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로 지명이 불리어지는 곳이 우리나라 주요도시들마다 더러 있다. 예컨대 서울의 '딸라 골목'이 그렇고, 부산의 '텍사스 촌,' 인천의 '차이나타운' 등이 이에 해당된다. 마산에도 있었다. 홍콩 이름을 딴 '홍콩빠'다. 있었다는 과거형이니 사라지고 만 것으로 여겨질 것이지만 그게 아니다. 지금도 그 명맥은 유지되고 있다.
도시들의 이런 외래어지명은 행정적인 차원에서 붙여진 것이 아니다. 그곳의 주된 기능성과 관련해 사용자와 이용자 사이에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고 불리어지면서 고착화된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경우 인천 화교들의 주 거주지이기 때문에 행정적인 의미가 가미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외국어로 된 것은 뭔가 좀 이국적이고 색다른 느낌을 주면서 그곳의 기능성이 강조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산의 '홍콩빠'는 기능적인 차원에서 말 자체가 나타내듯 술집을 뜻한다. 마산이 예로부터 술맛이 좋을뿐더러 술이 많이 생산되는 이른바 '술의 고향(酒都)'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측면에서 보면 이를 바탕으로 뭔가 이국적이고 낭만감이 감도는 이름이다. 더구나 마산이 바다를 낀 항구도시라는 점도 홍콩의 그 이미지와 부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산에 좀 살았다는 사람들은 남성동 선창가의 '홍콩빠'를 대부분 잘 안다. 그곳에 그것이 있었고, 그곳에서 술을 마셔봤으니까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마산의 '홍콩빠'를 둘러싸고는 여러 얘기가 있다. 이곳이 마산의 명소로 부각되면서 '홍콩빠'가 언제 생겼느냐 에서부터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었는가에 대한 다정하고 애정 어린(?) 논란이 있다는 얘기다. 이런 논란의 한 측면은 '홍콩빠'가 어떻게 생겨났고 이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관점도 작용하는 것 같다.
마산의 '홍콩빠'는 옛 남성동 해변에 얼기설기 천막으로 지어져있던 선창가 주점을 말하는 것으로, 1970년에 들어서 이름 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횟집 촌'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좀 성급한 감이 있다. '홍콩빠'라고 불리어지기 전의 선창가 그 주막들은 한 마디로 온전한 술집의 구색을 갖추지 못했다. 그저 나무판자에 비바람이나 막을 요량의 천막으로 얼기설기 걸쳐 지어진 간이주막이었다고나 할까. 바다에 반쯤 걸쳐진 어떤 집은 바닥 판자 아래로 바닷물이 촐랑이는 가운데 탁자 한 두어 개에 술을 내놓고 있었다. 이 무렵에는 물론 '홍콩빠'라는 이름이 없었다.
주인들의 면면도 기억난다. 대부분은 남성동 어시장에서 허드레 일로 연명하는 분들이어서 남성동에 살던 사람들과는 안면이 있었다. '횟집 촌'으로 부르는 게 성급했다는 이유는 나오는 안주가 대변한다. 초기엔 지금 관점의 생선회는 없었다. 멍게, 해삼과 그 흔했던 미더덕(날 것)이 주류였고, 어쩌다 생선 한 두 어 점 썰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노가다 판 술집에서 내놓은 굵은 소금도 있었다. 이게 당시로는 막소주 마시기엔 좋은 안주였다.
남성동 선창가의 이 간이술집들은 빈약했지만, 술값도 싸고 그런대로 멋과 운치가 있어 술꾼들 사이에 서서히 알려진다. 선창가를 지나다니는 호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주 고객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청년들이 많았다. 보수성이 강한 도시의 특징이 젊은이들이 갈 마땅한 술집이 없다는 점이다. 마산도 그랬다. 그러니 어른들 눈치 안 보고 얄팍한 호주머니에 맞는 적당한 돈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으면서 이름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남성동의 이 선창가 간이주막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마산의 젊은 청년학생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울서 대학을 다니던 마산의 이른바 재경대학생들이 아닌가 싶다. 당시는 대학진학률이 높지 않아 지방도시의 경우 지금처럼 대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러니 뭔가 우쭐해하는 경향들이 대학생들 사이에 있었다. 좋은 말과 의미로 자부심이라고 해도 될 성 싶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학생들의 이런 마인드와 함께 군사독재정권 아래 계몽성을 띤 문화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던 시기가 그 무렵이다. 마산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 마산학생들은 방학이 돼 고향으로 내려오면 각가지 행사를 가졌다. 매년 정기적으로 음악회, 문학의 밤, 연극제, 그리고 정치토론회 형식의 심포지엄 같은 것을 열었다. 고향에서의 이런 행사들을 통해 기존의 정치. 사회행태와 기성문화를 개선해보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섣부른 치기도 있었기에 용두사미적인 것이 많았다. 지역 여론으로부터 비판도 받는다. 어느 해인가는 지역 언론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한잔 술로 목을 축이는 곳이 바로 '홍콩빠'였다. 행사와 모임장소들이 주로 창동이었으니까, 바로 남성동 선창가로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곳이 '홍콩빠'였다. 그렇게 되면서 그곳은 창동의 '음악의 집'과 더불어 학생들의 '아지트' 비슷한 장소 역할을 한다. 주머니가 좀 되면 창동으로 가고, 헐렁하면 남성동 선창가로 가고. 그렇게 청년학생들이 많이 들락거리고 한 집 두 집 늘어나면서 지금 운위되는 횟집촌의 형태를 띠게 되면서 그 무렵 이곳이 '홍콩빠'라는 명칭으로 불리어진 것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명칭의 작명시기 등과 관련해 여러 얘기들이 있다. 대개는 1960년대로 잡는 얘기들이 있다. 이 시기 남성동 어시장에 지금의 어시장 횟집거리와 비슷한 횟집촌이 있었는데 일명 '홍콩빠'로 불리었다는 것. 이는 물 위에 판잣집을 지은 홍콩 빈민가와 비슷한 모양이어서 그랬다는 것부터, 1960년대부터 남성동 선창가에 가건물형태의 횟집이 하나 둘 모여 형성된 집단 횟집촌이 생기면서 '홍콩빠'가 됐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홍콩빠'를 잘 기억하는 사람들은 '홍콩빠'라는 이름이 1970년대 초 붙여진 것으로 추측한다. 왜 '홍콩빠'였느냐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얘기가 있다. 술을 마신 후 술 갑 추렴을 하며 계산을 치르다 주인에게 농담조로 자주 던진 "홍콩서 배 들어온다. 그라마 한 잔 씨게 사꾸마..."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홍콩에서 배 들어온다"는 말은 홍콩에서 라이타돌을 가득 실은 배가 들어오면 돈이 생긴다는 뜻으로 호기를 부리고자 하는, 당시에 유행하던 농담이다. 말하자면 농담 삼아 홍콩 라이타돌 판돈으로 술을 마신다고 자주 그러니까 '홍콩빠'가 되고 그렇게 불리어졌다는 것이다.
'홍콩빠'는 전국적인 유명세도 탄다. 당시는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이른바 운동권학생과 인사들이 많았을 때다. 마산은 '3.15의거'로 부각된 '혁명과 저항의 도시'아닌가. 자연 반체제 및 운동권학생들에게 마산은 하나의 '성지'였을 수도 있다. 이 무렵 정권의 칼날을 피해 다니던 운동권학생들이 이런 저런 연고로 몸을 숨기던 곳도 마산이었다. 이들이 또한 '홍콩빠'를 많이 다녔다. 좀 다른 차원이지만 한 서울출신 여학생이 기억난다.
S대 재학 중 학생운동으로 강제 징집된 연인이 마산인근 어떤 군부대에 있었는데, 그 사람 가까운 곳으로 택한 곳이 마산이다. 중성동 D병원에서 가정교사로 숙식문제를 해결하면서 저녁이면 '홍콩빠'를 찾았다. 술이 셌다. 남자들과도 곧잘 마셨는데, 훤한 대낮에 여자와 같이 마시는 낯을 보일 수 없어, 그 여학생을 거리 쪽으로 바라보게 앉히고 같이 마셨는데 그러다 그 여학생 술을 당할 수 없어 엎드러져 뻗었다는 어떤 선배의 얘기가 전한다.
지금은 유수한 대학의 교수와 학자로 재직 중인 몇몇 당시 운동권학생들의 '홍콩빠'에서의 면면도 기억에 새롭다. 김민기의 '친구'라는 노래가 운동권학생들 사이에 불려 질 때다. 군대 강제징집을 앞둔 비오는 어느 날 밤, 컴컴한 바다를 바라다보며 울면서 이 노래를 소리 내어 불렀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어디가 하늘이오/어디가 땅이오..." 걸쭉한 시를 바탕으로 반체제 활동을 하다 검거당한 후 가포 결핵요양소에 연금돼있던 모 시인도 가끔 마산으로 나오면 들러 후배들과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곤 하던 곳이 '홍콩빠'고 그래서 이곳이 더 유명해졌다.
'홍콩빠'의 전성기는 그러니까 1970년대일 것이다. '고향의 봄'의 이원수 시인도 고향인 마산으로 일이 있어 내려오면 제자와 후학들이 숙소로 잡아주는 호텔을 마다하고 대개는 남성동 선창가 인근의 여인숙에 묵으며 '홍콩빠'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그 때가 '홍콩빠'의 전성시절 그 무렵이다. 그 후 마산 바다의 매립 바람을 타고 '홍콩빠'가 있던 자리는 없어졌다. 이제는 '홍콩빠'가 있던 정확한 위치조차 가물거린다. 예전의 위치는 남성동에서 선창가로 나있는 큰 길에 연해있는 해변이었다. 그 오른편으로 충무와 부산, 거제로 가는 천신호. 웅남호가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었다.
'홍콩빠' 한창 전성기 때는 선착장 해변까지를 넘어 들어차 밤이면 불야성을 이뤘다. 남성동 바다가 매립되면서 '홍콩빠'는 근처 대우백화점 뒷골목으로 옮겼다는데, 여러 집들로 횟집촌을 이룬 그곳은 그래도 아직 그 명칭은 '홍콩빠'로 불린다. 언젠가 '홍콩빠'의 정확한 옛 위치를 가늠해본 적이 있다. 대략 현재 농협 남성동지점 일대가 아닌가 싶어 인근의 다른 분들께 물어봤더니 그들도 그렇다고 했다.
첫댓글 1970년대에 나무바닥 사이에 출렁이는 바닷물 보면서 한잔하던 그 시절 그립네.
50년전 홍콩바 투어한거 같다.
땡큐!!!
마산 이야기 고마와요
남성동 137은 소인의 본적지라서 더욱 ^^
나는 남성동 113번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