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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사람 형체는 진짜 유해가 아닌, 석고 모형이다. 화산재 틈의 공간에 액체 석고를 부어 만든 캐스트이다. |
독가스에 질식되어 고통스러운 모습의 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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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화산재를 덮어쓰고 죽은 사체가 죽는 순간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
watchdog cast(동물도 참사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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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에는 캄파니아의 신석기시대 주민 후손들인 오스크인(Osci)이 처음으로 정착했다고 추측된다. 이탈리아 토착세력 오스크인이 형성한 초기 부락은 선사시대에 용암이 흘러 층을 이룬 가파른 화산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은 7, 8지구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여러차례 거주민이 바뀌면서 형성된 정돈되지 않은 도로의 모습은 원시촌락의 특성을 확연히 보여 준다.
BC 6세기, 중요한 해상무역로로서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이곳에 그리스인이 정착했다. 그들은 사르노 계곡과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도리아식 신전을 짓고 아폴로신 숭배의식을 들여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폼페이는 영구적인 정착지라기 보다는 항구와 해양진출로를 통제하는 거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영향력은 BC 7세기에 캄파니아로 들어온 에트루리아인(Etruscan)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BC 524년부터 474년까지 에트루리아인이 도시를 점유했지만, 특별한 건축물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BC 474년 쿠마이(Cumae) 앞바다의 해전에서 시라쿠사(Syracuse)의 참주 히에론 1세가 에트루리아의 해군을 전멸시킨 후 에트루리아의 영향력은 약해졌으며, 그리스가 또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그들은 신전을 복구했고 성벽을 쌓아 수비를 강화했으며, 6지구 건설을 추진하여 도시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스인은 도시에 기하학적 규칙성을 주었고, 남북을 축으로 삼아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여러 갈래의 도로를 냈다. 그후 BC 5세기말이 되면서 이 오스크-그리스풍의 도시는 거칠고 잔인한 산악민인 삼니움족(Samnites)이 캄파니아를 정복하고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를 차지했다. 당시의 화폐는 1세기 후에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가 속했던 동맹을 누케리아 시가 주도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폼페이가 역사기록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BC 310년 제2차 삼니움 전쟁 때 로마의 함대가 사르누스 항에 상륙하여 누케리아를 공격하려다 실패한 일이었다. 삼니움 전쟁이 끝날 무렵 캄파니아는 로마 동맹의 일부가 되었고, 그곳의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시(同盟市)가 되었다.
주변 부족의 공격에서 도시를 방어하고, 로마로부터 독립을 지키고자 했던 폼페이는 도시의 수비체제를 더욱 철저히 했다. BC 424년부터 BC 89년 까지 폼페이의 성벽은 더욱 견고해 졌다. 검은 응회암과 석회암으로 만든 평행을 이룬 이중성벽은 흙더미로 보강되었고, 열두 개의 정방형 망루가 성벽위에 세워졌다. 헤르쿨레네움문과 베수비오문 사이에는 세곳에 망루가 서 있다. 남북방향으로 쌓은 성벽은 옛 성벽 위에 중축되었는데 이로써 도시가 남북방향으로는 확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동서 축을 중심으로 도시의 동쪽 구역이 그리스 도시를 본받아 상당히 발달했다. 삼니움족은 오늘날 알려져 있는 3km에 달하는 도시의 경계를 형성했다. 웅장한 성벽이 둘러쳐진 도시의 경계 저쪽에는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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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쿨라네움문과 베수비오문(그림의 후경에서 볼 수 있다) 사이의 10번 망루. 삼니움족은 요새화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
발굴된 폼페이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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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90년 3월, 삼니움족의 여러 도시가 로마에 힘을 합쳐서 대항했고 이번에는 폼페이도 반란자들 편에 가담했다. 그러나 폼페이는 술라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군에 포위되고 BC 89년에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의 포 강 남쪽인 나머지 지역과 함께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전쟁에 가담한 데 대한 처벌로 로마 제대군인들의 이주지가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AD 79년 8월 비운의 날까지 폼페이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초기의 난관을 거친 후 폼페이인들과 이주민들은 서로간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적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오스칸어를 대신하여 라틴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고, 폼페이 시는 곧 제도·건축·문화면에서 로마화 되었다.
로마 공화정의 지배를 받게 된 폼페이는 이후 로마귀족들의 휴양도시 중에 하나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로마 제정 초기에 이르러서는 가장 각광받는 휴양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플라비우스 왕조 중기에 이르러서는 인구 5만의 도시로 발전하게 되나, 62년에 한차레 베수비오 화산이 분화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에 다시 복구가 되어 이전보다 훨씬 크고 휼륭한 도시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불과 17년 후인 AD 79년 8월 24일 이탈리아 남부에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였다. 이 폭발로 폼페이, 에르콜라노, 토레 아눈지아타 등의 마을이 2∼3m 두께의 화산재에 묻혀 버렸다. 폼페이는 18세기 중반, 에르콜라노는 20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발굴되어 당시의 일상생활과 사회상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공공건축물 구역과 거주 지역
폼페이가 로마제국으로 편입되었을 때 로마인들은 폼페이의 특성에 맞게 개조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폼페이는 약 3㎞ 둘레의 타원형 도시이다.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쌌으며, 성문은 모두 8개, 길은 바둑판처럼 곧게 뻗어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길은 모두 돌로 포장되어 있고 가운데는 마차가 다니는 길이며 포장된 도로에 하수로가 있었기 때문에 보행자 도로를 양 옆으로 조금 높게 올렸다. 포룸과 원형극장에는 보행자들을 위한 특별 구역을 지정해 교통소통을 원할 하게 통제했다. 도로포장엔 베수비우스 산의 암반으로부터 가져온 둥글 넓적한 돌들을 사용했다.
(1) 도로에는 아직도 바퀴달린 마차가 다녔던 자국이 또렷히 남아있다. 말들의 배설물을 물로 청소하기 위해 길 양쪽에 하수구를
만들어 놓았고 비가 올 때에는 커다란 디딤돌을 딛고서 발을 적시지 않은 채 길을 건널 수 있었다. 징검다리 사이의 폭은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
-군데 군데 박혀있는 흰돌들은 밤에 길을 알아보기 위한 표시등
(2)(3) 도로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표지석을 새겨 놓았는데 마차출입금지 표지석(2)과 남성의 성기를 나타내는 표지석(3)이 있다. 가리
키는 방향으로 가보면 사창가인 루파나르 입구가 나온다.
큰 저택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집에는 수도가 없어 도시 중간 중간에 공동 수도가 있었다. 사르노 강과 샘에서 물을 받아 도시 전역에 파이프로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 주 송수관은 포장도로 밑에 묻혀 있고, 그 송수관들을 통해 부유한 주민들의 집과 공중 목욕탕, 공동 파운틴으로 물이 공급되었으나 수도관이 납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시민들이 대부분 납중독으로 오래 살지 못했다고 한다. 오늘 현재의 세상의 모습이나 별 다름이 없는 완벽한 인프라를 갖춘 도시다.
62년 지진이 있은 뒤 복구되거나 재건되는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폼페이의 공공건축물 구역과 거주구역이 지닌 삼니움 시대 고유의 특색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로마인의 생활은 도시의 기본구조에 적응되어 나갔다. 폼페이의 심장부에 위치한 중앙대광장(Foro)은 당시 종교, 정치, 상업의 중심지였다. 카피톨린 3신전, 라레스(가정과 거리의 수호신)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이 모두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정치에 관련한 다양한 활동은 공공건물에서 이루어졌고, 시장, 에우마키아 기념건물, 도량형을 담당하던 관청 따위는 도시의 상업중심지를 이루었다. 중앙대광장은 산책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로마 당국은 돌을 쌓아 아본단차 거리에서 들어오는 우마차의 통행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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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중앙대광장 재현도 |
우마차의 통행을 막았던 말뚝 |
BC 200년경, 삼니움 시대부터 존속한 대극장은 가장 오래되고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장 넓은 공연장소였다. 술라 통치기에 세운 소극장(오데온)은 음악연주, 시낭송, 강연등이 행해지는 실내공연장이었다. 세모꼴광장은 당시 대극장의 휴게실로 이용되기도 했고, 막간에 쏟아져 나온 관객들의 산책로로 사랑받기도 했다. 또한 근처에는 삼니움족 경기장, 이시스 신전, 주피터 메일리키오스 신전이 있었다. 따라서 이 구역은 종교활동과 체육활동이 더불어 이루어졌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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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극장 소극장 체육관 신전(남서쪽) |
원형경기장 외부 (남동쪽) |
원형경기장 내부 |
무대 뒤에서 배우들이 가면과 무대의상을 고르고 있다(비극시인의 집에서 발견, 현재 나폴리 박물관에) |
남동쪽으로는 원형경기장과 도시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갖춘 경기장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폼페이에서 가장 넓은 공간으로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모여든 구경꾼들은 행상이 파는 온갖 종류의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폼페이 시민은 구경거리를 찾아 대극장, 소극장, 원형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검투 시합을 즐겼던 원형경기장과 지금까지 발굴된 목욕탕은 네 곳으로 폼페이 사람들이 검투 경기를 보거나 목욕을 즐기는 등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지역 이외의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거주지역이다. 거주 지역은 로마 지배 시대에 공중목욕탕의 건설이 시작되면서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목욕탕은 삼니움 시대에 건립된 스타비아 목욕탕이다. 중앙대광장 목욕탕은 로마의 식민지가 정착되던 때 들어섰고, 중앙목욕탕은 화산이 폭발되는 때에도 한창 건설이 진행 중이었다. 목욕탕들은 옛날 오스크인들이 도시를 지배하던 시절의 도심지 옆을 지나는 중앙 통을 따라 세워졌다. 그곳 구 도심지에는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마다 사창가들이 있었다.
목욕탕 문화
태양의 빛을 이용한 채광 시설을 가진 목욕탕, 안락한 구조로 만든 홀, 정원, 뜰안의 벤치 들, 벽의 벽화 무늬들 모든 것은 폼페이인들의 높은 생활수준과 문화를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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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비아욕장 플랜 |
욕조가 있는 여성용 온탕실 |
욕장의 탈의실 |
공동욕장은 남녀별로 되어 있고 중정 오른쪽에는 냉욕실, 탈의실, 온욕실, 열욕실들이 설치되어 있다. 중정 왼쪽 중앙에는 수영장이 있으며 양옆에 탈의실이 있었다. 바닥은 이중구조로 증기를 이용해 일정 실온이 유지되어 있었다. 이 욕장거리는 지난날 폼페이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당시 주산업이었던 직물의 양모세탁장과 염색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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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목욕탕 복원도 |
욕장의 여성용 화장실 |
공동세탁장 벽의 프레스코 |
욕장의 에로틱 프레스코화
테르모폴리움(Thermopolium).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며 간단한 음식을 먹던 장소로 지금의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음식점쯤 된다. 아본단차 거리에 위치하며 보통 L자 모양의 판매대가 있다. 이 판매대는 입구를 마주 보는 쪽은 길고 다른 쪽은 내부를 향해 직각으로 되어 있다. 나오는 음료와 음식이 담긴 용기를 두기 위한 구멍들이 붙박이로 판매대 위에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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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음식 판매대 |
빵을 굽던 화덕과 곡물 분쇄 맷돌 |
빵제조 공정 상상도 |
빵가마에 굽던 빵이 발견 오늘날 피자처럼 8조각으로 나뉨 |
빵공장의 마당에는 응회암으로 만든 맷돌이 여러 개 나열해 있으며 이는 곡식을 넣고 노예나 동물의 힘으로 돌려 곡식을 빻는 맷돌로 보인다, 아치형 구조물은 빵집에서 사용했던 빵을 굽는 가마라고 한다(두번 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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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창고 건물 |
빵을 사고 파는 모습의 프레스코화 |
스타비아나 거리에 있는 모데스토의 베이커리에서는 밀가루 반죽 도구와 탄화된 빵 덩어리들이 발견되었다. 폼페이의 빵을 굽는 상점이 있어 시민들이 집에서 빵을 굽지 않고 상점을 통해 구입하여 소규모의 상거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벽화에 나타난 상업의 신 머큐리가 흔하게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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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화장실을 여러명이 한꺼번에 앉아 볼일을 보는데 기다란 의자 같은 곳에 홈을 파고 그 위에 겉터앉아 옆 사람과 수다를 떨며 일을 보았다. 로마의 화장실을 겨울엔 난방을 하고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하는 등 호화로웠다
작은 로마 폼페이
로마의 장군 술라는 폼페이에 내정문제에 관한 자치권을 주어 로마와 비슷한 체제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폼페이의 최고 권력가는 두 명의 이두정치가였다. 폼페이에서는 매년 7월 시행정관을 뽑기 위해 선거가 열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지지하는 후보의 이야기를 벽보에 적어 자신의 집 앞에 붙여놓았다. 도시가 화산재에 덮인 이후, 종이는 산화되어 사라지고, 벽보에 적힌 글씨들이 벽에 스며들어 흔적을 남겼다. 도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흔적들을 통해 당시의 뜨거운 선거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2000년 전 이미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1) 이웃 사람들은 후보자의 집에 붉은 글씨로 그들의 이름을 적어 놓는다. 사진에서 이웃사람들은 공직에 적합한 인물을 판정하고
그들의 이름을 약자로 표기하여 지지를 표현하고 있다.
(2) BC 1세기 말엽에 마르쿠스 툴리우스가 건축한 포르투나 아우구스타 신전은 중앙대광장 북쪽, 포로 거리에 면해 서있다. 카피톨린
3신전의 구조를 본떠 만든 이 신전 뒤쪽에 놓여있는 아우구스타 신상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은 황제로부터 총애를 받게 되며 행복
하리라는 희망을 폼페이인에게 주었다
폼페이는 도시행정면에서 자치권을 가졌지만, 황제의 칙령에 복종해야 했다. 선거에 선출된 시행정관들의 행정력은 시 내정문제에 제한되었다. 새 황제가 등극할 때마다 폼페이는 충성심을 보여 주어야 했다. 해마다 황제 숭배의식이 베풀어졌고, 황제의 미덕을 칭송하는 신전이 이곳저곳에 생겼다
참고자료 :Robert Etienne 지음/주명철 옮김. 폼페이 최후의 날. 시공사, 1995
첫댓글 복습 잘했습니다. 복원도가 저 위에 있군요.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원도 보고 푹빠져 자료찾아 헤맸답니다
그런데...사실은 실제보다 이자료가 충실해요. 실제로 가면 별로 없어요. 색깔도 낡았고...그래도 눈에 익히 보고 가면 흐려도 알아볼 수 있지요. 아무튼 수고하십니다. 다녀 오셔서 논문 쓰셔도 되겠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