌아 보며 더욱 푸르럭 거리고 있는 아들을 보고 난 후, 이 아버지는 나에게 "공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구 하던데..., 괜찮아, 걱정 할 필요없어. 집에가면 아들이 두 명 이나 더 있어!" 하는 말에 나는 폭소를 터트리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만나 친구가 된 그들은 아직도 연락을 하고, 서로 위로하고 도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친구란 자기들끼리만의 대단한 역사가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변하는 주변에 따라 만나는 사람도 달라지는 것을 흐르는 시냇물처럼 받아들여 진솔하게, 평범하게 열린 마음으로 만나면 인종이나 문화의 차이를 불구하고 만나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끼리의 사랑방식 편안함을 포기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미국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동안 자기의 행동이나, 몸가짐등이 마치 한국전체를 대표한다는 신앙으로 자기를 규제하고, 짐짓 모범이 되려는 업보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나는 바로 이것이 소극적 배타성을 고수하는 변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00년전 미국시인 Ralph Waldo Emerson 의 고백은 아직도 새롭습니다. “내가 베푼 덕은 다시 덕이 되어 나에게 되돌아 오는 것처럼, 친구를 얻으려면 친구가 되어주면 된다 (The only reward of virtue is virtue, the only way to have a friend is to be one)” 친구가 된다는 것이 항상 옳은 말만 하는 선생역할이 아니고, 지혜를 전해주는 부모역할도 아닌, 그때그때 만나 경험을 나누워 힘이 되어주는 것이라면, 맘에 드는 한국사람 뿐만 아니라, 문화가 다르고 생김이 다른 미국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인종적, 문화적 차이를 불구하고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 만나 친해 지는 일을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훨씬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 남자들이 미련하여 세상을 더 좁게 사는거 아닌가 자문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여러번 사랑을 하게 되며, 사랑의 모습과 깊이도 달라지는 것은 인정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사랑을 주면 된다는 이 엄연한 진실이, 겉모양만 봐도 정겨운, 한국사람들과는 교감하고 나누기 쉽지 않은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