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 교회사 21
(그 외 선교사들)
이 후에도 영국 성공회,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성결교 등
많은 선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중 몇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데이비스
그는 호주에서 파송한 선교사로
문학석사 학위까지 받은 재원으로
그가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입국했을 당시
서울과 북쪽은 이미 선교가 시작되어
남부지역 선교를 위해 남부로
선교여행을 하다가 추위 속 무리한 여정으로
급성폐렴과 천연두로 입국한지
6개월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가
공식적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즉 데이비스는 호주교회가
한국선교를 하게 되는 하나의 밀알이 된 것이다.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하다
생명을 바친 사람은 데이비스 뿐이 아니다.
미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의대공부를 했고
한국 선교사로 와서 여러 공관들과
왕의 충실한 시의였던 북장로교 선교사
헤론도 세상을 떠났으며
캐나다 명문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어를 한국인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한 게일,
토론토 의대 출신 하디,
정규학교나 신학교 교육은 없었지만
특별한 종교적 경험으로
한국 순회전도단을 조직해
선교활동을 한 펜윅,
어느 교단도 한국 선교가 시기상조라 하여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으려 할 때
신학교를 졸업한 맥켄지는 스스로
선교자금을 마련하여
어느 선교부에도 소속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한국에 입국한다.
그는 캐나다를 떠날 때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배 갑판에 발을 올려 놓음으로
나는 내가 가야할 길에 비로소 오르게 되었다.
오직 고향 천지를 떠나는 것 뿐이다.
후회는 없다.
섭섭한 감정도 없다....
희생이 아니다.
거기(조선) 가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래 오래 거기서 살며 일하게 하소서!
그리고 사망이 생명속에 삼키워져
큰 나팔소리가 요란스레 들릴때까지
나의 백골이 진토가 되어
그들의 백골과 같이 땅속에 묻히게 하소서."
일부가 아닌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한국에 입국함을 알 수 있다.
그의 복음에 대한 비장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복음의 홍수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울림이.아닐 수 없다.
비록 평안함 속에,
복음의 홍수속에 살고 있지만
당시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주님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한국에 도착한 맥켄지는
자신의 오랜 생활습관을 버리고
한국인의 생활양식대로 살았다.
한국인이 입는 옷, 그들의 음식,
그들이 사는 움막에서 살며
한국선교를 몸으로 실천했다.
맥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양처럼 순결하고 순진했으며
동네 아리들과 축구를 같이 하면서
동네 사람들과도 매우 잘 어울렸다.
맥켄지의 한국 애칭인 김목사를
누구나 좋아했고 한국인들에게
기독교인으로 진실한 모델이 되었다.
동학난이 일어나 마을 사람 모두 피했으나
맥켄지는 피신하지 않아
일본의 앞잡이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바위와 같은 흔들림 없는 신앙과 행동으로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청일전쟁 중에도 맥켄지는
소래 마을 사람들을 대변해 주어
1895년에는 10가정 이상이 정기적으로
주일을 지켰으며 귀신을 섬기던 터위에
한국인들의 헌금으로 소래교회를 건축하여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선교회의 도움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건립하는
전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맥켄지는 병에 걸려
교회 헌당식을 드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병사와 자살 사이에 논쟁이 있지만
그의 희생적 삶은 한국인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생명을 한국인을 위해 바친 것이며
복음은 민족과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
넘어선다는 진리를 확신시켜 주었다.
소래교회 사람들은 맥켄지를 너무도 존경하고
사랑하여 후에 그와 같은 목사님을 보내 달라고
그가 소속되어 있는 캐나다 장로교에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죽음으로 소래교회는
슬픔을 가눌길 없었으나
그의 죽음은 캐나다 장로교가
공식적으로 한국선교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복음이 들어 올 당시 장로교, 감리교를 초월하여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특별히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들은
당시 영국이나 미국에 일고 있는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열정이 투철했고
교단을 떠나 연합하여
선교지의 어려움을 극복해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기대 이상의
선교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은 1897년 세례교인이 777명으로 늘어났다.