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라소니에게 싸움을 배우다
■ “나는 ‘사시미’의 원조였다”
■ 청송교도소 ‘박영두 사망 사건’ 세상에 처음 알려
지난 2월24, 25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로 주먹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전설의 주먹왕 ‘스라소니’(본명 이성순)의 부인 이진옥 씨의 조문을 위해서였다. ‘낙화유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태련(74) 씨, 김두한 사단의 조일환·최창식 씨 등 100여 명의 원로 주먹이 빈소를 찾았다.
상주(喪主)는 스라소니의 아들인 이의현(45·일산 성현교회 목사) 씨였는데, 상주 역할을 하는 또 한 인물이 눈에 띄었다. 어렸을 적 스라소니를 큰아버지로 모시고 싸움 기술을 배웠고, 1970년대 영등포 암흑가를 지배했던 ‘대호파’ 두목 이상훈(54) 씨였다. 지금은 보석 사업가에 인권운동까지 벌이고 있지만, 그의 인생은 암흑가와 어두운 감옥에서의 ‘전쟁’으로 점철돼 있다.
조폭 두목, 법정 탈출, 전두환·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 대도(大盜) 조세형과 서방파 두목 김태촌과 만남…. 그리고 지금은 사업가에 인권운동까지. 한 인간이 지나온 삶의 궤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드라마틱하다. 지금부터 소설보다 재미있는 이상훈의 극적인 ‘주먹인생’을 추적해 보자. 이것은 실화다.
‘스라소니’에게 싸움을 배우다
이상훈 씨는 195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6·25 직전 월남한 이씨의 아버지는 부산에서 505방첩대 부산지부 대장을 지냈다. 이씨가 여섯 살 때 부모님의 불화로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그 유명한 주먹 스라소니와 한 집에서 살았다. 스라소니는 신의주가 고향이고, 이씨의 아버지는 평양이 고향인데 두 사람이 의형제 사이였다. 그래서 스라소니를 큰아버지로 부르며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스라소니 때문이었는지 집에는 이화룡·정팔이(당시 명동을 양분했던 왕초), 명동 신상사파 두목인 ‘밤의 황제’ 신상사(본명 신상현) 등으로 늘 북적거렸다. 이들은 모두 이북 출신 주먹들이었다. 이씨는 이들을 모두 아저씨라고 불렀다.
1960년대초 명동의 상권은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명동 일대 암흑가도 이북 출신 주먹들이 강력한 기반을 닦고 있던 터였다. 이들은 이씨의 집에 모여 주로 이정재사단에 대한 보복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이씨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어느 날 그는 동네 쌍둥이 형제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는다. 이 때부터 이씨는 스라소니에게 싸움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당시 처음 배운 자세가 ‘올려치고 박기’라는 기술이었다.
“저는 매일 남산에 올라가 소나무에 새끼줄을 감아 놓고 이마로 받는 연습을 했어요. 학교만 끝나면 500번이고 1,000번이고 들이받았어요. 스라소니는 박치기가 장기였는데, 거기에 걸리면 항우 장사도 쓰러집니다. 박치기 다음에는 ‘무릎치기’를 배웠죠. 이마로 받으면서 무릎으로 상대방의 관절이나 급소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술을 한 3년 동안 배웠죠. 이 때부터는 누구와 싸워도 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씨는 이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라소니의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아버지가 민주당 용산지구당 청년조직국장을 맡았는데, 용산 해방촌 동사무소 앞에서 유세 도중 자유당 조직 깡패 20여 명이 달려들어 린치를 가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때 스라소니가 나서서 신기의 싸움 기술로 이들을 모두 제압해 버린다.
“그 때 마침 스라소니 큰아버님이 옆에 계셨는데, ‘저런 애미나이 새끼들 보라우’ 하면서 뛰어 올라가시더라고요. 거리가 한 30m쯤 되는데 언제 뛰어갔는지 모르게 바람처럼 달려가더니 20여 명의 장정을 10분도 안 돼서 모두 쓰러뜨리더라고요. 이마로 받고 발로 차고…. 참 대단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도 저런 싸움을 배워야겠다 했는데 결국 세월이 흘러 깡패가 되고 말았죠.”
해방촌이 철거되면서 이씨 가족은 영등포로 쫓겨났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스라소니도 영등포로 와서 1년 반 가량 이씨 가족과 함께 생활했는데, 이 때 본격적인 싸움 기술을 전수받았다. 무릎치기, 관절치기, 발 걸어넘기기, 돌려차면서 이마로 받기 등이다. 이씨는 자신감이 생기자 매일 나가서 ‘다찌’(맞장)를 붙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학교에서 퇴학당해 여러 군데를 옮겨다닐 수밖에 없었다.
1967년, 이씨가 열여덟 살 때였다. 온 나라가 가난하기 짝이 없는 시절이었다. 당시 영등포 일대는 유흥가가 밀집해 있었고, 거지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어느 날 시장 일대를 배회하다 영보극장 앞에서 일단의 아이들이 여자들을 상대로 소매치기하는 것을 목격했다. 면도칼을 휘두르는 소매치기 대장을 때려 눕힌 이후 그는 소매치기 두목이 됐다. 이씨가 본격적으로 영등포 폭력계에 진출하게 된 계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후 소매치기 두목의 친구들은 복수하겠다며 이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이씨는 마침내 한 공원에서 이들에게 덜미를 잡혔다.
“4명에게 걸렸어요. 그들은 나이가 네다섯 살쯤 위로 보이고 체격들이 참 좋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지역에서는 꽤 이름 있는 깡패들이었어요. 내가 1대 1로 붙자고 하자 한 명이 비웃으며 덤비더라고요. 주변에는 영등포 일대 양아치·히라이파(깡통을 들고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조직)·떼끼파(소매치기단) 등 3파가 모여 우리가 한판 붙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체격이 유난히 큰 녀석이 덤비길래 곧바로 뛰면서 이마로 머리를 받고, 무릎으로 고환을 질러 버리자 완전히 뻗어버렸습니다.”
전두환과 운명적 만남
이 소문은 금세 영등포 일대에 쫙 퍼졌다. 이상훈이라는 이름이 영등포 일대 암흑가에 새롭게 심어진 것이다. 그날부터 여러 계파에 대한 접수가 시작됐다. 영등포 조직 세계를 장악해 나갔던 것이다.
당시는 암흑가에서 어느 정도 크면 유흥업소의 영업부장이나 연예부장을 맡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당시는 이런 곳 외에는마땅히 돈 나올 구멍이 없어 건달들이라면 으레 거치는 경로였다. 이씨도 20대가 되면서 큰 유흥업소의 연예부장으로 들어갔다. 김포공항 가는 길에 있던 에어포트호텔 지배인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전두환 장군과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이씨가 전두환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1971~72년 무렵. 에어포트호텔 맞은편에는 공수여단이 있었는데, 당시 전두환 준장이 공수여단장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대위 계급장을 단 군인 한 명이 군복을 입은 채 호텔로 찾아와 놀 만한 곳인지 살펴보고 갔다. 그는 이씨에게 “저희 어른께서 놀러 나오면 잘 부탁하겠다”고 말했다.
“저는 어른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곳에는 군인들도 많이 들락거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죠. 그분(전두환 장군)은 늘 부관 한 명, 지역 헌병대장 등과 함께 왔습니다. 그러면 저는 구석 자리로 모시고 특별 대접을 해 줬습니다. 매너도 참 좋았고 아주 호탕했어요. 당시 모시던 선배 한 분이 있었는데, 그 형님과 전두환 장군은 형님 동생 하고 지낼 정도였어요. 어쨌든 전장군이 저희 호텔에 오면 정성을 다했는데 1주일에 한두 번은 늘 찾아왔던 것 같아요. 그분도 에어포트호텔의 ‘훈’이라고 하면 알 것입니다. 당시는 호스티스들을 들여보내 모시도록 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 때 소진인가, 수진인가 키가 큰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를 예뻐해 자주 찾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씨의 이어지는 얘기다.
“당시 그분의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였죠. 친밀감이 있어서 선배님과 여러 차례 연희동을 찾았죠. 당시에는 이순자 씨가 미장원을 할 때였는데, 군인으로 가난하게 살았죠. 찾아뵈면 인사도 올리고, 선물도 사서 아들들과 놀아주었습니다. 큰놈에게 태권도도 가르쳐주고요. 전두환 장군은 당시 제가 봤을 때는 군인으로서는 참 멋있었어요. 사람을 포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세월이 지나 가슴의 영원한 적으로 남았으니 좋은 인연이 악연이 된 셈이죠.”
이씨는 1970년대 중반까지 영등포의 시장파 보스로 활동했다. 시장파가 대호파로 바뀐 것은 1976년 이후. 이 때부터 이씨는 사실상 영등포 일대를 완전히 장악했고, 대호파의 보스임을 암흑가에 천명했다.
당시 암흑가의 세력 구조는 복잡했다. 1976년 2월 명동 사보이호텔 습격 사건이 나기 전 명동은 밤의 황제인 신상사파가 잡고 있었다. 또 전주에서 올라온 이승완(전 호국청년연합회 회장, 구속중) 씨가 이끄는 전북식구들이 명동에서 기반을 단단히 닦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전남 세력보다 전북 조직이 막강했다. 서울 시내 큰 나이트클럽 영업권은 대부분 전북 조직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전북 조직의 실질적 리더가 이승완 씨였고 행동대장 역할을 한 사람이 이씨의 친구인 이태문 씨였다.
“신상사는 자유당 때부터 커 왔죠. 명동 위쪽에는 번개형님(박종석)이라고 있었는데, 퇴계로 쪽이 거점이었습니다. 1976년 양은이파의 보스인 조양은 씨에 의해 사보이호텔 습격 사건이 일어나는데, 세간에 다르게 알려진 부분이 많아요. 당시 신상사파의 보스인 상현이형님의 아킬레스건을 양은이파가 끊었다고 하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로 상현이형님은 조양은 씨에게 린치당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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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라소니’의 부인 이진옥 여사 빈소에서 왕년의 주먹들과 함께 조문객을 맞고 있는 이상훈 회장.(위 사진)/ 지난해 3·1절에 열린 ‘김좌진 의송 김두한 행사’에서 TV 드라마 ‘야인시대’ 출연진 등과 함께한 이상훈 회장(아래 사진 왼쪽에서 다섯번째) |
이씨가 ‘원정 작업’을 많이 했다는 것은 당시 조폭 세계에는 잘 알려져 있다. 1975년 부산에서 발생한 ‘연성동 사건’도 사회적 문제가 됐는데 이씨의 작품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다대기’(밀수) 쪽에서 ‘순이파’ 조직원 중 한 명이 거액을 빼돌려 달아났다. 최고 ‘오야붕’이었던 순이는 이씨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는 돈을 빼돌린 조직원을 부산 연성동에서 붙잡아 도끼로 팔목을 내리찍었다.
부산 극동호텔 나이트클럽 린치 사건도 이씨가 주도한 사건이다. 부산 극동호텔 사장이 건달들을 포섭해 영업하다 조직간 알력이 벌어지자 이씨가 조직원을 이끌고 습격해 칼질을 한 것이다. 당시 언론에는 ‘극동호텔 난자 사건’으로 크게 보도됐다.
여러 사건으로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씨는 일본으로 밀항한다. 일본 이케부로라는 곳에 숨어 지내다 야쿠자들의 습격을 받아 심장 부근에 칼을 맞기도 했다. 1년쯤 숨어 지내다 한국으로 돌아와 곧바로 경찰에 체포된다. 3년을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고 나와 1970년대말 곧바로 에어포트호텔에 사장으로 취임했다.
신군부는 1980년 광주학살 사건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다. 한편으로는 사회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시국사범은 물론 깡패들을 모조리 잡아들인다. 당시 많은 주먹들이 삼청교육대나 교도소로 끌려갔다. 이씨도 신군부의 칼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81년 1월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해밀턴호텔 습격 사건이 터진다. 이씨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1981년 1월이었습니다. 당시 해밀턴호텔에서 동생들 생일 파티가 있었어요. 어두워지기 시작할 즈음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쇠파이프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남대문경찰서에서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고 주변 건달들을 동원해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조직과 싸움인 줄 알고 사시미를 꺼내 대항했죠.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30여 명이나 됐어요. 사시미와 쇠파이프가 날아다니는데,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양측의 칼과 쇠파이프가 오가는 상황에서 두 다리에 칼을 맞았습니다. 도저히 당할 수 없어 도주했습니다. 밤 11시쯤 겨우 이태원 크라운호텔까지 피신했다가 콜택시를 타고 영등포로 돌아왔죠. 그러다 다시 인천으로 피했습니다.”
해밀턴호텔 집단 난투극 사건은 다음날 신문과 TV에 대서특필됐다. 내용은 남대문 형사들이 대호파 두목 이상훈을 검거하려다 여러 형사들이 칼을 맞고 부상당했다는 것이었다.
후배의 밀고로 체포, 그리고 법정 탈주
이씨는 그 사건 이후 인천 후배 집에서 숨어 지냈다. 하루는 인천 쑥고개파 조직원 중 한 명이 찾아와 “큰형님 피신해 있는데 우리 집이 크다. 형님을 그쪽으로 모시고 싶다”고 했다. 그 집으로 가기 위해 인천 올림포스호텔 커피숍에 앉아 기다리는데 이미 사복 경찰들이 호텔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이씨는 택시 기사를 인질 삼아 필사의 도주를 시작했으나 택시 기사가 호텔 아래 파출소 앞에 차를 세우고 도망가는 바람에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때가 1981년 1월25일입니다. 죄목이 살인미수, 강도, 범죄단체 조직 등이어서 당시 살벌했던 상황에서는 바로 교수형 감이었습니다. 교수형도 좋지만 밀고한 놈에 대한 분노가 앞서더라고요. 그래서 보복하기 위해 탈주를 결심했습니다. 체포된 날 부평경찰서·남대문경찰서·영등포경찰서를 거쳐 조서를 받으니 조서가 한 트럭이나 됐습니다.”
지난 1981년 6월5일자 신문을 보면 이상훈 등 흉악범 4명이 법정에서 교도관을 인질로 잡고 탈출했다는 보도가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당시 주인공이 바로 대호파 두목 이씨다.
이씨는 체포된 뒤 탈옥하기 위해 영등포구치소 병사에서 칼 맞은 다리를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병사에서 치료받으면서 그는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몰래 칼 네 자루를 만들었다. 법정에서 판사를 인질로 삼기로 했다.
“1981년 6월5일 서울 남부지방법원 제1법정에서 재판 도중 준비해 간 칼로 재판관을 위협해 탈출합니다. 칼 두 자루는 신발 밑창에 숨기고, 두 자루는 동생들에게 나눠 줬습니다. 오후 2시쯤 동생들과 함께 칼을 빼들었습니다. 경찰이 총을 쏘면서 쫓아오는데 1명은 잡히고 3명은 법원 담을 넘었습니다. 택시 한 대를 강탈해 목동 집으로 가서 수의를 갈아 입고 숨겨둔 칼을 한 자루씩 집어넣었습니다. 곧바로 복수를 위해 밀고자 조직이 운영하던 세탁소로 가 보니 벌써 다 도망쳤더군요. 제가 탈옥한 것을 알고 도피했던 것입니다.”
그날 저녁 이씨 일행은 부인들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한강을 넘는다. 군경 합동 수사반이 구성돼 체포 작전에 들어갔다. 전두환 대통령은 즉각 발포 명령을 내리고,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3,000만 원의 포상금까지 걸었다. 이에 대해 이씨는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3,000만 원의 포상금과 즉각 발포를 지시한 것은 저 때문으로 생각한다”며 “전대통령은 아마 탈옥한 이상훈이 과거 공수여단장 시절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던 이상훈인 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도언 중수부장과 담판을 짓다
그날 저녁은 종로경찰서 앞에 있던 창신여관에서 묵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대로 경찰서 앞이 오히려 안전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나중에 종로경찰서장은 이 일로 문책당했다. 탈주범들은 다음날 수유리에 있는 스위밍클럽 별장을 얻어 그곳에서 숨어 지냈다.
이씨는 고심을 거듭했다. 여기서 인생을 끝내야 할 것인가, 인생을 한번 전환해볼 것인가. 5일 동안의 고민 끝에 그는 자수를 결심한다. 그는 동생들에게 “연락하면 곧바로 들어오라”는 말을 남기고 혈혈단신 대검찰청으로 향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곳은 대검 중수부로, 나중에 검찰총장까지 지난 김도언 검사가 중수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수위실에서 곧바로 중수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이상훈이라는 사람인데 지금 대검 청사 수위실 앞에 와 있습니다. 제가 남자답게 왔으니 영감님도 남자답게 대해 주십시오. 지금 조용히 내려오십시오.”
김도언 중수부장은 깜짝 놀랐다. 쥐가 저절로 고양이 굴을 찾았으니 놀랄 수밖에…. 김도언 부장은 “혼자 왔나? 알았네. 금방 내려가겠네”라며 수사관 한 명을 대동하고 내려왔다. 김부장은 수갑도 채우지 않은 채 이씨의 귀에 대고 “뒤로 올라가자”
고 했다. 김부장은 다른 탈주범들은 어디에 있는지부터 물었다.
이씨는 “나는 영감님을 믿고 왔다, 나로 인해 구속된 사람들은 모두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김부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씨도 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수하도록 지시함으로써 5일 간의 탈주극은 막을 내린다.
나중에 김도언 부장은 검찰총장이 된다. 그는 1993년 검찰총장이 된 후 ‘중앙일보’ 권영민 기자와 인터뷰에서 “평생 검사 생활에 이상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힌 바 있다.
청주교도소에서 DJ와 만나다
이씨는 1심에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7년, 도합 14년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는 징역 5년에, 보호감호 7년을 받았다. 1심보다 2년이 깎인 것이었다.
그는 청주교도소에 수감중 광주내란음모 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김대중(DJ) 씨를 알게 된다. 당시 DJ는 허름한 창고를 개조해 만든 독방에 수감돼 있었다. 그 바로 5m 안쪽 담을 둘러싼 곳에는 시국사범을 유치한 엄정 독방이 있었다. 이씨가 수감된 곳에서는 DJ의 ‘뺑끼통’ 철장이 보였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시국사범과 운동권 학생들을 만나면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조금씩 알게 된다.
당시 시국사범들은 매일 식기를 긁으며 “김대중의 처우를 개선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그 때 교도소에서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두려워 DJ를 잡범으로 대우하는 등 멸시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이씨는 그곳에서 DJ와 관련해 두 차례 폭력을 휘두르다 결국 청송교도소로 이감되고 만다.
“김대중 씨에게 식사를 줄 때는 의무과에서 검열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제가 마침 의무과에 갔을 때 김대중 씨의 식사를 검열하고 있었습니다. 식사 내용물은 다른 제소자와 모두 같았는데, 사과 3개를 더 얹어 주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각 1개씩 드시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김대중 씨는 한복 비슷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점심 때만 운동을 하셨습니다. 식사 검열을 하는데, 교도관이 ‘소지’(청소 담당 죄수)에게 ‘이 사과 누구 거야’ 하고 묻자 소지가 ‘대중이 거요’ 하는 겁니다.
치료받던 저는 ‘이런 무식한 새끼가 있나? 아무리 잡범이지만 대중이가 뭐냐’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교도관이 ‘대중이만 사과 먹나? 나는 못 먹나’ 하면서 그 사과를 우걱우걱 씹어먹더라고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새끼야,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대중이가 뭐냐’ 하면서 냅다 질러버렸죠. 보안과장에게 끌려가 사유를 설명하자 오히려 교도관을 다른 곳으로 쫓아버리더군요.”
며칠 후 비슷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DJ는 담 벽에 계란처럼 생긴 꽃이 피는 꽃나무를 키우고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교도소에서 즐기는 유일한 낙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씨가 운동하고 있는데 청소를 하던 소지가 갈고리로 꽃 대가리를 탁탁 꺾어 버렸다. 이씨는 또 울분이 일어 “야, 인마, 꽃을 왜 꺾어” 하며 곧바로 뛰어가 이마로 면상을 받아버렸다.
얼마 후 원주에 있던 김태촌이 이감돼 왔다. 김태촌은 이씨에게 “사회에 나가서 만나 큰 사업을 한번 하자”고 했다. 이씨는 “당시 서방파 두목인 김태촌이 큰 사업을 하자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사업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송교도소에서 벌인 두 차례의 인질극
청주교도소에서 자주 사고를 치자 이씨는 청송교도소로 이송된다. 당시 청송은 삭막했고 제소자들에 대한 처우가 잔인할 정도였다. 이감 직후부터 이씨의 투쟁이 시작됐다. 이 때 청주교도소 시절 운동권 학생들에게 배운 조직화 방법이 큰 도움이 됐다.
혼자 관(官)이나 조직과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기 때문에 무조건 조직화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것. 그는 더욱이 학생들에게서 “먼저 의식화하고 다음에 조직화하고 그 다음에는 레지스탕스처럼 투쟁하라”는 대응 방법까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터였다.
청송교도소로 이감된 얼마 후 화천 27사단 총기 난동 사건과 관련한 군 감호자들이 들어왔다. 이씨는 이들을 포섭했다. 이씨는 이들과 함께 교도소 측에 ‘전두환 정권은 물러나라, 처우를 개선해 달라, 민간 법정에서 재판받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식화 쪽지를 돌린 사람이 군 감호자인 박영두였다.
1984년 10월12일 박영두가 교도관들에게 집단폭행당해 다음날 새벽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잔인하게 맞아 죽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씨는 두 차례나 인질극을 벌인다. 사회에서 대도(大盜)로 알려졌던 조세형도 인질극에 참여한다. 이씨의 말을 들어 보자.
“박영두 사망 사건 이후 저는 더욱 강력한 투쟁에 돌입했습니다. 1985년 1월 조세형이 우리 방 곁으로 오는데 제가 의식화 교육을 많이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조형, 우리가 인질극 투쟁 계획이 있는데 같이 하자’고 하자 협조하겠다고 하더라고요. 4명이 의기투합했는데 두 달 만에 칼 네 자루를 만들었어요. 1985년 10월12일 우리는 드디어 인질 사건을 벌입니다. 청송교도소 교도관 8명을 인질로 잡고 조세형과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우리는 사회보호법 폐지, 폭력 교도관 처벌, 박영두 사건 고소 고발 등을 조건으로 인질극을 벌여 3일을 끌었습니다. 결국 법무부에서 수습조가 내려와 진압됐습니다.”
이씨는 이 사건으로 제1감호소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1988년도 4월4일 제소자 6명을 포섭해 다시 인질 난동 폭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2차 난동인데, 교도관 3명을 잡고 3일간 난동을 벌였다. 두 차례 인질극에도 박영두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씨 등 제소자들은 나중에 ‘칫솔 사건’을 일으킨다. 제소자 6명이 일부러 칫솔을 먹었다. 칫솔이 뱃속에 걸려 사회 병원으로 나가면 청송교도소의 잔혹한 사정을 사회에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6명 중 한 명이 뱃속에 칫솔이 걸려 6개월 만에 외부 병원으로 가게 됐는데, 그 때 그의 항문에 두 통의 편지를 넣었다. 편지는 ‘고삐’의 작가 윤정모 씨에게 보내 달라고 했다. 윤정모 씨는 이 편지를 ‘한겨레신문’ 김종구(현 논설위원) 기자에게 보낸다.
칫솔 사건으로 박영두 사망 세상에 알리다
당시 김종구 기자는 사회면 톱으로 이 사실을 보도했다. 그 때 기사 제목은 ‘청송교도소 버려진 인권, 가혹 살인도’라고 돼 있다. 기사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영수 씨는 교도관들의 폭행으로 지난 1984년 숨진 박영두 씨의 사인 규명 등을 요구하며 청송 제1 감호소에서 동료 감호인 5명과 함께 인질극을 벌이다 붙잡혀 교도관들로부터 구타당한 뒤 이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리려면 외부 병원에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 칫솔을 삼켰다. 진씨는 결국 안동의료원에 외래검진 나온 틈을 타 이 같은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청송교도소에서 이씨 등이 쓴 편지는 김대중·김영삼 씨에게 보낸 것이었다. 이것을 김종구 기자가 기사로 써서 사회 문제화되고 나중에 김대중·김영삼 씨가 조사단을 보내기도 했다. 그 때 평민당에서 온 사람이 신순범 의원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88년에 삼청교육대 사건이 국정감사에까지 올랐다.
이씨는 청송교도소에서 투쟁을 계속하다 1993년12월25일 출소했다. 그는 출소 며칠 후에 자신에게 구형했던 김원치(현재 변호사)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이상훈인데, 출감했습니다. 한번 뵙겠습니다.”
이씨는 김원치 검사 역시 검사다웠다고 회고한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보복당할까 두려웠을 텐데 김검사는 “그래, 그럼 저녁이나 하지” 하면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서울 반포에 있던 한 일식집에서 김검사를 만났는데 당시 ‘한국일보’ 기자 한 명과 나왔다. 김검사가 “고생 많았지? 나를 원망하지?”라고 물어 이씨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영감님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폭력의 아수라장에 있었을 텐데 사람 되어 나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출감 후 1994년 3월24일 바로 사업자등록부터 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자동차 야광 특수안경 재고품을 파는 일이었다. 나중에는 중국시장에도 뛰어들어 가발 수입사업을 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3년 만에 부도를 맞고 사업을 접었다. 이후 이씨는 보석 관련 사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었다.
“독방에서 14년을 살던 사람이 태국·호주 등 곳곳을 찾아다니며 외국 굴지의 회사들을 고객으로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국내 보석상들 사이에는 저를 통해야 장사할 수 있다는 인식까지 심어지게 됐습니다. 진주사업에도 뛰어들어 중국에서 진주를 수입했습니다. 또 새로운 핵 진주도 개발했습니다. 주얼리 상가를 개발하는 사업도 했습니다. 수입하거나 개발한 제품을 판매할 수 있으니까요. 제조뿐만 아니라 판매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그는 돈이 얼마쯤 모이자 사회봉사에 나섰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1984년 10월에 청송교도소에서 죽은 박영두 사망 사건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는 모든 증빙자료를 만들어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 보내고, 함께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 2001년 6월 박영두가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음을 인정했다. 7년 간의 투쟁 결과였다. 5·6공 피해자협의회도 만들었다. 현재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주범이었던 허평길 교수가 대표를 맡고 있다.
“지금 5·6공 피해자협의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사회보호법 폐지, 삼청교육대 피해 보상 문제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삼청교육대피해보상안은 이뤄냈고, 사회보호법 폐지도 계속 추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남북사랑의빵나누기운동본부’를 결성했습니다. 굶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운동으로, 제 사업 수익금의 상당액을 거기에 쏟아부을 예정입니다.”
그는 현재 청송보호감호소에 수감돼 있는 김태촌과도 편지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김태촌은 편지에서 주로 신앙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그는 “김태촌 씨와 부인 이영숙 씨를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옥중결혼했는데 두 사람 모두 암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결혼하고도 두 사람은 손도 한번 잡아 보지 못했습니다. 하루빨리 사회보호법 같은 악법이 폐지돼 그들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월간중앙 2004년 04월 01일 341호 / 2004.04.09 11:34 입력 / 2004.04.09 17:0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