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리[Gongse-ri, 貢稅里]
바다를 마주보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동남쪽에는 농경지가 분포한다. 공세창이 있었으므로 공세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공세지, 동강, 서강, 새원, 천등마을 등이 있다. 공세지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공세리의 그것과 같다. 동강마을은 공세지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배가 닿았었다고 한다. 서강마을은 공세지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에는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와 조세를 배에 직접 실어 냈다고 한다. 새원마을은 공세지 북쪽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새로 언(뚝)을 막고 마을이 되었으므로 새원이라 하였다. 천등말은 서강 남쪽에 있는 마을로, "천등혈(天燈穴)"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공세리성당[貢稅里聖堂]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 성당.
내용
1895년 6월양촌성당(陽村本堂, 구합덕성당의 전신)에서 분리 창설되었으며, 공세리란 명칭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에 위치한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이 후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보존하던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는 양촌본당의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이미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1897년 6월에는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공세창이 있던 일대를 매입한 다음,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또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 사업에도 앞장서 공세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1920년대 들어 신자수가 증가하자 기존의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이 후 9대 주임 이인하(李寅夏) 신부는 1958년 초에 강당을 신축하였고, 1971년 1월에는 13대 주임 김동욱(金東旭) 신부가 성당을 증축하고 별관을 완공하였다.
참고문헌
『공세리본당 100년사』(공세리본당100년사편찬위원회, 천주교대전교구공세리교회, 1998)
『한국가톨릭대사전1』(한국교회사연구소, 분도출판사, 199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공세리비석군[貢稅里碑石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조선시대 비석군.
건립 경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의 공진창 터에 있는 9기의 비석과 인근의 2기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공진창은 충청도 인근 40여 고을로부터 모아진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 80칸의 조창이었고 이를 한양으로 조운하는 책임을 맡은 해운판관(海運判官)이 주재하였다. 근래 삽교천방조제와 아산만방조제의 건설에 따라 인근 지형이 크게 변모하였고, 산재하였던 해운판관의 비석과 고을 관리의 비석을 잔존하는 공진창 석축 옆에 나란히 조성해 놓았다.
위치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공세창 석축에 있으며, 2기는 동쪽으로 약 50m 방향 길옆에 있다.
형태
공세창 석축에는 9기의 비석이 있는데 현감 오경선 영세불망비[현감오후경선영세불망비(縣監吳侯敬善永世不忘碑)], 현감 이석희 애민선정비[현감이후석희애민선정비(縣監李侯錫禧愛民善政碑)], 참봉 지석범 자선비[참봉지공석범자선비(參奉池公錫範慈善碑)], 삼도해운판관 이동근 선정비[겸삼도해운판관이공동근선정비(兼三道海運判官李公東根善政碑)], 도사겸 해운판관 이의만 만덕흡조대만세불망비[도사겸해운판관이공의만덕흡조대만세불망비(都事兼海運判官李公宜晩德洽曹臺萬世不忘碑)], 도사겸 해운판관 이진휴 애휼조졸영세불망비[도사겸해운판관이공진휴애휼조졸영세불망비(都事兼海運判官李公震休愛恤漕卒永世不忘碑)], 삼도해운판관 장차주 청덕무사영세불망[겸삼도해운판관장공차주청덕무사영세불망(兼三道海運判官張公次周淸德無私永世不忘)], 삼도해운판관 조형기 선정비[겸삼도해운판관조공형기선정비(兼三道海運判官趙公亨期善政碑)], 삼도해운판관 한진기 청덕선정비[겸삼도해운판관한공진기청덕선정비 덕흡삼창 은류만고(兼三道海運判官韓公震埼淸德善政碑德洽三滄恩流萬古)]이다. 한편 인근에 2기가 길옆에 더 세워져 있는데, 영의정 김좌근 영세불망비[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領議政金公左根永世不忘碑)]와 군수 이석구 애민선정비[군수이후석구애민선정비(郡守李侯奭求愛民善政碑)]이다.
현황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의 도로 주변에 있던 비석을 공진창 석벽에 세운 것은 해운판관비의 의미에 걸맞는다. 당시 해운판관의 직책 중요도에 따라 권한은 관찰사에 버금갈 정도였다. 해운판관비는 이수를 갖춘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조성되어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주변은 좁은 차도변에 있어서 협소하고 정비가 혼잡한 편이다. 인근의 영의정 김좌근과 군수 이석구의 송덕비는 민가의 담장 옆에 겨우 서 있는데, 당대의 실력자인 김좌근에 비해 초라한 지위를 말해 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에 있던 공세창은 여러 고을의 세곡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막중한 중요성을 띤 유적이지만, 잔존 유구는 대단히 미약한 상황이다. 해운판관비를 비롯한 공세리 지역의 비석을 함께 설치하여 놓아 유서 깊은 옛 흔적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는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아산금석기문』(충청남도아산군·공주대학교박물관, 1994)
『인주면 향토지』(인주면향토지편찬위원회, 2005)
『아산시지』2(아산시청, 2016)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8월이면 성당의 이미지가 꽃대궐로 바뀌게 될 수십년 자란 베롱나무(목백일홍)
6.25로 모든 것을 잃고 폐허속에서 재기에 몸부림치는 군상들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저녁노을속에 은은히 들리는 미사의 종소리에 회한의 눈물을 짓는 모습들을 보는듯하여 가슴이 쓰라려오는 우리모두가 걸어온 전쟁의 상처가 남긴 노래이다. 작곡가 전오승과 남매간인 라애심씨는 백치아다다, 과거를 묻지마세요, 미사의 종등을 불러 인기가 급상승했고 연예인 가문의 허스키 보이스인 그 분은 영화감독과 아역 배우,처녀 가수를 가족으로 둔,연기와 노래가 다 되는 대형 가수였다. 미성과 작은 미모의 가수들만 보다가 개성적이고 큼직한 그 분의 용모와 소리를 듣는 것은 상쾌한 감각이었다. 히트곡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다....50년대 중반 가수로, 영화배우로 활약했던 가수 나애심(羅愛心)은 이북출신으로 꽃다운 처녀 18세 때 대동강 다리를 건너왔다. 가수 김혜림의 어머니..."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영화가 있었고 그 영화의 주제가가 지금은 복음성가 가수가 된 나애심(羅愛心) 집사의 히트곡이 되었습니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1957년 나애심씨가 불러 히트한 대중가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작사 정성수·작곡 정오승·노래 라애심)의 노래비가 서울 광진구 구의2동 91번지 거리공원에 세워진다.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이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아래 영문을 클릭하여 나애심 노래 미사의 종을 들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QJWvTXVlqWY&list=
미사의 종 나애심 노래
빌딩의 그림자 황혼이 짙어갈 때에
성스럽게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
걸어 온 발자욱마다 눈물 고인 내 청춘
죄많은 과거사를 뉘우쳐 울 적에
아~ 산타마리아의 종이 울린다
흰눈이 나릴 때 미사가 들려오면
가슴 깊이 젖어드는 아베마리아
흰눈 위의 발자욱마다 눈물 고인 내 청춘
죄많은 과거사가 나를 울릴 적에
아~ 산타마리아의 종이 울린다
2023-3-30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