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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한밝뫼(태백산) 눈꽃축제
황지못 집터 전체가 못으로 변해버리고 며느리마저 돌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낙동강 1,300리 예서부터 시작되다" 525km 낙동강의 발원지가 이곳임을 알 수 있다. 표지석 뒤쪽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있으며, 그 둘레는 약 100m 정도. 이곳에서 하루 5천여톤의 물이 쏟아져 나온다.
태백시를 둘러싼 함백산, 백병산, 매봉산 등의 줄기를 타고 쓰며들었던 물이 모여 못을 이룬 것이다. 이 물은 시내를 흘러 구문소를 지난 뒤 경상북도, 경상남도를 거쳐 부산의 을숙도에에서 남해로 유입된다.
옛 문헌인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등을 살펴보면 황지연못은 낙동강의 근원지라고 밝혀놓고 있으며, 처음에는 '하늘못' 이라는 의미로 천황이라 했고, 황지라고도 했다.
구문소(求門沼) 철암에서 장성으로 가는 길 중간 동쪽 철암천과 만나는 곳. 동점동 자개문 옆에 위치. 이 물줄기는 바위에 구멍을 뚫고 물길을 낸 뒤 큰 소(沼)를 만들었다.
얼음백마 9사단
황지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오랜 기간 석회암 바위를 녹여내 구멍을 낸 것. 구문소 주변의 바위는 5억년의 지구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고생대 표층을 연구 관찰할 수 있는 귀중한 장소라고 한다.
80평 정도의 구문소는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가 '물이 능히 돌을 뚫는다(수능천석水能穿石)'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기이한 곳. 황지에서 흘러오는 갈물이 동점동에 이르러 큰 산을 뚫고 지나가며 큰 석문을 만들고 깊은 소를 이루었는데 구무소라 한다. 강물이 산을 뚫고 흐른다 하여 뚜루내라고 부르기도 하는 구무소는 한자표기로 구문소(求門沼)라고 쓰고 있다.
'구무'란 말은 구멍의 옛말이니 구무소는 구멍소라는 뜻이다. 구무소 안쪽에 있는 마을을 구무안이라 한다. 황지천의 옛 이름이 뚜루내 천천(穿川)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천천(穿川)이라 표기되어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억5천만년에서 3억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구무소는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간 도강산맥이라는 특수한 지형이다. 구무소는 마당소, 자개문, 용소, 제일 윗쪽의 삼형제폭포, 여울목, 통속닭벼슬바위, 용천등으로 불리는 구문8경이 있다.
옛날 구문소에 구멍이 뚫리기 전에는 석벽을 사이에 두고 동쪽 철암천에는 청룡이 살고 있었고, 서쪽 황지천에는 백룡이 살았다고 한다. 두 용은 서로 낙동강의 지배권을 놓고 항상 다투었다. 매일 석벽 꼭대기에서 싸움을 하였는데 좀체 승부가 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백룡이 꾀를 내어 석벽 위에서 싸우다 내려와 석벽 밑을 뚫으며 공격을 하여 청룡을 물리치고 그 여세로 승천하였다고 한다. 백룡이 승천할 때 지나간 산을 용우이 산이라 하는데 구무소 앞에 솟은 산이다.
금천동 1926년 황지에서 면사무소 소사 장해룡(17세)이 금천 먹돌배기 언덕에서 검은 돌덩이 하나를 줍는다. 얼마 후 삿포로 전문학교에서 고열량 석탄으로 판명, 국내 최대의 석탄 산지가 된다. 금천의 옛 이름이 비만 오면 개천물이 검게 된다고 하여 거무내미골(거무내) 이었다. 95년 문수봉 주변에 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하여 유명해졌다.
철암동 액자 속 흑백 사진으로 들어간 듯 갑자기 주위의 풍경이 색을 잃는다. 산 중턱에 산더미 만큼 쌓인 석탄 더미, 빛바랜 상점들의 간판, 무너져 가는 허름한 사택들, 한국 근대화의 비가(悲歌)가 처연히 흐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처음 탄광이 개발되면서 만들어진 동네 철암. 전형적인 탄광촌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금껏 탄광촌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퇴락한 폐광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철암. 가파른 언덕에 지어진 광부의 사택들이 주인을 잃고 허물어져가고 있다.
1940년 무렵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묵호와 철암을 잇는 철암선이 개통됐고, 1955년에는 영주와 철암을 연결하는 영암선까지 열리면서 철암은 황금기를 맞게 된다.
시커먼 탄가루는 돈을 불렀고 그 돈은 사람을 불러 모았다. 길거리의 개도 수표가 아니면 물지 않는다 했고, 집세도 서울보다 높았던 곳이 철암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계속되지 않았다.
이후 황지와 고한을 잇는 태백선 때문에 상권을 황지 등에 빼앗기게 됐고 석탄 대신 석유가 주요 에너지로 자리 잡은 90년대 들어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됐다.
잇따른 폐광에 철암은 죽은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 3만 명이 흥청거리던 철암의 거리는 지금 채 5,000명도 안 되는 인구로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철암역 위의 선탄장에선 아직도 산 너머 장성탄광에서 채취된 뒤 터널을 통해 옮겨진 탄들을 선별, 간간이 열차에 실어 보내고 있다.
이미 문 닫은 여타 탄광촌이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에 따라 카지노다 스키장이다 해서 변신하고 있는 것과 달리, 철암은 아직도 석탄 산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법의 혜택을 받지 못 하고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탄광촌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다.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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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릴때 어려웠던 시절과 끝없이 흘려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더욱 정감이 가는 곳이며 많은것을 느끼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