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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6째>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신약 전체에서 두 번 사용되었고, 같이 쓰인 눅11:3절도 주기도문의 병행구절이고 보면, 실상은 한번만 나온다. 문자적인 뜻을 먼저 알아보자.
* 일용할(#1967 에피우시오스)
-# 1909 에피 :(열매의) 위에
-# 1510: 에이미: 내가 존재한다 (I be)
=> 합성어: ‘내일 날(열매)을 위한’, ‘다가오는 날을 위한(7째날)’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이란 통상적으로 생각되는 ‘정규적인, 매일의’의 개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우선은 날마다 목숨을 위하여 먹는 물질적인 양식을 말함은 물론 아닌 것이며, 영적인 양식이라 할지라도 날마다 먹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한 단단한 식물을 겨냥한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왜 믿는가? 신앙의 분명한 목적을 알고 믿어야 한다. 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듯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분을 영원토록 찬양하기 위하여 믿는다는 말은, 그저 하나님을 두 손 높이 받들며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기 위해(아부떰) 믿는 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명실상부한 전능자의 능력을 가진 자가 되기 위해 믿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이 믿는 자들이게 주신 성경에 분명히 쓰여 있기에, 그 목적을 향하여 믿음의 여정을 가는 것이다. 즉 인간 창조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 중에 부르심을 입고 또한 그 중에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처럼 만들고자(창조) 하심이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다. 세상일도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그 일에 성공을 하듯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누가 그저 천국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신앙생활 한다면,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비 성경적이어서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영원히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도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한다고 했다. 이런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영의 양식이라는 말이다.
1. 세 종류의 양식
사람이 취할 양식은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을 에덴동산에 있는 세 종류의 과실로 나타내었다. 생명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그 밖의 각종 나무의 열매다. 다시 말해서 나무열매로 비유된 양식이란 사람이 습득하는 지식의 종류에 대한 비유인 것이다. 즉, 일반 각종지식, 혼적지식(마음을 주장하는 종교적 지식), 그리고 생명을 주는 영의 지식이다.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반적 지식이 많이 필요하다. 이를 각종 과실이라 한다. 일반 상식부터 시작해서 특정한 분야의 전문지식(의료, 법률, 행정, 과학, 문화, 예술, 체육...)이 여기에 해당한다.
혼적인 지식이란 사람의 정신과 사상을 다루는 것을 말한다. 철학이나 각종 종교적 지식을 망라해서 다 포함되나 특별히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여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반하여 영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속에 숨겨진 본래의 의도를 깨달음으로서 이를 통해 생명을 취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진리지식이라고도 표현한다.
이 세 종류의 양식은 사람의 신앙의 성장에 따라 취하는 지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구속받은 사람일지라도 일반적 지식을 알아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다 풍성히 누릴(깨닫고 이용하고 기뻐함) 것이기에 각종 과일은 먹는 것이 허락 되었다.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60억 인구 중에 하나도 없는 것은 다양성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품과 성질과 재능이 다 다르다는 것이고, 이렇게 타고난 재능을 잘 계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발전시켜 자신의 삶을 보다 승화시키며 주변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런 재능을 누가 주신 것이며 왜 주신 것인가? 만일, 극단적인 생각으로 음악, 미술, 체육 등의 특기자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을 마치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매도한다면, 참으로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처사이다. 이는 과학적 지능이 타고난 자에게 학문을 중단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불교인처럼 산속에 들어가 道 닦는 것이 구원일 수 없다.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으라함은 이방인과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가치에 밟히지 말고 살라는 말이다. 세상의 부귀, 영광, 재물에 욕심내어 자신의 영혼을 파는 행각을 사전에 분별하여 부화뇌동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 사랑을 소원목적하지 않는 절제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야 말로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이요, 세상을 초월하고 이기는 자의 걸음이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에 빠지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 안에 세상성이 침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거룩함을 유지하는 능력을 가진 자다.
전문지식을 가진 직장인이나, 개인 사업가들도 일의 종류는 다를지라도 삶의 형태는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반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통제된 절제 안에서 기꺼이 감사로 받아 누릴 일들이다. 육신을 입고 있기에 천성 길을 가는 와중에도 육을 위한 생업을 유지해야 하되 강약을 잘 조절하면서 한다면 내면의 성숙함을 이루는 보약이 될 것이다. 적절한 안배를 통한 재화를 얻어 생계의 수단을 마련함으로 육을 위한 양식이다. 이것이 첫 번째 양식이다.
두 번째 양식은 선악과로 비유된 의문에 따른 율법말씀이다. 실은 문자적인 성경말씀도 잘 알아야 그 말씀을 토대로 영의 말씀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혼적인 말씀도 초보 단계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이때에는 몽학선생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율법 종교 신앙을 말하는데, 문제는 거기가 최종 목적지인줄 알고 더 이상 깊은 곳으로 나아가려고 안한다는 것이다. 타고난 천연적인 종교심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 구원을 얻으려는 것을 혼적인 신앙이라 한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말씀하셨기에 먹지 말라는 말인가? 아니다. 반드시 먹고 죽으라는 말씀이다. 선악과로 비유된 율법 말씀을 주신 이유는 인생이 처음부터 죄인이며, 또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깨닫고 죽으라는 뜻이다. 사람의 혈통과 육정으로 난 천연적인 자아는 계속해서 죄와 결탁하여 사망의 열매만 맺는 존재라는 것이다. 옛 사람은 죄들을 제조하는 공장이다. 죄의 삯인 사망을 중단시키려면 죽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 종교에 심취되어 뱀의 독극물에 마취되면, 자신의 철저한 율법준수 신앙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줄 착각하는데 있다. 이러한 자기 자랑의 기반 위에서 수많은 종교적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외적인 신앙을 혼적인 신앙이라 한다. 이 상태의 믿음은 하나님께로서 온 믿음이 아니라 인간 자기 믿음이다. 자신의 신념으로 믿는 믿음이다. 믿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믿음의 뿌리이다.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영혼이 영원히 망한다. 그래서 정령 죽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되 때가 차면 뱉을 줄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자기 혼자되는 일이 아니다. 살리는 말씀인줄 알고 배불리 먹은 것이 독임을 누군가 알려주어야 안다. 바울과 같은 아비 된 선생을 만나야 가능하다. 이때가 후견인과 청지기 밑에서 종의 영을 거부하고 도망치는 시기이다. 종교의 커다란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얻으려면 본 남편이 죽어야 다시 시집 갈 수 있다. 모두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성장과정을 의미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신앙인이 이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을 낸다. 왜냐하면 율법종교의 신앙은 누구든지 갈 수 있는 넓은 길이기 때문이다. 이 문은 넓어서 들어가는 이가 많다고 했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모두가 이 길로 가니 의심할 필요 없이 묻어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천국은 이렇게 편승해서 가는 길이 아님을 그들은 모른다. 침로해서 이기는 자만이 가는 곳이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혼적인 신앙의 대표주자가 사울 왕이었다. 그의 혼적인 신앙 지식의 수준을 떡 두 덩어리를 받은 자로 표현 했다. 삼상10:3절 이하를 보면 사울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으나, 진리를 나타내는 포도주 가죽부대나, 세 덩어리의 떡을 가진 자로부터 오직 두 덩어리의 떡만 받은 것은 그의 영적인 상태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울왕은 결국에 불레셋 족속에게 패하고, 아마렉 종자한테 목숨을 빼앗긴다. 불레셋과 아말렉은 할례 없는 자들, 즉 혈과 육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상징한다.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면서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을 잃게 된다는 말이다. 사울 왕의 할례 없이 믿는 혼적인 신앙을 보여주는 결론적 대목이다.
[마16: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울이란 말은 ‘크다’라는 말이다. 노아시대에 용사며 유명한 자들인 네피림의 영을 받은 자이다. 창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들의 아내로 삼았다는 말은, 말씀을 맡은 종들이 교회의 부흥을 빙자하여 교권을 거머쥐고, 성도들의 우상이 되어 높임을 받으며 하나님의 아내 된 양들을 자신의 이익의 소재로 삼는 것을 빗대어, 자신들의 아내 삼았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대형교회의 큰 교권은 자연히 세상 정치에도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힘을 소유하게 된다. 종교지도자는 사람의 정신을 인도하기에 머리됨의 존귀함과 영광을 차지하고, 게다가 부와 명예까지 움켜지는 무소불위의 자리이다. 뱀의 영을 받은 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사시대, 열왕시대, 그리고 사도시대의 뒤를 이은 교부시대부터 2천년 신약교회사 전체가 사울의 영을 받은 큰 자들의 독무대였다. 이것이 마귀가 뿌려놓은 가라지이다.
주님이 사십일을 금식하시고서 사역에 앞서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신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마귀는 언제나 속삭인다. ‘이 돌(영혼=사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여 잡아먹으라고...’ 구원을 소망하여 교회를 찾은 자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님을 대신하여 나누어 주어야 할 자들이, 이 땅의 것을 소원목적하게 하여 배나 마귀의 자식으로 만들어 놓고, 목사 자신의 말을 잘 들어야 천국도 가고 땅에서도 성공한다고 부추겨, 제 종으로 삼는 자들은 모두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는 자들이다.
신령한 가치를 주는 말씀을 이 세상의 복으로 떨어드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돼지처럼 땅의 가치에 몰두하도록 눈멀게 하고 사육하는 것이, 돌로 떡 덩이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인 숨은 뜻을 모르고 문자에 잡혀서 표면적인 활동에 치중하기 때문인데, 이처럼 의문에 따른 신앙생활을 혼적인 믿음이라한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바리새인의 믿음이지만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기에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된다.
2. 일용할 양식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떡(혼적 종교지식과 일반지식)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레마)으로 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생기이다. 영이다(루하흐).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생기를 대언하니 다 살아났다(겔37)고 했다. 이 생기가 바로 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가 있다. 로고스와 레마다. 로고스는 문자를 말하는 것이요, 레마는 생기가 되는 영의 말씀이다.
성경을 문자로만 보면 외적인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었다. 로고스의 함정이다. 설교를 들으면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어 눈물도 나지만, 속사람인 영의 생명에는 전혀 무관한 일들인 것은 로고스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 훌륭한 사람, 좋은 사람, 착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 이웃에게나 사회에 공헌하는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라고 예가지 들면서 가르침을 받으면 혼이 자극되어 공감이 되고 결심과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전혀 무관한 일임을 떡 두 덩어리 가진 종교 지도자들은 모른다.
반면에 레마는 영의 말씀이다. 영의 말씀이란 사람의 속 생명인 영을 살리는 말씀이다. 영을 만지고 영을 건설하는 말씀이다. 사람의 내면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건축하는 일에 관한 지식이다. 하나님은 본래 영이시다. 사람을 창조하여 우주를 경영하시는 목적 자체가 당신을 꼭 닮은 영의 아들들을 창조하시어 인격적 교제를 영원토록 가지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당신의 아들들을 창조하시는 사역의 현장이요, 하나님의 포도원이요, 목장이다. 만상과 만물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부속물이요, 등용물들이다. 마귀도 필요에 의해 유효 적절히 사용하시는 이용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육인 인간이 닮으려 해도 표상이 없기에, 영이 육신을 입고 친히 현현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리고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육의 껍질을 벗고 영으로 부활하심을 보여 주셨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의 표상이다. 살아가신 그대로(구원을 이루는 여정) 나에게 임재 하셔서 다시 나를 이끌어 하늘나라, 영의 세계로 인도하신다. 이 얼마나 상상할 수 없는 예정이요, 사랑인가? 바울은 이를 깨닫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깨달았다고 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번데기이다. 그러고 보면 번데기 속에서 날개가 만들어진다. 번데기는 죽음이 아니라 새 세계를 비상하기 위한 신령체로의 탈바꿈을 향한 창조시간이다. 이것이 십자가와 장사됨이다. 영광의 부활을 바라보는 자는 겟세마네에서 피와 땀이 흘려지는 영의 전쟁이 선행되어야 한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자아의 숨통이 끊어져서 로마 군병의 창끝이 폐부를 찔러도 다시 깨어나면 안 된다. 옛사람의 완전한 죽음만이 새 생명으로 움튼다. 단단한 껍질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벗겨진다. 이것이 비밀이다.
이러한 십자가의 길을 알고 걸어가는 자가 레마로 말씀을 받는 자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깨닫고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의 도성을 건축하고자 기존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알고 미련 없이 버리는 자이다. 미련이 있어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이 작품을 만들 수가 없다. 누가 이렇게 올인 할 수 있는가? 진리 지식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본 자들만이 가능하다. 법궤 안의 항아리에 감추인 만나를 먹는 자만이 이 길을 갈 수 있다. 이 양식을 떡 세 덩어리로 비유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은 이러한 깊은 영적인 지식을 섭생하는 자가 되라는 말이다. 주님은 창세로부터 감추인 비밀한 말씀을 풀어주시기 위해 오셨다. 언제나 말씀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려져 있다. 문자대로 읽고 액면대로 그것이 전부인 줄 안다면 신령한 세계를 너무 오해한 자들이다. 땅의 보물도 얻으려면 각고의 노력과 능력이 있어야 하거늘 하물며 하늘의 보물을 거저 얻겠다면 도적의 심보가 아닌가? 하나님은 바보가 아니다.
창1장의 천지 창조는 7날로 구성되어 있다. 천지는 누구인가? 눈에 보이는 천지는 모형이고 실제는 영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의 존재인 아담을 6번의 거듭남을 통해, 마침내 어둠이 없고 빛만 있는 일곱 날의 존재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는 조감도다. 여기에서 진리의 주님을 만나는 날이 여섯째 날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주님을 조우한 날이다. 주님은 이렇게 다섯 남편을 분명히 갈아치운 자에게만 임하신다.
다섯째 날까지는 몽학선생 밑에서 혼적인 가르침으로 목을 추겨왔다. 나름대로 말씀을 사모하여 이리저리 물을 구하러 다니다보니 남편을 다섯 번 바꾸어야 했다. 육의 눈으로 보면 창피스런 일이나 내적인 갈급함을 채우지 못한 방황이었으니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주님을 만나는 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길이다. 주의 입에서 나오는 레마(말씀)만이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만나는 날은 잔치가 벌어진다. 영의 풍성함으로 배 채우는 날이다. 자신의 여섯째 날을 상징하는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포도주가 가득 채워지는 날이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주님의 신성한 성품으로 열매 맺는 축복의 날이다. 주님과 더불어 영이 강화되고 탈바꿈 (삼년 반의 의미)되도록 교육받으면 이제 하산해야 한다. 이제 일곱째 날이 된 것이다. 내 안에서 주님은 안식하시고, 주님을 대신하여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의 사자로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신 말씀의 진의가 여기에 있다. 주님은 안식일(7째 날의 사람)이 된 ‘주의사자’안에서만 안식하신다. 안식일은 사람이지 토요일이 안식일이 아닌 것이다. 이 날이 된 자는 더 이상 먹지 않고 금식한다. 이미 먹은 일용할 양식으로 되새김질하며 토해 내는 사역만 있다. 언제 어디서든지 입만 열면 생명수가 강이 되어 흘러넘치다. 생명수의 근원은 보좌 가운데로 부터이다. 이 생명수를 마시는 자들은 다시 생명나무가 될 것이다. 계시록 22장의 완성이다.
주님은 지금 미래의 완성을 보시며 기도를 가르치신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가 되라고...
-그래서 주님을 닮은 열매를 맺으라고...
-그것은 일곱째 날의 주의 사자가 되는 것이라고...
<눅11:5~8>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주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소용대로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