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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샬롬투어 원문보기 글쓴이: 조동주
성지순례 기행문
글쓴이: 강성열
일시: 2007년 1월 22일~2월 9일 (18박 19일)
방문지역: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 터키, 그리스, 로마
주관:(주) 샬롬투어 [02-738-6977]
대표이사 조동주사장[010-3240-9928]
호남신학대학교
(1) 두 번째 성지순례 기행문을 시작하면서
두 번째 성지순례 기행문을 쓰려니 3년 전의 정말 흥미로웠던 성지순례 여행이 생각난다. 당시에 우리는 신학대학원 1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33명의 사람들을 모아 16박 17일(1월 26일-2월 11일) 동안 터키,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등 무려 다섯 나라를 순례하였다. 그 때 여행에 동참한 33명이라는 숫자는 공교롭게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민족대표 33인의 수와 동일한 것이어서 더욱 의미 있는 순례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숫자와 관련된 묘한 인연이 계속되는 것 같아 은혜가 배가되는 듯하다. 이번 여행은 1월 22일(월)부터 2월 9일(금)까지의 18박 19일 여정으로 진행되는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여행 참가자의 수가 18명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순례기간 동안 매일 아침 말씀을 읽으면서 한 명씩 그 날 일정을 위한 기도를 담당하였는 바, 18박 일정에 필요한 기도자의 수가 18명이었으니 참으로 은혜로운 일치가 아닌가!
일정이 긴 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주일이 두 번 끼어있던 탓에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로서는 두 주(실제로는 삼주)씩이나 교회를 비운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는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의 구약학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하려던 계획이 수정되어, 학교 밖의 다른 사람들도 포함시켜 가는 여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순례 일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야말로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중요한 성지들을 18박 19일에 걸쳐서 하나씩 둘러보려는 야심찬 계획이었기에, 참여자가 적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집트를 출발하여 요르단과 이스라엘, 터키, 그리스,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여섯 나라에 걸친 여정은, 벅차기는 해도 단번에 성경 전체의 주요 성지를 둘러볼 수 있다는 큰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순례 여행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후회 없는 여행이요, 감동과 은혜가 넘치는 여행이었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성서의 세계를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만졌노라!” 이런 외침이 절로 나오는 여행이었다. 특히나 18명의 참여자들 중에는 타교단이기는 하지만 여교역자로 수십 년을 사역한 귀한 분들이 여섯 명씩이나 포함되어 있어서, 더욱 뜻 깊은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더욱이 중간에 아테네의 한인교회에서 부흥회를 갖기로 예정되어 있던 장신대 신대원 동기 목사님 가정의 세 식구가 동행하는 여행이었으니, 그 즐거움이 오죽했겠는가!
이제 그러한 감동과 은혜, 그리고 즐거움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만 있을 수 없어, 그 일정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단편적으로 보고 들은 것들만을 가지고서 기행문을 쓰기에는 너무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부득이하게 기존의 성지순례 자료들-3년 전에 썼던 기행문을 포함하여-을 폭넓게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에서 구입한 각종 안내문들이나 책자들도 두루두루 참고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공부가 되어 좋고, 홈페이지를 매개로 하여 만날 다른 사람들이나 수업 시간에 만날 학생들 모두에게도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여기에 정리한 내용들과 자료들-사진 포함-을 통하여, 이미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와 감동이 생생하게 전달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여행기가 순조롭게 잘 씌어져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모든 순례자 식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 이집트의 카이로 도착: 2007년 1월 22일(월)
이번 팀은 광주 지역 9명과 서울-강원 지역 9명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모두 정해진 시간에 인천공항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광주 지역 9명은 이른 아침 6시에 모여 인천공항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나머지 9명과 합류하였다. 오후 2시 55분에 인천국제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11시간 30여분을 날아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였다(현지 시간 오후 6:30, 한국과 8시간 시차).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우리는 기내에서 호신 동문인 안웅현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다. 남미의 브라질 바로 위쪽에 있는 수리남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던 중이라 하였다. 5년쯤 전에 칠레에서 2년 정도 선교사 활동을 했었다니 천생(天生) 선교사로 부름 받은 종이 아닌가 싶다. 남한의 1.5배 면적에 45만 명의 인구가 사는 수리남에서 주의 복음을 널리 전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암스테르담에서 우리는 서로의 발길을 달리 하였다.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해서는 2시간 30분 정도를 기다린 다음에 카이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고, 4시간 10분 가까이 어두운 밤하늘을 난 끝에 마침내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이집트를 안내할 김인순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새벽 3시 무렵이었다. 우리나라로서는 오전 10시경이지만, 이곳은 우리나라와 7시간의 시차(時差)를 두고 있는 까닭에, 오전 9시에서 7시간을 뺀 시간이 이곳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이렇게 꼭두새벽에 1박을 하게 되었으니, 먼저 이집트와 카이로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반(半) 사회주의 국가인 이집트-더 정확하게는 이집트 아랍 공화국-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회교권 국가로서, 남한의 11배 정도 되는 영토를 가지고 있다 한다. 그러나 국토의 95% 정도가 사막 지대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전체 땅의 5%밖에 안 된다. 나일강 주변과 나일 삼각주가 그 5%에 해당하는 지역임은 물론이다. 그 좁은 지역에 7~8천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살고 있으니 실질적인 인구밀도는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상위 5~10% 정도 되는 사람들이 이집트의 부를 장악하고 있다 하니, 빈부의 격차 또한 심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카이로는 현재 1,8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이집트의 수도로서, 창세기의 요셉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요셉은 태양신을 섬기는 온(On) 또는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 불리는 도시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했는데(창 41:45), 이 온이 바로 오늘의 카이로에 해당하는 곳이다. 카이로는 흔히 현대와 고대가 한데 뒤엉킨 도시 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라고 한다. 도시 전체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신(新) 카이로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구(舊) 카이로이다.
신 카이로는 도시로서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옛 유적지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지만, 구 카이로(Old Cairo)는 1천년 이상 되는 도시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유적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 기독교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구 카이로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기 예수 피난교회와 모세 기념교회이다. 이 두 교회를 비롯하여, 세계에서 몇 번째 안 가는 유명한 이집트 박물관, 그리고 그 유명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내일 방문키로 하고 모두들 밤늦게(?) 잠을 청하였다. 잠이 곱게 올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는 잠(시 127:2)도 시차 극복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일까...
(3) 구 카이로를 거쳐 시내산까지의 출애굽 여정: 2007년 1월 23일(화)
카이로에서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시차 적응의 겨를도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전용버스를 타고서,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기자(Giza)의 피라미드를 향해 이동하였다. 기자에 도착하니 고왕국 제4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세 개의 피라미드가 크기와 연도순으로 그곳에 나열되어 있었다(주전 2700-2500년). 맨 북쪽에 가장 큰 쿠푸 왕의 피라미드가 있었고, 좀 더 아래쪽에는 그의 아들 카푸레 왕의 약간 작은 피라미드가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쪽에는 쿠푸의 손자인 멘카우레 왕의 가장 작은 피라미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집트에는 모두 98개 정도의 피라미드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기자의 쿠푸 왕 피라미드라고 한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관람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피라미드 내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오전 150명, 오후 150명으로 관람객을 제한하는 바람에, 우리 같은 단체 관광객은 표를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손자인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를 관람했지만, 별로 볼 것이 없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처럼 큰 곳-높이가 147m이고 밑변이 230m인-이라면 볼 것도 많을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무게가 2.5톤에서 10톤에 이르는 화강암 덩어리 250여만 개를 채석하고 또 운반하여 아파트 40층 높이로 쌓았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21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언젠가 벼락을 맞아 7개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지금은 207개의 계단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무거운 돌을 채석장에서 어떻게 공사 현장까지 운반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나일강의 범람 주기에 있다. 6-9월경의 우기가 계속되면 나일강은 7-10월경에 범람하게 된다. 나일강 상류의 물이 하류까지 내려오는 데 걸리는 시일(한 달 정도)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피라미드에 소용될 큰 돌들은 이처럼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뗏목에 실어 운반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야 쉽게, 그리고 빨리 운반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피라미드는 전부가 암반 지역에 건축하게 되어 있다.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요, 오래도록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암반 지역을 깎는 데만 9년 정도 걸린다고 하니, 얼마나 큰 공사인지 짐작이 안 간다. 피라미드 제작에 하루 10만여 명이 1년에 3-4개월씩 20여 년 동안, 연인원 2~3억 명이 동원되었다는 말을 누가 믿으려고나 할까? 더욱이 피라미드의 각 능선이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피라미드가 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불리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라미드 제작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일반적으로 피라미드가 파라오 생존 시에 만들어지는 게 원칙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완성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피라미드는 그 피라미드의 주인공인 파라오가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음을 의미한다.
피라미드 외에도 이집트의 석조물들 중에 유명한 것이 피라미드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하는 스핑크스이다. 기자의 삼대 피라미드 부근에는 사자의 몸과 인간의 머리를 가진 스핑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석조물은 길이가 73m, 높이가 20m, 머리 폭이 4m 이상이나 되는 거대한 석상으로,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큰 바위에 카푸레 왕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또 하나 유명한 석조물은 장제전(또는 장례제전)이다. 이것 역시 기자의 삼대 피라미드 가까이에 있었다. 이 장제전은 신왕국 시대에 이르러 왕묘(王墓)로서의 피라미드를 만드는 대신에, 미이라 처리된 파라오의 죽음을 애곡하는 한편으로, 그를 예배하고 그의 행복한 내세를 비는 제사 장소로 만들어진 것이다.
기자의 피라미드 부근에도 장제전이 있었지만, 장제전 중에서도 가장 볼만한 것은 룩소르(Luxor)-중왕국 시대의 수도인 테베(=‘노-아몬’[No-Amon], 나 3:8)-에 있는 하트셉수트(Hatshepsut)의 것이란다. 그러나 아쉽게도 카이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비행기로 1시간 거리) 우리의 일정으로는 가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더욱이 룩소르에는 이집트 최대 규모의 카르낙 신전(=아몬[Amon] 신전)과 아멘호텝 3세의 신전-지금은 폐허가 된-을 지킨다는 멤논의 거상(巨像, 의자에 앉아 있는 스핑크스로 20m 높이), 피라미드 도굴을 피하여 암벽 중간을 파서 만든 왕들(주전 1600-1200년)의 공동묘지, 곧 왕가의 계곡(the valley of the kings), 각종 제전을 치르는 장소인 룩소르 신전 및 태양신을 상징하는 기념비 오벨리스크 등이 있어서 꼭 가봐야 할 유적지임에 틀림이 없다.
특기할 사항은 본래 룩소르에는 오벨리스크가 두 개 있었는데,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하여 자기 나라로 옮겨가는 바람에, 하나는 룩소르 신전 앞에 그대로 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콩코드 광장 앞에 있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이집트에서 꼭 가봐야 할 또 다른 유적지는 한참 남쪽에 있는 나일강 상류 지역의 아부심벨 신전(람세스 2세)이다. 사진으로만 본 이 신전은 요르단의 페트라 유적지 못지않은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너무 멀어서 갈 수가 없었다. 70인역이 만들어졌다는 알렉산드리아 역시 꼭 가봐야 할 곳이지만, 일정상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에서 우리가 본 주요 유적지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및 장제전 등이었지만,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고대 이집트인들이 항상 태양이 뜨는 나일강 동쪽 지역에다가 신전을 짓고, 태양이 지는 나일강 서쪽 지역에다가는 주로 피라미드나 장제전 또는 왕가의 계곡 같은 묘지를 지었다는 점이다. 서쪽 지역은 죽은 자들의 영토(necropolis)인 셈이다. 비록 태양이 지는 서쪽을 죽음의 장소로, 그리고 생명이 소진되는 장소로 이해했으면서도 이집트인들은 본질적으로 강한 내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석조 무덤인 피라미드가 그 점을 뒷받침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무덤을 그렇게 크게 만든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다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그저 인간의 무모한 욕심이 만들어낸 거대한 문화 유적지일 뿐인 것을!
쿠푸 왕의 피라미드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그 거대한 무덤의 크기에 압도당했던 우리는, 피라미드 내부의 그 많은 금은보화들이 일찍부터 도굴되어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피라미드 외벽의 많은 화강암들이 이집트 사람들에 의해 건축물 재료로 쓰이는 바람에 적지 않게 훼손되어 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아닐 수 없었다. 왕들의 절대적인 권세를 널리 알리고자 했던 그 큰 무덤들이 지금은 텅 비어 있고 또 겉모양마저도 많이 훼손되어 있다 하니, 해 아래 새 것이 없고 인생살이의 모든 것이 다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과도 같다는 전도자의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 같다.
이상의 세 유적지를 순식간에 관람한 우리는 곧바로 구 카이로의 유명한 기독교 유적지들을 방문키로 하였다. 아기 예수 피난교회와 모세 기념교회가 바로 그곳이다. 우리가 먼저 방문한 첫 유적지는 아기 예수 피난교회였다. 이 교회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함께 피난했던 곳으로 알려진 지하 토굴(crypt) 위에 세워진 것으로, 성 사르기우스 교회(St. Sargius Church)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 교회가 본래는 로마의 막시밀리안 황제 때(주후 296년)에 순교한 사르기우스(Sargius)와 바쿠스(Bacchus)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였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건물은 10-11세기에 바실리카 양식으로 재건한 것이다. 따라서 이집트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 할 수 있다.
예수 피난교회는 현재 콥틱 정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콥틱(이집트 원주민 또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뜻) 교회는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을 인정하는 탓에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단성론)으로 정죄되었지만, 그들 나름의 신앙을 지금껏 고수하고 있다. 회교도 일색인 이집트에서 10%에 가까운 기독교인 인구를 구성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에 아기 예수 피난교회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보수 공사를 완료한 다음이어서, 우리로서는 새롭게 단장한 이 교회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옛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기둥이 내부에 있었는데,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것만 잘 다듬어지지 않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열한 개의 기둥은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기 예수 피난교회를 나와 가까이에 있던 성 조지(St. George) 교회를 지나친 다음, 곧바로 모세 기념교회를 찾았다. 모세가 나일강으로부터 건짐 받은 곳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말이 모세 기념교회이지, 실제로는 벤 에즈라 회당(Ben Ezra Synagogue)이다. 유대교 회당이다 보니까 테러 위험을 염려하여 입장객의 소지품을 검색하는 경찰들이 있었다. 교회 건물 자체는 주후 4세기에 세워졌으나, 9세기 말에 유대인들에게 매각되어 유대교 회당으로 바뀌었고, 1115년에 예루살렘에서 랍비 아브라함 벤 에즈라가 방문한 이후 재건되면서 그의 이름을 딴 교회로 개명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모세가 이곳에서 살았으며, 그 안에 있는 바위는 모세와 예언자 예레미야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곳이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이집트에 온(렘 43-44장) 예레미야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하여, 그의 가묘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회당 앞마당에는 모세가 나일강으로부터 건짐 받은 곳임을 나타내는 우물이 보존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 우물이 모세 구출 장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 회당에서는 구약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게니자(Geniza) 사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원래 회당에서는 매주 안식일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일정 부분들을 낭독하는데, 그 오경 두루마리의 가죽이 낡아서 글씨가 희미해지면 새로운 것으로 갈게 된다. 이 때 낡아져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두루마리는 회당 한구석에 모아놓게 되는 바, 이렇게 해서 모아진 두루마리들과 기타 문서들의 창고를 흔히 게니자(Geniza)라고 부른다. 중세 이후 유대교 회당의 게니자를 통해서 많은 오경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1890년대에 벤 에즈라 회당의 게니자에서 발견된 오경 두루마리 사본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모세 기념교회를 방문한 다음, 우리는 간단히 점심을 마친 후 카이로 일정의 마지막 장소인 이집트 박물관을 찾았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집트의 문화 유산에 대한 탐구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략시(1799년)에 발견한 로제타 석비를 기점으로 하여 프랑스 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집트의 무수한 유적들이 서구 열강의 손길에 큰 수난을 겪게 되었지만, 뜻있는 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19세기 중반경에 이집트의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할 박물관 건립이 가능케 되었다.
현재의 박물관은 10만점 이상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특히 1920년대에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된 투탕카멘의 유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피라미드나 무덤에서 발견된 거의 대부분의 유물들이 도굴이나 약탈로 인하여 사라지거나 유럽 강국들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만은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어서 발굴 당시의 상태를 완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더욱이 투탕카멘은 9세에 왕위에 올라 18세에 죽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의 무덤에 그렇게 많은 유물들이 담겨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애초부터 발굴 자체를 시도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박물관 건물 입구로 들어서니, 파피루스 종이의 원료가 되는 식물이 자라고 있었고, 전시관 초입에는 그 유명한 로제타 석비 모형이 세워져 있었다. 원본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집트 박물관의 1층은 유물들을 고왕국 시대, 중왕국 시대, 신왕국 시대 등 시대별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2층에는 유물들이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이집트 박물관을 “투탕카멘의 박물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지 그 이유를 알만했다.
1층과 2층을 대충 둘러본 결과, 참으로 많은 옛 시대의 유물들이 짜임새 있게 관리ㆍ전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전시관을 가득 채운 많은 석상들 중에 남자 석상의 얼굴이 한결같이 갈색으로 되어 있던 반면, 여자 석상의 얼굴은 거의가 다 흰색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미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살아있던 자의 석상이 두 손과 수염을 밑으로 내리고서 왼발을 앞으로 내민 형태로 되어 있지만, 죽은 자의 석상은 두 손이 가슴에 X자 모양으로 접혀져 있고 수염은 말아 올려져 있으며 두 다리 역시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는 점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는 이집트인들의 독특한 방식에 눈길이 갔다.
우리는 1층과 2층을 중요한 유물들만을 중심으로 조금만 관람하였을 뿐이지만, 전체를 다 관람하려면 하루가 걸릴 수도 있다 하니, 이집트 박물관이 영국의 대영박물관 및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에 속한다는 것이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많은 유물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화려했던 이집트 문명의 영화는 어디론가 가고 없고, 이제는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국민들이 대부분인 회교권 국가가 되어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이집트의 부를 독차지하고 있는 상류층 5~10%의 전횡이 꼭 그 옛날 파라오의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수십만의 인명을 희생시켰던 권력층의 모습을 닮은 것 같다는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처럼 씁쓸한 느낌을 뒤로 하고서 우리는 오늘의 종착역이요 내일의 주요 방문지인 시내산을 향하여 이동하였다. 시내산으로 향해 가는 길은 정확하게 출애굽의 경로를 따른 것으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의 오랜 여정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카이로를 빠져나가 신광야로 가기 위해서는 수에즈 운하를 거쳐야만 했다.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홍해를 맨땅처럼 건넜지만, 우리는 버스를 타고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의 밑을 통과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통과한 수에즈 운하는 1869년에 처음 완성된 것으로서, 이집트의 국유화 선언으로 인하여 시내 반도와 더불어 한동안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의 이익이 충돌하는 국제 분쟁의 중심지로 변했으나, 미국의 중재를 통한 평화협정의 체결로 인하여 완전히 이집트의 소유로 확정되었다 한다. 카이로에서 육로를 통하여 시내 반도로 가려면 반드시 이 운하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수에즈 운하 밑으로 뚫은 해저 터널을 지나야만 한다. 우리는 장장 4km나 되는 해저 터널을 지나면서, 이 터널을 만들었다는 일본의 선진 기술이 새삼 부럽게 느껴졌다.
1.6km 길이의 해저 터널을 지나다 보니 정작 173km에 이르는 수에즈 운하-폭은 200m이고 수심은 20m인-의 모습을 조금도 보지 못한 게 아쉽긴 했지만, 수에즈 운하의 밑을 통과하여 지나갔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기로 했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후 곧바로 마라를 향한 발길을 재촉하였다. 오늘날 아랍어로 오윤 무사(Oyuon Musa, ‘모세의 우물’)라 불리는 마라에 도착해보니, 마라가 앞으로 가게 될 르비딤과 마찬가지로 대추야자 나무가 무성한 오아시스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고 모세에게 불평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출 15:23-25). 백성의 불평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한 나무를 물에 던지라고 명하셨다. 모세가 그대로 했더니 물이 달게 되었다.
마라에는 모세의 이러한 기적을 상기시키는 큰 우물이 하나 보존되어 있었다. 관리가 너무 소홀한 탓인지 물이 더러워 보였지만, 이스라엘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이 발생한 곳이라 하니, 허술할지언정 옛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마라에서 잠시 머문 다음에, 다음 목적지인 르비딤으로 이동하기 위해 모두 전용버스에 몸을 실었다. 르비딤으로 가는 길에 신광야를 지나다 보니 유전 시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신광야가 유전 지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집트는 널리 알려진 석유 수출국이라 한다. 한여름에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도 전기세가 별로 나오지 않는다니 알만한 일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 지대에는 아직도 채굴하지 못한 채로 방치되어 있는 천연자원들이 무진장하다고 한다. 부러운 나라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옛 나일 문명의 영화를 회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상류층 5~10%가 이집트 경제의 99%를 장악하고 있는 구조적인 경제 부정의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집트 문명의 21세기 르네상스는 요원할 것이다.
신광야를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이 또 하나 있다. 이집트에 사막이 많은 이유는 전반적으로 강수량이 적기 때문이다. 비가 오지 않으니 나일강 주변을 제외한 모든 곳이 사막으로 바뀐 것이다. 실제로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보니, 하늘에서 구름을 보기가 아주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처럼 푸른 하늘의 연속이었다. 어쩌다가 빗물이 강물로 변하여 도로가 유실될 정도로 갑자기 많은 비가 오는 경우도 있으나, 이집트 전역의 평균 연강수량은 20-30mm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집트가 문자 그대로 태양의 나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집트는 태양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서 최고신으로 숭배했을 것이다.
신광야를 오래도록 달린 끝에 르비딤을 지나게 되었지만,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밤중이어서 볼 수도 없을뿐더러 숙소까지의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르비딤에 관해서 몇 가지 알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오늘날 파이란 오아시스(Oasis of Feiran)라 불리는 르비딤은 이스라엘이 아말렉 족속과 더불어 싸웠던 곳으로 유명하다(출 17:8-16; 신 25:17-19). 당시에 아말렉 족속은 피곤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었고,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에 힘입어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있음으로 인하여,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모세는 그 승리를 기념하여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 그 단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지어 불렀다.
이러한 역사적인 흔적이 담겨 있는 르비딤 오아시스를 어둠 속에서 일견한 후 우리는 계속해서 시내산 밑의 숙소로 달렸다. 마침내 밤 늦게 숙소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짐을 풀었다. 시차 적응도 안 된 터에 아침부터 강행군을 한데다가 장시간 버스를 탔으니 모두가 피곤할 법도 했다. 특히나 연세 많은 여전도사님들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더욱이 내일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새벽 2시에 일어나 시내산 등반을 해야 하니 많은 기도가 필요한 하루였던 것 같다. 내일도 좋은 날씨와 건강을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면서 짧은 잠을 청하였다.
(4) 시내산 등정 후 요르단으로: 1월 24일(수)
우리가 하룻밤을 머문 시내산 지역은 시내 반도 중하부에 위치한 곳이다. 물론 시내산이 속한 시내 반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삼각형의 반도로서, 출애굽 여정의 성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독교 성지가 바로 시내산인 것이다. 비록 하룻밤이긴 했지만, 이처럼 유명한 시내산 기슭에서 1박을 했으니 모두들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호텔에서가 아니라 천막처럼 생긴 방갈로에서 1박을 했으니 말이다. 좀 춥기는 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시내광야 체류 기간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고생이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시내산 등정은 당시에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만 오를 수 있었던 산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그 산을 오르려 하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장막이 둘로 나누어진 것과도 같은 은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시내산 등정은 항상 예외 없이 새벽 2시나 2시 반경에 시작된다고 한다. 해돋이를 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아침에 떠나면 도중에 너무 더워서 산행(山行) 자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팀도 예외일 수 없어 잠도 거의 자지 못한 채로 꼭두새벽에 일어나 시내산 등정을 준비했다. 시내 광야는 시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해발 800m)에 속해 있지만, 시내산 자체의 높이가 2,285m이기 때문에 시내산 등정은 결코 만만치 않은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나 평소에 운동을 별로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시내산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종종 ‘하나님의 산’으로 불리는 시내산의 발음이 꼭 ‘신(神)의 산’이라는 표현과 같게 들린다는 점이다. 결국 시내산은 신의 산, 곧 하나님의 산인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예정된 대로 새벽 3시 반경에 숙소를 출발하여 시내산 등정을 시작하였다. 중간에 성 캐더린 수도원(St. Catherine Monastery) 곁을 지나갔다. 손전등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초승달로 인하여 컴컴하기 이를 데 없는 시내산을 오르기가 아주 힘들었을 정도로 사방이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며칠 전엔가 많은 눈이 내렸다는데, 정작 우리가 올라갈 때에는 그 흔한 눈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디 그 뿐인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시내산의 하늘은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일단은 중간 휴게소까지 가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산에 오르다 보면 뒤로 처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 일정액을 지불하고서 중간 휴게소까지 낙타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럭저럭 버틸 만한 사람들은 낙타를 타기보다는 그냥 걸어서 산에 오르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낙타 맛을 보고 싶은 사람들과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은 낙타에 올라 중간 휴게소로 향했다. 성지순례가 시작된 이후 오래간만에 제대로 하는 운동이어서 참 좋았다.
걸어서 올라간 사람들이 중간 휴게소에 도착한 것은 새벽 5시경이었다. 더 천천히 올라오는 낙타 팀을 기다렸다가 사람들이 다 모이자, 이제는 모두 걸어서 시내산 정상을 향하여 산행을 시작하였다. 정상 바로 밑의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6시경이었다. 천막 형태로 된 휴게소 하나를 예약하여 곧바로 예배를 드렸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수요 기도회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했다. 서문원 목사의 설교로 진행된 예배는 정말 은혜로웠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 두 돌판을 받았다는 곳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에는 미리 가지고 올라온 컵라면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그리고 나서 몇 걸음 안 되는 시내산 정상을 향해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모았다. 시내산 최정상에는 모세 기념교회가 있었다. 그래서 아랍인들은 이 산을 ‘모세의 산’이라는 뜻으로 ‘제벨 무사’(Jebel Musa)라고 부르는 것일까? 7시경에 해가 뜨는 모습을 보니 장관이었다. 찬란한 아침 햇살이 시내산 주변의 황갈색 바위산들과 어울려 만들어내는 경치는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시내산 해돋이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하산하기 시작했다. 올라갈 때는 몰랐으나 내려갈 때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올라갈 때 걸었던 낙타길과 그보다는 훨씬 험한 바위길-수도원의 수사들이 만들었다는 3,750개의 계단길-이 그렇다. 우리가 선택한 낙타길은 처음에 오를 때는 몰랐으나 정말 길고도 긴 등산로였다. 아마 날이 밝을 때 왔더라면 그 거리에 질려 시내산 등정을 처음부터 포기했을 정도로 길었다. 그래도 처음에 출발했던 성 캐더린 수도원 앞에 도착하고 나니, 온 몸이 개운하고 상쾌했다. 몸 안에 쌓여 있던 온갖 노폐물들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얼굴 피부가 무척 부드러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염려와는 달리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하산을 완료하고 나니 감사가 절로 나왔다. 그 힘든 시내산 등반을 잘 마친 여전도사님들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은혜와 사랑의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 결과가 아닌가 싶었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일행이 다 모이자, 우리는 바티칸의 교황청 도서관 다음으로 많은 성서 사본들을 가지고 있다는 성 캐더린 수도원을 방문했다. 이 수도원 자리는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장소(출 3:1-5)라고 한다. 본래 이 수도원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은둔한 자들이 주후 3세기 중엽에 콘스탄티누스의 모후인 헬레나(Helena)의 도움에 힘입어 세운 것이었으나, 귀족 출신인 캐더린이라는 여인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아 순교하게 되고, 그녀의 시신이 천사에 의해 시내산 지역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옮겨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성 캐더린 수도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수도원은 무엇보다도 1859년에 독일 학자 티센도르프가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을 발견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시내산 사본은 주후 4세기 후반에 필사된 것으로서, 신약 전체가 수록된 사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에 없고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티센도르프가 그것을 제정 러시아 황제에게 기증했는데, 나중에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영국에 팔아넘기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유명한 성 캐더린 수도원을 빠른 속도로 관람했는데, 모세의 우물(또는 이드로의 우물)과 떨기나무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모세의 소명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떨기나무는 우리 자신의 소명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해주어서 좋았다.
우리 모두는 모세처럼 일생을 주님 나라 위해 헌신하리라 다짐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성 캐더린 수도원을 떠나 숙소로 돌아온 후 아침 식사를 하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다음 목적지로 떠나기 위해 짐을 정리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이집트 땅을 탈출한 지 두 달이 지난 제3월에 르비임을 떠나 시내 광야에 도착했었다(민 19:1-2). 그리고 11개월 정도를 이곳에 머문 이스라엘 백성은 제2년째 되는 해의 2월 20일에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에 도착했었다(민 10:11-12). 그런데 우리는 단 이틀 만에 그 길을 주파하고 있으니 세상이 너무도 많이 편해진 개 아닌가 싶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배낭을 메고서 걸으면서 성지순례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의 발길을 좇아 우리도 시내 광야를 떠나 다름 목적지인 타바-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국경지대-를 향하였다. 그 중간에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바란 광야(민 10:12)를 지났다. 비록 차에서 내려 바란 광야를 가로지를 수는 없지만, 이 거친 광야에 대해서 몇 가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란 광야는 거의 대부분이 해발 600-750m 정도의 석회암 바위산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크고 두려운 광야”(신 1:19)로 불려지는 곳이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이 거주했던 곳도 바란 광야이다(창 21:21).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의 다윗도 이곳 바란 광야에까지 내려온 적이 있었다(삼상 25:1).
이처럼 구약 시대 사람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바란 광야를 지나는 동안, 우리는 도로변 곳곳에서 법궤(출 25:10)와 분향단(출 30:1)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싯딤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고맙게도 운전기사의 배려로 모두 차에서 내려 싯딤나무 사진을 가까이서 찍을 수 있었다. 이 나무가 ‘조각목’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개의 줄기들이 자라면서 서로 꼬이게 되어, 결국에는 조각을 내어서 사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이 나무는 흡수력이 강하여 같은 종류의 나무는 물론이고 어떤 다른 수종도 곁에서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싯딤나무는 여러 그루가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 법이 없었다. 한결같이 한 그루씩 서로 떨어져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나홀로’ 나무라고나 할까... 배워야 할 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있는 나무인 것 같았다.
싯딤나무를 구경한 후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드넓은 바란 광야를 횡단하여 타바 국경을 향한 길을 재촉하였다. 그 길이 멀고 지루한 만큼(2시간 정도) 광야의 신학적인 의미를 잠시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꼭 바란 광야에 국한된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다고 고백하는 모세의 노래(신 32:10)는,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어제 밤늦게 도착했던 시내 광야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광야는 참으로 인간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 그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육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광야를 너무도 편하게 지나간 것 같다. 조금은 하나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처럼 소중한 광야의 의미를 오늘의 삶 속에서 찾기 위해서라도 평소에 자주 나만의 광야를 자주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다지는 동안에, 드디어 아카바만을 끼고 있는 또 다른 홍해가 보였다. 홍해 건너편에는 황토색 민둥산(바위산)으로 가득 찬 사우디 아라비아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카바만이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 등 네 개 나라의 접경지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카바만의 홍해 물은 연안에 온갖 오염 물질을 쏟아내는 강이 없어서인지 너무도 맑고 깨끗하여, 각종 열대어와 산호초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물고기가 많으면 당연히 고깃배가 몰리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렇게 되면 홍해가 고기잡이배들로 몸살을 앓을 것이요, 그로 인하여 풍부한 수산 자원이 고갈될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아카바만을 끼고 있는 네 나라는 낚시는 허용할 수 있어도 고깃배는 허용하지 않기로 상호 협정을 체결하였다고 한다. 현명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홍해 물의 깨끗함에 취해 있는 동안에 버스가 마침내 타바 국경에 도착하였다. 타바 국경을 넘으면 곧바로 이스라엘 땅이지만, 출애굽의 여정을 보더라도 이스라엘은 요르단 다음의 목적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 최남단 서쪽 국경지대를 그대로 가로질러 동쪽 끝에 있는 아카바 국경지대로 이동하였다. 요르단의 유일한 항구도시인 아카바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엘랏’(또는 ‘엘롯’이나 ‘에일랏’)으로 불리는 바, 이곳은 구약성서의 그 유명한 조선소가 있던 에시온 게벨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에시온 게벨은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기도 한 곳이었다(민 33:35-36; 신 2:8; 왕상 9:26; 22:48; 대하 8:17; 20:36). 어쨌거나 우리는 주님 은혜로 큰 어려움 없이 두 국경지대를 통과하여 요르단에 입성하였으며, 새로운 가이드 문효심씨와 함께 곧바로 내일의 방문지인 페트라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페트라의 숙소로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가이드로부터 요르단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틀을 머물게 될 요르단은 구약 시대의 암몬, 모압, 에돔 등지에 해당하는 나라로서, 한반도의 절반 조금 못 되는 면적에 550만 가까이 되는 인구가 살고 있다 한다. 수도는 암만(Amman)-“암만 가도 암만이 안 나온다”는-이고 아랍어를 사용하며, 북쪽은 시리아, 동쪽은 이라크,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은 이스라엘과 접한 특이한 나라이다. 맨 남쪽의 아카바만 연안에 있는 아카바 항을 제외하면 나라 전체가 온통 육지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무함마드(Muhammad)의 40대 손으로 알려진 후세인 국왕이 47년간 요르단을 통치하다가 죽자, 그의 아들 압둘라 2세가 아버지를 이어(1999년)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는 중에 우리 팀 식구들이 의외로 까다로운 현지 식사에 잘 적응하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의 경우 중동 지방에 처음 오면 이곳 특유의 독특한 향료 때문에 식사 적응이 꽤나 어려운 법인데, 제일 막둥이인 진세진(진태동 전도사의 큰 아들)이로부터 시작하여 최고령이신 여수조 전도사님에 이르기까지 식사 문제로 고통을 겪은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으니, 이건 기적이라고 해야 옳을 일이다. 이러한 식탁의 기적은 마지막 일정인 로마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은 주의 종들의 위대(胃大)한 식성에 거듭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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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르단의 페트라 순례 후 수도 암만으로: 1월 25일(목)
오늘의 순례지는 아랍계 유목민 나바태인들(Nabataeans)이 건설한 산악도시 페트라(‘바위’)이다. 다소 추운 날씨였지만 아침 식사 후 모두 일찍 페트라 유적지 입구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에 아론이 죽었다는 1396m 높이의 호르산(민 33:39)을 볼 수 있었다. 시간 관계로 호르산을 밟을 수는 없었지만 아론의 무덤(정상의 흰색 집)이 있다 하니 언젠가는 한 번 꼭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페트라로 시선을 옮겨보도록 하자. 1985년에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는 페트라는 해발 950m의 산악도시로서, 최고 높이가 300m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산들-더 정확하게는 붉은(에서=‘붉음’) 사암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페트라는 요르단이 과거 에돔 족속이 거주하던 세일 산지를 중심으로 하는 고지대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요르단 제1의 유적지라 할 수 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서남쪽 1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유적지는 구약성서에서 에돔 족속의 수도인 셀라에 해당하는 곳이었다(삿 1:36; 왕하 14:7; 사 16:1; 42:11). 주전 600년경에 나바태인들(5만여 명)이 에돔 족속의 뒤를 이어 이곳을 차지하면서 페트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나바태인들의 수도 역할을 했던 페트라는 주후 100년경에 로마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제라쉬(Jerash)와 다마스커스를 잇는 교역 중심도시로 탈바꿈하였으나,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수자원의 고갈로 인하여 도시 전체가 폐허로 바뀌고 말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이 도시가 다시금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1812년에 스위스의 부르크하르트(John Lewis Burckhardt)라는 젊은 탐험가의 탐험 활동에 의해서였다. 그는 페트라 유적지를 알고 있던 베두인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페트라를 탐험하였으며, 탐험의 결과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페트라 유적지가 세인의 주목을 끌게 만들었던 것이다.
페트라 도시 유적지로 가는 길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첫 단계는 매표소에서 도시 유적지 입구까지 2-3km 정도를 직접 걷거나 말을 타고서 가는 것이고, 둘째 단계는 페트라 진입로-거대한 바위산들 사이로 난 좁은 길(=Siq 골짜기)로 마차 2대 정도가 지나다닐 수 있다-를 통하여 도시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페트라 진입로는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다. 거대한 바위산들 사이로 난 시크 골짜기를 걸으면서 우리 모두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경치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장엄하고도 화려한 경관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2km 정도 거리의 페트라 진입로가 끝나자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의 후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바위산을 깎아 만든 엘카즈나 신전과 그 앞의 커다란 광장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레코 로마 건축 양식을 따라 2층으로 만들어진 신전(왕들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음)도 그렇거니와 그 앞으로 이어지는 바위 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은 감동 그 자체였다. 천연의 바위산들도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그 바위산들을 파서 만든 웅장한 신전들이나 신분에 따라 구별되는 다양한 종류의 무덤들, 대극장, 목욕탕, 상수도 시설, 15개 교회들 중 유일하게 남은 비잔틴 시대(=동로마 제국 시대, 330-1453년)의 교회 등등 한결같이 경이감을 안겨주는 것들뿐이었다. 척박한 산악 지대 한가운데에 이처럼 환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꼭 별천지에 온 것만 같았다.
페트라를 빠져나오면서 우리는 자주 고개를 돌려 경이로운 바위 도시의 빼어난 경관을 다시금 음미하곤 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천연의 요새와도 같은 페트라도 세월의 무상함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유적지만 남은 도시의 모습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평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진리보다는 썩어 없어질 것들에 너무 집착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견고한 바위더미 사이에 세워진 도시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마는 것을... 왜 우리는 그리도 세상의 부질없는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사는지!
페트라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다음 순례지인 므리바 샘을 향해 이동하였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모세가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친 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와 아론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 바, 그 일과 관련된 므리바 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했다. 정말로 그곳에는 산 위로부터 바위를 지나 계속 흘러가는 샘물이 하나 있었다. 제각기 의미 있는 기념사진을 찍은 후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였다. 수도인 암만으로 가는 길에는 세렛강을 경유하였는데, 이 세렛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아래쪽은 에돔 지역이고 위쪽은 모압 지역이었다고 한다. 비가 올 때만 흐르는 건천(wadi)이어서인지 강 같지 않아 보였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강이었다 하니 자꾸 그곳으로 눈길이 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어서 우리는 모압 왕 메사가 장남을 번제물로 바쳤다는 길하레셋 성(지금은 카락 성; 왕하 3:25-27)을 방문하였다. 당시 모압의 수도였던 길하레셋 성은 앞에 깊은 계곡이 있어서인지 천연의 요새로서 오랜 기간 모압을 지탱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실제 성의 1/10만 남아 있다 하니 얼마나 큰 성이었는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군데군데 십자군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오랜 세월을 버텨온 길하레셋 성의 끈질긴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길하레셋 성을 지나 한참 더 올라가니 이제는 암몬과 모압의 경계 지역이었던 아르논강을 지나게 되었다. 아르논강 아래쪽은 모압 지역이었고, 위쪽은 암몬 지역이었다고 한다. 아르논강 역시 세렛강처럼 건천이서서 물이 거의 없는 강이나 마찬가지였다. 국경 지대 역할을 했던 두 강을 지나니 “암만 가도 암만이 안 나온다”는 그 옛날 암몬 족속의 수도였던 해발 9백m 높이의 랍바(삼하 12:26, “암몬의 왕성”)에 드디어 도착하였다. 지금의 요르단 수도인 암만을 가리키는 랍바는 밧세바의 남편인 헷 사람 우리아가 다윗의 범죄 은폐 기도에 의하여 희생당한 곳이기도 했다(삼하 11:1, 16-17). 이처럼 유서 깊은 암만에 오게 되어 여러 모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버스를 참 많이 탄 하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에 요단 동편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에돔, 모압, 암몬 등의 세 나라를 지나게 되어 참으로 뜻 깊은 순례길이 아니었나 싶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시내 반도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향해 올라가던 길이기도 하였으니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다윗의 범죄-밧세바 사건으로 우리아를 죽였던-를 연상시키는 암만(인구 2백만)에 도착했더니 요르단에서의 두 번째 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던 때도 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아가 죽은 때가 설령 낮이었다 해도 그 때는 밤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솔로몬이 암몬 여인 나아마와의 사이에 악독한 아들 르보호암(남왕국의 초대 왕)을 낳은(왕상 14:21, 31) 때도 밤이 아니었던가... 밤을 조심하라!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ㅋㅋ
(6) 알렌비 국경을 지나 이스라엘 입국: 1월 26일(금)
금요일이 무슬림(회교도)의 안식일이라 하니 오늘은 모스크를 방문하는 요르단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암만 일대에서의 오전 일정을 시작하였다. 오늘의 첫 순례지인 마다바로 가는 도중에 사사 입다가 정복했다던 아벨 그라밈 지역(삿 11:33)을 경유하였으며, 아모리 왕 시혼의 도성이었던 헤스본(민 21:26, 34; 신 4:46; 수 12:2; 13:10; 삿 11:19)도 경유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 일일이 확인해 보고 발로 밟아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몰려왔으나 그렇게 하려면 1년 이상의 세월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오전 일정 중에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암만에서 남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마다바(Madaba)였다. 마다바는 구약에서 “메드바”로 칭해지는 곳으로, 출애굽 공동체가 정복한 지역들 중의 하나였다(민 21:30; 수 13:9, 16). 비잔틴 시대(=동로마 제국 시대, 330-1453년)의 요단 동편 최대 기독교 도시답게 기독교인들이 회교도들보다 더 많은 도시이지만(시리아의 알레포처럼), 특별하게 남아 있는 유적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성 조지 성당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이 성당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고(주후 6세기) 또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고지도(古地圖) 모자이크가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성 조지 성당은 19세기 말에 이 모자이크 지도를 바닥으로 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본래 이 지도는 비잔틴 시대의 성지안내도로서, 230만 개 정도의 모자이크 조각을 합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과거에는 가로 5.6m, 세로 15.7m의 대형으로 약 30평의 바닥을 채울 수 있었으나, 지금은 3분의 2가량이 훼손되어 10평 정도(특히 예루살렘) 분량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예배드리는 날이었지만 크게 방해를 받지 않고 성당 내부를 촬영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은 후에는 다음 목적지인 느보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찬 바람이 부는 느보(Nebo) 산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된(민 32:38) 느보산은 마다바로부터 북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으로, 모세가 40년 동안의 광야 유랑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못한 채로 그 땅을 조망한 후 120세의 나이에 죽은 곳이다(민 27:12-14; 신명 32:48-52; 34:1-8). 이 산은 세 개의 중요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니바(Ras al-Niba)로 높이 835m이고, 두 번째 높은 봉우리는 높이 790m 무카야트(Khirbetel-Mukhayyat)이며,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는 높이 710m의 시야가(Ras Siyagha)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본 장소는 이 세 번째 봉우리이다.
1930년대에 이 지역을 발굴한 학자들에 의하면, 주후 4세기 말경의 비잔틴 시대에 모세 기념교회가 처음으로 모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알려진 시야가 봉우리에 세워졌으며, 교회 내부는 각종 새와 동물들이 새겨진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이 교회는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반에 두 차례에 걸쳐서 새롭게 확장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시야가 봉우리에 세워진 로마천주교회는 당시의 교회를 그대로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이 교회 앞에 있는 전망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해와 싯딤 골짜기(해발 300-400m) 및 이스라엘 땅-특히 여리고 지역-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안개가 옅게 깔려 있어서 더 멀리 볼 수가 없지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예루살렘까지도 눈에 보인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전망대 바로 옆에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지방 출신 조각가인 판토니(Giovanni Fantoni)의 놋뱀(brazen serpent) 작품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모세가 에돔 지경 광야길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놋뱀(민 21:1-9)에 인류 구원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것이다(민수 21:6-10). 판토니가 놋뱀과 십자가를 결합시킨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놋뱀 사건과 관련시켜 말씀하신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요 3:14-15).
약속의 땅을 바로 앞에 두고서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아마도 그는 젊은 일꾼 여호수아를 미래의 새로운 지도자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결정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했을 것이다. 젊은이처럼 기력이 왕성했지만 말이다(신 34:7).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진리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마음을 비우고서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겸허하게 순종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일 것이다. 모세는 참된 지도력의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 준 사람이다. 한국 교회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은 권력에 중독된 채로 구차스럽게 정치 생명을 연명해가고자 하는 구태를 벗고 겸손하게 모세의 지도력에서 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느보산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싯딤 골짜기를 지나 알렌비 국경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내친 김에 싯딤 골짜기에 관하여 약간의 설명을 보태도록 하자. 싯딤 골짜기는 창세기 14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 이렇다: 아브라함과 롯이 떨어져 살게 된 이후로, 사해(死海) 또는 염해(鹽海) 부근의 싯딤 골짜기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에 가나안 지역 사람들은 비옥한 땅 내지는 주요 무역로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자주 벌였는데, 아브라함이 끼어든 전쟁도 마찬가지 성격의 것이었다. 그가 헤브론에 머물던 때에 벌어진 이 전쟁은 사해 남부 지역의 다섯 나라가 엘람 족속의 왕 그돌라오멜을 12년 동안 섬기다가 13년째 되던 해에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터진 것이었다(1-4절). 이들 다섯 나라가 맞서 싸운 동방의 나라들, 곧 엘람 족속 진영의 동맹군은 모두 네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전쟁에서 가나안 지역의 다섯 나라들은 엘람 족속 진영의 동맹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의 군대는 싯딤 골짜기에 있던 역청(瀝靑; 아스팔트)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전쟁에서 패함과 동시에 자기 나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5-11절). 이 전쟁의 와중에서 소돔성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네 왕들의 군대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12절).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즉시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과 다메섹 북쪽의 호바까지 쫓아가서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조카 롯, 그의 재물,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다 되찾았다(14-16절).
이 외에도 싯딤 골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면서 그들의 신들-특히 바알브올-에게 제사를 드렸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2만 4천 명이나 죽은 곳이기도 했으며(민 25:1-9), 여호수아가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낸 곳이기도 했다(수 2:1).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싯딤 골짜기를 지나 알렌비 국경 지대를 향해 이동하던 중에 우리는 엘리사의 고향으로 알려진 아벨 므홀라(왕상 19:16)와 요단강의 물이 멈춘 장소인 아담 읍(수 3:16)을 통과하였다.
국경선 직전 도시인 아담 읍을 지나자 요르단의 알렌비 국경이 눈에 보였다. 이곳을 통과하여 이스라엘의 여리고로 들어가는데, 우리가 굳이 이 길을 택한 것은 출애굽 공동체가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요단강을 건넌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처럼 요단강 바닥을 걸으면서 국경을 건너지는 않지만 말이다. 중동 지역의 준(準) 전시 상황으로 인하여 국경 통과 절차가 조금 까다롭기는 했지만, 우리는 여러 차례의 복잡한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친 끝에 1시간 만에 알렌비 국경을 지나 이스라엘 땅으로 입국하였다. 시간을 보니 점심 무렵인 12시 15분경이었다.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으니 잠시 이스라엘에 대해 개관해 보도록 하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의 강원도 정도 넓이에 650만 명 정도가 사는 부강한 나라이다(GNP 2만 달러 이상). 시오니즘 운동에 힘입어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한 결과 1948년 5월에 UN의 승인을 얻어 국가를 수립한 이스라엘은 주변의 아랍권 국가들에 둘러싸인 탓에 국가 수립 이후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인지 국경에서부터 시작해서 나라 전체의 분위기가 다소 살벌해 보였다.
이를 피부로 느끼면서 우리는 모두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섰다. 이스라엘 국경 지대 앞에는 히브리 대학에서 구약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성언 전도사가 전용버스와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이어서 곧바로 여리고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현재 아랍 사람들만 거주하는 이른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잘 정리되고 깨끗해 보이는 유대인 거주지들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어수선해 보이고 살아가는 게 힘들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서로를 배척하면서 살아가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불편한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되려나.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여리고에서 우리는 두 군데를 방문하였다. 그 첫 번째 방문지는 엘리사의 물 치유 사건(왕하 2:19-22)이 발생한 지역이었다. 당시에 여리고 성읍 사람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던 엘리사에게 그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지하수)이 좋지 못하므로 땅이 불임(不姙) 상태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들은 엘리사가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 권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이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라고 명한다. 엘리사는 새 그릇에 담긴 소금을 물의 근원이 있는 곳에 던지면서, 물의 치유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그 물을 고치셨으니 이제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정말 그의 말대로 오염된 물이 맑게 되어 수질오염으로 인한 부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된다.
엘리사의 사역 초기에 속한 이 기적을 상기시켜주는 우물을 보면서, 우리도 주님의 권능에 힘입어 엘리사처럼 많은 기적을 행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있는 수도꼭지 물을 마시는 중에 엘리사의 능력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품어보기도 했다. 그곳이 정말로 엘리사의 물 치유 사건이 발생한 곳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역사적인 현장을 목격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기로 하고, 삭개오의 뽕나무로 알려진 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더 정확하게는 돌무화나무라고 해야 할 그 나무의 거대한 모습을 보면서, 그게 정말로 그 나무였겠느냐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려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 비스무리한 것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댔다.
엘리사의 물 치유 사건이 발생한 지역과 삭개오의 뽕나무 후보지 두 군데를 본 후에, 우리는 여리고를 빠져나와 사해 북서쪽 지역에 있는 쿰란 동굴 쪽으로 이동하였다. 쿰란 동굴 지역에 도착한 우리는 그 앞의 식당 자리를 빌려 도시락 점심을 먹은 다음, 쿰란 동굴이 있는 지역으로 올라가 그 일대를 조망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엣세네파(금욕과 은둔을 특징으로 하는 유대교 종파)에 속한 쿰란 공동체의 은둔 거주지로 추정되는 쿰란 동굴은 구약 최고(最古)의 사본이 발견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쿰란 사본 또는 사해 사본이 그것이다.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이 사본은, 1947년에 잃어버린 양을 찾던 베두인 족의 한 양치기 소년에 의해 쿰란 마을의 한 동굴에서 그 일부가 처음 발견되었고, 그 후 이미 도굴된 사본들을 아랍인 골동품상들에게서 구입하려던 히브리 대학 교수 수케닉(Sukenik)과 그의 아들 야딘(Yadin)의 눈물겨운 노력 및 드보(de Vaux)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고고학자들의 연속적인 발굴 작업에 힘입어, 11개의 동굴들에 감추어진 무수한 구약 사본들과 외경 및 에세네파의 성격을 갖는 쿰란 공동체의 주요 문서들이 차례대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쿰란 동굴에 감추어진 구약 사본들은 주전 2세기부터 주후 1세기 사이에 속한 것으로, 주후 68년에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쿰란 공동체가 로마군의 손길을 피해 항아리에 담아 부근의 몇몇 동굴들에 숨긴 탓에 2천년 동안이나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이 지역의 건조한 기후가 구약 사본들의 원형 유지에 기여하였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사본들은 에스더를 제외한 모든 구약성경을 다 포함하고 있으며, 이제껏 알려진 구약 사본들보다 무려 1천년 이상이나 오래된 것이어서, 성서고고학 분야에서는 20세기 최대의 발견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쿰란 공동체가 거주하던 지역을 둘러보고 동굴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은 다음에, 우리는 모두가 한결같이 가보고 싶어 하는 엔 게디의 사해 온천장(Ein Gedi Spa)으로 향했다. 참고로 엔게디 지역은 유다 지파에 분배된 땅으로(수 15:62), ‘염소의 샘’이라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대 광야 지역의 오아시스에 해당하는 곳이다. 아가서는 이곳이 포도원의 고벨화(henna)로 유명한 곳이라고 노래한다(아 1:14). 엔게디는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남왕국의 여호사밧을 치기 위해 진을 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대하 20:1-2), 무엇보다도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의 피난처로 유명한 곳이다(삼상 23:29; 24:1-2). 사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엔게디 계곡 위쪽에는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고, 그 위로 또 다시 30-40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다윗이 몸을 숨긴 동굴(삼상 24:3)이 있다 한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곳은 사해에 인접한 엔게디 지역의 유명한 온천장이었다. 이 온천장은 사해와 너무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먼저 사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먼저 갖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해 지역은 해수면(sea level)보다 무려 400m나 낮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다. 남북의 길이가 75km이고 가장 긴 동서의 폭이 18km인 사해는 갈릴리 호수보다 6배 정도 넓은 곳으로, 일반 바닷물보다 염도가 8배 정도 높아서(30% 정도) 물고기를 비롯한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는 바다이다. 한 마디로 죽음의 바다(Dead Sea)인 셈이다. 아무래도 요단강 물이 흘러들어오는 북쪽 지역 물보다는 남쪽 지역 물의 염도가 더 높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해에는 요단강을 비롯한 여러 지류들로부터 매우 많은 광물질을 포함하는 물이 하루에 5백만 톤이나 들어오는 까닭에, 질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부분적이나마 정신치료까지도 가능하다고 한다. 산소가 다른 곳보다 7~10% 가량 더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사해 안에 있는 다양한 광물질들-염화칼슘, 마그네슘, 나트륨, 칼륨, 유황, 브로마인 등-을 추출하여 외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사해 개펄의 진흙(mud)으로 여러 종류의 화장품을 개발하여 관광객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상당량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바다를 죽음의 바다라 칭하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소금의 바다’(‘얌 하멜라흐’)로 칭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 역시 이 바다를 한 번도 사해라 부르지 않고 똑같이 ‘염해’(‘얌 하멜라흐’)-개역은 이를 옳게 번역하고 있으나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은 ‘사해’로 번역함-로 부르고 있다는 것(창 14:3; 민 34:3, 12; 신 3:17; 수 3:16; 12:3; 15:2, 5; 18:19)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개의 경우 목회자들이 사해를 죽음의 바다로만 이해하고서, 요단강 물을 받기만 하고 배출하지는 않는 사해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신앙생활의 부정적인 요소를 지적하곤 하지만, 시각을 달리해서 본다면 사해는 무궁무진한 광물질을 가진 천혜의 보물 창고요, 질병을 치료하고 피부 미용에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바다일 수도 있음을 강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우리는 사해 온천장에 도착하자마자 유황 온천물에 15분 정도 몸을 담근 다음에, 해변가로 가는 중간 지대에서 눈과 코만 빼놓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에 사해의 진흙을 발랐다. 그리고서는 해변가로 걸어가면서 몸을 말렸다. 사해 물에 몸을 씻으면서 바닷물 위에 슬그머니 누워보았더니 정말로 몸이 둥실둥실 뜨는 것이 아닌가!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고마운 바다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염도가 높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이처럼 유익한 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고마운 사해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다. 사해를 끼고 있는 두 나라, 곧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사해 물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통에 사해의 수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2050년 무렵에 가면 사해 물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있고 보면, 상황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해가 링거 주사를 맞고 있는 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있을 정도라지 않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해 북쪽 물을 남쪽으로 보내는가 하면,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중해 물을 끌어들이는 방안도 연구 중이라 한다. 어떤 방법을 쓰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천혜의 보물 창고를 건강하게 잘 간직하여 지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유익을 줄 수 있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창조 질서의 보존이라는 차원에서라도 사해 물을 쓰는 두 나라가 머리를 맞대고서 사해 살리기 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해 온천장에서 종일토록 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내일 종일토록 힘겨운 일정이 예정되어 있는지라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둔 채로 전용버스에 탑승하였다. 숙소가 있는 남쪽의 아라드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부지런히 달린 끝에 마침내 저녁 무렵에 성경에도 언급되어 있는 아라드(Arad, 민 21:1; 33:40; 삿 1:16)에 도착하였다. 내일은 북쪽 갈릴리 지역으로 계속 올라가야 하는 강행군이 예상되기 때문에 저녁 식사 후 피곤을 풀고서 일찍 취침을 하였다. 오늘 방문키로 했으나 시간 관계로 가지 못한 예수 세례터, 곧 야드니트(Yardenit; 이스라엘 현지식 영어 발음으로는 야르데니트; “야르덴”은 요단강을 말하고 어미인 “이트”는 “작은”을 뜻하므로 실제 의미는 “작은 요단강”[little Jordan]이라고 함)는 내일 아침 갈릴리에 도착하는 대로 방문키로 하고서 말이다.
(7) 갈릴리 지역 탐방: 1월 27일(토)
한참 남쪽에 있는 아라드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조금 일찍 움직여야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짐을 챙겨 전용버스에 올라 계속 북상하는 길에 마사다(Masada) 요새가 눈에 보였지만, 마사다 대신에 여리고를 방문키로 일정을 수정했던 까닭에 마사다는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친 김에 마사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그 전체가 거대한 바위산이라 할 수 있는 마사다 요새의 유적지는 1838년 사해 주변을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Robinson, Smith)의 망원경에 잡힌 이후 오랫동안 사람들의 탐험 대상이 되어오다가, 마침내 이스라엘 정부가 1963년 히브리 대학의 고고학 교수였던 이가엘 야딘(Y. Yadin)을 통해서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들어가면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성지로 다시 태어난 곳이다. 전체 높이가 440m이고 남북의 길이가 650m이며 동서의 길이가 300m인 마사다는 광야 지대 한가운데 우뚝 솟은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걸어서 올라가는 길도 있다. 이른바 뱀길(snake path)이 그렇다.
마사다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 책자를 읽어보면, 마사다의 역사를 한층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사실 마사다에 대해 언급하는 고대 자료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 하나밖에 없었고, 마사다 함락 이후 거의 1900여 년 동안이나 잊혀져 있었는데, 야딘의 발굴 이후로 요세푸스의 마사다 관련 기록이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마사다의 거대한 바위산을 맨 처음 요새로 만든 사람은 요나단(Jonathan, 주전 160-143) 이라는 대제사장이었다. 그 후 헤롯 대왕(주전 37-주후 4년)이 로마의 배신이나 유대인의 반란 또는 외적의 침략 등과 같은 의외의 변수를 염려한 나머지 마사다를 자신의 비밀 은신처로 삼기로 결정하고서는, 이곳에 1,300m 길이의 두꺼운 성벽을 두르고 자신이 거할 왕궁을 건축하는 한편으로, 무기와 식량을 저장할 창고를 건축하는 등 장기간의 생존을 가능케 할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다가 주후 66년에 유다 반란군이 로마에 항거하는 일이 발생했고, 70년에 티투스(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가 이끄는 열심당 사람들이 마사다를 최후 항전지로 삼고서 3년 동안이나 로마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마사다 정복의 명을 받은 로마군의 실바(Flavius Silva) 장군은 처음에는 사방이 절벽인 마사다를 공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중에는 마사다 옆에 그와 같은 높이의 언덕을 쌓고서 투석기를 사용하여 큰 돌덩어리와 불화살 등으로 공격함으로써 가까스로 그곳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사다 요새로 진입했을 때에는 이미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였다. 그 때는 주후 73년 4월 15일 저녁이었고, 죽은 사람은 모두 960명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는 마사다 요새 위에는 왕궁, 회당(마사다 항전 유대인들에 의해 건축됨), 비잔틴 교회(5-6세기 비잔틴 시대의 수도사들에 의해 건축됨), 주거지, 목욕탕, 풀장, 창고, 거대한 물 저장 웅덩이, 망대, 성벽 등이 옛 폐허 위에 복구된 채로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사다 주변에는 로마군 주둔지가 군데군데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학계 일각에서는, 마사다 항전과 관련하여, 아랍권 국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현실과 고고학의 결탁에 의해 지나치게 미화된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고 한다. 소수의 생각일 뿐이지만, 일리 있는 지적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주변 나라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소재로서 마사다 만한 것이 과연 있을까?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헤롯의 비밀 은신처로나 오랜 항전을 가능케 한 천연의 요새로서 정말 손색이 없었을 마사다 요새를 뒤로 하고서 우리는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것(마 4:1)으로 알려진 여리고 지역의 광야 산악지대(속칭 “예수 시험산”)를 지났다. 여리고를 지나 1시간 이상 달려가니 어느덧 벧산 가까이에 있는 길보아산이 눈에 들어왔다. 길보아산 아래에 가보면 미디안을 상대로 기드온이 3백 용사를 선발한 곳으로 알려진 하롯샘(삿 7:1-7)이 있다고 하는데,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거둔 길르앗 야베스 마을이 있다는데, 이곳들 모두를 살펴볼 시간적이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역시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길보아산 꼭대기까지 한 번 가보면 좋으련만...
차창 밖으로 길보아산을 바라보면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벧산 시내를 달리는 중에, 바로 가까이에 있는 벧산 유적지를 차창 밖으로 구경하였다. 벧산 유적지 역시 시간상 들를 수는 없어서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3년 전에 방문했던 기억이 있어서 당시의 자료를 잠시 정리하고자 한다. 이스르엘 계곡과 요단 계곡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벧산(Bet Shean, 성경의 벧스안)은 여리고에서 북쪽으로 85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한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도 유명한 벧산은 본래 므낫세 지파에게 주어졌으나 그들이 가나안 정착 시기에 정복하지 못한 성읍들 중의 하나였다(수 17:11; 삿 1:27). 성경에서 그렇게 자주 언급되는 도시는 아니지만,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이 내걸린 곳이 벧산 성벽이어서, 기독교인들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사무엘상 31장에 보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블레셋 군대와 길보아 산에서 싸우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군대는 길보아 산에서 죽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목을 벤 다음에 그들의 시신을 벧산 성벽에 못박았다(삼상 31:10, 12).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그와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벧산 성벽에서 거두어 화장시켜 주고 7일 동안 금식하면서 장례를 치러주었다(삼상 31:11-13).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과거에 사울이 암몬 족속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었기 때문이다(삼상 11:1-11).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는, 벧산이 적어도 사울 시대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족속의 관할 아래 있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블레셋 족속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다른 곳이 아닌 벧산 성벽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솔로몬이 벧산을 자신의 다섯 번째 행정구역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아(왕상 4:12), 벧산은 어쩌면 다윗 시대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이스라엘에 정복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남아 있는 벧산 유적지는 그 이후 시대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벧산의 발굴은 1920년대에 처음 실시되었었고, 1986년 이후로 계속 진행 중에 있는 바, 현재 대략 10분의 1정도 발굴 작업이 진척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벧산 유적지의 정면에는 아직 다 발굴되지 못한 텔 벧산(Tell Bet Shan)이 푸른 풀들로 뒤덮인 채로 완전한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한다. 벧산에 대해서 소개하는 안내 책자에 의하면, 벧산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한 후 앗수르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고, 나중에 헬레니즘 시대에는 스키타이인들의 거주지(Scythopolis)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한 후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데가볼리 중의 하나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비잔틴 시대(=동로마 제국 시대, 330-1453년)에는 3-4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거대한 기독교 도시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지금 남아 있는 유적지는 이 두 시대, 곧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로마 시대의 여러 신전들, 비잔틴 시대의 교회들, 150m 길이의 열주(列柱) 거리(Palladius Street), 7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대극장, 공중화장실, 목욕탕, 상업 지구(아고라), 분수대(Nymphaeum) 등이 그러하다.
벧산을 지나친 우리는 서둘러 갈릴리 호수 주변으로 이동하였다. 오늘 오전의 일정이 갈릴리 호수 주변의 주요 순례지들을 탐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 선택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신 곳이 바로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는 지역들이 아니었던가! 그가 갈릴리 지역에서 해한 24회의 기적 가운데 18회가 갈릴리 호수와 관련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이 호수가 성지순례 일정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맨 먼저 방문한 곳은 팔복교회가 있는 팔복산(또는 팔복언덕)이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 그 중에서도 특히 팔복을 설교하신 것을 기념하여 세웠다는 팔복교회에 도착하였더니,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과 갈릴리 호수의 푸른 물이 팔각형 모양의 교회 건물과 더불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바로 부근에 있는 답가(Tabgha)의 오병이어 교회를 방문하였다. 오병이어 교회에서는 마루바닥에 새겨진 비잔틴 시대 때의 오병이어 모자이크 그림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시각이 점심 무렵인 정오 무렵(12시)이어서 교회 종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방문지는 이른바 “베드로 수위권(Primacy of St. Peter) 교회”라 불리는 곳이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사랑을 확인하신 사건(요 21장)을 기념하는 교회이다. 그래서인지 교회 옆에 있는 갈릴리 호수의 푸른 물이 고풍스런 교회 건물과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가버나움 유적지를 향했다. 가버나움을 향해 가는 길에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 빌립 등의 고향이었던(요 1:44; 12:21; 마 4:18-22) 벳새다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으나, 제대로 발굴된 옛 유적지-당시의 어촌 유적으로 알려진 곳을 제외하고는-도 없을뿐더러 그 때 당시의 상황을 기념할 만한 교회도 없어서 순례 여정에 별도로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그냥 머리로만 당시 벳새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가버나움을 향했다. 가버나움은 벳새다와는 달라서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무엇인가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버나움 유적지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가버나움이 어떠한 곳인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 활동하신 곳이 주로 갈릴리 지방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가버나움이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눅 4:16-30) 가버나움에 있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으며(막 1:21; 눅 4:31-33), 중풍병 걸린 백부장의 하인을 비롯하여 다른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기도 했다(마 8-9장). 그래서인지 마태복음의 저자는 가버나움을 “그 분의 도시”(His own city, 개역은 “본 동네”; 표준새번역은 “자기 마을”)라고 칭한 바가 있다(마 9:1).
아니나 다를까, 가버나움 유적지로 들어서는 순간, 가버나움이 정말로 “그 분의 도시”임을 나타내는 표지판(Capernahum the Town of Jesus)이 도시 초입에서부터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 오래된 유적들이 여기저기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주후 3세기경의 회당 건물이었다. 뼈대만 남아 있었지만, 그 밑에 1세기경의 회당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잔잔한 감동이 온 몸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상대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던 곳이 정말 이곳이련가... 남아 있는 회당 건물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노라니, 내가 마치 예수의 설교를 듣던 그 옛날 가버나움 군중들 중의 한 명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버나움 유적지에서 우리의 시선을 끈 또 하나의 건물은 회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베드로의 집이었다(8:14). 그곳은 예수께서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곳이기도 하다(마 8:14). 베드로는 본래 벳새다 지역에서 고기잡이 생활을 하던 갈릴리 어부였으나,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은 후에는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인 가버나움으로 옮겨와 식구들과 함께 이 집에 기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집의 옛 흔적들 위에는 팔각정 형태의 현대식 건물이 우주선 모양으로 건축되어 있었다. 베드로의 옛 집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을 가진 듯한 이 건물은 그곳이 베드로의 집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교회라고 한다. 이 건물 앞쪽에는 베드로의 동상과 함께 아담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이제까지 살핀 지역들, 곧 벳새다와 가버나움, 그리고 그냥 지나치기만 한 고라신 등은 한결같이 예수께로부터 저주 받은 곳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마 11:20-24).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 이 지역들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사람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다 해도, 언제 주님께로부터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는 심판의 말씀을 들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울 사도처럼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고전 9:27) 날마다 죽는 훈련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말이다(고전 15:31).
순례의 현장들이 이처럼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수도 있다는 색다른 경험을 뒤로 한 채, 우리는 갈릴리 호수 지역 탐방을 마치고서 가까이에 있는 한 식당으로 가서 베드로 물고기를 주 메뉴로 하는 점심 식사를 하였다. 이 물고기에 베드로의 이름이 붙은 것에는 그 나름의 사연이 있다. 마태복음 17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 성전에 들어가려고 하실 때 성전지기가 성전세를 요구하자, 베드로에게 갈릴리 바다에 가서 고기를 낚되 가장 먼저 잡힌 물고기의 입을 열면 동전 한 세겔이 나올 것이니 그것으로 성전세를 대신하라고 명하신 적이 있다. 이 사건에 근거하여 갈릴리 바다에서 주로 잡히는 그 물고기에 베드로의 이름을 붙여 베드로 물고기라 칭하게 된 것이다.
점심을 마친 후 이스라엘이 1967년의 6일 전쟁-갈릴리 호수 위쪽의 물줄기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에서 시리아로부터 빼앗았다는 골란고원(구약의 바산)을 지나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니, 이스라엘 영토의 북쪽 끝이었던 텔 단(Tell Dan)이 눈에 들어왔다. 헐몬산의 계곡물이 흐르는 곳이어서 그런지, 단 지역은 전체가 하나의 자연 휴양림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후 3시까지 입장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조금 넘긴 탓에, 단 지역의 유적지(Tell Dan)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서 입구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꼭대기까지 계속 가면 북왕국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 제의터(ritual site)가 있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사진조차 찍지 못하고 초입에서부터 돌아서야만 하는 심사가 영 불편했다. 1993년에는 다윗 왕가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는 이른바 단 석비(Dan Inscription, 높이 32 x 폭 22cm)가 발견되었다는데, 그것 역시 볼 수가 없었다. 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겠지... 아무튼 이 중요한 역사의 현장들을 정상 부근까지 낱낱이 밟아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너무도 컸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 일대 전체가 유명한 휴양지요 관광지인 바, 데가볼리의 중심부에 있던 가이사랴 빌립보의 유적지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암벽을 파서 만든 동굴 형태의 판(Pan) 신전이었다. 높이 40m, 길이 70m 규모의 이 신전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이 헬라 시대의 풍요와 다산의 신인 판을 숭배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신전 부근에는 헐몬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한데 모여 샘물처럼 솟아나오는 곳(Banias springs)이 있었다. 헐몬의 차갑고 맑은 물은 그 샘물을 거쳐 수로를 타고 계속 흘러내려 바니아스 폭포(Banias Waterfall)를 이루고, 마침내는 갈릴리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상부 요단강(헐몬산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까지의 하부 요단강을 일컬음)의 근원을 이룬다고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이곳을 방문하신 것(마 16장)은 이곳이 이처럼 맑고 쾌적한 환경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주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을 차분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시고, 분주한 일정을 잠시 멈추시고서는 시간을 내어 이곳을 찾으셨을 것이다. 그리고서는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겨지는 삼림의 신 판(Pan)의 신전을 보시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셨을 게다. 이에 베드로의 그 유명한 신앙고백이 주어지자, 주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반석으로 삼아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던가!
이토록 유서 깊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돌아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만일에 주님께서 오늘 이 순간 우리 앞에서 동일한 질문을 하신다면, 어찌할 것인가? 한 점 부끄럼 없이 정말 주님이 내 삶의 모든 것이 되신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나중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앞선다. 판 신전의 흔적은 남아 있으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념하는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현주소가 우리의 현재 모습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 순례를 마치고 숙소가 있는 갈릴리 호수로 가기 위해 이동하던 중에 우리는 눈에 덮인 헐몬산 정상(2,814m)을 차창 밖으로 볼 수 있었고, 니므롯 요새(Nimrod Fortress, 815m 지점) 관광지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창세기 10:8-9에 있는 니므롯의 이름을 딴 이 요새는 이슬람 제국이 십자군의 다메섹 정복을 막기 위해 다메섹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려는 목적 하에 1227년에 만들기 시작한 것이라 한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니므롯 요새를 멀리 보면서 우리는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갈릴리 호수 부근의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긴네롯(수 12:3), 긴네렛(수 13:27), 게네사렛(눅 5:1), 디베랴(요 6:1, 23; 12:1) 등으로도 불리는 갈릴리 호수는 남북의 길이가 21km이고 동서의 평균 너비가 12km인, 그리고 둘레가 55km 정도인 민물 호수라고 한다. 그리고 호수 수면이 일반 해수면보다 200m 가까이 더 낮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날부터 갈릴리 호수를 호수라고 부르기보다는 바다라고 부르기를 즐겨한 것일까? 가나안 땅이 본래 물이 귀한 지역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그곳이 민물 호수이기는 해도 약간의 소금기를 포함하고 있어서였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호수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규모가 커서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갈릴리 호수가 오늘날 이스라엘 중부와 남부 지역에 식수와 농공업 용수를 제공하는 이스라엘의 젖줄이요 생명수라는 점이다.
(8)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1월 28일(일)
오늘은 갈릴리 바다 위에서 주일 선상(船上) 예배를 드려야 하는 관계로 모두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서둘러 갈릴리 호수 선착장으로 직행하였다. 오전 7:30부터 8:15까지 배를 빌린 탓에 시간적인 여유가 별로 없었다. 유람선이 호수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주변이 고요하고 적막하여 딴 생각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는 데 딱 맞았다. 갈릴리 선상에서 듣는 설교(요한복음 21:15-17, 설교: 유행열 교수), 임고은 자매의 은혜로운 특송,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애찬식은 우리에게 색다른 감동을 안겨 주었다. 아마 성지순례를 또 오지 않는 한, 이런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상 예배의 여운이 아직 마음에 진하게 남아 있을 때, 우리는 호숫가로 돌아와 전용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나 혼인잔치 교회에 가기에 앞서 어제 시간 부족으로 가지 못했던 예수 세례터, 곧 야드니트(Yardenit)로 이동하였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 최남단 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사해를 향해 떠나는 요단강 물의 출발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것(마 3:13-17; 막 1:9-11)을 기념하는 관광지라는 점이다. 물론 예수께서 실제로 세례 받으신 장소(요 1:28; 3:23)는 우리가 요르단으로부터 이스라엘로 들어올 때 건넜던 알렌비 다리 위쪽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2000년 3월 21일에 교황 바오로 2세가 특별히 방문하여 정식 예수 세례지로 인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곳은 현재 두 나라의 국경 지대에 속해 있어서 민간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까닭에, 임시변통으로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해 물이 상대적으로 많은 요단강 상류 부근의 야드니트에 세례 기념장소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서는 이곳의 기념 건물 벽에다가 그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1:9-11 본문을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아랍어 등 여러 나라 언어로 기록하여 놓았다.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우리도 푸르고 맑은 요단강 물로 내려가서 세례식을 거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터에 엉뚱한 일을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모두 그곳에서 세례 받은 셈치고 편한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인 가나 혼인잔치 교회로 발길을 옮겼다.
갈릴리 서편 지역에 있는 가나 혼인잔치 교회(The Cana Catholic Wedding Church)는 예수께서 처음 행하신 표적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로 그 이름에서 보듯이 로마 천주교에서 지금도 예배당으로 쓰는 곳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을 행하신 곳이라 하니(요 2:1-11)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는 순례지가 아닌가 싶다. 마침 주일이어서인지 예배(미사) 드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혼인잔치 교회와 옛 유적지 터를 얼른 둘러본 다음에, 바로 곁의 그리스 정교회(The Cana Greek Orthodox Wedding Church)에서도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혼자서 잠시 시간을 내어 사진 촬영을 하였다.
주일 예배 중이어서 돌항아리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리스 정교회 앞마당에 돌항아리 모형 같은 화분들이 여럿 있어서 그것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키로 하였다. 서둘러 일행에 합류한 후에 다음 순례지인 나사렛 지방을 향해 지중해 방향인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예수께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낸 나사렛 지역은 현재 아랍인들-특히 아랍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동네여서인지, 서울의 달동네와 같이 비교적 높은 지대(해발 380m)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2-5층짜리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이곳의 생활수준은 달동네 이상일 것이다.
나사렛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마리아 수태고지 기념교회였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교회답게 주후 4세기의 옛 터(lower church) 위에 세워진 현대식 교회 건물(upper church)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계 각국 천주교회의 후원을 받아 건축된 건물이어서인지, 각 나라의 전통 화법(畵法)에 따른 모자이크 성화가 벽마다 그려져 있었다. 우리나라 것은 가톨릭 부산교구에서 보낸 것으로, 한복 차림의 마리아가 색동옷을 입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림 밑에는 “평화의 모후여 하례하나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 교회 지하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동정녀 탄생에 관해 말했다는 동굴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 교회 바로 옆에는 요셉의 집터를 기념하는 요셉 기념교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요셉의 목공소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그 때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나사렛을 빠져나와 국도로 진입하기 직전에, 왼편을 바라보니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는 낭떠러지(눅 4:16-29)가 눈에 들어왔다. 그 일대에서 낭떠러지로 보이는 유일한 장소가 그곳이라니 그렇게 믿어도 될 것 같다. 차창 밖으로 급히 사진을 찍은 후, 나사렛 시가지를 벗어나 므깃도 유적지를 향해 한참 달리다 보니, 차창 밖으로 비옥한 이스르엘(Jezreel=Esdraelon) 평야가 펼쳐져 있었으며, 멀리 다볼산(장난말로 “다 볼 수 있는 산”이라는 뜻)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순례 여정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차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다볼산에 대해서 몇 가지 정리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스르엘 평야 북동쪽에 위치한 다볼(Tabor) 산은 580m의 비교적 낮은 산으로, 헐몬산과 함께 변화산(눅 9:28-36)의 후보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다볼산에는 예수변화 기념교회가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헐몬산을 변화산으로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이와는 별도로 다볼산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벌인 전쟁의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드보라와 바락이 하솔 왕 야빈의 군대와 더불어 싸운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사사 드보라는 하솔의 군대를 크게 무찌른 바가 있다(삿 4장). 이처럼 의미 있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답사할 만큼의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는 했지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드보라와 바락의 눈부신 활동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머리에 그려지는 듯했다.
나사렛을 떠난 지 40여 분 정도 지나자 므깃도 유적지(Tel Megiddo)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므깃도는 이스라엘 유일의 곡창 지대인 이스르엘 평야 지대에서 가장 크고 강한 성읍이라 할 수 있다. 남북과 동서를 잇는 전략상의 요충지이다 보니 옛날부터 크고 작은 전쟁이 대단히 많이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남왕국의 요시야 왕이 앗수르 왕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올라가던 이집트 왕 바로느고에 맞서 싸우다가 죽은 곳이 므깃도임을 생각한다면(왕하 23:29), 므깃도가 얼마나 중요한 성읍인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므깃도는 이러한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아주 일찍부터 요새화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므깃도를 분배 받은 므낫세 지파는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도 이 성읍을 오랫동안 정복하지 못했다(삿 1:27). 므깃도가 지상 최후의 전쟁, 곧 아마겟돈(헬라어임, 히브리어로는 ‘하르 므깃도’=“므깃도의 언덕”) 전쟁이 일어날 장소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계 16:16)도 므깃도의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에 기인할 것이다. 실제로는 므깃도에서 마지막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뜻하기보다는 므깃도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한 메시지이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므깃도는 대체 언제쯤에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것일까? 이 성읍이 솔로몬의 행정 구역 안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기록(왕상 4:12)이나 므깃도가 솔로몬 때에 하솔 및 게셀과 함께 요새화되었다는 기록(왕상 9:15)에 의한다면, 므깃도는 다윗 아니면 솔로몬 때에 정복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므깃도 유적지에 들어서니 솔로몬 때와 그 이후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왕궁이나 성전, 성문, 계단, 마굿간, 곡물 창고, 아합 왕이 만들었다는 지하의 수로 터널(120m) 등이 그러했다. 이 흔적들은 므깃도가 솔로몬에 의해 병거성(chariot city)으로 사용되었음을 입증하는 것들이다.
지상의 모든 전쟁들을 한 번에 끝낼 최후의 전쟁이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지를 마음 속으로 그리면서, 우리 일행은 므깃도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갈멜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해발 500m 정도(최고 560m)의 갈멜산은 항구 도시인 하이파의 구(舊) 시가지 뒤편에 있는 거대한 산지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 이긴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왕상 18장). 갈멜 산지의 한 봉우리인 무흘라카(Muchlaka=‘불의 제단’) 봉우리에 이를 기념하는 교회, 곧 엘리야 기념교회가 있었고, 교회 앞뜰에는 바알 선지자들을 밟고 있는 엘리야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엘리야가 구부러진 칼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는 점이다. 농담에 가까운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너무도 많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느라 칼이 휘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설명이었다.
이번 순례여행에서는 애석하게도 오늘이 주일이어서 교회가 관광객들에게 문을 열지 않은 탓에 설명만을 듣고 말았지만, 3년 전의 기억이 새로웠다. 그 기억을 더듬으면서 갈멜산을 떠나 가이사랴 지역으로 이동하는 중에, 우리는 바알 숭배적인 요소가 우리 자신 안에 얼마나 많은지를 다시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지나치게 풍요와 다산의 복만 구하는 한국 교회가 21세기의 바알 숭배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호남신학대학교 캠퍼스를 일컬어 ‘갈멜 동산’이라 칭하고 있음을 주목한다면, 우리 모두는 이 시대에 엘리야와 같은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 나라의 전사(戰士)들이 아니겠는가! 갈멜산을 벗어나는 동안, 갈멜 동산의 엘리야들이 가는 길에 주님의 큰 은혜와 능력이 늘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갈멜산을 내려오니 시야가 확 트이면서 짙푸른 지중해가 눈에 들어왔다. 이스라엘 제1의 항구 도시요 최대의 산업도시인 하이파(Haifa)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별다른 기독교 유적지가 없어서 그냥 건너뛰기로 했다. 곧바로 가이사랴(Caesarea) 유적지를 향해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빌립 집사의 고향(행 21:8)이기도 한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에 의해 건설된 도시라고 한다. 본래는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Caesar)에 의해 그에게 하사된 지역이었는데, 헤롯이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서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을 ‘가이사랴’로 지은 것이다. 이 도시는 빌라도가 총독 재직 시에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가이사랴 유적지에는 로마 시대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원형극장, 신전, 회당, 경기장, 공중목욕탕, 상업 지구(아고라), 두 개의 거대한 방파제 등이 그러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갈멜산 물줄기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7.5km 길이의 도수교(導水橋, aqueduct)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이사랴가 바울과 베드로의 선교 사역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도시라는 사실일 것이다.
먼저 바울의 경우를 보자.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가이사랴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진력하였다(행 23-26장). 특히 그는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아그립바 왕 등의 최고 권력자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베드로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도행전 10장에 의하면,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고넬료의 개종은 가정 복음화를 가능케 했고, 이로써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가이사랴 지역의 복음화가 촉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에 의한 고넬료 가정의 복음화는 베드로가 욥바에 머물러 있었을 때 그 계기가 마련된 일이었다. 이를 확인하려면 가이사랴에서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욥바를 찾아야 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일정상 그곳을 방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접고 3년 전의 욥바 방문기를 이곳에 삽입하고자 한다. 욥바에 가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욥바는 오늘날 텔아비브(Tel Aviv, 겔 3:15)로 알려진 곳으로, 본래는 조그마한 항구 도시를 가리켰으나, 이스라엘 공화국이 출범한 이듬해(1949년)에 텔아비브와 병합되어 오늘날 이스라엘 제2의 도시로 알려진 텔아비브라는 하나의 도시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텔아비브의 일부가 되어버린 욥바는 공교롭게도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똑같이 이방인 선교와 관련된 도시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약 시대의 경우, 욥바는 본래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사용될 레바논 백향목을 바다로 운반하여 내륙 지방으로 옮길 때 중간 통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대하 2:16; 스 3:7).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언자 요나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려고 내려간 항구가 바로 욥바였다는 사실이다(욘 1:3).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탔다가 하나님께서 내리신 풍랑을 만나 선원들에게 들키게 되고, 그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신상을 밝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요청에 따라 그들이 그를 바다에 던지자 바다가 잔잔해진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놀라운 이방인 선교의 역사가 일어난다. 제각기 자기 신을 부르던 그 배의 선원들과 승객들(욘 1:5)이 결국에는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바뀐 것이다(욘 1:15).
신약 시대에는 어떠했는가? 베드로는 선행과 구제로 널리 알려진 여신도 다비다가 질병으로 인하여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욥바에 가서 그녀를 다시 살린다. 이 일로 인하여 욥바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주를 영접하게 된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 후로도 욥바에 있는 피장(皮匠, tanner) 시몬의 집에 여러 날 머물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행 9:36-43). 그 무렵에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와 베드로는 거의 같은 시기에 환상을 보게 되고, 마침내는 환상 중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베드로는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로 가게 되어, 앞서 말한 대로 고넬료 집안의 복음화 및 가이사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방인 복음화의 큰 역사를 이룬 것이다(행 10장).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욥바를 방문하게 되니, 당시 상황이 머리에 그려지면서 절로 감동이 밀려오는 듯했다. 그 감동을 미처 정리할 틈도 없이 얼른 등대 근처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집을 잠시 살핀 다음,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베드로 기념교회(St. Peter's Church, 프란체스코회)를 방문하였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다시 살린 것을 기념하는 교회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교회의 제단 위에는 베드로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교회 안팎을 잠시 둘러보니, 며칠 동안 욥바에 머물렀던 베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여기까지가 3년 전의 여행기 추가 부분임)
가이사랴를 뒤로 하고 우리는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요 성지순례의 클라이맥스인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그런데 텔아비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전체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길이었다. 예루살렘 자체가 해발 800m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1시간 가까이를 달려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서니, 도시 전체가 온통 암회색 화강암 석조 건물들 일색이었다. 고도(古都)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 주택이건 공공건물이건 관계없이 오로지 돌(화강암)로만 건축하도록 법으로 규제하기 때문이란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의도대로 옛 도시의 품격이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다양한 색깔의 조화를 무시한 획일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예루살렘에 도착한 즉시 우리는 감람산으로 향했다.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해발 810m의 감람산은 예수께서 기도하기 위해 즐겨 찾으셨던 곳이어서 다른 어떤 산보다도 애착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감람산은 예수의 마지막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이 다수 발생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 사건들을 기념하는 교회들이 아주 많았다. 이를테면 예루살렘에 입성시의 출발 지점에 세워진 벳바게 기념교회, 전 세계 80개국의 언어로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는 주기도문 교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음(눅 19:41-44)을 기념하는 예수 눈물교회(Dominus Flevit),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곳의 겟세마네 교회(세계 각국 교회들의 기부금으로 지었다 하여 만국교회라고도 함), 베드로 통곡교회, 예수 승천교회 등이 그렇다. 이 교회들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곳은 겟세마네 교회였다. 예수께서 엎드려 기도하셨다는 바위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감람나무 여덟 그루를 간직한 교회 옆의 겟세마네 동산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수령이 아주 오래 되었다는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그랬다.
감람산을 내려오면서 해질 무렵의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니 정말 장관이었다. 감람산이 예루살렘보다 조금 높다 보니 예루살렘 성이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예루살렘 성전의 자리인 이른바 성전산(聖殿山, Mount of Temple)에는 꼭 보아야 할 바위돔이 있다는데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다. 이 바위돔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는 바위를 기념하여 세운 모스크를 가리킨다. 또한 이곳은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이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회교도들은 무함마드가 꿈 속에서 날개 달린 천마를 타고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이 바위에서 천국으로 올라가 알라에게서 코란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들이 메카, 메디나와 함께 예루살렘을 이슬람 3대 성지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람산을 내려간 우리는 저녁 무렵의 어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수난의 길 또는 십자가의 길, Via Crucis)로 이동했다. 예수께서 벳바게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타고 지나가셨다는 양문(또는 사자문; 스데반 집사가 이 문밖에서 순교했다 하여 스데반 문이라고도 함)을 통과한 다음에, 비아 돌로로사로 가는 길 초입에 성 안나 교회가 있어 잠시 들르기로 했다.
이 교회는 예수의 외할머니 안나가 모친 마리아를 낳은 곳에 세워진 건물이라는데, 새롭게 지어진 교회 옆에 십자군 시대에 건축된 옛 예배당 터와 “양문 곁”에 있다는 베데스다 연못(요 5:2)의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 교회의 특징은 세계에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늦은 시간이어서 우리는 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건물 외양만 보고서는 십자가의 길, 곧 비아 돌로로사를 걷기 시작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께서 재판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어가셨던 길을 일컫는다. 이 길에는 순례자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어야 하는 14군데의 주요 장소들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그 14군데에는 한결같이 그 장소를 기념하는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다. 첫 번째 장소는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마 27:11-26; 눅 23:13-25), 지금은 아랍인 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 장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이며(마 27:27-31), 세 번째 장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다가 힘에 겨워 쓰러지신 곳이다.
그리고 네 번째 장소는 모친 마리아를 만났다는 곳이요, 다섯 번째 장소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이요(마 27:32; 눅 23:26), 여섯 번째 장소는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에게 손수건을 건네 드렸다는 곳이요, 일곱 번째 장소는 예수께서 두 번째로 넘어지신 곳이요, 여덟 번째 장소는 예수께서 울면서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눅 23:27-31)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위로하신 곳이요, 아홉 번째 장소는 예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신 곳이다.
또한 열 번째 장소는 로마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벗긴 곳이요(마 27:33-36), 열한 번째 장소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곳이요(마 27:37-44), 열두 번째 장소는 예수를 못박은 십자가가 서 있던 곳이요(마 27:45-56), 열세 번째 장소는 십자가에서 예수를 내려놓은 곳이요(막 15:42-45), 마지막 열네 번째는 예수께서 묻히신 곳이다(눅 23:50-56). 그런데 이들 중에서 마지막 다섯 장소는 모두 골고다 언덕에 있는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자리를 기념하는 교회를 짓게 했다. 그 교회가 바로 여섯 개 교단이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성묘(聖墓) 교회, 즉 거룩한 무덤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이다. 따라서 열 번째에서 열네 번째까지의 장소는 모두 성묘교회 안에 있는 셈이다.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느 순례자들처럼 십자가의 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성묘교회에 이르기 전까지는 십자가의 길이 온통 아랍 사람들의 가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곳을 왕래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본래 수난의 길이라는 것이 번잡한 생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인생들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역시 그러한 길을 가야 할 것이고... 어쨌거나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수난의 길을 걸으신 날이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금요일이었는데, 마침 우리가 이곳을 찾은 오늘은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이어서 정말 뜻깊은 순례길이 된 것 같았다.
십자가의 길 탐방을 마친 후 우리는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인 통곡의 벽(Wailing Wall)으로 이동하였다. 유대인들이 가장 거룩한 곳으로 여기는 통곡의 벽은 길이가 60m이고 높이가 18m인데, 주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할 때 남은 서쪽의 옹벽 일부가 그에 해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 나라에 분할되면서, 이 벽은 요르단에 속하게 되었으나, 1967년의 6일 전쟁 때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함으로써 통곡의 벽을 자기 나라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 칭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일인 아브(Ab)월(유대력으로 5월) 9일에 이 벽 앞에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를 슬퍼하면서, 나라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탈환을 눈물로 호소했기 때문이다(왕상 8:30).
하루 24시간 개방되는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역사의 현장이어서 그런지, 입구에서부터 엄한 검색을 실시하였다. 검색대와 넓은 광장을 지나자 통곡의 벽을 왼쪽(남자)과 오른쪽(여자)으로 나누어 남녀를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자들에게는 반드시 키파라는 작은 모자를 쓰게 했는데, 우리 같은 순례자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키파를 쓰고 들어갔더니, 많은 유대인 남자들이 기도용 복장을 하고서 머리를 흔들어 대면서 기도문을 낭송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리 테이프 모양의 검은색 성구 띠(‘테필린’)를 두 팔에 감고 머리에도 성구를 담은 조그마한 상자를 붙들어 맨 채로 말이다(신 6:8).
밤늦게까지 이곳을 찾아와 열심히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니, 한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하는 모습과 그 양태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식일이나 절기 때에는 이곳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하는데, 금요일 오후 4시 반경에 시작되는 안식일의 광경을 볼 수 없어 아쉽기는 했다. 그러나 사람들로 홍수가 될 이곳을 방문하게 되면 우리가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아, 안식일을 피한 날의 방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기도에 힘쓰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이곳을 더 이상 통곡의 벽으로 부를 것이 아니라 기도의 벽으로 불러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이곳을 서쪽 벽(the Western Wall)으로 부르고 있지만 말이다.
(9) 예루살렘에서 터키의 이스탄불로: 1월 29일(월)
오늘은 예루살렘 순례를 마감하고 터키의 이스탄불로 이동하는 날이다. 그런데 어제부터 우리가 방문한 예루살렘은 사실 1948년의 이스라엘 독립을 계기로 급속도로 확장된 신(新) 예루살렘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구(舊) 예루살렘, 곧 4km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예루살렘 구도시이다. 이처럼 중요한 장소인 예루살렘은 도시 전체가 관광지요 순례지여서인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세계 각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더욱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삼대 종교의 성지이고 보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본래 가나안 원주민인 여부스 족속이 거주하던 성읍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가나안 땅에 들어왔으나 오랜 세월 동안 예루살렘을 정복하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주전 천 년경에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 다윗이 예루살렘의 극비 정보인 수구(水口)를 통하여 성내에 진입함으로써 정복에 성공하였다(삼하 5:6-10). 그 후 예루살렘은 다윗에 의해 통일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왕국분열 이후에는 남왕국의 수도로 계속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한 후에도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보증해 주는 상징적인 도시로 이해되었다.
예루살렘의 이러한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오늘의 첫 순례지인 세례 요한의 고향 마을, 곧 예루살렘 서쪽 변두리의 엔케렘(Ein Karem=“포도원의 샘”이라는 뜻)을 방문하였다. 이곳에는 세례 요한의 탄생지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세례 요한 탄생교회와 마리아가 처녀 몸으로 임신한 채로 사촌 엘리사벳을 만나러 왔던 것을 기념하는 마리아 방문교회가 있다. 세례요한 탄생교회는 장식은 물론 종탑도 없이 구조를 외부에 그대로 노출시킨 검소한 외관을 지녔는데, 아마도 세례요한의 청빈한 삶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리고 마리아 방문교회는 세례 요한 탄생교회에서 나와 한참을 언덕 위로 올라가야 만나는데, 가는 중간에는 마리아가 물을 먹었다는 마리아의 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쁜 일정으로 인하여 마리아 방문교회와 마리아의 샘을 보지 못한 채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전용 버스에 몸을 실은 우리는 곧바로 예루살렘 신시가지에 있는 유대인 학살 기념관 야드 바셈(Yad Vashem=a memorial and a name, 사 56:5)을 방문하였다.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6백만 유대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목적의 기념관이었다.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과거의 아픈 기억을 영원토록 기억함으로써 희망의 미래를 건설하기 위함일 것이다.
야드 바셈의 본관에 들어가니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유대인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연도별로 정리해둔 것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풍부한 사진 자료와 함께 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어서, 유대인 박해와 학살의 역사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6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비참하게 학살당했고, 그 절반인 3백만이 폴란드에서 희생되었다고 하니, 그토록 끔찍한 학살의 역사는 영원토록 기억해야 할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기념관 건물 바깥으로 나오는 길에, 유대인 학살 당시에 유대인들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고, 그들의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정성껏 나무들을 가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지난 역사를 남김없이 기억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집념이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이런 정신이 오늘의 강한 이스라엘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점심식사로 예정된 양달선 집사의 집을 향했다. 모처럼 한국 음식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 곧바로 다음 순례지인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현재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베들레헴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스라엘과 아랍인들(팔레스타인 난민 포함) 사이의 갈등이 얼마나 큰지를 한눈에 알게 해주었다. 콘크리트 장벽을 통과하여 베들레헴으로 들어간 우리는 가장 먼저 예수 탄생교회(Nativity Church)를 방문하였다. 본래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가 무슨 연유로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되었는지는 누가복음 2:1-14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본문을 직접 읽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대로 인용한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탄생교회는 주후 325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에 의해 세워졌고, 이로부터 200년 후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개축했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12세기 초 십자군이 탈환한 후 일종의 요새와 같은 곳으로 개축한 것인데,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면 조그마한 구멍 같은 입구를 거쳐야 하는데, 이는 겸손한 마음으로 허리를 굽히고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정말로 허리를 굽히고서 정문으로 들어갔더니, 제단이 보였고 그 밑으로는 동굴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어둠침침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동굴 한 구석에 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 위에 큰 별 표시가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 예수의 탄생지란다. 그 시절에는 가축의 우리가 대부분 동굴에 있었다 하니, 마리아는 아마도 이런 지하 동굴의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탄생지에서 왼쪽으로 조금 더 아래쪽에 당시에 태어난 아기 예수를 두었다던 말구유 자리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동방박사들이 세 가지 예물을 드린 곳이 아마도 그곳이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탄생교회가 지금은 두 종교 간의 갈등 속에 둘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스 정교회가 예수 탄생교회를 실질적으로 차지한 반면에, 로마 가톨릭은 그 왼쪽 공간에 성당을 마련하여 성탄절이면 그들 나름대로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예수 탄생지를 놓고서 종교 간의 분열과 갈등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에 사랑과 평화를 심기 위해 지극히 낮은 곳에 탄생하신 예수의 복음이 베들레헴의 탄생지에서부터 놀라운 화해와 용서의 역사를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예수 탄생교회의 가슴 아픈 현실을 마음에 담고서 베들레헴을 빠져 나오는 길에,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알려주었다는 곳의 탄생고지교회(그리스 정교회 관할)와 베냐민을 낳다가 죽은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을 말로만 전해들은 후, 다시 예루살렘의 시온산으로 돌아와서 최후의 만찬 장소요 오순절 성령강림의 장소였던 그 유명한 마가의 다락방을 방문하였다. 다락방 내부의 회당과 아래층에 있는 다윗의 무덤, 그리고 다윗의 박물관, 다윗을 기념하는 찬양과 기도의 방(King David's Psalm and Prayer Room) 등을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 있는 다윗의 무덤은 당연히 다윗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의미의 가묘(假墓)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은 후에 다윗성에 장사 지낸 바 되었기 때문이다(왕상 2:10).
마가의 다락방을 끝으로 이스라엘의 순례 여행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텔아비브 공항을 향해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터키의 이스탄불을 향해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두 시간 정도를 비행한 끝에 우리는 터키의 제2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이스탄불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터키 가이드인 이승수 선교사를 만나 다시금 비행기를 타고서 다음 방문지인 카이세리(Kayseri,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갑바도기아 왕국의 수도였음)를 향해 1시간 30분 정도를 날아 자정쯤에 숙소에 도착하였다.
비행기를 두 번 탄데다가 밤늦게 도착해서인지 모두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기왕에 터키에 도착했으니 잠들기 전에 터키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앙카라(Ankara)를 수도로 가지고 있는 터키는 고대의 아나톨리아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힛타이트(헷) 족속에 뿌리를 둔 나라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터키는 셀주크 터키 시대와 오스만 터키 시대를 거쳐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다가 1923년에 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 나라이다. 이 나라는 7천만 명 정도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으며, 국토 전체의 면적이 남한의 8배요 남북한을 합한 것보다 3.5~4배 정도는 넓다고 한다. 터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또 수니파 이슬람(인구의 98%)을 국교로 가지고 있는 정통 이슬람 국가인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서인지, 여러 가지 면에서 유럽적인 요소와 아시아적인 요소를 겸하여 가지고 있다.
(10) 괴레메 동굴교회와 데린구유 지하도시: 1월 30일(화)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전용버스를 타고서 카이세리를 떠나 곧바로 네브쉐히르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네브쉐히르는 성경에서 갑바도기아로 알려진 곳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던 때에 사도들의 방언 전도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갑바도기아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행 2:9). 사도 베드로가 자신의 편지 서두(벧전 1:1)에서 갑바도기아의 기독교인들을 향한 안부 인사를 전한 것으로 보면, 갑바도기아 지역에는 일찍부터 기독교인들이 있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유서 깊은 갑바도기아로 향해 가는 동안, 며칠 전 내린 눈이 다 녹지 않은 탓에 구불구불한 산간지방 도로로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승수 선교사의 독려와 운전기사의 탁월한 운전 솜씨 덕에 아주 어렵게 갑바도기아 지역에 도착하였다. 갑바도기아 지역으로 오면서 느낀 것이지만, 이곳은 특이하게 생긴 바위들(기암괴석)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커다란 바위산에 조성해 놓은 동굴교회와 동굴수도원, 동굴주택, 원추형 바위기둥들, 우산이나 굴뚝 위에 덮개나 모자를 쓴 것 같은 형태의 무수한 바위기둥 등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예르지에스 산(3917m)의 화산 폭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산 폭발 이후의 특이한 지형이 오랜 세월 동안 눈(얼음)이나 비바람, 강물 등에 의해 침식되거나 깨뜨려지고 부서지면서 오늘날 보는 것과도 같은 신기한 바위산이나 바위기둥들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사진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창조 섭리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뿐이다. 어떤 이는 갑바도기아에 있는 버섯 모양의 바위기둥들이야말로 “개구쟁이 스머프”라는 만화의 지리적인 배경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는데, 정말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기교회 기독교인들은 이곳에 있는 거대한 바위기둥들의 속을 깎고 다듬어서 동굴교회나 동굴수도원, 동굴주택 등을 조성했다. 그 전 시대의 거주민들이 이미 만들어 사용하던 것들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특히 괴레메 계곡에 있는 것들이 주목할 만했다. 그곳에는 3-4층 규모의 큰 것도 있을 정도로 많은 바위동굴 건축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동굴교회나 동굴수도원 안에는 예수의 생애나 초기교회 지도자들과 관련된 각종 프레스코 벽화(성화)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들 동굴교회들이나 동굴수도원은 한편으로 보면 로마 치하의 가혹한 박해 때문에 생겨난 것일 수도 있지만(피난이나 방위 목적),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일반교회의 성격을 갖기보다는 세속화된 세상을 떠나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는 목적 내지는 은둔을 특징으로 갖는 수도 생활을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참조. 히 11:38).
전자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상황과 관련된다면, 후자는 그 이후 시대의 상황과 관련될 것이다. 주후 4세기 무렵에 바실리우스, 니싸의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의 종교 지도자 3인이 갑바도기아 지역에 수도 생활의 원리를 정착시켰다는 지적이 있고 보면, 그 많은 동굴교회들과 동굴수도원 및 동굴주택 등이 나중에 일종의 수도원에 해당하는 것들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갑바도기아 지역이 후에 중세 수도원 운동의 시발지가 되었다는 지적 역시 동일한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어쨌거나 1천여 개 가까이 된다는 동굴교회들과 그 안에 그려진 무수한 성화들을 보니, 옛 사람들의 순결한 신앙생활이 머리 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갑바도기아에는 이처럼 커다란 바위 속에 구멍을 뚫어 교회나 주거지를 만드는 방식의 건축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동굴교회와 동굴수도원 및 동굴주택 등이 주위의 신비로운 거대한 자연석들과 어울려 비경(秘境)을 이루는 이곳과는 달리, 데린구유 지역에 가서 보면 또 다른 형태의 교회와 주거지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땅 밑에 있는 화산의 응회암을 완전히 깎아서 만든, 이른바 지하도시가 그에 해당한다. 갑바도기아의 지하도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막클르와 데린구유에 있는 지하도시인데, 우리가 젤베 계곡과 낙타 계곡 및 장미의 계곡 등을 거쳐 일종의 동굴 식당에서 터키의 전통 음식인 케밥으로 점심을 먹은 후에 관람한 곳은 데린구유의 지하도시였다.
지하 20층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이 지하도시는 현재 지하 55m의 8층까지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바, 길이가 6km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1만 명이 넘는 사람들(많게는 1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게 만들어져 있었다. 실제로 지하도시 안에는 마굿간, 식당, 부엌, 물통, 비상 수로, 공기통, 교실, 창고, 기도실, 교회 등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환기시설도 아주 잘 되어 있어서 지하로 한참 내려가도 공기가 탁하다거나 숨쉬기가 곤란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극도의 보안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인지 입구는 하나밖에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도 한 사람이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좁았다. 게다가 통로 군데군데에 맷돌 모양의 둥근 돌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유사시에 통로 안쪽에서 그 맷돌을 굴려 외부의 침입을 차단할 수 있게 했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하도시와 그 거주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입구는 하나여도 지하도시 안에는 각 층과 방들을 연결하는 많은 통로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혼자서 함부로 들어가기에는 다소 위험한 데가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데린구유 주변에 이보다 규모가 작은 지하도시가 30-40개 정도 더 있고, 그 지하도시들이 지하도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본 지하도시나 이미 발굴된 군소 지하도시 외에도 아직 발굴되지 않은 많은 지하도시들이 있다고 하니, 회교권 국가인 터키가 언제쯤에나 넓은 마음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수난의 현장을 완전히 발굴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할꼬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다못해 관광자원으로도 크게 각광을 받을텐데... 비록 지하도시 안에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할 만한 기록문헌이나 벽화 또는 장식 등이 아직까지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탓에,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삶의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땅 속에 지하도시를 건설하여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이처럼 치열한 삶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75세의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간 것처럼(창 12:1-4) 순전히 믿음을 지키기 위해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짐승 같은 삶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히 11:38). 그들의 이처럼 숭고한 신앙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부끄러운 마음이 그지없다. 이렇게 편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죄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그들이 걸어간 뜨거운 신앙의 발자취를 과연 얼마나 닮아갈 수 있으려나.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멀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괴레메 계곡의 동굴교회들과 데린구유 지하도시를 통해 신앙 선조들의 훌륭한 믿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우리는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꼬냐(또는 콘야)로 가는 길에 도자기 마을로 알려진 아바노스에 들러 몇 가지 기념품들을 구입하였다. 도자기 마을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일행 중의 한 사람(임훈식 목사)이 가게 주인의 도움을 받아 물레를 직접 돌려가면서 진흙을 손으로 빚던 중에 가게 주인의 농간(?) 덕택에 남자의 거시기 모양을 만들더니 마침내는 그것을 부러뜨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한바탕 웃음의 도가니에 빠져든 우리는 다시 전용 버스에 올라 숙소가 있는 꼬냐로 이동하였다.
(11) 소아시아의 세 교회들: 1월 31일(수)
우리가 하루를 머문 곳은 꼬냐(Konya)라는 도시의 한 호텔이었다. 갈라디아 지방(행 18:23; 갈 1:2; 벧전 1:1)에 속한 꼬냐는 성경에서 이고니온으로 불리는 곳이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지 중의 하나이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복음 전도 활동을 하다가 유대인들의 큰 핍박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이 성내의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두 사람을 추방하자, 하는 수 없이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으로 선교지를 옮겨 복음 전도를 계속하였다(행 13:13-14:1). 그러나 그곳에서도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루스드라로 옮겨가고 말았다(행 14:2-7).
그러나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은 루스드라까지 두 사람을 따라와 끝까지 그들을 괴롭혔다. 바울은 그 일로 인하여 돌에 맞아 죽임당하기 직전의 상황에 몰리기까지 했다(행 14:19).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한 다음에, 다시금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붙들어줌으로써(행 14:21-22), 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였다(행 14:23-28). 나중에 바울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성도들에게서 칭찬받던(행 16:2)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세 지역, 곧 안디옥과 이고니온 및 루스드라 등지에서 당한 일들에 대해서 언급한다(딤후 3:11). 이 지역들에서 겪은 핍박이 너무도 그를 괴롭혔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그를 핍박하고 얼마나 극렬하게 그의 전도 활동을 훼방했으면, 바울이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가 편지에서 그것을 밝혔겠는가!
꼬냐는 이처럼 바울의 선교 활동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도시이지만, 특별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 없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숙소를 나온 우리는 조반 후 전용 버스를 타고서 파묵깔레(Pamukkale=목화성, Cotton Castle)로 이동하였다. 현재의 파묵깔레는 성경에서 히에라볼리(Hierapolis)로 불리는 곳이다. 히에라볼리는 골로새서 4:13에서 딱 한 번 언급될 뿐이다(“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그 까닭에 성경의 내용과 크게 관련된 것은 없지만, 1840m 높이의 리코스 산 중턱에 위치한 온천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파묵깔레의 온천장에서 솟아나 흘러내리는 물 속에 다량의 석회질이 섞여 있어서인지 주변 지역 일대가 온통 하얀 색깔로 변해 있었다. 석회질이 침전하여 하얗게 변하는 자연의 조화가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어내는 것을 보니,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솜씨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모두 신발을 벗고 온천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온천 아래로 걸어 다녀 보기도 했다. 물이 나오는 곳은 따뜻했지만, 아직 겨울이어서 아래로 갈수록 물이 차가워졌다. 바닥이 차기 때문에 금방 물이 식어버린 것이다. 여름철이었다면 수영복 차림으로 온천욕을 할만도 했다.
온천욕을 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파묵깔레를 빠져나온 우리는 중간에서 점심을 먹은 후, 골로새 지역과 라오디게아 지역을 거쳐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빌라델비아 교회의 유적지를 향해 이동하였다. 본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경유할 예정이었으나 그곳은 아무런 안내판도, 정리된 흔적도 없어서 내버려진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 행태에 대하여 책망을 들었다는 점이다(계 3:15-16). 이 책망은 파묵깔레의 뜨거운 온천물이 돌로 만든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를 거쳐 골로새 지방으로 흘러가는 동안에 점점 식어가다가 차갑게 변하는 과정을 빗댄 것이다. 라오디게아의 물이 중간 지대의 미지근한 물이어서 그런지, 주께서는 그 교회 성도들의 미지근한 신앙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안약에 대한 계시록 3:18의 언급 역시 의약업(특히 안약 제품)과 염색업이 발달한 라오디게아 지역의 산업 구조에 착안한 표현이다. 비록 라오디게아 교회의 유적지를 직접 살피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행태를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반성하는 마음으로 빌라델비아 교회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칭찬만을 들은 교회여서(계 3:8) 정말 가볼 만한 곳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교회의 원래 터가 주후 17년과 23년의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탓에, 옛 교회의 모습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 그곳에는 주후 600년경의 비잔틴 시대(=동로마 제국 시대, 330-1453년)에 재건된 교회(=성 요한 교회, St. Jean Church)의 거대한 기둥들이 여섯 개 중에서 네 개나 남아 있었다. 마치 하나님 성전의 기둥들처럼 말이다(계 3:12).
빌라델비아 교회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간 곳은 사데(Sardis) 교회였다. 주후 1세기 중반경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사데 교회는 본래 그보다 먼저 지어진 아데미(Artemis) 여신의 신전 뒤편에 조그맣게 지어진 곳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세운 것이라 한다. 아데미 신전 뒤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사데 교회의 흔적은 이 교회가 살아 있으나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들은 바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주었다(계 3:1). 이는 사데 교회 성도들이 세속에 물들어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비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데 교회로 가기 전에 사데 체육관을 먼저 들렀었는데, 수영장을 포함한 각종 운동 시설을 갖춘 사데 체육관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데 지역이 고대 리디아(Lydia) 왕국(BC 670-546)의 수도였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틀리지 않음을 아데미 신전의 거대한 모습이나 사데 체육관의 위용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사데 지역 탐방을 마친 우리는 서양 서사문학의 원조로 불리는 호머(Homeros,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의 저자)의 고향 이즈미르(Izmir), 더 정확하게는 성경에서 ‘서머나’(Smyrna, 계 1:11; 2:8)로 불리는 터키 제3의 도시를 향해 이동하였다. 이즈미르에 있는 서머나 교회(=폴리캅 기념교회)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에게해를 끼고 있는 서머나 지역의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 중의 하나로서, 사도 요한이 지도 감독하고 그의 제자 폴리캅이 초대 감독을 지낸 유명한 교회였다. 폴리캅은 86세 때에 로마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던 중에 화형을 받고 순교한 위대한 신앙의 위인이었다. 실제로 성전 본당 앞쪽 천정에는 폴리캅이 순교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주님이 일평생 자기를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자신도 주님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화형 당함을 두려워하지 않던 폴리캅의 믿음이 곧 나 자신의 믿음이 되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한 우리는 인구 350만 명 정도가 산다는 서머나 시를 벗어나 숙소가 있는 쿠사다시(Kusadasi) 항구 도시로 발길을 옮겼다. “새들의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도시, 그리고 사도 요한을 밧모섬으로 유배 보낼 때 사용했다는 도시 쿠사다시(이 도시에서 밧모섬까지는 배로 4시간 소요)에서 오늘 하루의 일정을 마치면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세 곳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는 김에, 그 일곱 교회 전반에 관한 중요한 정보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흥미롭게도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기록함에 있어서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가까운 곳부터 언급하는 바, 해안 지방에 있는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 및 버가모 교회 등이 밑에서부터 위쪽으로 언급되고, 내륙 지방에 있는 두아디라 교회와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이 반대로 위쪽부터 아래쪽으로 언급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12) 에베소를 거쳐 그리스로: 2월 1일(목)
이 날도 전날처럼 새벽 같이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한 후에 곧바로 짐을 정리하여 셀축(Selcuk)으로 이동하였다. 성경에서 에베소로 불리는 셀축은 의사 누가, 사도 바울, 사도 요한, 성모 마리아 등과 깊은 관련을 가진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에 잠시 에베소에 들러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들과 변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행 18:19-21). 그러나 너무 짧은 기간 밖에 체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남아 있었는지, 3차 전도여행 때에는 2년 동안이나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행 19:1-10). 의사 누가는 아마 당시에 바울 사도와 동행하면서 복음 전도에 조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마음에 담고서, 우리는 역사적인 도시 에베소의 유적들을 살펴보기 전에 그 입구 부근에 있는 누가의 무덤을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진 의사 누가는 한동안 바울의 복음 전도 여정에 참여한 사람이다(골 4:14). 1860년에 이 무덤을 발굴한 영국의 고고학자 우드(T. J. Wood)는 십자가가 건물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데다가, 또 무덤의 묘석에 누가를 상징하는 황소머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가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곳을 찾아와서인지, 무덤 입구에 “성지보존회”의 이름으로 “누가의 묘”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누가의 무덤이 발굴 흔적만 남은 채로 아무 표지판도 없이 내팽개쳐져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나머지, 성지보존회 식구들이 돈을 들여 약간의 모양새라도 갖추어 놓은 것으로 보였다. 대단한 신앙의 열기가 아닐 수 없다. 남의 땅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누가의 무덤을 일견한 후에, 곧바로 에베소의 도시 유적들 안으로 들어갔다. 세계 교회사에 의하면, 에베소는 제3차 세계 공의회(에베소 공의회)가 열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곧 성모이시라는 교의가 확정된 곳이라고 한다. 유적지 안에 들어가 보니 셀 수 없이 많은 옛 도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파손되고 무너진 건물들이 많은 것만큼이나 도시가 크고 화려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로마의 여러 황제들이 세운 각종 신전들과 체육시설, 목욕탕, 공중화장실, 창녀의 집, 아고라 광장(야외 시장), 길게 늘어선 상가, 대리석 길, 대극장, 셀수스 도서관, 성모 마리아의 교회 등이 그러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을 끈 것이 대극장과 셀수스 도서관 및 창녀의 집 광고물 등이었다.
먼저 대극장을 보도록 하자. 무대 바닥에서 맨 꼭대기까지 높이가 60m인 이 대극장은 2만 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로 되어 있었다. 관중석이 세 구역으로 나누이는 이 극장은 아마도 은장색(silversmith) 데메드리오가 직공들을 사주하여 바울에게 폭력을 행하고자 시위한 장소였을 것이다(행 19:24-41). 당시에 바울은 친하게 지내던 관원들의 충고를 듣고서 대극장 진입을 포기하였었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에베소의 서기장(town clerk)은 대극장에 모인 무리들의 불법성을 조리 있게 지적함으로써 그 불법 집회가 자진 해산토록 하는 데 성공하였었다.
대극장 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대극장 가까이에 있는 셀수스 도서관이다. 에베소의 집정관이었던 셀수스 폴레마누스(Celsus Polemaeanus)의 아들 아퀼라(C. Aquila)가 주후 135년경에 아버지를 기념하여 세웠다는 이 도서관에는 당시에 1만 2천여 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로마 제국 최대의 도서관). 20세기 초에 발굴되어 복구된 이 도서관 전면에는 지혜, 덕, 이성, 지식을 상징하는 여신상들이 차례대로 서있는 바(진품은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는 한 박물관에 있다 함), 이는 참된 배움의 길이 지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덕,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성 등에도 있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지성인들, 그리고 특히 신학도들과 목회자들이 마음 깊이 새겨야 할 소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은 이처럼 훌륭한 도서관에서 네 가지 덕목에 기초한 폭넓은 배움을 추구하면서도, 아데미 여신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2년 동안이나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강론한 것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병자를 고치는가 하면 귀신을 쫓아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아데미 여신을 위해 각종 은제품들을 만들어 팔던 자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서는 마게도냐로 피신해야 했지만 말이다(행 19:8-20:1). 혹자는 셀수스 도서관이 두란노 서원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여겨지는 면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대극장과 셀수스 도서관을 연결하는 대리석 길바닥의 한 특이한 광고물이었다. 오른쪽 길바닥에 새겨진 부조물로 된 이 광고물은 흥미롭게도 셀수스 도서관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창녀의 집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 부조물에는 성인 남자의 왼쪽 발과 여자의 얼굴 및 심장 등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그 발 크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미성년자이므로 창녀의 집에 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으리라.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도서관 맞은편에 창녀의 집이 있었다는 점이다. 에베소에 아데미 신전을 포함한 각종 신전들이 많았고, 배움의 길에 전념하는 자들을 유혹하는 창녀의 집이 도서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에베소 사람들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금방 알게 해준다. 에베소 교회가 계시록에서 처음 사랑을 버린 탓에 주님의 책망을 들은 교회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계 2:1-7).
장시간 에베소의 유적들을 살핀 후에 우리는 전용버스를 타고서 사도 요한 기념교회로 발길을 옮겼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직전에 어머니 마리아를 맡긴 사람이다(요 19:26-27).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복음 전도에 매진함으로써 기독교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의 기독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는 요한을 밧모(Patmos) 섬으로 귀양 보낸 장본인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나중에 폭군으로 변하여 원로원에 의해 살해된(100년) 후에야 비로소 요한은 밧모 섬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에 돌아와 에베소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에베소에 있는 사도 요한 기념교회는 4세기경에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교회는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에 개축된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추가하자면, 에베소 유적지 안에 성모 마리아 교회가 있다는 점과, 우리가 비록 가보지는 못했지만, 에베소 유적 가까이(10km 정도 거리)에 마리아가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집이 있다는 것이다. 에베소가 로마 천주교 성도들에게 인기 있는 성지순례지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만... 아쉬운 게 있다면 요한이 유배당한 밧모 섬과 그곳에 있는 요한 수도원을 방문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거대한 에베소 유적지 탐방을 마친 후 우리는 오후 5시에 체스메 항을 출발하는 배에 올랐고 1시간 정도를 항해한 끝에 그리스 령에 속한 히오스(Chios) 섬에 도착하였다. 히오스 섬은 사도행전 20:14-15에서 “기오”로 표기되는 섬을 일컫는다: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히오스 섬에서 우리는 다시 배를 탔는데, 그 배는 2,500명을 태울 수 있는 초대형 페리 여객선이었다. 오후 10시경에 승선하여 하룻밤을 지새운 끝에 다음날 오전 6시 30분경에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Piraeus)에 도착하였다.
피레우스 항은 그리스 최대 항구요 세계 5대항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Athens)에는 그리스 전체 인구 1,100만 명 중 4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는 바, 그 중 100만 명 정도는 외국인이라고 한다. 남한 면적보다 조금 크고 남북한을 합한 면적보다 조금 작은 그리스는 국민소득이 이미 2만 불을 넘은 터여서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잘사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와 아테네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다음 여정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13) 아테네와 고린도: 2월 2일(금)
배에서 하룻밤을 보낸 관계로 우리는 피레우스 항에 도착한 즉시 그리스의 가이드 남미나 집사를 만나 짐을 전용 버스에 싣고서 아테네의 주요 유적지들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의 이름을 따서 만든 아테네(성경에서는 아덴, 행 17:15-16)는 고대 그리스의 중심 도시요, 서양 문명의 모판 역할을 했던 아주 오래된 도시이다. 우리가 아테네를 찾은 것은 바울이 지금의 유럽 지역-특히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2차 전도 여행(행 15:36-18:22) 도중에 아테네에 들러 복음을 전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주후 50-52년에 걸친 제2차 전도 여행은 바나바와 마가 요한이 구브로(키프로스 섬)로 간 반면에, 바울과 실라는 이미 제1차 전도 여행 때 다녔던 터키 남부 지역을 다시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한 바울은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이르러 청년 디모데를 만나 제자로 삼고 할례를 행한다(행 15:36-16:5).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자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갔는데,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바울은 지금의 터키 수도인 앙카라 주변(갈라디아 지방)을 지나가던 중 갑작스런 발병이 계기가 되어 갈라디아 지방에 이방인 중심의 여러 교회를 창립하였다(갈 4:13-15; 행 16:6).
이어서 무시아 앞에 이르러 아시아 땅인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트로이)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밤의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의 간청을 듣고서 누가와 함께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했으며, 이튿날 항구 도시인 네압볼리로 가고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렀다(행 16:7-11).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다하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감옥 문을 빠져나오고 간수의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16:12-40),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마게도냐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3주 동안 복음을 전하였으나, 유대인들의 방해로 하는 수 없이 밤에 올림푸스 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베뢰아 마을로 간다(17:1-10).
유대인들이 베뢰아에서의 복음 전도 역시 방해하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둔 채로 혼자 아테네로 가서 회당과 장터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그곳의 학자들(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과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17:11-18). 논쟁의 와중에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지만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채로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가며, 그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다(17:19-18:5). 고린도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난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포함한 일행 전부를 이끌고서 배를 타고 수리아 지방으로 갔는데, 도중인 겐그레아에서 서원의 표시로 머리를 깎는다(18:6-18). 겐그레아를 지나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며칠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을 떠나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선교사 파송지였던 안디옥으로 돌아옴으로써 제2차 전도여행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18:19-22).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을 세 지역, 곧 빌립보와 아테네와 고린도 등지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아테네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유적지를 가지고 있는 유명한 도시요,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배출한 학문의 도시요, 근대 올림픽의 발상지이기도 한 도시이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는 아테네는 옛 조상들이 남긴 유적지들로부터 나오는 관광수입으로 그리스의 경제를 크게 떠받치고 있는 중요한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조상을 잘 둔 덕이라고 해야 하나...?
바울의 전도여행과 아테네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는 아테네의 중심을 이루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로 이동하였다. 아테네의 방어를 목적으로 하여 주전 5세기 후반에 일종의 군사ㆍ행정ㆍ종교의 중심지로 세워진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위해 지어진 곳으로, 파르테논 신전과 에렉테이온 신전 및 니케 신전 등의 신전 건물들, 야외 음악당과 극장, 아우디움(Audium), 대법정 아레오바고, 그리고 저자거리에 해당하는 아고라 등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가 이처럼 중요한 곳이기에 옛날부터 아테네에서는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없게 했다고 한다. 어디서나 이곳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유적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테네가 지진 지대라는 것도 고층 건물 금지의 한 이유가 되겠지만 말이다.
아크로폴리스에 들어선 후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신전으로 가는 길에 두 군데의 중요한 문화공간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 음악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Dionysos) 극장이었다. 헤로데스 음악당은 주후 161년에 정치가이며 대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사랑하는 죽은 아내 레길라를 위하여 아크로폴리스 남서쪽에 원형극장 형태로 지은 후 아테네 시민들에게 기증한 음악당으로, 6,000명 정도가 관람할 수 있다는데, 2천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름철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 음악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건축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성악가인 조수미도 2005년도에 이곳에서 플라시도 도밍고와 협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디오니소스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남동쪽에 있는 반원형의 극장으로, 세계 최초의 극장이라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주전 6세기경에 고대 그리스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에서는 바커스[Bacchus])를 위한 축제가 열린 이후 목조 건물로 지탱해 오다가 주전 342-326년 사이에 리쿠르고스(Lykourgos)에 의해 다시 돌과 대리석으로 재건축되었는데, 1만 5천 명 정도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큰 극장이란다.
이 두 문화공간을 차례대로 밑으로 내려다 본 후 우리는 대리석이 깔린 길을 밟으면서 해발 142m의 정상 부근에 있는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향해 올라갔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계속 오르자 온통 철골 구조물로 씌워져 공사가 한창인 니케 신전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르테논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한 이 신전은 이름 그대로 승리의 여신인 니케(Nike;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주인공)에게 바쳐진 이오니아식 건축물이다.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인들을 포함한 주변 민족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이곳에서 니케신의 도움과 승리를 기원했다고 한다. 주전 5세기에 지어진 이 신전은 17세기 후반에 터키 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으나 그리스가 400년 터키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1832년)을 이룬 후로 계속 복원 작업을 진행하는 중에 있다.
니케 신전을 다 지나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할 정도로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의 위용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신전은 아테네의 황금기인 주전 500년경에 아테나 여신을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헬라어로 “처녀”를 뜻하는 낱말이 ‘파르테노스’(parthenos)인 것을 생각한다면, ‘파르테논’ 신전은 처녀신을 모신 곳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 신전은 폭 30.8m, 길이 69.5m, 높이 10.4m인 46개의 도리아식 돌기둥들(동서로 각각 8개, 남북으로는 17개)로 건축되어 있어서 그리스 건축 예술의 백미라고 불린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46개의 돌기둥들이 한결같이 안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세워져 있고 위로 갈수록 가늘어져서, 마침내는 910m 상공의 한 지점에서 정확히 만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착시현상을 감안한 건축기법이라고 하니 참으로 정교하고 치밀한 건축술이 아닌가 싶다. 마치 가로수 길이 멀리 보면 서로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1456년에 터키의 지배를 받으면서 모스크로 사용되다가 1687년에 베네치아의 대포 공격으로 신전 중앙 부분과 지붕이 파괴된 이후로 기둥들만이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적지 않은 수의 내부 조각품들이 대영 박물관에 있는 바,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복원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나,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르테논 신전의 북쪽(파르테논 신전으로 올라가는 시각에서 본다면 파르테논 신전의 왼쪽)에는 규모가 작은 건축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위해 세운 에렉티온(Erechtheion) 신전이 바로 그것이다. 주전 420-39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신전은 도리아식이 가미된 이오니아 양식으로 세워진 건축물이다. 이 신전은 옆쪽에 세워진 2m 정도 높이의 소녀상 여섯 개로 유명한 곳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의 삼지창을 내던져 꽂힌 곳이 이곳이며, 지혜의 신 아테나가 올리브나무를 심은 곳이기도 하다. 에렉티온이라는 이름은 아테네의 왕인 에릭토니우스(Erichthonius)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신전 건축물들을 다 구경한 후에 우리는 파르테논 신전 옆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박물관 입구에 부엉이 모양의 조각품이 있었는데, 이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사실 디즈니랜드의 만화 영화에서 부엉이가 안경을 걸친 선생으로 묘사되는 것은 바로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속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부엉이가 대학의 휘장 같은 데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서양에서는 부엉이가 가르침과 교육기관의 상징물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불현듯 유명한 철학자인 헤겔이 『권리의 철학』(Philosophy of Right, 1820년) 서문에 “해가 저물면 미네르바(Minerva)의 부엉이는 날개를 편다”라는 글귀를 남겼던 것이 생각난다. 해가 저무는 듯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인생을 이해하는 지혜를 얻게 되었다는 뜻일 게다.
이처럼 묘한 의미를 가진 부엉이 조형물을 지나 박물관 내부에 들어서니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세 개의 신전 건축물들에서 발굴한 각종 부조물이나 조각들-특히 남자/남신이나 여자/여신의 머리 또는 전신(全身)을 묘사하는-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남자상이나 여자상의 상당 부분이 누드 조각상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동성애가 널리 퍼져 있던 당시 상황에서 남성이나 여성의 육체미를 강조하는 것이 하나의 관습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을 다 보고 나니 아크로폴리스의 역사적인 의미에 걸맞지 않게 규모가 작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아테네 시에서는 지금 이보다 훨씬 큰 규모의 박물관을 건축 중에 있다고 한다. 그 때가 기대된다.
파르테논 신전 주변을 한 바퀴 돌고난 후에 아레오바고로 가기에 앞서 아크로폴리스 전체를 조망해 보니, 남서쪽 아래에 고트족의 침입으로 인해 파괴되어 84개 돌기둥들 중 15개의 기둥만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 최대(지금은 보잘것없지만)의 제우스 신전이 보였다. 아테나 여신의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이 최고신 제우스의 신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아마도 힘보다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 사람들의 철학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는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의 아고라(저자거리)를 사진기에 담았다. 그 위의 아레오바고 역시 사진기에 담은 후, 곧바로 사도행전에 언급된 아레오바고를 향해 내려갔다.
일종의 대법정이라 할 수 있는 아레오바고는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입구의 바로 왼쪽에 있다. 이곳을 아레오바고라 칭한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곳에서 재판을 받은 최초의 인물은 제우스신의 아들이요 전쟁의 신인 아레스(Ares)였는데, 그는 자기 딸을 겁탈한 사촌 형제를 살해해 다른 신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재판 결과 정당한 복수 살인을 인정받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아레스가 재판 받은 곳을 “아레스의 언덕,” 곧 헬라어로 아레오파고스(Areopagus)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살인죄를 범한 사람을 재판하던 장소였던 아레오바고는 나중에 아테네 시의회 의원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는 바, 바울이 이곳에서 설교한 것은 아레오바고가 그러한 용도로 쓰이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행 17:22).
바울의 흔적이 남은 곳이어서인지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 바위에 바울의 사도행전 설교문이 동판 위에 새겨져 있었다. 언덕을 내려와 다시 왼쪽 길로 내려가면 아테네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관리 디오누시오(행 17:34)를 기념하는 교회가 아고라 옆에 있다고 하는데, 그곳까지 볼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곧바로 서양 철학의 선구자였던 소크라테스의 감옥(무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전 470년경에 태어나 주변 사람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철학(대화법, 귀납법)을 가르치며 평생을 자기의 신념에 정직했던 소크라테스는 주전 399년 반국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잡혀 유죄 선고를 받아 사약을 마시고서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 때 남긴 말이 “악법도 법이다”라는 구절이었다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바로 그곳이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감옥을 보니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야말로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감옥을 끝으로 아테네 순례를 얼추 마친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고린도(Corinth) 유적지로 이동하였고, 아테네 한인연합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임훈식 목사 가족(3명)은 아테네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부흥회가 끝난 다음날인 월요일에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 아테네의 서쪽에 있는 고린도는 본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 끝에 있었던 도리아인의 도시 국가였는데, 나중에 로마 시대에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널리 알려졌다. 고린도는 또한 바울 사도가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아테네에서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로 고린도로 옮겨와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고, 천막업을 하는 그들과 함께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 그러다가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한 후에 유대인들이 계속 시비를 걸면서 바울의 전도활동을 방해하자, 하는 수 없이 고린도를 떠나 수리아로 가고 말았다(행 17:1-18).
고린도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세계 3대 운하 중의 하나로 알려진 고린도 운하였다.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연결함으로써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관통하는 고린도 운하는 300km 정도를 돌아서 가야 하는 길을 6.34km의 거리로 단축하였으니 시간과 거리 절약에 대단히 크게 기여하는 물길이 아닐 수 없다. 폭이 25m이고 수심이 8m인 이 운하는 로마 시대 때에 네로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에 의해 건축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 운하가 최종적으로 완공된 시점이 1893년도였으니, 얼마나 힘든 공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만큼이나 아름다운 고린도 운하의 장관을 수면으로부터 70m 높이에 있는 다리에서 사진기에 담은 우리는 아크로 고린도, 곧 구(舊) 고린도를 향해 이동하였다. 마케도니아(알렉산더 대왕)와 로마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던 고린도는 로마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야외 음악당과 박물관, 유대인 회당, 아고라 광장, 아폴로 신전, 재판정, 수로, 우물터, 화장실 등의 많은 옛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크로 고린도 맨 꼭대기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다 하는데, 너무 높은 곳에 있기도 하고 시간도 없고 해서 그냥 고개를 쳐들어 눈 속에 담아두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기에 앞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고서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였는데(행 18:18), 그 유명한 장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우리 일행 역시 그곳에서 하차하여, 고린도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인 겐그레아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 한편으로, 바닷가에 남아 있는 로마 시대 신전 터와 중세 시대 교회의 미약한 흔적을 가까이서 확인하였다. 가이드의 말로는 신전 터가 지진으로 무너지는 바람에 그곳은 일종의 수중 도시가 되어버렸고, 중세 시대에 그곳에 교회를 건축하여 예배 처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겐그레아에서 사도 바울의 숨결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 우리는 다시 숙소가 있는 아테네로 이동하였다. 아테네 시내로 들어온 후로는 국회의사당 건물을 잠시 구경하였으며, 1843년 최초의 헌법이 공포된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아테네 시내 중심가의 신타그마 광장(Sintagma[=헬라어로 “헌법”이라는 뜻] Square)을 차창 밖으로 보면서 다음 목적지인 근대 올림픽 경기장으로 이동하였다. 주전 776년에 올림픽이 처음 시작된 장소였다는 그곳에는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대리석 경기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 LeCaf가 고대 올림픽의 슬로건이었던 “더 빨리”(citus) “더 높이”(altus) “더 강하게”(fortis)의 헬라어 첫 알파벳을 모아서 만든 것(le는 영어의 정관사 the에 해당하는 불어임)이라는 설명을 이곳에서 듣고서는 올림픽 경기가 오늘날의 스포츠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올림픽 경기장을 끝으로 아테네 방문 일정을 완전히 마친 우리는 숙소 부근의 한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아테네 한인연합교회(Korean United Church of Athens)의 오후 8시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임훈식 목사의 설교(행 9:17-22)를 듣고서 큰 은혜를 받았으며, 순서 마지막에는 함께 찬양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성지순례에 와서 부흥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이한 경험이었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설교 내용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바울처럼 눈에 비늘이 떨어지는 근본적인 변화(사울이 바울로)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을 청하였다. 주님 은혜와 기적으로 완전히 뒤집어지는 경험을 통하여 새 피조물이 되는 나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4) 수도원 집성촌 메테오라: 2월 3일(토)
가랑비가 내리는 기후 속에 아침 일찍 오늘의 주요 탐방지인 메테오라(Metteora)를 향해 이동하였다. 먼 길(400km 정도의 거리)이어서 모두들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한 후에 떠났다. 금방 햇빛이 비추는 날씨를 보고서 순례 기간 동안에 날씨와 기후를 주관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시간이 좀 많으면 아테네 남서쪽의 스파르타나 북서쪽의 델피 지역(아폴로 신전에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을 받았다는)도 가고 싶었지만, 기독교 순례지로서는 비중이 약하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메테오라를 향해 가는 길에 도로 곳곳에서 아주 작은 초소형 교회당들을 볼 수 있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자들을 위한 사당과도 같은 것인데, 그리스 사람들은 그 안에 성화상(icon)을 넣어두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추모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교통사고 다발지역에 주로 있기 때문에 운전을 거칠게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고의 의미도 있는 셈이다. 그것만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어디를 가나 올리브 나무(olive tree=개역의 “감람나무”)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올리브 나무가 그리스의 국목(國木)이라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유럽 지역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올리브 기름을 생산하는 나라들로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그리스 세 나라를 꼽는다고 한다. 이 세 나라가 아니더라도 유럽 지역에서는 전반적으로 많은 올리브 나무를 볼 수 있는 바, 이는 올리브 나무가 지중해성 식물로서 물이 없어도 잘 자랄 뿐만 아니라, 석회질 땅에서도 잘 자랄 수 있다는 이점을 안고 있어서이다. 순례지를 옮겨갈 때마다 올리브 열매가 식탁에 올라왔다는 것만 보아도 올리브 나무가 유럽이나 중동 지역에서 인기 있는 식물인지를 알 수 있다. 홍수 때에 방주 안에 있던 노아가 비둘기를 내어보냈을 때 그 비둘기가 올리브 나무 잎을 물고 왔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전 내내 달려서 정오 무렵에 메테오라 아래의 조그마한 마을 칼람바카(Kalambaka)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들면서 휴식도 취할 겸 메테오라에 대해 잠시 개관한 다음에 메테오라 탐방을 시작하기로 하자. 메테오라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으로, “공중에 떠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기둥 모양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사암(沙岩) 바위산들과 그 정상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들로 유명한 곳이다. 14세기에 처음으로 수도원이 세워지기 시작하였으며, 15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받자 종교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찾아온 수도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많은 수의 수도원들이 세워졌다는데,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4개의 수도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속세와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올라가는 길을 만들지 않고 도르래를 이용하여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물자 보급과 사람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하니 참으로 대단한 은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만이 남아있는데, 1925년부터 바위를 깎아 진입도로를 만들기 시작해 지금은 쉽게 출입이 가능하며, 대부분의 수도원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일반인의 관광을 허용하고 있다. 물론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긴치마를 입어야만 관람할 수 있다. 레위기 6:10 말씀을 연상시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바위 위의 비좁은 곳에 세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도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개인 기도실과 교회당, 휴게실, 창고, 도서관, 포도주방, 주거 공간, 물통, 빗물 탱크, 유골방, 식당 등 없는 것 없이 다 구비되어 있었다. 더욱이 각 수도원의 교회당 안에 있는 각종 성화상(icon)들과 벽화들, 그리고 오래된 성경 필사본들은 오래된 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적 자료들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듯했다.
여섯 개의 남아 있는 수도원들 중에서 우리가 직접 들어간 곳은 두 군데였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아기오스 니콜라우스(St. Nicolaus) 수도원(1510년)은 산타클로스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성 니콜라우스-4세기 초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에 있던 리키아의 수도 미라의 주교였던-를 기념하는 유명한 수도원이었지만, 시간 관계상 그냥 멀리서 사진만 찍고 지나쳤으며, 우측 정상에 있는 발람(Varlaam) 수도원(1530-40년경) 역시 전체적인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수도원이 1350년에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수도사 발람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으로서, 모든 성인들에게 헌정되었다 하여 “모든 성인들의 수도원”(Monastery of All Saints)이라고도 불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바라 루사누(St. Barbara Roussanou) 수도원을 지나 정상 부근(해발 613m)의 대(大) 메테오론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Great Meteoron; 1356-72년)은 비교적 규모도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있기도 하여 직접 입장하여 관람하였다. 변형 수도원(Monastery of Transfiguration of Jesus Christ) 또는 변신(Metamorphosis) 수도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1356년경 메테오라의 덕망 높은 수도자였던 성 아타나시오스(Saint Athanasios)에 의해 맨 처음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그가 이 수도원을 대메테오론(Megalo Meteoron)이라고 이름붙인 후 이 지역을 “메테오라”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메테오론 수도원을 탐방한 후에는 올라온 길과는 다른 길로 내려가는 중에 접근이 가장 힘들다는, 그래서인지 영화 “007 Your Eyes Only”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됐다던 삼위일체 수도원(Monastery of Trinity; 1458년)을 오른쪽으로 바라다보면서, 그 왼쪽에 있는 스테파노스 수녀원(Monastery of St. Stephen; 1312년)을 두 번째로 탐방하였다. 어느 수도원이나 지금은 관광객들이 많은 탓에 수사들이 다른 수도원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소수의 관리 수사들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수행에 전념하는 수사들이 거의 없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지리산 청학동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을 돌아보면서 소설가 공지영씨가 쓴 『수도원 기행』(김영사, 2001년)의 내용들이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랐다. 많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을 충분히 맛볼 수 있게 하는 유럽 땅에서 스스로 창살 안으로 들어가 가난을 자초하는 수도사들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잃고서 스스로에게 갇힌 자들이 아닌가 하는 표현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이처럼 흥미롭고도 아름다운 수도원 지역을 다 둘러본 우리는 곧바로 아래의 칼람바카 마을로 내려가 저녁 식사와 함께 숙소로 들어가 하루의 일과를 정리한 후 내일 일정을 준비하였다.
(15) 데살로니가와 빌립보: 2월 4일(일)
오늘은 주일이어서 순례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먼저 아침 일찍 예배를 드렸다. 성지순례 여정을 감안하여 계시록 3:7-13의 빌라델비아 교회를 소재로 하여 설교하였다(설교자: 강성열). 오늘의 순례는 데살로니가를 거쳐 아볼로니아와 암비볼리, 그리고 빌립보를 탐방한 다음에 숙소가 있는 네압볼리(=지금의 까발라)로 가는 여정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행 16:11-17:14)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로여서 묘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그제 탐방한 아테네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그리스 지역의 성지순례는 고린도만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바울의 전도여행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마게도냐의 수도였던 데살로니가로 가는 도중에 왼쪽을 바라보니 그리스 영토 중앙을 가로지르는 평균 높이 2천m의 핀도스(Pindos) 산맥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 중간에 그리소 최고봉이면서 그리스 신화의 본 고장이요 신들의 거처로 알려진 올림포스 산(Olympos, 2917m)이 바로 곁의 다른 봉우리와 함께 만년설에 뒤덮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 산 아래에 있는 베뢰아 마을이 멀리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바쁜 여정 때문에 갈 수 없는 곳이지만, 바울이 경험한 베뢰아 성도들의 훌륭한 믿음을 한 번 마음 속에 새기고 가는 것도 괜찮으리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 17:11-12).
데살로니가로 가는 도로의 왼쪽으로는 에게해의 깨끗하고 맑은 물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의 데살로니키(Thessaloniki)를 일컫는 항구 도시인 바, 알렉산더 대왕 사후 치열한 권력 쟁탈전에서 승리한 카산드로스(Kassandros) 장군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주전 315년에 세운 다음, 자신의 왕비인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주전 146년 이후의 로마 시대에는 속령(屬領) 마케도니아의 가장 큰 도시로 번영하였으며, 동로마 시대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다음 가는 도시로 번영하였고,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데살로니가는 지금도 아테네 다음 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로 110만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 도시가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발전을 거듭한 것은, 그곳이 유럽 내륙의 출구에 해당하는데다가 아드리아해(海)와 비잔틴을 연결하는 유명한 군사 도로 에그나티아(Egnatia) 가도(街道) 중간의 중요한 교통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이어서인지 이곳 데살로니키에는 발칸 반도 최대의 대학인 아리스토텔레스 대학(학생 7만 명)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데살로니가를 찾은 것은 바울 사도가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이곳에 교회를 설립하였기 때문이다(행 17:1-10; 살전 1:1; 살후 1:1). 물론 그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바울의 전도활동 덕택이어선지 데살로니가에는 비잔틴 시대(=동로마 제국 시대, 330-1453년)에 세워진 역사적인 교회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1천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만 해도 20곳이 넘는다고 하니, 바울 한 사람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얼마나 풍성한 열매를 맺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모든 교회를 다 방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데살로니가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고 의미 있는 교회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디미트리우스 교회가 바로 그곳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직전에 유명한 순교자인 디미트리우스(Demetrios)를 기념하여 세운 이 교회는 410년대에 건축되었으나 1917년 데살로니가를 휩쓸었던 대화재로 크게 파손되고 말았지만, 다행히 지하에 로마 당시의 회당 터를 비롯한 원형이 많이 남아 있어서 회당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1-2).
바실리카 양식(로마 시대의 공공건물 건축양식)으로 건축된 그리스 최대의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디미트리우스 교회는 194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어 전 세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성지순례 장소로 탈바꿈하였다고 하니, 한 사람의 순교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후대에까지 미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교회 탐방을 마친 후 우리는 데살로니가 시가지를 통과하는 중에 지하에 묻힌 로마 시대의 공중 집회소 내지는 아고라 광장 지대-가로 100m, 세로 64m나 되는-를 눈여겨보면서, 어쩌면 바울이 지하의 이곳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으리라는 가이드의 말에 또 다시 바울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약간은 흥분된 모습으로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왔다.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이어지는 에그나티아 도로를 따라 빌립보를 향해 가던 중에 우리는 바울이 암비볼리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던 중에 잠시 들렀던 아볼로니아(Apollonia)를 방문하였다. 한 마을의 작은 바위에 사도행전 17:1 말씀이 새겨진 비마(bimah, 유대교 회당의 높게 올린 연단을 가리킴)를 보고서 바울이 아볼로니아에 들렀을 때 설교한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서 모두들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로마 시대의 목욕탕이었다고 전해지는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너무 초라한 모습뿐이어서 다들 별다른 관심 없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 다음 목적지는 암비볼리(Amphipolis)였는데, 이 마을 역시 터키의 이스탄불과 이탈리아의 로마를 잇는 에그나티아 도로에 접한 곳이어서인지, 우리는 바울이 지나갔을 그 길을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에 약간씩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암비볼리 마을 부근의 도로변에 바울의 이전 시대인 주전 4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사자상이 서 있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바울도 마게도냐를 상징하는 이 사자상을 보았을 것이다. 마을 입구에 암비볼리 박물관이 있다는데, 갈 길이 바쁜 우리로서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암비볼리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빌립보 지방을 향해 달렸다. 빌립보(지금의 필리피, Philippi)는 에게해에서 내륙으로 16㎞쯤 들어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있는 도시로, 알렉산더의 부친인 필립 2세(주전 359-36년)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세운 곳이다. 사도행전에서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행 16:12)으로 소개되는 이 도시는 주전 42년 시저를 암살한 그의 양자 브루투스가 참패한 후 자결한 곳이요, 이 전쟁(빌립보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후에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게 된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빌립보는 특히 바울 사도의 전도활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도시인 바, 사도행전 17장에 당시의 상황이 매우 잘 설명되어 있다. 아시아에서의 전도활동을 중단하고서 마게도냐로 나아갈 것을 지시받은(행 16:6-10) 바울은 드로아(트로이)에서 배를 타고서 사모드라게를 거쳐 네압볼리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전진하여 빌립보로 갔다. 바울은 이 성읍에서 수일을 머물다가 안식일에 기도처를 구하여 강가로 나갔고, 그곳에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요 여성 사업가인 루디아를 만났다. 두아디라 시에서 자색 옷감 장사로 일하던 루디아는 하나님의 감동에 힘입어 바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마침내는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은 후 강권하여 바울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한다(16:11-15).
그러다가 바울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한 명을 만나 그를 치료하는 기적을 행하는데,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 여종을 부리던 주인들에게 붙잡혀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감옥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던 중에 큰 지진에 의하여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자결하려는 간수와 그의 온 집안 식구들을 구원키에 이른다.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과 실라는 곧바로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만나본 다음에 그들을 위로하고서 다음 선교지를 향해 떠난다(16:16-40).
이처럼 중요한 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는 빌립보에 들어선 탓인지 모두들 감동과 기대감에 사로잡힌 기색이 역력했다. 빌립보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바울이 루디아를 만났다는 강가의 기도처였다. 당시 자주 옷감 장사를 하던 두아디라(계 2:18) 출신의 루디아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후에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에게서 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간직하여 그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여러 번 그를 도와주었고(빌 4:15-16),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위문품을 보내기도 했다(빌 4:18). 빌립보서는 그처럼 자신을 여러 차례 도와준 빌립보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바울이 쓴 편지이다.
바울이 루디아를 만났다는 곳은 강이라기보다는 조그마한 도랑 같은 곳이었다. 물고기 모양의 샘터가 조성되어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루디아가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을 일컬어 “루디아의 세례터”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세례터 바로 옆에는 바울이 루디아를 만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바울 기념교회(또는 루디아 기념교회)가 있었다. 교회는 루디아의 순수한 신앙을 생각해서인지 매우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된 루디아의 귀한 믿음을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 우리는 버스에 올라 다음 목적지인 빌립보 유적지로 이동하였다.
우리가 찾은 빌립보 유적지는 규모가 굉장히 큰 곳으로, 아테네의 에콜 프랑세즈(Ecole Francaise)에 의해 1914년부터 1937년까지 고고학적 발굴이 행해졌다고 한다. 중앙의 에그나티아 도로를 기준으로 산 위쪽 지역과 산 아래쪽 지역으로 도시가 나누어지는 바, 우리가 먼저 찾아간 곳은 아래쪽 지역이었다. 에그나티아 도로 바로 밑의 아래쪽에는 길이 91m, 폭 46m가 넘는 장방형의 대광장이 있었고, 북쪽 중앙에는 연사들이 연단으로 사용한 것이 틀림없는 장방형의 주춧돌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대광장의 북동쪽과 모서리에는 두 개의 성전이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하여 바실리카 B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성전은 특이하게도 지성소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외에도 도서관과 분수, 목욕탕, 수세식 화장실, 칸막이 가게 등 다양한 문화시설들이 눈에 띄었다.
주후 6세기경에 지어졌다는 바울 기념교회는 아직도 발굴 중이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봉쇄하고 있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서, 에그나티아 도로 위쪽의 산기슭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만난 유적지는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었다는 감옥이었다. 주후 5세기경의 것이라는데, 어쩌면 바울 이후로 주후 5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조그마한 감옥이었지만 찬송과 기도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했던 당시의 상황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감동의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감옥을 지나 조금 더 위로 올라갔더니 바실리카 A라고 불리는 성전 터가 남아 있었고, 조금 더 지난 후에는 17,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거대한 원형극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주전 4세기 마게도냐 시대의 하단 부분과 주후 4세기 무렵의 상단 부분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니, 이곳이야말로 초기 교회 성도들의 눈물겨운 신앙의 현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극장의 기본 뼈대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인지 지금도 여름이면 각종 공연을 비롯한 축제 행사가 벌어진다고 한다. 그런 축제 행사의 때에 한 번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빌립보 유적지 바깥쪽에는 옛 도시를 구성하고 있던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어서 빌립보의 오랜 역사를 웅변적으로 보여 주는 듯했다. 바울의 숨결과 흔적이 꽤나 많이 남아 있는 빌립보 유적지를 뒤로 하고서, 우리는 바울이 빌립보에 오기 전에 들렀던 네압볼리를 향해 이동하였다. 지금은 “까발라”(Kavalla)로 불리는 네압볼리(네아폴리스, Neapolis)는 마게도냐 지방에서 데살로니가 다음으로 큰 도시로,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도착했던 항구요, 따라서 바울이 유럽 전도를 시작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행 16:11-12).
그래서인지 네압볼리에는 바울의 도착을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두 개나 있다. 하나는 항구 가까이에 있고, 다른 하나는 항구의 언덕 위에 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항구 가까이에 있는 교회였는데, 바울 도착 기념교회라 불리는 이 교회의 바로 앞에는 바울의 도착 장면을 그린 벽화가 세워져 있었다. 이 교회의 정면과 그 앞의 벽화를 사진기에 담은 우리는 숙소에 짐을 푼 후, 항구 위의 요새화된 성채를 향해 올라가는 미니 열차(Dotto Trains)를 타고서 성채 주변의 까발라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정확하게 15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는데,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미니 열차를 끝으로 오늘의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났기에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오늘 하루의 순례여행을 정리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16) 터키의 이스탄불과 그랜드 바자르: 2월 5일(월)
오늘은 그리스의 국경을 넘어 터키로 이동하는 날이어서 아침 일찍 짐을 정리하고서 입살라 국경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런데 터키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교회보다는 모스크(무슬림 사원)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터키가 회교권 국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린 끝에 마침내 입살라 국경에 도착하였고, 30분 후인 오전 11시경에는 이스탄불을 우리에게 안내할 터키 가이드 허은혜 집사를 만날 수 있었다. 숙소가 있는 이스탄불까지는 4시간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 내내 터키와 이스탄불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가이드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오랜 고속도로 주행 끝에 우리가 도착한 이스탄불은 인구 1,200만 명이 거주하는 큰 도시요, 서쪽의 유럽 지역과 동쪽의 아시아 지역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유일한 도시라고 한다. 주전 7세기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비잔티움’으로 불렸던 이 도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주후 330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개칭되었다. 그러다가 1453년 오스만 터키에 함락되면서 지금의 ‘이스탄불’로 불리게 되었다. 개칭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1923년에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지기는 했지만, 어찌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이스탄불에 비길 수 있겠는가! 이스탄불은 이렇듯이 오랜 역사를 지나는 동안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중심지로 여겨졌던 탓인지, 두 종교의 유적들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는 듯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이슬람이 국교여서 이슬람 유적이나 사원들이 훨씬 많아 보이기는 했지만....
오후 3시 40분경에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아테네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이스탄불로 날아온 임고은 자매의 식구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러나 재회의 기쁨을 나눌 틈도 없이 우리는 모두 짐을 모두 숙소에 푼 다음, 예정대로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 제1의 시장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r)를 잠시 동안 관광하였다. 밖에서는 약간의 가랑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지붕이 덮인 시장 안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종의 토산품 시장이라 할 이곳에서 우리는 제각기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한두 가지씩 구입하였다. 그랜드 바자르가 중국 장안까지 장장 7,500km나 되는 실크로드(비단길)의 시작점이자 종착역이어서인지 시장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상당수의 물품들이 모조품이나 가짜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1461년도에 지어진 목조 건물들의 기본 구조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 같은 데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시장 탐방을 끝으로 오늘 일정을 마친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내일 로마를 향해 떠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하루를 마감하였다.
(17) 이스탄불 순례 후 드디어 로마로: 2월 6일(화)
오늘은 이스탄불의 중요한 유적지들을 탐방한 다음 보스포러스 해협을 구경하고 곧바로 로마로 떠나는 날이다. 그래서 조금 서둘렀다. 오전 7시 30분에 호텔을 떠난 우리는 가장 먼저 히포드롬(Hippodrome) 광장을 방문하였다. 이 광장은 본래 로마의 셉티미우스 세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만들어지고,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확장된 전차 경기장으로서, 당시 규모는 폭이 117m, 길이가 480m에 달했으며 10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쉽게도 바로 다음에 우리가 찾아갈 블루 모스크와 일부 광장만이 남아 있다.
그 일부 광장에는 몇 가지 고대 기념물이 남아 있는 바,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및 힛타이트 등을 정복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26m 높이의 오벨리스크(방첨탑)이다. 본래는 이집트의 테베(지금의 룩소르)에 있던 것이었는데,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테베에서 이곳 히포드롬 광장에 옮겨다 세워놓은 것으로, 전차 경기가 벌어지는 날에는 일종의 중앙 분리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오벨리스크 바로 옆에는 나선형의 뱀 세 마리가 엉켜져 꼬여 있는 모습(단결을 상징)의 구리기둥이 철책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의 도시 개통식 때에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머리 부분이 깨뜨려져 있어 전체적인 형상을 알 길이 없으나, 대영 박물관과 이스탄불 박물관에 그 머리가 각각 1개씩 보관되어 있다 한다.
바로 이어서 찾아간 곳이 그 유명한 블루 모스크였다. 터키 사람들에 의해 ‘술탄 아흐멧 모스크’(Sultan Ahmet Mosque)라고 불리는 이 건축물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14번째 왕(술탄)인 아흐멧 1세가 20세 때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회교 사원을 세우기 위해 유명한 건축가 시난(Sinan)의 제자 메흐멧 아가(Mehmet Aga)에게 지시하여 만든 것이다(1609~1616년).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사원에 속한 이 모스크는 6개의 첨탑을 가진 유일한 사원으로, 푸른빛이 나는 타일 21,040장(타일 1장의 가격=은 18냥 가격)으로 내부를 장식했다고 하여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다. 이 사원이 완성되자 왕들은 이곳을 중요한 종교 정책을 결정하거나, 종교적 축제를 거행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대단히 화려하고도 비싼 건물인 블루 모스크를 지나 조금 이동하니, 비잔틴 건축물의 표본으로 꼽히는 그 유명한 성(聖) 소피아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거룩한 지혜”라는 뜻을 가진 이 성당은 주후 325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건축된 후 소실되었다가, 537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된 것으로서, 본래는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길이 81m, 너비 70m의 널찍한 내부 공간과 지상 56m 높이(15층 건물 높이)에 받침기둥도 없이 떠있는 직경 32m의 거대한 네 개의 돔들은 왜 사람들이 이 건물을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그리고 세계 5대 성당 중의 하나로 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듯했다. 오죽 했으면 헌당식에 참여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 소피아 성당을 솔로몬 성전에 비교하면서, “오! 솔로몬이여! 내가 드디어 그대를 능가했노라!”고 외쳤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장대하고 신비스럽던 성 소피아 성당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에 망하면서(1453년), ‘아야 소피아’라 불리는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고 말았다. 1935년에 터키 근대화의 아버지인 아타 투르크 장군(케말 파샤)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조될 때까지 5백여 년 동안이나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된 탓에, 그 안에 이슬람 관련 문양들과 장식들이 많이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슬람 제국이 성 소피아 성당을 회교 사원으로 개조하면서, 그리스 정교의 화려한 성화들과 모자이크들을 그대로 두는 종교적인 관용책을 실시한 결과 기독교의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성당 내부를 둘러보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성당 출구 쪽에 있던 한 모자이크 그림이 특히 그러했다. 이 그림의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오른쪽에는 도시를 바치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왼쪽에는 교회를 바치고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성 소피아 성당의 산 역사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흥미로운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이 건축물은 이슬람 세계에 영향을 미쳐, 비잔틴-이슬람 문화의 융화라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낳게 했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 관람을 마친 후에 우리는 보스포러스 해협(Bosphorus Straits)을 유람하기로 했다. 선착장으로 가서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 정기선에 오른 우리는 이스탄불을 양분하고 있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 해협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에 위치한 곳으로서, 북쪽의 흑해와 남쪽의 마르마라해를 잇는 아주 중요한 해협(31.7km)이다. 흑해의 엄청난 자원들이 서방 세계로 쉽게 빠져나갈 수 있게 해주는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물론 이 해협 중간에는 해협을 가로질러 두 지역을 연결하는 현수교가 두 개 있다. 제1대교가 1560m인 반면, 제2대교는 1510m이다. 아무튼 보스포러스 해협을 경계선으로 하여 서쪽의 유럽과 동쪽의 아시아가 둘로 나누어지는 까닭에, 이 해협을 가슴에 안고 있는 도시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유일한 도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을 끝으로 터키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하여 로마로 떠나는 2시 30분발 비행기에 탑승하였고, 두 시간 30분을 날아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하였다. 숙소로 가는 길에 들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남북한 합한 면적의 1.4배 정도(인구는 6,500만 명)인 이탈리아(영어로는 Italy; 현지 발음으로는 이딸리아)와 그 수도인 로마(영어로는 Rome; 현지 발음으로는 로마)의 역사가 서양 역사의 8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하니, 전 세계에서 1년에 5천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온다는 얘기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서울보다 조금 넓은 인구 350만의 로마가 서양 역사의 뿌리요 서양 역사를 대변하는 도시라는 지적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로마 자체가 거대한 도시 박물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미국과 독일은 서양 역사와 문화의 요람인 로마를 지켜야 한다는 협정을 맺었고, 그 협정에 근거하여 로마 폭격을 최대한으로 자제했다고 한다. 이탈리아가 국민소득 3만 불을 상회하는 선진국인 것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 유적지로부터 벌어들이는 막대한 관광 수입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 역시 그리스처럼 조상들을 잘 둔 덕에 지금까지도 그 풍부한 유산으로 별다른 고생 없이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처럼 불필요하게 허세 부리면서 사는 민족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시내에 돌아다니는 무수한 소형 차량들을 보면서 그러한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두 사람만 탈 수 있는 아주 귀여운 소형 차량도 적지 않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만큼의 차량을 타고 다니는 정신이야말로 이탈리아의 국부(國富)를 지탱하는 가장 큰 자원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기왕 로마에 왔으니 로마에 관한 재미난 표현들 몇 개를 소개하면서 오늘 하루의 일정 정리를 마치고자 한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지켜라.” 특히 로마가 군사용 도로로 12만 km의 도로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그리스에서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달려왔던 길(에그나티아 도로)도 사실은 그러한 길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18) 바티칸 박물관과 베드로 대성당: 2월 7일(수)
로마에서의 순례 여행은 일종의 유격 투어(tour)라고 한다. 오늘 우리는 그 혹독한 유격 투어를 하기 위하여 로마 변두리의 숙소에서 로마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탈리아 안에는 두 개의 나라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이탈리아 반도의 아드리아 해안 중북부에 있는 내륙국 산마리노(San Marino) 공화국이다. 이 나라는 38.6㎞의 국경이 이탈리아에 둘러싸여 있으며, 2만 2700명(1987)의 인구 가운데 1만 2000명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고, 전체 인구의 약 95%가 이탈리아계로 이탈리아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안에 있는 두 번째 나라는 우리가 오늘 가고자 하는 로마 시내의 바티칸 시국(市國)이다. 로마 교황청이라고도 불리는 바티칸 시국은 바티칸 박물관, 성 베드로 대성당, 시스티나 소성당, 성 베드로 광장, 바티칸 궁전(교황의 거처 및 교황청 사무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Mussolini) 정부 사이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바티칸은 하나의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나, 둘레가 7.7km라 하니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임은 물론이다. 인구 1천명의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절반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고 나머지 절반만이 바티칸 시국에 거주하고 있다. 바티칸 박물관과 성 베드로 대성당 두 군데만 일반인들에게 개방하는데도, 엄청나게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가만히 앉아서 바티칸 시국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덕을 덤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맨 먼저 찾아간 곳은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 http://www.christusrex.org)이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및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제대로 보려면 3-4일은 걸린다고 할 정도로 많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는 박물관이라니 많은 기대가 되었다. 오전 9시 30분에 도착하였는데도 박물관 입구에는 관광객들로 매우 붐비고 있었다. 너무 사람이 많아 단체 여행객들이 서로를 놓칠 수 있는 탓에, 단체 여행객들의 경우에는 수신기를 착용하지 않으면 들여보내지를 않았다. 수신기 주파수를 맞추어야만 가이드의 설명도 들을 수 있고 길을 잃었을 때에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기에 참으로 적절한 조치가 아닌가 싶었다.
바티칸 박물관에는 역대 교황이 모은 것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미술과 미술사적으로 다양한 시대의 진귀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바, 우리가 가장 먼저 통과한 곳은 굉장히 큰 규모의 솔방울 정원(Pigna Courtyard or Pine-Corn Courtyard)이었다. 이탈리아의 국목(國木)인 소나무가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이어서인지, 이곳에도 큰 솔방울 청동 조각품이 박물관 입구 건물 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 정원에서 우리는 가이드를 통하여 시스티나 소성당의 두 작품, 곧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설명을 미리 들을 수 있었다. 성당 안에서는 두 작품의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밖에 두 작품의 축소판 사진을 진열해 놓고 관광객들로 하여금 그 맛을 미리 보게 한 것이다.
이어서 우리가 간 곳은 벨베데레의 뜰(Cortile del Belvedere)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은 뜰의 한 모퉁이에 있는 라오콘 상이다. 16세기 초에 콜로세움 부근의 티투스 목욕장 유적에서 발견된 이 대리석상은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걸작으로,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Laoconte)이 두 아들과 함게 큰 뱀에 묶여 고뇌하는 모습을 매우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태양신인 아폴로 신상 역시 이곳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 티그리스 강을 주관하는 강의 신이 항아리를 손에 쥐고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작품도 볼만했다. 항아리 안에 악귀 퇴치용 호랑이가 들어 있다니 흥미로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벨베데레의 뜰에서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통로에 지혜의 신인 아테나 여신상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음악의 신 뮤즈의 목과 팔다리가 없는 토르소(Torso) 작품도 눈에 띄었다. 미술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진 조각 작품이다. 일설에는 카라칼라 황제의 목욕탕 내부에서 발견된 것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오른쪽 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왼쪽 손에는 사자 가죽을 들고 있는 헤라클레스 청동상과 기독교 공인의 최대 공로자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친 헬레나의 석관이 있었고,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아데미 여신상이 24개의 젖가슴을 안은 채로 세워져 있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세 명의 교황을 배출한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바닥에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었고, 로마 시대 각 지역의 지도들이 양쪽 벽에 그려져 있는 방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물관 안뜰 오른쪽의 회화관에는 비잔틴 시대부터 현대까지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연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인 라파엘로(“아테네 학당”과 “그리스도의 변용”으로 유명함)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로 유명함)의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끄는 것 같았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4개의 방으로 나누어지는 라파엘로의 방이다. 4개의 방 중 가장 아름다운 “서명의 방”에서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라파엘로에게 의뢰하여 그렸다는 천장화를 볼 수 있다. 이 벽화는 라파엘로가 1508-11년 사이에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으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지식과 도덕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티칸 박물관의 백미는 시스티나 성당(La Cappella Sistina)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두 작품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라 할 것이다. 본래 교황청용 성당으로 만들어진 시스티나 성당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 성전의 규격에 맞춰 높이 20.7m에 너비 13.41m, 그리고 높이의 두 배이면서 너비의 세 배인 길이 40.93m의 규모로 만들어진 것으로, 교황 유고시에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장소인데, 미켈란젤로는 이곳의 20m 높이 천정에 창조에서 노아 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아홉 장면을 담고 있는 40m 길이의 초대형 벽화를 1508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1512년에 완성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천지창조”이다. 일종의 프레스코 천정화인 셈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천정화 때문에 시력이 극도로 나빠지는 불행을 맛보았다고 한다. 참고로 아홉 개의 장면들을 소개하면 이렇다: 빛과 어둠의 분리, 해와 달과 별들의 창조, 바다와 육지의 분리,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의 제사, 대홍수, 술에 취한 노아.
시스티나 성당의 두 번째 명물인 “최후의 심판”은 그의 말년(67세)에 교황청의 명을 받아 완성한 벽화이다(1534-41년). 이 벽화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수염도 없는데다가 아폴로 신상을 모델로 했다는 후문(後聞)으로 미켈란젤로는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이 벽화에서 자연주의 내지는 인간 중심주의에 기초한 나체 기법을 사용하여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자 했으나, 나체 그림이 성화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존되어 있는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본래 그렸던 완전 누드화에 1700년대 중반경의 바티칸 예술가들이 나체의 주요 부분들에 덧칠을 한 결과 생겨난 것이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향해 이동하였다. 이 성당은 본래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처음 세워진 것이다. 그는 326년에 예수의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이었던 성 베드로가 묻혀있는 이곳에 처음 성당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217대 교황) 때 이르러 새로운 성당의 건축이 시작되었는데, 120년의 세월 동안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등 당대 최고 건축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1626년(교황 우르반 8세) 지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중간에 성전 신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면죄부 남발 및 종교개혁 등의 파동으로 인하여 공사가 부진한 적도 있었으나, 어쨌든 지금은 전 세계 가톨릭 성도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니, 우리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성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입구이고 다른 하나는 출구이며, 맨 오른쪽에 있는 문은 25년마다 열리기에 닫혀 있다고 한다. 지난 2000년에 열렸다고 하니 앞으로는 25년 뒤인 2025년에 열릴 것이다. 입구를 통하여 성당 안으로 들어섰더니, 길이가 211.5m이고 천정 높이는 45.44m나 되는 성당 본관의 거대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최대 6만 명이나 되는 신자들을 수용할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성당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성당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 상이다. 그가 21세 때 만든 이 조각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방탄 유리벽에 둘러싸여 있다. 예전이 어떤 정신 이상자가 침입하여 망치로 성모 마리아상을 부순 적이 있어서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란다. 그리고 이 조각품의 특징은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중에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남긴 이 걸작품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서운함을 느낀 나머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일까? 하기야 한참 젊은 나이에 이 작품을 만들었으니 어느 누가 그의 작품이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 심정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몇몇 작품들을 감상한 후에 본관 홀로 들어섰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특별 미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본관 앞의 제단을 직접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대신에 베드로 성당의 미사를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쩌면 교황이 미사를 집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부지런히 미사 장면을 사진기에 담았다. 수십 명의 신부들이 제단 부근에 둘러 앉아 미사를 돕고 있었는데, 그 제단 아래에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로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세계 최대, 최고의 돔이 있는데, 그 돔 밑에는 4복음서 저자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의 초상화가 모자이크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그 돔의 모습은 나중에 성당 밖으로 나가서 베드로 광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베드로 성당 내부 관람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출구를 통하여 베드로가 순교한 장소에 조성되었다는 그 유명한 성 베드로 광장(=산피에트로 광장)을 향해 나아갔다. 좌우 폭이 240m여서 한 번에 30만 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다 하니 그 거대한 규모에 입이 벌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한들 우리나라의 여의도 광장만 하겠는가! 광장 좌우로는 반원형의 회랑에 4열의 그리스 건축양식인 도리아식 원주(圓柱) 284개와 88개의 각주(角柱)가 서 있고, 그 윗부분에는 142명의 성인상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광장 중앙에는 제3대 로마 황제인 칼리굴라(Caligula)가 주후 40년경 광장 바로 곁에 있던 자신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가져온 높이 25.5m, 무게 320톤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으며, 오벨리스크 양쪽에는 분수 2개가 있다. 물론 이 오벨리스크는 칼리굴라의 경기장에서 순교한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해 1586년에 교황 식스투스(Sixtus)에 의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그렇다면 성 베드로 광장 자체는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이곳은 제237대 교황인 알렉산더 7세의 명에 의하여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거장인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가 만든 것이다. 1656년에 설계를 시작하여 12년만인 1667년에 이 광장을 완공한 그는 입구에서 좌우로 안정된 타원형 모양이 되게 하고 가운데서 반원씩 갈라져 대칭을 이루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로마 교황청의 다양한 모습을 간략하게나마 살핀 우리는 곧바로 성 베드로 광장을 빠져나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로마의 구(舊) 시가지 성벽 안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스파게티를 점심으로 해결한 다음 우리는 다시 성벽 밖의 신시가지로 나와 바울 참수터 위에 세워졌다는 바울 참수교회로 이동하였다. 바울의 목이 떨어지면서 세 번 튈 때마다 분수(샘)가 솟았다 하여 세 분수 교회라고도 한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더니 참수터로 알려진 곳에 참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관광객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철창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목이 떨어져 분수가 솟았다는 세 지점 역시 철창으로 막아져 있었다.
위대한 복음 전도자의 순교 현장을 눈으로 확인한 탓인지 모두들 숙연한 표정이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주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리라 다짐하면서 다음 목적지인 초기 교회의 지하 교회(카타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카타콤이 본래는 그 전부터 사용되던 이교도들의 지하 무덤(공동묘지) 자리였는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숨어 살기도 하고 예배를 드리기도 하면서 기독교인 전용의 생활 및 예배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40여 군데의 입구로 들어갈 수 있고 총 연장 길이가 850km라 하니, 신앙을 지키기 위한 초기 교회 성도들의 눈물겨운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찾아간 카타콤은 도미틸라 카타콤(Domitilla Catacombe)이었다. 40여 군데의 입구들 중에 일곱 군데 정도가 관광객들을 위해 공개되어 있다는데, 도미틸라 카타콤은 그 일곱 군데 입구들 중의 하나였다. 이 카타콤에 도미틸라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도미틸라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도미틸라는 로마 집정관이었던 플라비우스 글레멘스의 아내요,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의 질녀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발각되어 오랜 유배 생활 끝에 마침내 화형당하고만 순교 성인이다. 그런데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던 카타콤 자리의 땅을 교회에 기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하여 그곳에 만들어진 카타콤을 그녀의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된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시멘트 성분의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카타콤 동굴들은 공기와 접촉하면 금방 딱딱하게 굳기 때문에 지하 무덤으로나 생활공간으로 매우 적격이라고 한다. 카타콤 안으로 들어간 그러한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입구의 예배당과 무수한 무덤들을 사진에 담으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 300여 년 동안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간 초기 교회 성도들의 열정이 자신의 몸과 마음 속에 새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로처럼 얽혀져 있어서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길을 잃고서 하루 종일 헤맬 수도 있다 하니,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투쟁인지를 우리 모두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해와 순교 시대를 살았던 초기 교회 성도들의 거룩한 믿음을 마음에 새기면서 우리는 다시 로마 구시가지로 들어가 기독교 박해의 대명사인 콜로세움(Colosseum)으로 이동하였다. ‘거대하다’는 뜻을 가진 콜로세움은 주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인 주후 80년에 완공한 로마 제국 최대의 원형 경기장이었다. 그리스의 세 가지 건축 양식인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 및 코린트식을 1-3층에 그대로 적용하여 만든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 188m, 최소 지름 156m, 둘레 527m, 외벽 높이 57m의 타원형 4층 건물로서, 5만 명 정도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콜로세움의 중심부에는 긴 지름 86m, 짧은 지름 54m의 아레나(arena=투기장 또는 경기장)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명을 내건 검투사(gladiator)들끼리의 싸움, 검투사와 맹수와의 싸움, 맹수들끼리의 싸움 등이 행해지곤 했으며, 장내에 물을 채워 넣고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도 간간히 벌어졌다니, 콜로세움이 인간의 전투 본능을 자극하는 잔혹한 오락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300년 이상 처참한 사투를 되풀이하던 콜로세움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로 서서히 관심 밖으로 밀려나가다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잔혹한 투기장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오락성 투기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콜로세움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콜로세움이라는 원형 경기장은 무수한 기독교인들이 검투사들의 칼에 맞아 죽거나 맹수의 밥이 되고 또 나무 기둥에 매달려 불에 타죽는 처참한 순교의 현장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쿼바디스>라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당시의 그러한 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러셀 크로우)가 노예 검투사가 되어 싸우는 모습을 연상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불행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콜로세움은 낙뢰나 지진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기도 하고 교회나 집을 짓는 재료로 약탈당하기도 하는 바람에 지금은 외벽의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 18세기경에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콜로세움 바로 옆에는 높이 21m, 너비 25.7m, 안길이 7.4m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2년에 로마의 폭군이었던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로마 원로원이 그 해에 건축을 시작하여 315년에 봉헌한 것인데, 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유가 전투 전날 밤에 꿈에서 본 십자가 때문이라고 믿고서 313년에 밀라노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반포한다. 이 개선문은 칙령이 내려진 후인 315년 7월 25일에 준공되어 황제에게 바쳐졌다. 개선문 윗부분에는 라틴어로 이렇게 새겨져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바침: 신의 영감과 숭고한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정의의 무기로 폭군과 그 일파들에게 복수하였으므로 이에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은 승리의 증표로 이 개선문을 헌정한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은 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본 따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탐방을 마친 후 드리어 이번 순례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트레비(Trevi) 분수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가는 도중에 우리는 로마의 구(舊) 도시, 곧 “로마 속의 작은 로마”로 알려진 로마 공회정(포로 로마노, Foro Romano=Roman Forum; 고대 로마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이 되었던 곳으로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 발굴 중임)을 지났으며, 팔라티노 언덕 앞에 있는 율리우스 시저의 동상과 이탈리아의 통일(1923년)을 기념하는 통일기념관 및 캄피돌리오 광장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 기마상(8m 높이) 등을 차례대로 거쳐 갔다. 시간이 많았더라면 반나절이 걸린다는 로마 공회정과 통일기념관도 공들여 탐방하였을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면서 트레비 분수 앞에 도착하였다.
발달된 상수도 덕택에 도처에 분수를 가지고 있는 “분수의 도시” 로마에서 그래도 가장 볼만한 분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트레비 분수일 것이다. 분수 앞 광장이 세 갈래 길이 모이는 곳이어서 “트레비”(“삼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 분수는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명을 받아 니콜라 살비의 설계로 1732년에 착수하여 1762년에 완성한 것으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해신(海神)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가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크게 의미 있는 분수가 아닌 것 같은데도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것은 “로마의 휴일”이나 “달콤한 인생”과 같은 로맨틱한 영화의 일부가 이 지역을 무대로 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 장소가 관광 명소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로마의 휴일”에서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이 부근의 스페인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에 착안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곤 했는데, 아이스크림 흘린 자국으로 그곳이 더러워진 탓에 음식물 섭취를 법으로 금지하는 바람에, 이제는 사람들이 이곳 트레비 분수에서 아이스크림을 즐겨 먹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도 임고은 자매 가족의 사랑에 힘입어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이 분수에 얽힌 한 가지 흥미로운 전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른손으로 동전을 쥐고 왼쪽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동전 한 개를 던지면 로마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고, 두 개를 던지면 평생의 연인을 만나 사랑을 이룰 수 있으며, 세 개를 던지면 사랑이 깨뜨려져서 이혼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당무계한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는 것을 보면 다들 마음 속에 품은 소원들이 많은 모양이다. 어쨌든 수많은 관광객들이 던지고 간 동전이 하루에 3,000유로(약 370만원) 정도나 된다고 한다. 이 동전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 것일까? 과거에는 가끔씩 건져 자선단체에 보내곤 했지만 도둑들이 많이 훔쳐가는 바람에, 이제는 매일 밤 수거해 빈민들에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슈퍼마켓을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 탐방으로 공식 순례 일정을 마친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대통령궁과 디오클레티아누스 왕제의 목욕탕 위에 건축했다는 유로열차의 종착역, 곧 로마의 관문이라고도 하는 테르미니역을 지나면서 너무도 짧았던 로마 순례의 아쉬움을 달랬다.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면서 쇼핑을 마친 후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제 투숙하였던 로마 시내 밖의 호텔로 이동하였다. 로마의 주요 순례지들을 하루 만에 주파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것이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유격 투어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지만, 이제 하룻밤만 자면 그리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모든 피곤이 일시에 풀리는 것 같았다.
(19) 성지순례를 마치고 고국으로: 2월 8-9일(목-금)
중요한 곳은 어제 다 돌아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시간 여유가 있어서 오전 10시 반경에 느긋하게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로마에 처음 들어왔을 때 사용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한 후 곧바로 짐을 부치고 오후 1시 30분발 비행기에 올랐다. 두 시간 반 정도를 날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오후 6시 40분발 비행기를 탔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비행길에는 편서풍의 영향이 있어서 처음에 올 때보다 무려 두 시간이나 일찍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하룻밤을 자고서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2월 9일(금) 오후 1시 40분이었다.
이로써 공식적인 순례 일정이 완전히 끝났다. 이번에 18박 19일의 성지순례 일정을 소화하면서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깨달았다. 극히 일부이기는 해도, 성서의 세계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얻은 것들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성서가 씌어진 시대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들을 조금이라도 현실감 있게 살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더욱이 필자는 18박 19일의 일정을 되새김질하면서 하루에 한 편씩의 기행문을 쓰는 중에 성지순례를 두 번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이번 순례팀의 일원들이 찍은 사진 자료들을 전부 수합하여 홈페이지의 사진방에 순서대로 설명을 붙여 정리하게 되면, 세 번째 순례여행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도 크든 작든 이와 비슷한 작업을 추진하고 있을 것이다. 번거롭기는 해도 이러한 작업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수행할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성지순례 과정에서 과거의 역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기는 했다. 또한 성지순례가 관광 차원에서 진행되는 점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사전 연구와 유능한 가이드들의 친절한 설명은 그러한 단점들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앞으로 남은 일은 그 동안의 일정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주요 탐방지들에 관한 자료를 총정리하는 한편으로, 비디오와 사진에 담아온 각종 현장 자료들을 잘 편집하여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공급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가 가지 못했던 다른 많은 순례지 내지는 유적지들에 관한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여, 이번 여정에서 소화하지 못한 많은 틈새들을 메움으로써, 성서의 세계 전반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추구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차후 성지순례를 또 다시 가게 될 경우에 어느 곳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탐방해야 할 것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를테면 성서의 책별로, 또는 나라별로, 시대별로 그에 적합한 순례 일정을 만들어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추진하고 싶은 순례 방식은 성서의 주요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현지를 직접 답사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배낭을 메고서 발로 직접 뛰는 답사 말이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지 답사와 같은 것을 배낭 여행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아브라함 일가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순례여행을 한다든가, 다윗의 피난 시절을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순례하는 방식, 또는 엘리야나 엘리사의 예언 행적을 이들의 주요 활동 장소를 따라 추적하는 방식 등도 같은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주요 전쟁 경로나, 주요 예언자들의 활동 장소-고향 포함-를 중점적으로 답사하는 방법도 권장할만하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성지순례를 추진하게 되면, 좀 더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성서를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단히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기존의 여러 성지연구소들이 연대하여 이 작업을 추진하고, 그 결과를 자료집이나 책 또는 CD-ROM 등으로 정리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급한다면,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위에서 말한 다양한 성지순례 일정들을 중심으로 하는 성경공부 교재 내지는 강의 자료를 개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니만큼, 성지순례를 정례화하되, 거기서 얻은 각종 책자들과 자료들을 성지연구소 예산으로 매번 구입하여 학교 내의 박물관 한켠에 정리ㆍ진열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계속 이어져 나가다 보면, 장차 커다란 성지 박물관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울러 성서의 세계와 관련된 각종 실물들-모조품이라도-을 낱낱이 구하여 전시한다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서 교육에도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성지순례가 이제는 단순한 관광 차원을 넘어서서 성서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 사이에 놓여 있는 시공간적 간격을 뛰어넘어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진시키는 유력한 수단 중의 하나임을 우리 모두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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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샬롬투어 원문보기 글쓴이: 조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